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구
Explore tagged Tumblr posts
Photo
(사진출처 : https://www.biographyonline.net/business/robert-owen.html ) 나라의 상황이 이러할 때에 오언이 그 유명한 빈민 고용 '계획'을 들고 나온 것이다. 국가가 그리고 국가가 하지 못할 때에는 지방 당국 혹은 민간의 자선가 집단이 나서서 빈민들에게 일자리를 찾아 주어야 한다고 그는 촉구했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라면 구빈세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며, 노동자들은 다시 좋은 조건에서 유용한 생산 활동에 종사하게 될 것이며,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재생시킬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오언은 그리하여 '협동 마을'의 설립을 제안했던바, 이는 통치와 행정의 방법에 있어서 모두 그가 뉴 래너크에서 스스로 경험했던 것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뉴 래너크와는 달리 이 협동 마을들은 주로 농업 공동체로서, 공장 노동은 보조적 고용으로서만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다. 오언은 농업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으면서도, 면화 산업에서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성 향상을 이루었던 자신의 경험과 공장의 상황을 가정한 계산에만 근거하여 자신이 제안한 공동체의 생산 능력을 아주 낙관적으로 추산했다. 그가 세운 공동체에서는 누구도 너무 많이 일하는 법이 없고 생활수준도 좋고 교육뿐만 아니라 여흥과 오락 또한 풍부하게 제공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동체는 스스로를 지탱하고도 남을 경제적 능력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 세계는 조만간 자신의 '협동 마을들'이 옛날 시스템에 비교하여 얼마나 우월한 것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계급이 앞다투어 여기에 몰려들게 될 것이며, 사회는 이성적인 평화 혁명을 통해 변혁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p29-30) 오언주의는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에 안성맞춤이었다. 자본가들의 경쟁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이라는 지배적 학설에 맞서서 오언은 사회적 협동이라는 그리고 사회를 생산자들의 협동적 공영체로 조직하자는 복음을 설파했던 것이다.비록 빈민들을 위한 새로운 시스템을 건설해야 한다고 오언이 호소했던 대상은 상류계급이었지만, 그가 내놓은 제안들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이 자기들 스스로를 위하여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을 암시하고 있었다. 부자들이 아무 일도 해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움 없이도 가난한 이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오언이 세우고자 했던 식의 공동체를 세울 만한 자원은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야심을 줄여 좀 작은 규모에서 우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노동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방식으로 오언주의를 해석했다. 이들은 '협동 마을' 대신에 작은 규모의 협동 결사체들과 협동 상점들을 건설했다. 그 목적은 선전을 위한 것도 있었고 또 상호 신뢰에 바탕하여 자신들 스스로가 일상적으로 필요한 재화들을 사고팔기 위함도 있었다. 이들은 작은 규모의 '협동cooperate'에서 시작했지만, 이는 그냥 식료품과 야채나 사고팔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시작의 지점을 찾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즉 이러한 작은 규모의 구매 및 판매 활동을 수단으로 하여 공동의 기금을 축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기금으로 좀 더 야심적인 실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아마도 언젠가는 오언의 계획에 기초한 노동자 계급의 공동체를 건설할 날도 오리라는 것이다. (p36-37) 오언의 사회주의는 '유토피아적'이라고 부릴 때가 많고, 훗날의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이름과 구별된다. 이러한 묘사는 크게 보아 옳다. 오언의 당대에는 빈민들의 가난을 범죄라고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책임도 빈민들 본인에게 돌리는 경향이 지배적이었거니와, 그는 여기에 맞서서 인간의 성격 형성에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강조했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오언의 관점은 당대의 지배적 경향에 대한 교정자의 역할로서 견줄 바 없는 큰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는 와정에서 환경만 바꾸어주면 그 즉시 사람들이 확실하게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난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틀린 생각이지만, 그는 거짓 명제를 말한 것이 아니라 모종의 참 명제를 과하게 말한 것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는 사회주의의 기초가 사람들 사이의 연합과 결사에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들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협동의 역량에 대한 의식을 일깨워서 이것을 사회주의의 신념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사회주의 사상에 있어서 중요한 기여이며, 이러한 생각은 오랫동안 잊혀 있었지만 오늘날에 비로소 그 의미와 중요성이 제대로 음미되기 시작했다. (p48)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이를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그는 13세 무렵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서로 논쟁하는 분파들은 모두 틀렸으며, 신앙의 차이는 그 신앙을 가진 개인의 의지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회제도의 영향에 기인한다는 것이었다. "나의 이성은 내게 다음과 같이 가르쳐주었다. 나의 여러 성질 중 나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하나도 있을 수 없다. 그러한 성질은 자연이 내게 강제로 부여한 것이다. 나의 언어, 종교, 여러 습관은 사회가 내게 강제로 부여한 것이다. 나는 전적으로 자연과 사회가 낳은 아이일 뿐이다. 나의 여러 성질을 부여한 것은 자연이며, 그 성질들에 방향을 부여하고 인도하는 것은 사회인 것이다. 이리하여 나는 지금까지 인간에게 가르쳐진 모든 종교의 모든 신앙이 그 근본으로부터 오류임을 알게 되었고, 결국 모든 종교를 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의 종교적 감정이 사라지자 그 즉시 그 자리에는 보편적 자애심이 들어서게 되었다. 