#삶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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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에 림분켕이 있었다면, 페낭에는 우롄테Wu Lien The伍連德(1879~1960)가 있었다.[*우롄테의 이름 표기는 그의 삶처럼 다양하다. 우롄테Wu Lien The는 예전 중국 보통어 영문 표기이며, 페낭의 공통어인 혹키엔으로는 고롄턱Goh Lean Tuck, 광동어 표기로는 응린턱Ng Leen Tuck, 현대 중국 보통어로는 우롄더Wo Liande이다. ‘응린턱’이 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표기이겠지만, 이 글에서는 오늘날 페낭의 도로 명으로도 기억되는 이름인 우롄테로 한다. 우롄테는 금세공 장인인 신케 응키혹Ng Khee Hok과 페낭 태생의 객가 뇨냐[Lam Chou Fan]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롄테는 광동성 태산台山 출신 이주자의 아들로 페낭에서 태어나고 영어 고등교육을 받았다. 싱가포르의 림분켕처럼 ‘여왕장학금’을 받아 1896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이매뉴얼 칼리지에서 의학을 전공했다. 해협���민지에서 영국 의학박사 학위를 딴 최초의 화인이다. 직례총독 원세개袁世凱의 초빙으로 1907년 천진의 육군군의학교天津陸軍軍醫學堂 부교장이 된 그는 1910년 동삼성東三省 방질총의관防疾總醫官에 임명되어 하얼빈에 창궐한 치사율 99퍼센트의 괴질 퇴치 책임을 맡았다. 괴질이 기존의 쥐에 의해 감염되는 것이 아니라 호흡기로 전파되는 폐페스트임을 규명해 방역에 성공한 그는 ‘역병의 투사plague fighter’란 별명을 얻었고, 이후 중국 근대의학의 토대를 닦아 1935년 중국인 최초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1937년 중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귀향해 동네 병원 의사 우롄테로 여생을 보낸 ‘페낭 화인Penangite Chinese’이었다.[*1937년 중일전쟁으로 베이징이 함락되자 퇴각이 불가피해진 우롄테는 귀향을 택했다. 그는 페낭 대산 페락의 이포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무료 진료와 공공도서관 사업에 힘을 쏟았다. 1959년 자서전 《역병의 투사》를 발간하고 페낭으로 은퇴한 그는 이듬해 1960년 1월 조지타운의 자택에서 타계했다. 달리 말해 그의 정체성은 ‘중국계 페낭인’이었던 셈이다.
영국 유학을 마친 우롄테는 1903년 페낭으로 돌아와 곧바로 싱가포르의 림분켕을 찾아가 3주간 그의 집에 머물렀다. 영국에서 경험한 정체성 위기를 상의하기 위해서였다. 페낭에서 영어 교육을 받은 영국의 신민이었는데도 영국인은 늘 그를 중국인으로 대할 뿐이었다. 중국인 부모를 두었지만 중국어 신문은커녕 자기 이름조차 한자로 쓸 수 없다는 사실에 깊은 자괴감을 느껴야 했다. 해협식민지에서 영국 신민으로 살아가는 화인의 정체성에 관해 10년 선배의 의견을 구한 것이다. 우롄테는 당시 림분켕에게서 학식과 열정을 사회개혁의 대의에 쏟아부으라는 말을 들었다고 회고했다(Wu, 1959: 221). 당시의 인연으로 우롄테는 나중에 림분켕의 처제와 결혼했고, 해협의 두 지식인은 동서이자 사회개혁의 동지가 됐다.
우롄테는 1903년 9월 말레이국연방 정부가 쿠알라룸푸르에 개설한 의학연구소Institute for Medical Research에 일자리를 얻었다. 문제는 영국의 인종 장벽이 의학연구소에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케임브리지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파리 파스퇴르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지냈지만, 중국인인 그에게 ���어진 자리는 하급 연구원에 불과했다. 인종 장벽과 ‘2등 국민’임을 거듭 확인한 셈이다. 그는 1904년 말 페낭으로 돌아와 조지타운의 출리아가에 개인병원을 열었다. 하지만 ‘페낭 화인’ 우롄테는 쿠알라룸푸르에서의 1년 남짓한 짧은 타향살이에서 귀중한 발견을 했다. 자신처럼 페낭을 ‘고향’으로 여기는 ‘페낭 화인’들을 만난 것이다. 우롄테는 그들을 ’페낭 디아스포라Penang Diaspora’라고 불렀다(Wu, 1959: 225).
(417~419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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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해방일지>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엔딩 by 권순재
삶의 모든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전 남자 친구가 떠넘긴 빚에 쫓기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지쳐버린 대상은 좀 더 본질적인 것, 즉 '세상 모든 것'에 가까웠다.
그녀의 독백처럼 여자에게는 모든 관계와 눈 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조용히 웃음 지으며 있는 듯 없는 듯 무력하게 살아간다. 지독한 우울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멜랑콜리형 우울증 환자인 여주인공 미정의 서사는 여느 드라마에서는 조연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함께 사는 달걀흰자와 같은 지역 산포시처럼 대단한 드라마도,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도, 박진감 넘치는 반전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대단치 않은 사연은 실제의 삶처럼 현장감과 공간감을 두르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그녀가 밤늦게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드라마 속 시간을 체크하게 된다. 매일 1시간 반 씩 걸리는 전철을 타고 산포시로 향해야 하는 그녀의 막차 시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듯 느리게 흘러가는 드라마 초반부의 일상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마음이 정말로 편하고 좋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요?"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절여진 배추처럼 숨죽이게 하는 것들, 숨이 죽다 못해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스스로의 손으로 이 하찮은 인생의 막을 내려버릴 건지 고민하게 하는 것들은 대개 단 한 명의 악당이나 단 하나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다. 실체조차 보이지 않고 언제 시작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어떠한 것들. 굳이 억지로 정의하자면 우리에게 축적된 삶의 흔적 그 자체이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나를 한 번에 죽이진 않지만 딱 오늘 하루만을 망치게 할 정도의, 트라우마 정도는 아니지만 경, 중증 정도는 되는 마치 스토커 같은 스트레스. 우울증에 걸린 불쌍한 피해자의 사고 범위는 터무니없이 넓어진다. 하루 일과를 끝내기에도 버거운 한 명의 인간이 머릿속으로는 지나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 수십년을 끊임없이 넘나든다. 사고는 끝없이 가속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말을 들어야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나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별 볼일 없는 평가를 상상하며,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타인의 완벽한 행복을 질투한다. 머릿속이 불행의 목소리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한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우울의 끝은 어디일까? 자살? 일부 맞긴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인 케이스고, 그렇다고 좌절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약한 것 같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가 도달하는 곳은 사실 '무관심'이다. 삶이 지겨워지고 살아있는 것 자체만으로 노동이 된다. 최후의 방법으로 '기권'을 택한 희생자의 논리는 모든 감정성을 차단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만 한다. 뇌가 그 주인을 죽게 놔둘 수는 없기에 차선으로 선택한 '살아있지도 않고 죽어있지도 않은', 간신히 숨만 쉬며 연명하고 있는 상태다.