어떤 분파나 어떤 당파를 위한 것도 아니요 심지어 어떤 나라나 어떤 깃발을 위한 것도 아닌 인류 전체를 향한 자애심으로서, 인류 전체에게 좋을 만한 일을 행하고 싶다는 절실하고도 열렬한 욕망이 자리 잡은 것이다." (p64) 공장 노동자들 중에는 상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구빈법 행정 당국은 구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불행한 빈민 아동들을 떼로 엮어서 고맙게도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공장 소유주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파견하는 관습이 있었다. 이렇게 해서 공장으로 오게된 교구 도제들이 400에서 500을 헤아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단 이 아이들이 교구의 손에서 공장주의 손으로 넘어온 뒤에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라는 불편한 질문은 모두들 회피했다. 고지대 소작농이었다가 살던 땅에서 쫓겨나 공장 노동자가 된 이들은 공장을 죽도록 싫어했기에 항상 술에 절어 있는 상태였으니, 보통의 고용주들로서 볼 때에는 갈 곳 없는 영세민 자녀들이야말로 산업의 원료로 쓰기에 최상의 자재였다. 데이비드 데일은 이 아이들에게 비교적 괜찮은 숙식을 제공했고 또 기초적인 종교 교육도 시켜주는 것으로 자신의 ���심을 위로하려 했지만, 그 또한 자기 공장에 아이들을 노동자로 고용하는 당시의 지배적 관급을 그대로 따르기는 마찬가지였다. (p115) "이 아이들 중 다수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난쟁이가 되어버리며, 그들 중 다수는 아예 기형이 되고 만다. 낮에는 내내 일만 하다가 밤이 되면 이번에는 교육이 시작된다. 이게 너무나 지겹고 싫어서 수많은 아이들이 계속해서 도망을 치며 7년, 8년, 9년에 달하는 이들의 도제 훈련 기간이 빨리 끝나기를 몸부림치며 애태우며 기다리지 않는 아이가 없을 지경이며, 그나마 도제 훈련은 보통 이들 13세에서 15세가 되었을 때에 끝나버린다. 이 나이 때에는 스스로 생계를 벌어 생활하는 데 익어 있지 않은 데에다 세상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법인데 이런 아이들이 에든버러나 글래스고와 같은 대처로 보통 나오게 된다. 그러면 이 소년 소녀들은 곧 큰 도시에는 항상 있게 마련인 무수히 여러 유혹에 공격당하게 되며, 그들 중 다수는 그 희생물이 되어 쓰러지고 만다." (p117) 그는 최초부터 자신의 신화적 신조에 있어서 기초가 되는 원리에 입각하여 행동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훌륭한 사람으로 발전시킬 수 있으려면 또 물질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좋은 결과를 확실하게 얻기 위해서는 물질적 환경과 도덕적 환경을 모두 개선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원리를 행동의 원칙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에 굳건하게 새겨두었다. "뉴 래너크에서 벌어졌던 이 실험은 태초 이래 오늘날까지 인간 사회의 기초가 되었던 근본 원리를 변혁하고자 하는 최초의 실천적 조치였다. 그리고 개인의 인성은 개인 스스로가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을 위해서 형성되어지는 것이라는 원리,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는 만인의 성격을 제대로 형성해줄 수 있는 광대한 권력과 수단을 손에 넣었다는 원리를 진리로 입증하는 데에 이렇게 성공적인 실험은 없었다." (p118) 오언의 모든 계획과 비전, 그의 뉴 래너크에서의 작업뿐만 아니라 그의 협동조합 실험과 사회주의를 일관하는 중심 원리이지만 그의 숭배자들과 비판자들 모두 쉽게 간과하곤 하는 명제가 있다. 오언주의의 기초는 바로 교육을 인격 형성과 행복 소유의 수단으로 보는 그의 이론이라는 사실이다. 오언은 교육의 힘에 대해 최고의 또 무제한의 신뢰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육의 방향을 제대로 잡아 수행하기만 한다면 이 세상만사가 모두 번영으로 가는 과정으로 변할것이라는 게 그의 믿음이었다. 그는 만사가 다 교육의 문제라고 주장했으며, 좋은 생활, 좋은 우정, 좋은 노동의 기초도 모두 교육이라고 보았다. 교육은 인간 세상의 가지가지 차이점들을 화해시키며 계급, 신앙, 민족 간의 분쟁을 분쇄해버리며, 이 세계를 이성과 애정의 유대로 묶인 단일의 협동 고영ㅇ체Co-operative Commonwealth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교육이 없다면 오류와 분열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지만, 교육을 수단으로 삼는다면 과학이 밝혀낸 광대한 가지가지의 생산적 힘들을 만인의 공동선을 위해 ���어낼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p152) "벨 박사나 랭커스터 씨의 시스템에서는 아이들이 읽기, 쓰기, 계산, 바느질 등을 배운다고 해도 그와 동시에 최악의 습관도 함께 습득하는 일이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합리적으로 인생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정신을 얻지 못하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도 명백한 일이다." "이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이 해보면 된다. '전국적'이라는 명칭이 붙은 학교 아무 곳에나 들어가서 교장에게 아이들의 학업 성취를 보여달라고 해보라. 교장은 아이들을 불러낼 것이며, 아주 심오한 학식을 갖춘 이들도 합리적으로 답하기 힘든 신학적 문제들을 질문 할 것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이미 그 전에 배워 달달 외우고 있는 대답을 그 자리에서 내놓을 것이다. 이는 교육도 아니며 그저 아이가 기억력만 좋으면 만사형통인 창피스러운 교육 흉내일 뿐이다. 이렇게 되면 여러 아이디어를 비교해보는 자연적인 재능과 합리적 능력을 가장 먼저 망가뜨린 아이들 그리고 그 대신에 전혀 일관성도 연관도 없는 여러 명제들을 그냥 줄줄 외워댈 기억력을 가진 아이들이 이 학급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라고 불리게 될 것이며, 정말로 유용한 교육에 쓰여 마땅할 시간의 4분의 3은 아이들의 정신적 능력을 망가뜨리는 데에 쓰이게 될 것이다." (p156) 그가 어떤 성격이든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했던 단위가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어떤 공동체에서든'이라는 점을 주의해야 하며, 또 그는 이어서 "아이들은 집단적 차원에서 어떤 인격으로든 형성시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가 말한 논점의 핵심은 각각의 개인 모두가 모든 면에서 순전히 자기가 받은 훈련과 환경의 산물이라는 것이 아니라, 사회 성원들이 어떤 형태의 사회적 환경에서 어떤 훈련을 받으며 자라나는가에 따라서 사회마다 서로 다른 집단적 생산물이 된다는 것이다. 개개인의 성격을 순전히 이러한 논리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전제만 받아들인다면, 이러한 학설은 사회에 대한 하나의 보편적 명제로서 얼마든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p160) 게다가 오언은 여러 번 반복하여 '선천적 성격nature'과 '후천적 성격nurture'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주장했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어느 하나를 희생시키고 ���른 것을 치켜세운 것이 아니었다. 그가 1817년에 쓴 글을 보면, "인간은 타고날 때부터 여러 다른 성향과 자질들을 결합되어 있는데 이 성향 및 자질들은 힘의 크기도 다르며 조합의 비율도 다르기 때문에 태어난 뒤 살아가는 과정에서 사람마다 그 인격과 성격의 개성과 차이점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마다 이렇게 타고난 성향들, 자질들의 힘과 조합이 제아무리 서로 다르다고 해도 그 이후에 주어지는 여러 환경에 따라서 그 방향이 결정되어 일반적인 성격들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일반적 성격들이란 그 어떤 것도 될 수가 있고 심지어 정반대의 성격이 될 수도 있으므로 완전히 비합리적일 수도 완전히 합리적일 수도 있는 것이다. (p160-161) 따라서 이러한 오해 때문에 오언이 그저 무해한 괴짜 혹은 열성가 정도로 치부되어 잊힌다는 것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1816년 이전에 쓰인 그의 교육 관련 저작들은 건전한 양식이 풍부하게 느껴지며, 비록 천년왕국 어쩌고 하는 요소들이 없지 않지만 이는 쉽게 분별하여 제거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인격 형성에 관한 그의 이론은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논리가 탄탄하며, 각자가 타고난 성질을 어떻게 가꿀 것인가가 교육의 도덕적 기초가 되어야 한다고 그가 강조했던 것은 분명한 건강성을 가지고 있어서 오늘날의 교육가들도 진지한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또 아이들의 건강 그리고 건강을 위한 레크리에이션이 교육 작업의 기초로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 또한, 칙칙한 도서 환경 속에서 담장이 둘러쳐진 아스팔트 놀이터에 아이들을 몰아넣고 대충 만족하는 우리 시대에 뼈저리게 소중한 진리를 담고 있다. "인간의 성격은 그 사람 스스로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오언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사람의 여러 정신적 습관이라는 것이 유년기 및 소년기에 획득한 건강과 산체적 습관에 크게 좌우되는 만큼 그 사람이 자라나게 된 양육 방식 또한 근본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인정할 수 있는 것이며, 사회에 널리 퍼진 여론이라는 것의 90퍼센트는 개개인 각각의 논리적 사유를 거쳐 형성되는 것이라기보다 그러한 견해를 품고 있는 이들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 및 결합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주장은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 더욱 설득력 있는 것이 되었다. 오언이 1817년 쓴 글에 나오듯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지구 위의 모든 지역에서 인간은 말 못 하는 영아기부터 일정한 분파, 일정한 계급, 일정한 정당, 일정한 나라에 따라오는 특정한 생각들을 수용하도록 강제당해왔다. 그 결과 모든 개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오류 및 편견으로 꽉 찬 이 네 가지의 두꺼운 안개 속에 갇혀 있으며, 그들이 자기 주변의 만사만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 때문에 왜곡을 겪을 수밖에 없다." (p171-172) "이 이득이라는 원리에 만약 아무런 제약도 가하지 않을 경우 특히 가장 개탄스러운 결과가 나올 만한 곳은 바로 공장 제조업의 실제 작업 분야에 종사하는 노동계급이다. 왜냐면 이러한 실제 작업 분야는 성인들의 건강과 도덕심에 상당히 해로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부모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자식들을 일터로 보내어 그 아이들의 행복을 희생시키고 있다. 아이들은 응당 인간성의 정신으로 사회 전체가 심사숙고하여 마련한 시스템 아래에서 자라나야만 정신과 신체의 조화가 뛰어난 아이들로 자라날 수 있지만, 이렇게 하여 공자으이 일터로 보내진 아이들은 정신과 신체의 구성과 조화가 그보다 훨씬 열등하게 되지 않을 수 없다. (p191) "우리는 모든 시장에 다 우리의 공산품들이 포화 상태라고 불평합니다만, 그러면서도 또 우리의 어린아이들과 수백만의 어른들에게 밤이나 낮이나 거의 쉬는 법 없이 노동하여 계속 기계의 힘을 증가시키며 앞으로 전진하라고 좨치고 있습니다. 가뜩이나 포화 상태인 시장을 더욱 포화 상태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 "큰 공장주의 입장에서 볼 때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마땅한 것이 바로 저임금입니다. ... 임노동자들은 그 숫자가 많기 때문에 모든 물품들의 가장 큰 소비자들입니다. 따라서 임금이 높으면 나라 전체가 번영하지만 임금이 낮으면 최상층에서 최하층까지 모든 계급이 다 고통을 받는 다는 점, 특히 그중에서도 제조업자들의 이익이 큰 타격을 받는다는 것은 언제나 사실입니다. ... 모든 경우에 나라 전체의 진정한 번영은 항상 임금의 수준에 즉 생산적 계급이 자기들이 내놓은 노동의 대가로 얻어가는 안락품들의 정도와 범위에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그래서 진정한 사회악은 너무 어린 아이들을 고용하는 것, 과도한 노동, 저임금 등이라는 것이다. (...) 이러한 사회악들이야말로 "우리 공장주들에게 무역 경쟁국들이 우리에게 만들어내는 그 어떤 경쟁보다도 열 배는 더 강력한 적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설령 생산 비용이 오른다손 치더라도 그 몫은 소비자들이 치르게 되어 잇으며 또 그게 마땅한 일이라는 점, 그리고 그 증가분이라는 것은 "어떤 물품이든 몇몇 부유한 투기꾼들이 대량의 원자재를 한 번에 매점하는 바람에 나타나게끔 되어 있는 항시적인 가격 등락"에 비교하면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오언은 주장한다. (p197-198) 이렇게 오언은 당시의 지배적인 실업 상태를 서로 연관된 두 개의 원인 탓으로 돌렸다. 즉 전쟁의 종식 그리고 전쟁 때문에 인위적으로 촉발된 기계제 생산의 발흥이었다. 이렇게 오언의 관점은 액면 그대로 볼 때 기계로 인해 일자리가 늘어난다고 보는 전통적인 생각과는 직접적으로 반대되는 것이었다. 위원회는 그 자리에서 오언에게 그의 관점을 더 발전시켜서 그의 진단뿐만 아니라 그가 제안하는 해결책들까지를 담은 온전한 보고서를 위원회에 제출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언은 즉시 이 임무에 정력적으로 임했고, 금방 완수했다. (p208) 인간 노동의 대체와 강제적 임금 하락은 곧 국내 시장의 축소를 뜻하며, 이런 식으로 궁핍의 악순환 고리가 형성되면서 또 점점 커져간다. "노동계급은 이제 기계의 힘과 경쟁할 수단조차 충분치 못한 상태이다." 따라서 그 결과는 다음의 세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 기계의 사용을 중단하든가(하지만 이는 전 세계적 차원이라면 모를까 국제적 경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일국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기계가 수백만의 인간들을 대체해버리는 바람에 그들이 굶주리게 되든가. 세 번째의 가능성은 "빈민들과 일자리 잃은 노동계급에게 유리한 직종을 찾아주어, 지금처럼 기계가 이들의 노동을 대체��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노동에 하인으로 복무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오언의 유명한 '게획'이며, 그의 사회주의에 있어서 맹아가 된다. 