극 중 미정의 오빠 창희의 말대로 '끼리끼리는 ��학'이라고 했던가. 여자는 자신의 아빠 일을 도와주는 출신도 이름도 모르는 알코올중독자 구씨에게 홀린 듯 다가간다.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발작하듯이 말한다. 날 '추앙'해달라고. '나는 한 번만이라도 채워지고 싶다'고. 그러자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안하고 싶은 남자는 되묻는다. 그러는 너는 누군가를 채워준 적이 있느냐고. 그렇다. 일방적인 추앙은 신에게나 하는 것 (worship). 인간 끼리의 추앙은 배려나 사랑, 그 외 모든 숭고한 행위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하는 것 (respect)이었다. 그렇게 삶의 우울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두 남녀의 '추앙'으로 시작하여 '환대'로 끝나는 해방일지가 시작된다.
"둬, 그냥 두라고. 내가 싼 똥 누가 치워주는 게 니들은 고맙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시작하면서 초반에 내가 목표로 한 것은 '공감하는 의사'였다. 공감,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겪은 것처럼 여기되 중심을 잃지 않고 환자를 위한 치료를 지속해나가는 것.'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고 있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닌 사건을, 내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을 섣불리 이해하려는 것은 알코올중독자의 집 안에 쌓여 있는 수치스러운 빈 술병 무더기를 허락도 없이 치워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하고 비공감적인 행위인 것을.
여러 케이스가 실패로 끝난 후 나는 깨달았다. 상대방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위로, 나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한 조언들. 내가 공감한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후벼 파야만 했던 수많은 남의 상처. 좋은 의도만으로 사랑은 성립되지 않았다. 사랑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론이 필요했다.
미정은 말한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사랑 전문가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랑은 현상이 아니라 행위다.
받는 게 아니라는 것. 작가는 추앙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구사하며 구원을 말한다. 사랑이 타인을 위한 감정적인 행위 일체를 말한다면, 추앙은 사랑하는 행위의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앙의 실천은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며 응원하는 행위'로 체현된다. 그렇다면 추앙을 통한 사랑은 두 사람을 변화시켰을까?
'예전엔 시키는 말 외에는 잘 안했던것 같아요. 누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까... 근데 이제 머릿 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냥해요. 그냥 나와요. 그러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와요. 갑자기, 내가, 사랑스러워요."
여자는 남자가 떠난 이후에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남자를 계속 사랑하고 응원하기로 한다.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매일 술을 마시던 그에게 숙취가 찾아오지 않기를.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하고 사랑했으니까. 개새끼,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다 개새끼라던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비참한 여자로 몰아 세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어떤 증명과 설명을 원하니까. 그들은 더욱 확실한 개새끼임을 증명하려면 나는 비참해야만 했다. 하루에 최소 5분은 있었을 설렘을 외면하고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썩은 물이 도는 느낌', 끊임없이 별로가 되는 내 사진과 삶이었던 것이다.
구씨가 자신을 떠나도 여전히 구씨를 추앙한다는 것은 그녀의 내면세계에서 사랑이 마침내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였다. 2년의 세월이 흘러 무심히 걸려온 남자의 전화는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정신적 자살을 하려는 그녀를 구원하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전 남자 친구가 정말 개새끼였다는 것을 증명할 최고의 기회 앞에서, 여자는 복수를 포기한다. 결코 오지 않는 연락과 결코 갚지 않는 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자가 이제는 자신의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썩은 물 대신 그날 분의 설렘을 담기 시작한다. 1초, 2초... 설렘이 쌓이기 시작한다. 내 안에 무엇을 담을지 내가 결정함으로써 해방된 여자의 삶.
구씨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과거의 그는 세상으로부터 보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분노했다. 업소에서 진 빚을 갚지 않는 손님에게 "너는 끝까지 나에게 예의 없었으면서 나는 왜 끝까지 예의를 지켜야 하느냐"고 외치던 그였다. 항상 배신만 당하던 여자와 여자의 아버지를 답답해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용서하며 말한다. "형, 환대할게. 환대할거니까 살아서 보자."
추앙이 사랑의 방법이었다면 환대는 사랑의 결과였다. 선의로 한 말이 사랑했던 여자를 죽게 만든 것처럼 선의가 항상 보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면, 악의가 내게 남기는 것이 반드시 증오만은 아닐 터이다. 자신의 선의로 세상의 악의를 이겨내고 스스로를 회복시키며 진정으로 얻어지는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환대.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 데도 굳건히 지상에 버티고 잇었떤 500원 짜리 동전과도 같은 나.
내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남들도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용돌이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담을지 내가 결정하는 것. 자신의 결정에 대한 추앙. 그 결과로 얻어지는 환대. 아침마다 그를 채우던 악연의 목소리 대신 설렘이 담기기 시작한다. 6초, 7초... 하루에 단 5분, 그 정도만 설레어도 충분하니까. 남자는 손에서 술병을 놓고 여자의 모자를 되찾아주러 도랑 위로 날아오르던 그때처럼 여자에게로 날아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해방되라고. 너는 답답하다고. 어리석다고. 그러니 스스로를 깨라고.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부수고 나오라고.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말한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소망과 순수함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라고 말이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성역'을 지켜내는 것이야 말로 '해���'이라는 것을 극은 역설한다.
그러니 당신이 해방되길 원한다면, 어떤 충고도 조언도 평가도 없이 자신과 타인의 성역을 그저 추앙하라.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그리고 환대하라. 당신이 당신과 타인의 성역을 환대한다면 마음은 결국 채워져 마음속에는 느낄 것이 사랑밖에 없을 것이니. 이미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세상과 만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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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 권하는 사회 (2)
우리는 누구나 장단점을 모두 가진 복잡하고 취약한 존재이며, 이것이야말로 인간다운 모습이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기대에 대해 현실점검을 해야 한다. 일주일에 명작 소설 하나를 줄줄 써내지 못한다고 해서 훌륭한 작가가 못 되는 건 아니다. '재능을 타고났다'는 말을 듣는 사람 모두 대개는 시간과 노력을 쏟아부어서 엄청나게 노력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나는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생각은 자신의 실제 모습을 외면하고, 자신의 실제 능력과 한계도 무시하게 만든다. 완벽함에서 시작하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 내려갈 수밖에 없다.
완벽함 대신 성장을 선택하는 순간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커진다. 성장이나 개선은 완벽함보다 훨씬 더 현실적인 목표다. 이룰 수 없는 목표를 버리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수치심 민감성은 줄어든다.
목표가 성장이고 '이것을 개선하고 싶다'라고 말하면 현재의 자신에서 시작할 수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자신을 다독이고, 자신이 불완전하더라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자신을 인정해주고 소중하게 아껴주는 사람들과 유대감 네트워크를 형성하면 변화할 가능성이 훨씬 더 커진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힘.
현재 자신이 어떤 모습이고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수용 능력이 필요하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능력과 상황을 잘 인식하여 자신의 욕구, 결점, 감정, 충동 등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기 수용인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기반 다지기'다. '기반 다지기'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손을 내밀거나 자신이 어떤 상태고 앞으로 어떻게 되고 싶은지 살펴볼 때 필요한 안정감을 준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을 기르기 시작할 때는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구가 아주 커질 수 있다. 그래서 별로 가깝지 않은 사람한테까지 마음을 털어놓는 경우가 생긴다. 속마음을 털어놓을 때 우리는 자신이 적당한 때에 적당한 상대에게 적당한 방식으로 이야기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론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예고도 없이 자신의 취약한 모습을 갑자기 고백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취약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을 때는 상대가 그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충분히 시간을 들여서 확인하고 자신이 그런 민감한 이야기를 하고도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상대가 우리의 고통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하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자신의 취약성 때문에 무시당하고, 동��받고, 험담의 주인공이 되는 것도 싫고, 민감함 사연이 자신에게 ���리하게 이용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잘못된 기대에서 벗어나는 법.
'희망카드 작성'은 자신이 가진 기대를 현실점검해볼 수 있는 아주 좋은 훈련법이다. 열 장의 카드에 자신이 바라는 것들을 각각 하나씩 적는다. 열 장의 카드를 다 쓰고 나면 글씨가 보이지 않도록 카드를 뒤집고 섞은 다음 다섯 장만 고르라고 한다. 열 장 중에서 다섯 장의 내용만 현실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습니까? 인생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면서 그 기대가 모두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자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수치심에 사로잡히기 쉽다. 인생 희망 카드를 통해 자신의 취약성과 두려움을 알아두면 수많은 기대에 대해 현실점검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 삶이 달라질 거라고 믿도록 사회화되어 왔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일어나면서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문제들은 그 일이 일어난 기쁨이 사라지는 즉시 처음보다 훨씬 더 힘들고 심각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실현되어야 자기 가치가 높아진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자기 가치가 위험해진다. 불완전함과 평범한 삶처럼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들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려면 먼저 자신의 두려움과 취약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수치심 회복탄력성으로 비난 극복하기.
개인적인 차원에서 투명인간 취급, 전형화와 꼬리표 붙이기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고 자신와 같은 집단 구성원들을 정형화해서 바라볼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둘째로는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전형화를 파악해야 한다. '문제제가 대화법'을 통해 그 전형화를 분석하는 방법이 있다.
나는 누구인가?
2. 누가 그렇게 말하는가?
3. 그런 꼬리표로 누가 이득을 보는가?
4. 그런 꼬리표가 나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할까?