그는 사회가 그 성원들에게 유용한 일자리를 제공할 의무가 있다고 보았으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할 사회 조직의 계획을 고안하는 작업에 나선 것이다. (p211) 이 계획의 시작에 대해서 오언은 정부가 움직일 것을 원했다. "사회 전체가 얻게 될 혜택의 많은 것들은 이 계획이 국가적 차원에서 시행될 때에만 현실화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움직이지 않는 경우에도 "이 계획을 실행할 수 있는 몇 가지 형태가 있다. 개개인들이 실행할 수도, 교구에서 할 수도, 주나 구 차원에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는 큰 비용이 드는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기에 들어간 지출은 회수가 가능한 지출일 뿐만 아니라 사실 가장 경제적인 지출이다. 스핀햄랜드 구호 시스템과 전쟁 직후의 궁핍이 겹치면서 빈민 구호 지방세의 부담이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이미 늘어나 상태였지만. "이 계획은 한 세대 안에 빈민 구호세를 불필요하게 만들 것이다". 오언이 지적하는 바, "현행법 아래에서 실업을 당한 노동계급을 부유하고 근면한 이들이 먹여 살리고 있으며 후자의 재산과 생산물을 전자가 소비하고 있지만 그들의 정신과 육체는 여전히 생산적으로 쓰이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자신은 이 비생산적인 계급들을 생산적으로 만들면서 또 동시에 이들을 더욱 저질의 존재로 만드는 일 없이 그들의 효율성과 행복을 증대시켜줄 환경을 마련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고 말한다. "입법 활동의 기초는 예방의 원칙이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기존의 구빈법은 근본적으로 부실한 것이어서 반드시 개혁되어야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한 이들을 그들의 운명에 내맡기는 식으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자신의 계획이 반드시 채택되어야 하며, 그러지 않을 경우에는 비참한 생활 속에서 도덕성을 상실하는 바람에 더 건실한 방향으로 사회를 재건할 능력까지 상실한 이들이 조만간 폭력으로 아예 전체 사회 시스템을 전복하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p218) 오언은 이른바 '인구 법칙'이라는 것을 완전히 부인했다. 당시 그가 발표한 여러 글들에서 상당 분량이 이러한 맬서스식 관점에 맞서 싸우는 데에 할애되어 있다. "온 지구를 아주 잘 개간된 농지로 덮어버리면 모를까 인구 과잉은 반드시 여러 사회악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은 제대로 정확하게 조사해보면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허깨비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 허깨비는 순전히 온 세상을 악덕, 무지, 범죄-이런 것들은 얼마든지 없앨 수 있는 것들이다-에 묶어두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산되어 나온 것이다. ... 역사 이래로 인류의 생활을 생계 수준으로 내리눌렀던 것은 수요와 공급이라는 인위적 법칙이었으며, 이 법칙의 근간이 되는 것은 사회의 안녕에 반하여 개인의 이득을 취한다는 원리이다." 맬서스는 문제의 근원이 우리가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다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진정한 문제는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구매자의 부족으로 인해 생산 활동 자체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하는 실제의 현실에 있다는 것이다. (p220-221) 오언은 다시 한 번 육체적 도덕적 환경이 인격을 형성한다는 자신의 관점을 상술한다. 사악함과 빈곤은 "오로지 우리 조상들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천년왕국이라는 말은 사람마다 다른 뜻으로 쓰겠지만, 제가 분명히 알고 있는 바의 뜻이 있습니다. 범죄도 빈곤도 없고, 보건은 크게 개선되어 있으며, 가난으로 굶는 이는 거의 없고, 지성과 행복이 백배나 늘어나 있는 사회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그러한 나라의 건설을 막는 장애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무지뿌입니다." 그는 '학식 있는 자들'의 잘못된 교육을 공격하면서 자신은 그런 교육의 기초인 여러 다양한 편견들을 제거하려고 애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거의 1년 전 런던에서 그랬던 것처럼, 종교적 교조야말로 무지와 분령의 근원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은 사회로부터 모든 당파적 분파적 다툼의 '씨앗'을 제거하는 것이며, "민족과 민족을 갈라놓는 허구의 분리선들로 생겨난 온갖 분열과 차별도 저는 똑같이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p245-246) 이 문서는 명쾌한 명제로 시작한다. "적절하게 지휘되는 육체노동은 모든 부와 국가적 번영의 원천이다." 오언은 말한다. 이러한 노동은 그 노동자를 상당히 안락하게 부양하는 데에 필요한 만큼의 소비를 넘는 잉여를 항상 생산하게 되어 있다고. 이는 "앞으로도 여러 세기 동안 세계 어디에서도 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인구 증가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생산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문제는 충분히 생산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생산된 것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가이다. "노동계급은 항상 열심히 일하여 사회에 득이 될 수 있는 것을 생산하려 하며 또 그 목표를 실제로 달성할 능력도 있다. 하지만 이를 가로막는 것이 딱 하나 있으니, 바로 이윤을 낳을 만한 시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세계의 여러 시장은 오로지 노동계급이 그 근면에 대해 얻는 보상을 통해서만 창출되게 되어 있으며, 그 시장들의 확장성과 채산성은 노동계급이 자기들의 노동의 대가로 보수를 어느 만큼 받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현존하는 사회제도에서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근면에 대해 제대로 보상 받는 것을 허용치 않고 있으며, 그 결과 모든 시장들이 다 무너지게 된다." 오언은 이에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러한 고용의 결핍은 산업혁명이 낳은 "놀라울 정도로 늘어난 신규 자본"의 분배 양식에 일정한 결함이 있어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p263) 조지 제이콥 홀리오크George J. Holyoake 그는 죽을 때까지 아이들만큼은 넘치게 사랑했다. 단지 아동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실제로 살아 있는 아이들을 너무나 사랑했다. 