수치심 회복탄력성이 높은 인터뷰 참가자들은 변화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투명인간 취급은 은밀히 이루어지며 전형화는 잘못된 생각을 불러온다. 이런 문제를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동조자가 되면 변화를 이룰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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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희망과 의욕을 잃어버린 한 여자가 있다. 여자는 전 남자 친구가 떠넘긴 빚에 쫓기고 있지만 단지 그것만이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지쳐버린 대상은 좀 더 본질적인 것, 즉 ‘세상 모든 것’에 가까웠다. 그녀의 독백처럼 여자에게는 모든 관계와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다. 자신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채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그저 조용히 웃음 지으며 있는 듯 없는 듯 무력하게 살아간다. 지독한 우울을 가슴에 품고서 말이다.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속 멜랑콜리형 우울증 환자인 여주인공 미정의 서사는 여느 드라마에서는 조연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이 함께 사는 달걀흰자와 같은 지역 산포시처럼 대단한 드라마도, 뜨거운 감정의 소용돌이도, 박진감 넘치는 반전도 없다. 하지만 그녀의 대단치 않은 사연은 실제의 삶처럼 현장감과 공간감을 두르고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그녀가 밤늦게 술을 마시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우리는 드라마 속 시간을 체크하게 된다. 매일 1시간 반씩 걸리는 전철을 타고 산포시로 향해야 하는 그녀의 막차 시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듯 느리게 흘러가는 드라마 초반부의 일상을 통해 그녀는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진다. “살면서 마음이 정말로 편하고 좋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요?”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절여진 배추처럼 숨죽이게 하는 것들, 숨이 죽다 못해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스스로의 손으로 이 하찮은 인생의 막을 내려버릴 건지 고민하게 하는 것들은 대개 단 한 명의 악당이나 단 하나의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다. 실체조차 보이지 않고 언제 시작했다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어떠한 것들. 굳이 억지로 정의하자면 우리에게 축적된 삶의 흔적 그 자체이다. 우울증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나를 한 번에 죽이진 않지만 딱 오늘 하루만을 망치게 할 정도의, 트라우마 정도는 아니지만 경·중증 정도는 되는 마치 스토커 같은 스트레스. 우울증에 걸린 불쌍한 피해자의 사고 범위는 터무니없이 넓어진다. 하루 일과를 끝내기에도 버거운 한 명의 인간이 머릿속으로는 지나간 과거와 알 수 없는 미래 수십 년을 끊임없이 넘나든다. 사고는 끝없이 가속한다. 내가 뭘 원하는지, 어떤 말을 들어야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나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별 볼일 없는 평가를 상상하며, 심지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타인의 완벽한 행복을 질투한다. 머릿속이 불행의 목소리로 가득 차게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개새끼들도 시작점은 다 그런 눈빛, ‘넌 부족해’라고 말하는 것 같은 눈빛, 우리를 지치고 병들게 한 건 다 그런 눈빛들이었다.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발견하고자 달려들었다가 자신의 볼품없음만을 확인하고 돌아서는 반복적인 관계.” 우울의 끝은 어디일까? 자살? 일부 맞긴 하지만 그건 너무 극단적인 케이스고, 그렇다고 좌절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약한 것 같다.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가 도달하는 곳은 사실 ‘무관심’이다. 삶이 지겨워지고 살아 있는 것 자체만으로 노동이 된다. 최후의 방법으로 ‘기권’을 택한 희생자의 뇌는 모든 감정성을 차단한 채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만 한다. 뇌가 그 주인을 죽게 놔둘 수는 없기에 차선으로 선택한 ‘살아 있지도 않고 죽어 있지도 않은’, 간신히 숨만 쉬며 연명하고 있는 상태다. 극 중 미정의 오빠 창희의 말대로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던가. 여자는 자신의 아빠 일을 도와주는 출신도 이름도 모르는 알코올중독자 구씨에게 홀린 듯 다가간다. 자신과 비슷한 냄새가 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자는 발작하듯이 말한다. 날 ‘추앙’해달라고. ‘나는 한 번만이라도 채워지고 싶다’고. 그러자 사람하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남자는 되묻는다. 그러는 너는 누군가를 채워준 적이 있느냐고. 그렇다. 일방적인 추앙은 신에게나 하는 것(worship). 인간끼리의 추앙은 배려나 사랑, 그 외 모든 숭고한 행위가 그렇듯이 ‘서로’에게 하는 것(respect)이었다. 그렇게 삶의 우울로부터 해방을 꿈꾸는 두 남녀의 ‘추앙’으로 시작하여 ‘환대’로 끝나는 해방일지가 시작된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를 시작하면서 초반에 내가 목표로 한 것은 ‘공감하는 의사’였다. 공감, ‘상대방의 감정을 내가 겪은 것처럼 여기되 중심을 잃지 않고 환자를 위한 치료를 지속해나가는 것.’ 지금은 그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는지 알고 있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닌 사건을, 내가 되어보지 않은 사람을 섣불리 이해하려는 것은 알코올중독자의 집 안에 쌓여 있는 수치스러운 빈 술병 무더기를 허락도 없이 치워주려고 하는 것만큼이나 오만하고 비공감적인 행위인 것을. (“둬, 그냥 두라고. 내가 싼 똥 누가 치워주는 게 너희들은 고맙냐?”) 여러 케이스가 실패로 끝난 후 나는 깨달았다. 상대방이 아닌 오직 나를 위한 위로, 나의 선함을 증명하기 위한 조언들. 내가 공감한다는 만족감을 얻기 위해 후벼 파야만 했던 수많은 남의 상처. 좋은 의도만으로 사랑은 성립되지 않았다. 사랑을 체현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방법론이 필요했다. 미정은 말한다.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사랑 전문가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사랑은 현상이 아니라 행위다. 받는 게 아니라는 것. 작가는 추앙이라는 독특한 단어를 구사하며 구원을 말한다. 사랑이 타인을 위한 감정적인 행위 일체를 말한다면, 추앙은 사랑하는 행위의 방법론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추앙의 실천은 ‘조언하지 않고, 위로하지 않고, 정직하게 대하며 응원하는 행위’로 체현된다. 그렇다면 추앙을 통한 사랑은 두 사람을 변화시켰을까? “예전엔 시키는 말 외에는 잘 안 했던 것 같아요. 누가 내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할까… 근데 이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그냥 해요. 그냥 나와요. 그러면서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감정이 올라와요. 갑자기 내가, 사랑스러워요.” 여자는 남자가 떠난 이후에도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남자를 계속 사랑하고 응원하기로 한다. 감기 한 번 걸리지 않기를. 매일 술을 마시던 그에게 숙취가 찾아오지 않기를.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정하고 사랑했으니까. 개새끼, 내가 만났던 남자들은 다 개새끼라던 그녀는 지금까지 스스로를 비참한 여자로 몰아세웠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받은 상처에 대해 어떤 증명과 설명을 원하니까. 그들이 더욱 확실한 개새끼임을 증명하려면 나는 비참해야만 했다. 하루에 최소 5분은 있었을 설렘을 외면하고 내게 남은 것은 오직 ‘썩은 물이 도는 느낌’, 끊임없이 별로가 되는 내 자신과 삶이었던 것이다. 구씨가 자신을 떠나도 여전히 구씨를 추앙한다는 것은 그녀의 내면세계에서 사랑이 마침내 받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으로 대체되었다는 의미였다. 2년의 세월이 흘러 무심히 걸려온 남자의 전화는 지옥 밑바닥으로 떨어지며 정신적 자살을 하려는 그녀를 구원한다. 그리고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전 남자 친구가 정말 개새끼였다는 것을 증명할 최고의 기회 앞에서, 여자는 복수를 포기한다. 결코 오지 않는 연락과 결코 갚지 않는 돈을 하염없이 기다리던 여자가 이제는 자신의 불행을 설명하기 위한 썩은 물 대신 그날분의 설렘을 담기 시작한다. 1초, 2초…. 설렘이 쌓이기 시작한다. 내 안에 무엇을 담을지 내가 결정함으로써 해방된 여자의 삶. 구씨도 한 걸음을 내딛는다. 과거의 그는 세상으로부터 보답받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에 분노했다. 업소에서 진 빚을 갚지 않는 손님에게 “너는 끝까지 나에게 예의 없었으면서 나는 왜 끝까지 예의를 지켜야 하느냐”고 외치던 그였다. 항상 배신만 당하던 여자와 여자의 아버지를 답답해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을 배신한 동료를 용서하며 말한다. “형, 환대할게. 환대할 거니까 살아서 보자.” 추앙이 사랑의 방법이었다면 환대는 사랑의 결과였다. 선의로 한 말이 사랑했던 여자를 죽게 만든 것처럼 선의가 항상 보답받는 것만은 아니라면, 악의가 내게 남기는 것이 반드시 증오만은 아닐 터이다. 자신의 선의로 세상의 악의를 이겨내고 스스로를 회복시키며 진정으로 얻어지는 자신에 대한 용서와 환대. 그리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도 굳건히 지상에 버티고 있었던 500원짜리 동전과도 같은 나. 내가 남을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아닌 것처럼, 남들도 나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소용돌이 같은 세상에서 무엇을 담을지를 내가 결정하는 것. 자신의 결정에 대한 추앙. 그 결과로 얻어지는 환대. 아침마다 그를 채우던 악연의 목소리 대신 설렘이 담기기 시작한다. 6초, 7초… 하루에 단 5분, 그 정도만 설레어도 충분하니까. 남자는 손에서 술병을 놓고 여자의 모자를 되찾아주러 도랑 위로 날아오르던 그때처럼 여자에게로 날아간다. 사람들은 말한다. 해방되라고. 너는 답답하다고. 어리석다고. 그러니 스���로를 깨라고.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를 부수고 나오라고.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는 말한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소망과 순수함을 달성하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라고 말이다. 자신 안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성역’을 지켜내는 것이야말로 ‘해방’이���는 것을 극은 역설한다. 그러니 당신이 해방되길 원한다면, 어떤 충고도 조언도 평가도 없이 자신과 타인의 성역을 그저 추앙하라. 한 발 한 발, 어렵게 어렵게. 그리고 환대하라. 당신이 당신과 타인의 성역을 환대한다면 마음은 결국 채워져 마음속에는 느낄 것이 사랑밖에 없을 것이니. 이미 당신은 처음부터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세상과 만났던 것이다.
- <정신건강의학과 의사가 본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엔딩>, 2022.6.24, 에스콰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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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무언가에 열중하노라면, 스스로가 식충처럼 느껴지는 자괴감에 저녁을 먹지 않고 영화를 보았다. #기생충 #... cut to. 엔딩 크레딧 위로 흐르는'소주한잔'을 끝까지 듣고나서 무척 아늑하게 혹은 씁쓸하게 영화관에서 퇴장했다. 배가 무척 불렀다. 밥을 먹지 않고 영화만으로 포만감 있던 시절이 떠올랐다. 직접적인 연관이 없는 오히려 이영화의 많은 클로즈업과는 거리가 먼 추억들이 떠올랐다. 카프카,길,자크반도마엘, 라쇼몽,마르케스,오스야스지로,400번의 구타,쟈크따띠,첸들러,매트릭스,나루세미끼오,무솔리니,스왈로우테일,타란티노,올드보이의 그 멍함,달콤한 인생의 그 페이소스, 경멸, 그섬에 가고싶다,초록물고기,게임의규칙,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춘광사설 등... 내가 좋아했던 그 친구의 '울고있는 네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미소'가 밀려 왔지만... 왜 그걸 벌레처럼 느꼈나 반성했다. 내 냄새는... 내 분노는... 웃프다... 슬프고 불안했던... 불안하지 않아서 더 불안했던 ㅂㄹㅊㄱ...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동경하던. 평범하던. 집착했던 영화에 대해.. 가족에 대해. .. 할 수 없음에도 소통했고 같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던 그들 은 지금...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친구가 많이 보고 싶은 밤이다. 인간에 대한 예의에 대해 고민하느라 지리멸렬했던 오늘 하루에 마치 단비처럼 해소해주는... 계획이 생기는.. 넘을듯 선을 넘지 않고 예측 가능하지 않아 더 큰 기쁨을 주는 우리네 #삶처럼 ...★ 참으로 #고마운밤 #😎🍢 이다. https://www.instagram.com/p/ByGLtXspkh1/?igshid=gl4tm96vz2y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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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밤은 대인기피로
물들어가는 시기이다.
저녁엔 회사에 불만이 생겼으며
그로인해 8시즘엔 잠수를 탔다
내일은 휴일이니 ,
이대로 회사와 결별하는 모양새,,
나의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
아니 엄밀히 말하지면
회피와 사라짐,
숨기, 은둔,,
"난 멀리가지 않아"....
"생각도 먼걸 찾지 않아"...