이 사랑만큼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그 이외의 면에서 보면 만년에 들어서 오언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걸어다니는 원리였으며, 나는 이것으로 그의 여러 실패들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모든 인류에 이익을 미치겠다는 생각이 지나쳐 자신의 세계를 추운 곳으로 만들어버렸고, 그가 노년에 빠져든 심령술 또한 '운동의 대의'를 품고자 희생해버렸던 따뜻한 인간적 온기를 다시 움켜쥐고픈 때늦은 몸부림이었다. 그가 만약 만사를 좀 적당히 해두는 법을 알았더라면 더 나은 예언자가 되었을 것이고 또 더 인간적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일은 그 "오직 한 생각만을 가진 사람"이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p281) 오언주의는 노동자들만의 계급 행동이 아닌 모든 '근면한 계급들'의 연합을 목표로 하는 이론이었지만, 1820년대에 빠르게 확산되고 지지를 얻은 오언주의는 다른 종류의 물건이었다. 직업 활동으로든 선전 활동을 위해서든 1820년 이후 협동조합들을 세운 이들이나 오언주의 간행물을 시작한 이들은 전부는 아니었어도 대부분이 노동자였을 뿐만 아니라 그 운동의 추동력도 노동계급으로부터 나왔다. 공동체에 대한 오언주의 학설도 본래는 국가 및 선의의 부자들이 채택하도록 제시된 것이었다. 하지만 상류계층이 이를 거부하는 것을 보면서 그 계획이 혜택을 베풀고자 했던 대상들이 스스로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물었다. "이걸 우리 스스로가 하면 되지 않나? 비록 우리는 부와 권력이 없지만 우리들의 숫자와 단결로 메꾸어나가면 되지 않나? 이들의 마음속에서 위로부터의 사회화라는 복음이 아래로부터의 사회화라는 복음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 자발적으로 협동을 이룬다면, 그 시작은 비록 작더라도 무엇이든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한 것이다. (p300) 오언의 '노동 지폐'는 오해될 때가 너무나 많았다. 그는 모든 재화를 오로지 그 생산에 들어가는 노동 시간으로만 가치 평가하자고 한 것도 아니며 또 실제로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우선 생산에 들어간 재료의 가치는 현행 시장가격의 화폐로 계산했으며, 뿐만 아니라 노동 또한 다양한 종류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여, 다양한 유형의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현실의 화폐 임금률을 기초로 하여 노동 또한 차등화했다. 따라서 한 물품의 가격은 재료의 화폐가치에다가 만드는 데에 들어간 노동 시간을 현행 시간 임금률로 계산하여 더하고 나서 여기에 다시 1실링당 1페니의 교환소 비용을 얹어서 계산되었다. (...) 오언의 '노동 지폐'는 조롱의 대상이 될 때가 많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볼 때 이는 오늘날에 느껴지는 것만큼 몽상적인 것이 전혀 아니었다. 민간 은행들은 도처에서 스스로의 지폐를 발행하고 있었고, 이는 제한된 지역 내에서 유통되었다. 그리고 특히 나폴레옹 전쟁 기간에는 고용주가 현금이 부족하면 임금 지불을 위해 스스로의 특별 통화를 발행하기도 했다. 오언의 지폐는 새로운 가치 척도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했던 점에서는 독특했지만, 단지 지폐를 사적 발행했다는 사실만큼은 당시의 정황상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노동 지폐'가 일정 기간 동안 런던에서 상당히 널리 받아들여졌다는 분명한 증거가 있다. 이 새로운 시스템의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보통의 상인들 또한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p308-310) 제임스 E. 스미스 노동조합주의가 노동자들의 상상력을 이토록 사로잡았던 일은 그때 이후로 다시는 벌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1834년의 노동자들은 빅���리아 여왕 시대의 아래 세대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영향을 미치기가 쉬운 이들이었다. 이들은 더욱 비참했고, 교육도 덜 받았으며, 공장에서 펼쳐지는 매일 매일의 노예 상태를 그저 인간이 타고난 운명이려니 하며 받아들이는 것에도 익숙하지 못했다. 공장 시스템은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들은 후대의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본능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새로 나타난 자본주의라는 것에 무참히 짓밟힌 이들 노동자들은 절망에 빠져 있었고, 자신들에게 구원을 약속하는 듯 보이는 새로운 복음이라면 무엇이든 믿고 따랐다.정치적 산업적 구원이 아니더라도 구세주들과 종교적 광신도들도 아주 쉽게 추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던 시대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심성이 단순했다. 오언의 비전들은 그의 달콤한 설득의 기술과 결합되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실패의 나락까지도 오언을 따랐다. 하지만 오언이 그 실패의 나락에서 꺼내 든 급작스러운 경로 변경은 그들도 따를 수 없었다. 오언주의의 길과 노동조합주의의 길은 1830년에서 1834년의 기간 동안 하나로 합쳐졌지만, 1834년 이후에는 급하게 찢어진다. 노동계급 운동에 대한 오언의 짧았던 지도력도 급작스럽게 종말을 고한다. 이제는 협동 운동 대신 차티스트 운동이 노동계급을 지배하는 복음이 된다. (p343-344) 물론 그에게는 천재성 이외에도 비정상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데이비드 데일에 따르면, 그는 자신이 믿는 것들에 대해 '대단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광신적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홀로 생각했고, 자신의 여러 결론들을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냈다. 따라서 그에게 무슨 논리를 들이댄다고 해도 그가 믿는 바의 가장 사소한 세부 사항조차도 조금도 흔들 수가 없었다. 그는 결코 논쟁을 벌이지 않았다. 단지 자기의 사상을 반복했을 뿐이며, 듣는 대상이 자기가 말한 것의 진리성을 깨달을 때까지 선의와 사랑을 품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주었다. 그는 그야말로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만든 사람이었다. 따라서 자신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진리의 문앞에 이르게 된 것이며 그 밖의 어떤 길잡이도 필요 없다고 믿었다. 그는 스스로만을 등불로 삼아 살아왔으며, 따라서 스스로의 등불이 다른 사람들의 앞길도 훤히 비출 수 있다고 보는 실수를 저질렀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지도자는 되어도 추종자는 될 수 없었고, 조직할 수는 있어도 결코 진정한 협동을 할 수는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동료들에게도 자기의 내면의 등불에 토 달지 말고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p368-369) 하지만 오언이 대부분의 저술가들과 크게 다른 지점이 하나 있다. 그는 '지식인'이 전혀 아니었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연구자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상이란 하나의 도구일 뿐이며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행위는 결코 아니었다. 