배달거리가 먼것처럼
난 골목골목 길거리 도로
여기저기를 일반인처럼 누볐다
하지만
몇년간 놀고있는 그네들의 삶처럼,
난 이제 극심한 대인기피환자처럼
숨을 것이다
난
아까부터 3시간째 멍을 때렸고
여기 이사와서
tv를 켜본적이 3번 될까 말까한 것같다
그냥 아무것없음이 좋고
아무이벤트가 없음이 좋다
그로인해 아무생각도 안하게 될것이다
머리는 쓰면 쓸수록 멀리간다
"내 생각은 멀리가지 않아"
"쉬운길만 갈꺼야"
라고 다짐하며
무념무상의 경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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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석양, 아늑한 이층침대, 멋진 자연 경관 속에서 끝없는 사진 촬영 등 탁 트인 도로에서 꿈꾸는 자유의 삶처럼 보입니다.
성장하는 유목민 숭배자들은 종종 인스타그램에서 해시태그 #vanlife와 함께 여행 하이라이트를 문서화하는 속임수 캠퍼 밴을 타고 장거리 여행(때로는 몇 달 동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커플, 특히 경험이 없는 커플의 경우 이 겉보기에 평온해 보이는 생활 방식이 독특한 문제를 낳을 수 있습니다. 비좁은 숙소를 공유하고 지원 네트워크에서 격리된 도로 위의 커플은 서로를 미치게 하지 않고 매일 지루함과 물류 문제와 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번 여름에 약혼자 브라이언 런드리(Brian Laundrie)와 함께 크로스컨트리 여행을 하던 중 22세의 개비 프티토(Gabby Petito)가 사망하면서 화창한 소셜 미디어 게시물에 올리지 못하는 밴 생활의 측면에 새로운 관심이 생겼습니다. 증거에 따르면 부부는 그녀가 실종되기 며칠 전에 길에서 긴장된 순간을 보냈습니다. Petito의 유해는 일요일 와이오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에 대해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습니다. 당국은 이달 초 플로리다에 있는 부모님의 집으로 혼자 돌아온 후 실종된 23세 세탁소를 찾고 있습니다. 밴 라이프 커플과 함께 일한 시카고 지역의 심리학자 존 더피는 많은 커플이 새링크 쿠쿠티비-qooqootv.com. 한국 드라마 tv 예능 영화 다시보기 무료사이트 자동차 여행을 낭만적으로 생각하지만 주요 세부 사항을 미리 계획하지 않아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런 여행은 당신을 더 가깝게 만들어줄 두근두근하고 신나는 모험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 종종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루가 길고 힘들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당신은 서로의 신경을 건드리게 됩니다. 적어도 가끔은." Duffy가 말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상당한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면 불편하고 극단적으로 위험한 수준의 불편함과 갈등에 처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작은 공간을 공유하면 대가가 따를 수 있습니다. #vanlife 라이프스타일은 소셜 미디어 게시물, YouTube의 DIY 밴 전환 동영상, 전염병 기간 동안 군중을 피하려는 열망으로 인해 최근 몇 년 동안 인기를 얻었습니다. CNN은 밴을 타고 미국을 돌아다녔던 소수의 커플들과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하고 소셜 미디어에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등장한 젊은 부부의 이야기에 푹 빠져있는 Petito 사건의 전개를 따라왔다고 말합니다. "저는 사건 경계선을 집요하게 따라갔습니다. 개비는 참담하고 가슴 아픈 불운을 겪었습니다."라고 28세의 시에라 피터스 버클랜드(Sierra Peters-Buckland)는 말합니다. 그녀의 여자친구인 아네트 헤이워드(Annette Hayward)와 몇 달간 여행을 떠난 승합차 생활자입니다. "하지만 밴라이프가 개비를 죽이지 않았고, 여행이 개비를 죽이지 않았고, 국립공원이 개비를 죽이지 않았다. 사람이 개비를 죽였다." Peters-Buckland에게 밴 라이프의 매력은 작년에 손짓했습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 오션사이드에 있는 스포츠 용품점에서 일을 그만두고 가방을 꾸리고 크로스컨트리 여행을 계획하기 시작했습니다. 시에라 피터스-버클랜드와 그녀의 여자친구는 지금까지 42개 주와 50개 국립공원을 여행했습니다. 시에라 피터스-버클랜드와 그녀의 여자친구는 지금까지 42개 주와 50개 국립공원을 여행했습니다. 4월에 그녀와 Hayward는 Chance라는 별명을 가진 흰색 Mercedes Sprinter 밴을 샀습니다. 그들은 밴의 목재 내부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깨끗한 흰색 린넨과 커튼으로 장식하고 침입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여러 장소에 몇 가지 소지품과 곰 스프레이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길을 쳤습니다. 마지막 여행에서 Peters-Buckland와 그녀의 여자 친구는 24,000마일을 운전하여 42개 주와 50개 국립 공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버팔로, 곰, 큰사슴과 큰뿔양을 보았습니다. 한 인스타그램 사진은 데스 밸리 국립공원의 일출을 보여주었습니다. 전경에 있는 커피잔에는 "Enjoy the Journey"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길 위에서의 긴 하루와 수많은 일상 업무는 큰 타격을 줄 수 있다고 Peters-Buckland는 말합니다. 그녀는 그들의 여정이 갈등을 다루는 것에 대한 귀중한 교훈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여행, 특히 저예산 여행은 피곤할 수 있고 매일 결정을 내려야 하는 추가적인 부담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힘든 새링크 쿠쿠티비-qooqootv.com. 한국 드라마 tv 예능 영화 다시보기 무료사이트 시기를 예상하고 예상치 못한 것을 예상하고 열띤 논쟁에 빠질 수 있는 관계에 있다면 전략을 세워야 합니다. " Peters-Buckland는 그녀와 Hayward가 분쟁을 신속하게 해결하는 방법을 배웠다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어떤 커플은 처음부터 욕설을 하며 그들의 문제를 밴으로의 긴 여행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도로에서 너무 많은 말다툼을 하는 것은 나쁜 징조라고 밴 생활자들은 말합니다. Peters-Buckland는 "말다툼이 매우 규칙적으로 일어나거나, 공격적이 되거나, 깊은 슬픔을 야기한다면, 현실은 좁은 공간에서 함께 여행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Peters-Buckland는 말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개비처럼 되지 않도록 해로운 행동을 정상화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밴 라이프는 정신 건강을 돌봐야합니다 밴 라이프는 생각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고 전국에서 친구를 사귄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적 서클에서 떨어져 있는 것은 외로울 수 있습니다. Navod Ahmir는 1년 동안 파트타임으로 그의 검은색 2018 Ford Transit 밴 크로스컨트리를 운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동부 해안을 오가며 조지아의 흑인 유목민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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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에 평온이 더해지면, 붓다가 탄생한다. 지성이 없는 평온함에서는 들소의 세계로 퇴화하는 삶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벌어져 왔다. 속세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이 100퍼센트 비실용주의적 활동으로 홀로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명상하고 또 명상한다. 이것은 온전한 삶이 아니며 온전한 삶이 될 수도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실용주의적인 삶만을 추구하면서 더 많은 재물을 축적하고 더 많은 은행잔고를 쌓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도대체 무슨 놀이를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비록 그들이 놀이를 한다고 해도, 자신의 놀이에 너무 심각하게 빠져든다. 그래서 그들의 놀이조차 거래가 된다.