그는 남들의 생각에 자기가 어떤 빚을 지고 있는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아예 아무 생각도 없었다. 왜냐면 그의 머릿속을 채우고 있었던 것은 문제들이지 사상가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적 문제들로 뛰어 들어가 지휘관으로서 명령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며, 고립 상태에서 사유하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실천 활동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사유에도 적용하여 지적인 문제에서도 독재자가 되어버렸다. 그 결과 그는 고립을 자초했고, 여러 정신의 소유자들과 동등한 소통을 통하여 새로운 것을 발견하도록 강력한 자극을 얻을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고, 그러한 확신이 지나친 나머지 새로운 사상과 아이디어로 통하는 문을 스스로 잠가버리고 말았다. (p372) 하지만 우리가 지루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사람을 참아주는 경우는 대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고 느껴지는 경우이다. 오언은 말할 내용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으며, 그 몇 되지 않는 논점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이야기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몇 가지 안 되는 이야기들이라는 것은 실로 이 세상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들이었다.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사건 속에서 무수히 극악무도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건만 공장주들과 정치가들은 이를 진보의 이름으로 기꺼이 싸 바르고 옹호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위대한 공장주였던 로버트 오언이 분연히 이들에 반대하여 일어서서 공장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는 것은 어떠한 효율성의 미덕을 가지고 있는지를 설파한 것이다. 다른 모든 '실제적 인간들'이라는 자들이 경쟁적 자본주의의 여러 미덕에 찬송가를 불러대고 있을 때에 그는 자본주의의 여러 악덕을 직시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시스템 즉 인간들이 서로를 동료라고 부르며 협동하는 것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의 비전을 보았던 것이다. '조교 제도monitorial system'라는 것이 아주 진보된 교육 개혁 프로젝트라고 여겨지고 국가는 그 시민들의 교육을 완전히 내팽개치던 때에 그는 일반적 무상 교육을 설파했을 뿐만 아니라 교육의 실제에 있어서도 그의 시대를 훌쩍 뛰어넘는 실용적인 모범들을 보여주었다. 노동자들이 극악한 공장 상태에 신음하여 절망에 치여 쓰러져 갈 때에 그의 희망과 믿음은 그들을 일으켜 세워 경제적 자유를 위한 싸움에 나서 처음으로 힘을 합쳐 일격을 가하도록 만들어주었다. 많은 여러 운동들이 오언을 자기들 운동의 창립자라고 혹은 최초의 영감을 제공한 이라고 하는 것도 공연한 일이 아니다. (p378-379) <역자 서문: 4차 산업혁명의 한가운데에서 사회 혁신가 로버트 오언을 읽는다> 인간이 이러한 협동의 원리로 산업사회를 조직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도덕적으로도 또 효율성에 있어서도 현존하는 시장 자본주의의 산업사회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그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신앙이었다. 그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그러한 능력을 타고 태어났으며, 그러한 능력을 제대로 된 교육으로 각자 발현할 기회를 얻기만 한다면 그러한 사회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또한 반대로 제대로 된 사회적 관계를 튼튼하게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그렇게 개개인들이 협동할 수 있는 스스로의 사회적 본성을 제대로 발현하게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존의 사회는 이렇게 협동을 지향하는 사회적 인간의 발전으로 사회의 강화가 이루어지고 이것이 다시 그러한 사회적 인간을 낳는 선순환 구조를 반대로 뒤집은 악순환 구조로 되어 있으니 이를 다시 뒤집어야 한다는 것이 오언의 생각이다. (p11) 인간의 본성은 개인의 이익을 계산적으로 추구하는 경제적 인간일까 아니면 다른 이들과 함께 공감하고 힘과 지혜를 합쳐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일하고 향유하는 사회적 인간일까? 이는 더 이상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적 문제가 아니다. 지금부터 꼭 200년 전의 영국과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감당하기 힘든 기술 변화와 사회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으며, 새로운 원리로 새로운 모습으로 조직된 새로운 산업사회가 나타나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어디에서나 예견하고 또 갈망하는 바이다. 여기에서 200년 전 로버트 오언이 그의 온 인생을 바쳐서 외쳤던 메시지가 다시 살아온다. 인간의 본질은 경제적 인간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이다. 그러한 인간의 본성이 제대로 발현될 수 있도록 하는 협동의 원리로 사회를 조직할 때에만 산업사회는 비로소 인간을 치어 죽이는 살인 기계 '저거노트juggernaut'가 아니라 사람과 자연이 함께 서로를 꽃피워주는 미래 사회가 될 수 있다. 그러한 크고 작은 단위에서의 전면적인 사회 혁신이 지금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다. 이러한 생각을 공유하는데에 그치지 않고 그에 입각하여 자신의 삶을 둘러싼 크고 작은 범위에서 혁신적인 시도를 행하는 사람들이 간절히 필요한 순간이다. (p13-14) - G.D.H. 콜 , ' 로버트 오언 ' , 중에서
0 notes
Video
youtube
KBO 연합팀, 프로 못간 일본 사회인 야구팀 투수에 ‘17k+13k’ 굴욕당했다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AWB)[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슈퍼스타는 없지만, 그래도 '프로'인 한국프로야구(KBO) 연합팀이 일본 사회인 야구 선수에 창피를 당했다. 일본 은행원 투수에서 17개의 삼진을 당하며 '완투패' 당했던 KBO 연합팀은 사흘 만에 가진 재대결에서 또다시 10개가 넘는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지난 29일 KBO 연합팀은 대만에서 일본 사회인팀(실업리그 소속)과 2018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AWB) 5차전 경기를 가졌다. 이날 선발로 나온 일본 투수 가와노 류세이(20)는 7이닝 동안 2피안타 3볼넷 1실점 ... ▶유튜브 구독하기: https://goo.gl/JQ1f1j 보고 주셔서 ���사합니다. #K #B #O #연 #합 #팀 #프 #로 #못 #간 #일 #본 #사 #회 #인 #야 #구 #팀 #투 #수 #에 #‘ #1 #7 #k #1 #3 #k #굴 #욕 #당 #했 #다
0 notes
Text
[라엘리안 보도자료]“문재인 대통령은 교황 방북 앞서 ‘예언자 라엘’ 방한부터 추진하라!”
[라엘리안 보도자료]“문재인 대통령은 교황 방북 앞서 ‘예언자 라엘’ 방한부터 추진하라!”
> 라엘리안 보도자료 2018(AH73).10.19
“문재인 대통령은 교황 방북 앞서 ‘예언자 라엘’ 방한부터 추진하라!”
-진정한 한반도 평화·번영 위해선 ‘진실’ 통찰하고 결단 내려야-
최근 문재인 대통령이 북핵 이슈를 다뤄 나가는 데 있어 보여주는 로마 교황청과 북한간 교류 주선 등 일련의 움직임이 주목을 끌고 있다.
특히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평양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김희중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대동하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교황의 방북을 제안한데 이어 10월 18일 교황청을 공식 방문, 프란치스코 교황과 면담한 자리에서 김 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직접 전달했다.
이에 대해 국내외 언론 및 외교 전문가들은 대체로 문 대통령이 거대종교 가톨릭의 본산인 교황청의 ‘힘’을 빌어 북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등 한반도의 당면 문제를 우회적으로 돌파하면서, 북한을 대외개방과 함께 사상·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이른바 ‘정상국가’로 변모시키려는 뜻이 담겨 있는 고도의 외교전략으로 풀이한다.
인류의 창조자 우주인 ‘엘로힘’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대표 정윤표) 역시 다양한 채널을 통해 한반도의 긴장 완화와 세계평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문 대통령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며 적극적인 지지의 뜻을 보낸다.
하지만, 기존의 질서와 패러다임이 급속도로 바뀌는 문명사적 대전환기에, 그것도 다종교 사회인 대한민국의 국정 최고지도자가 자신이 믿는 종교인 가톨릭을 국가 중대사의 해결에 불러들이는 것이 과연 미래지향적 안목에서 바람직한 것인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통령의 진의와는 상관없이 결과적으로 가톨릭의 북한 진출과 교세 확장을 적극적으로 돕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가톨릭(로마교황청)은 서구제국주의의 식민지 건설 과정에서 ‘조력자’ 역할을 함으로써 인류 역사에 큰 상흔을 남긴 전력이 있다. 당시 서구 열강은 가톨릭을 앞세워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사실상 유럽을 제외한 세계 전 대륙을 침략해 무수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고유의 전통문화와 신앙체계를 포함한 토착문명 자체를 말살하는 등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질렀는데(그같은 문명파괴와 학살에 대해 지금까지 경제적 보상은커녕 깊은 반성조차 ���대로 행해지지 않고 있다!), 가톨릭은 그런 ‘정복자들의 전쟁’에 편승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며 세계적인 종교로 발돋움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톨릭교회는 거의 모든 과학적 발전에 반대해 왔다. 그들은 지구 밖 외계에도 생명이 사는 행성이 무수히 많다고 주장한 지오다노 브루노를 화형시켜 죽였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음을 입증한 갈릴레오 갈릴레이를 종교재판에 넘겨 탄압했다. 또 귀중한 생명을 구하는 수술과 항생제의 사용, 전염병을 막는 백신에 반대했으며 수술에 필수적인 수혈, 혁명적인 생명 연장술인 장기이식에도 반대했다.
또 ‘낳고 번성하라’는 원시적 교리에 얽매여 피임은 물론, 불임부부들의 마지막 희망인 시험관아기, 그리고 에이즈 등 성병 확산에 가장 효과적인 콘돔 사용에도 반대했다. 오늘날에는 복제연구 등 생명과학 발전에 발목을 잡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인류가 다양성을 지키며 과학적 발전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톨릭교회의 반(反) 진보적 입장을 철저히 배격해야 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최근에는 전세계 수많은 가톨릭 사제들이 아동 성폭행범들로 밝혀지고 교황청은 오랜 기간 동안 이를 조직적으로 은폐해 왔음이 드러나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성직자들로서 앞에선 ‘복음’을 얘기하며 뒤로는 ‘악행’을 일삼는, 그야 말로 겉과 속이 다른 ‘가면’을 썼던 것이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이 바티칸을 방문하고 교황의 북한 방문을 요청하는 모습을 보고 한국 라엘리안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비논리적 행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2003년 8월 2일 노무현정부 시절 한국을 방문한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시자이자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에 대해 당시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은 “인간복제를 지지하는 종교지도자 ‘라엘’이 한국에 입국하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구실로 입국을 불허했고 그 조치는 15년이 지난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정윤표 대표는 “정부는 반문명적 종교의 수장인 교황을 종교의 자유조차 없는 북한에 초청하기에 앞서 과학발전만이 인류의 살 길임을 설파하는 예언자 라엘의 한국 입국을 허용해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정 대표는 “먼 옛날 외계 과학자들이 고도의 DNA(세포설계도) 합성기술을 통해 인간을 비롯한 지구 상의 모든 생명체들을 창조했다는 엘로힘의 메시지와 함께 오늘날 ‘생명복제기술을 통한 영원한 생명의 추구’ 역시 예언자 라엘의 종교 철학의 일부”라며 “라엘의 생명복제 지지 발언이 사회적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확대 유추해 그의 입국을 계속 금지하는 것은 헌법과 유엔인권선언이 보장하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 및 종교의 자유를 심각하게 억압하는 반인권적, 초법적 조치로서 자유민주국가의 정부가 할 법한 일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복제를 지지하든 반대하든 그것은 개인의 철학적 자유이며, 그것을 이유로 특정 종교단체의 지도자를 억압하는 것은 소수종교 탄압과 다름없다. 문재인정부가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소수자에 대한 관용과 포용, 국민통합 그리고 종교의 차별 아닌 중립성을 지키고자 한다면 하루속히 라엘에 대한 부당한 입국금지 조치를 해제함으로써 전 세계의 다른 나라들처럼 떳떳이 그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 시대, 창조자 엘로힘의 ‘마지막 메신저’로서 특별한 사명을 수행 중에 있는 라엘은 오래 전부터 세계평화와 직결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염원하며 한국 방문을 희망해 왔다. 한반도의 평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실로 지대하다.