사람들은 카드 게임을 해도 그냥 하지 못하고 꼭 돈을 건다. 그러면 그것은 심각해진다. 거래의 형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무언가를 걸어야만 놀이를 시작할 수 있다. 자신의 놀이에 너무나 심각하게 빠져든 나머지 죽자 살자 뛰어드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아무도 흥겹게 놀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은 실용주의적 활동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진정으로 명상하고 기도하고 놀이하는 삶, 궁금증이나 경이로움을 느끼는 삶, 아무런 이유 없이 그저 기쁨이 차올라 별을 바라보거나 꽃을 감상하는 삶, 기타를 치거나 노래를 부르는 삶처럼 온갖 흥겨움을 잃어버렸다. 이런 사람들 역시 매우 궁핍하다.
나는 세상에 완전히 새로운 인간을 창조해내고 싶다. 그는 어떤 식으로도 궁핍하지 않고 진정으로 풍요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는 풍요로운 세상, 풍요로운 관계, 존재계의 풍요로운 도전들을 모두 품으면서도 침묵할 수 있으며, 흥겹게 놀이할 수 있고, 깊은 명상에도 빠져들 수 있는 사람이다.
내가 갖고 있는 산야신의 의미는 이렇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일부분이 아닌 존재이다. 세상 속에 있으면서도 세상을 뛰어넘는 존재이다. 부디 도피주의자가 되지 말라.
- 오쇼의 <나는 누구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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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태환트리오 #공연 #강태환 #재즈 #미연 #박재천 #알토색소폰 #피아노 #퍼커션 . 그의 즉흥 연주는 시간과 체험, 우연과 불안 그리고 아름다움을 향한 열망이 쌓아올린 놀라운 세계였다. 여든에 가까운 그는 연주가 끝나자 앳된 소년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앨범에 이백의 싯구를 써주며 환하게 웃는 그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에게 연주는 삶 그 자체가 아닐까. 즉흥의 방식으로 점철된 우리 삶처럼 말이다. (서귀포문화빳데리충전소- Seogwipo Cultural Battery Station에서) https://www.instagram.com/p/Byz3VaTpqbr/?igshid=1s7mzygfywip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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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r’s Unwomanly Face
출판 검열관과 나눈 대화에서:
— 그래요, 우리는 정말 어렵게 승리를 쟁취했소. 그래서 당신은 영웅적인 사례들을 써야만 하는 거요. 그리고 그런 예는 수백 가지도 넘어요. 그런데도 당신은 전쟁의 추악한 면만 보여주고 있소. 냄새나는 속옷만 보여줬단 말이오. 우리의 승리가 당신한테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에 불과한 거요? 도대체 원하는 게 뭡니까?
— 진실들.
— 당신은 삶 속에 진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군요. 거리에 있다고 말이오. 당신이 말하는 진실은 천박해요. 지나치게 세속적이오. 아니, 진실은 우리가 꿈꾸는 바로 그것이오. 우리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것!
“내가 정말 적절한 단어를 찾��� 수 있을까? 어떻게 총을 쏘았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어. 하지만 어떻게 울었는지는 말 못하겠어. (…) 당신은 작가잖아. 직접 한번 생각해봐. 뭔가 아름다운 말. 들끓는 이도 더러운 진흙탕도 없고 구토물도 없는…… 보드카 냄새도 피 냄새도 없는 그런 말을…… 우리 삶처럼 끔찍한 그런 거 말고 …….”
그렇게 처참하고 끔찍한 전투가 또 있을까. ‘심장 하나는 증오를 위해 있고 다른 하나는 사랑을 위해 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사람은 심장이 하나밖에 없으니까. 나는 늘 어떻게 하면 내 심장을 구할 수 있을까 생각했어.
*
말줄임표가 너무 많다. 그들은 같은 전쟁에서 싸웠지만 같은 대우를 받지 못했고, 싸움보다 사랑에 대해 말하기를 더 어려워했다. 인터뷰를 가득 채웠을 pause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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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한 날이 있다. 삶이 죽음 같고, 죽음이 삶처럼 여겨지는. 산다는 일이 실체가 없는 듯 막막한, 아무 것도 감각되지 않는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의 지금이 현실인지 환각인지 분간이 안 돼 당혹스럽다. 사람들이 내일이라도 나를 조문하러 온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아무도 내일이 먼저 올지 내세가 먼저 올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내가 조문한 이들과, 나를 조문하는 이들과, 조문을 맞이하는 내가 무엇으로 다를 것인가. 시간 앞에 그 다름이란 것이 다르면 얼마나 다를 것인가. 인간이 신앙처럼 떠받드는 '많이'와 '오래'도 우주의 광대무변 앞에서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한숨이고 티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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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키우기
나를 키우는 과정이 재미있다.
자기개발에 대한 유튜브를 요즘엔 많이 보고 있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자기 우월감에 차있다가 실패한 경험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정말 잘난 사람들이고 이로 인해 인정도 많이 받았었고
너무 자아도취하다 실패한 사람들일것 같다.
또 그 실패에서 좌절한 것이 아니고 인생을 어떻게 헤쳐나가야할지 고민을 정말 많이 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와 비슷하다.
나는 내가 너무 잘났다고 생각했다.
외모, 패션센스, 공부, 디자인 등등 하고자하면 왠만큼은 할줄알고 특히나 또래에 비해서는 꽤나 성공한 삶처럼 보이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잘났으니 남들이 나보다 잘나면 화가나곤 했다.
그런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너무 크게 받다보니
자기 객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무엇을 하고자하면 열심히 하는 집념은 있는 편이다.
그치만 태어나서부터 잘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고 보긴 어렵다.
그래서 노력을 해서 이 세상에서 정말 멋지고 특이점이 있는 사람으로 커야한다.
내가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깐
이 세상에는 배울 수 있는 것들이 천지였다.
나보다 뛰어난 점을 가진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성장할 수 있다.
올해에 정말 크게 얻은 것은 객관화와 나도 못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금이 못난만큼 나는 발전할 수 있는 사람이고
앞으로 성장할 내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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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는 자신을 기만하지 않겠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일찍이 그 어떤 사람도 완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누구나 자기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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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카페는 개인적이면서도 사회적인 공간이다. 혼자 자유시간을 즐기거나 다른 사람과 교류하기 위해 방문하는 부담 없는공간이다. 카페에 따라 다채로운 음료와 음식을 즐길 수 있으며, 카페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는 점에서 우리에게 카페가 가지는 공간은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로서도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혼자 카페에 가면가끔 주변을 둘러본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공통점외 동일한 행위를 하지 않는다. 공부, 독서, 미디어 감상, 과외, 대화 등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만남과 이별이 발생하는 다양한 감정이 공존, 창조, 소비되고, 하루의 시작과 마무리가 카페에서이루어지기도 한다. 카페는 현대인의 삶에서 집, 회사만큼 중요한데, 수많은 일이 벌어지는 만큼 이 사회가 지속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공간 중 하나이다.
하지만 카페를 가기 위해 특별한 목적이나 목표를 가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것은 우리 삶에 깊숙이 그리고 평소에 공기만큼이나 존재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데 어디에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런 상황에서 각 카페의 생존 전략이 궁금할 때가 있다. 음료와 음식의 질인지, 접근성 향상을 위한 지리적 위치인지, 인테리어 인지, 기타 마케팅인지 수많은 프랜차이즈 카페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각 개인 카페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그 싸움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들을 피부로 느끼는 경우가 잘 없지만 말이다.
그 또한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이다. 단순히 시간 때우기 혹은 음료를 즐기기 위해 방문하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경쟁과마케팅이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의 삶처럼 겉으로는 평온하고 행복한 듯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엄청난 고민과 고난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만든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평온 혹은 사회의 구성원 중 일원으로서 커뮤니티에 참여하고 유지하기 위해 카페를 방문한다. 카페는 1m² 가 채 되지 않는 작은 나만의 공간이자, 치열하고 삭막한 도시 생활에서 유일한탈출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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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으로 노년 보기
김환식 장로 (Ph.D) / (제 981 칼럼) 인생(人生)을 어떤 사람은 “고생(苦生)스런 나그네 길”이라고도 하지만 긍정적(肯定的)으로 보고 긍정(肯定)으로 생각하면 인간(人間)의 삶처럼 귀(貴)하고 놀라운 작품(作品)은 없다. 늙음을 부정적(否定的)으로 보지 말고 경의(敬意)와 부러움으로 보고 평가(評價)해야 한다. 노년은 많은경험(經驗)의 소유자(所有者)이고 만고풍상(萬古風霜)을 이겨낸 백전노장(百戰老將)이다. 맥아더는 “노병(老兵)은 죽지 않고 사라질 뿐이다.” 라고 갈파(喝破)했지만 현대(現代)의 노년은 사라지지도 죽지도 않고, 삶의 현장(現場)에 당당(堂堂)히 버티고 살아가기에 생활(生活)의 관점(觀點)을 어디에두느냐 하는 것이 중요(重要)하다. 노년의 삶을 부정(否定)보다는 긍정에 관심(關心)과 초점(焦點)을 맞추어야한다. 긍정에 초점을 맞추면 감사(感謝)할 일도 많고 감탄(感歎)하고 즐기며 기뻐 할일이 너무나 많다. 노년을 낡은 것으로 보지 말고 익어가는 것으로, 완성(完成)되는 것으로, 보아야한다. 노년은 용서(容恕)하기 좋은 때고 빈 마음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고 욕심(慾心) 없이 살고 자연(自然)과 함께 하기 좋은 때다. 돈이 많지 않아도 살만하고, 명예(名譽)는 없을수록 좋고, 세상관심(世上關心) 던져 놓고 멀찍이 물러나서 마음의 여유(餘裕)를 즐기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滿足) 할 수 있어서 좋다. 노년을 긍정적으로 보면 늙음은 참으로 아름답고 멋지다. 멋진노년은 일하는 노인이고 건강(健康)한 노인(老人)이다, 마음이 너그럽고 나쁜 생각을 하지않고 남을 도우며 스스로를 즐기며 행복해한다. 노년은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 만일 노년이 불행(不幸)하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삶이 불행과 슬픔이됨으로 결코 불행 해지지 않도록 미리 준비(準備)해야 한다. 아름다운 노년을위해 젊어서부터 성실(誠實)하고 바르게 열심히 일하며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려야 한다. 준비(準備)된 노년은 멋지고 아름답다. 아름답고 행복(幸福)한 노인이 되는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큰 축복(祝福)이다.(끝) 2018-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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