특히 라엘은 지난해부터 올해초까지 북핵 이슈가 절정에 달하면서 미국이 대북 군사행동을 심각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정보를 접하자 자칫 세계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전세계 라엘리안 회원들과 평화 애호가들을 향해 매일같이 적어도 1분 이상 세계평화를 염원하는 명상을 하도록 촉구하기도 했다.
한국 라엘리안들이 지난 2월 평창 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으로 만들려는 우리 정부의 노력에 전폭적인 지지의사를 밝히고 전국 각지에서 미국의 대북 군사행동에 반대하는 한편 근본적인 비핵화와 평화를 위해선 북핵 뿐만 아니라 지구 상의 모든 핵무기들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는 캠페인을 펼친 것도 “전면적인 핵무기 금지야말로 인류가 자멸의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밝힌 라엘의 메시지에 따른 것이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문재인 대통령은 ‘디모테오(하느님을 공경하는 자)’라는 세례명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 대통령이 세례명대로 하느님을 공경하는 자가 되고자 한다면, 그 옛날 로마제국과 바티칸의 권력자들에 의해 절대적 유일신(God)으로 왜곡·변질된 진짜 하느님들을 뜻하는 우주인 ‘엘로힘(Elohim)’의 의미를 이해하고, 교황의 방북 보다 먼저 엘로힘의 마지막 메신저인 ‘라엘’의 방한부터 추진하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 한국 라엘리안 무브먼트 [email protected]
엘로힘 (Elohim) 기독교 성경에는 하느님으로 번역돼 있으나 원래 의미는 고대 히브리어로 "하늘에서 온 사람들"이란 복수형. 오래 전, 외계에서 빛 보다 훨씬 빠른 우주선(일명,UFO)을 타고 지구를 방문해 고도로 발전한 DNA합성기술로 실험실에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를 과학적으로 창조(지적설계)한, 다른 행성에서 온 인류의 창조자들을 의미한다. 엘로힘은 지구에 세워질 그들의 ◆대사관에 공식 귀환할 예정이다.
엘로힘의 모든 메시지는 한국에서 ◆지적설계 Intelligent Design (구 우주인의 메시지) 등으로 출판되어 있으며,
www.rael.org
에서는 E-Book을 즉시
무료다운로드
할 수 있다.(스마트폰 이용시, 구글Play 스토어에서 '지적설계'
무료앱
을 다운받을 수 있음)
라엘리안 무브먼트 (Raelian Movement) 지난 1973년과 1975년 엘로힘과 접촉한 '마지막 예언자' 라엘이 그들의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엘로힘을 맞이할 지구 대사관을 건립하기 위해 창설한 세계적인 비영리*무신론 종교단체로, 현재 전 세계 90여개국에 9만여 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AH (after Hiroshima) 연도 국제 라엘리안 무브먼트의 창설자이자, 그 정신적 지도자인 라엘은 기독교력이나 이슬람력, 불교력 등이 아닌 종교와 종파를 초월한 새로운 AH연도 사용을 유엔(UN)에 제안했다. AH연도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첫 번째 원자폭탄이 떨어진 날을 잊지 않기 위한 것으로, 오늘날 특히 유일신 종교로부터 비롯되고 있는 전쟁, 테러에서 벗어나 평화를 이루고자 하는 세계인의 염원을 담고 있다. 또한 원자에너지의 발견으로 이 엄청난 힘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파괴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인류가 우주만물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아포칼립스시대(Apocalypse:진실이 밝혀지는 계시의 시대)로 들어섰음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다. www.icacci.org
RAEL.ORG / 보도자료 / 국제라엘리안뉴스 / 라엘아카데미 / 과학미륵 / 엘로힘리크스 / 다음카페
0 notes
Text
서문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실험은 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 주민의 투표로 임기가 보장된 일꾼이 어디를 보고 일하겠는가. 당연히 주민들의 눈 높이에 맞춰 지역을 살필 수밖에 없다.” / 김대중 자서전
선거를 기다렸다.
최순실을 등에 업고 나라를 ‘말아먹은’ 박근혜가 탄핵당한 지 1년이다. 그리고 정권교체 이후 첫 번째 맞이하는 선거가 이번 6월에 예정된 제7회 전국동시 지방선거다. 보통 지방선거는 ‘정권 심판’을 하는 선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다를 것 같다.
정권심판이냐, 야당 심판이냐. 어쩌면 자유한국당 심판이 될 수도 있다
촛불 혁명 당시 추운 겨��에 선거만 기다려온 사람들이다. 박근혜가 빨리 파면돼서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기다렸다. 국회를 심판하는 총선을 좀 더 기다리겠지만, 적어도 정당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선거가 바로 지방선거다. 지방선거를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다.
‘정권 심판’은 없을듯 하고, ‘야당 심판’은 명확할 것 같다. 박근혜 정권에 이바지했던 인물들이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역이 많다. 누군가는 ‘박근혜를 지키기 위해’ 본인을 당선시켜달라 했던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늦었지만, 확실히’ 심판하려 한다.
지선아 반갑다
사람들은 이제 지방선거가 반갑다. 한때 ‘투표근 운동’ 등 이야기가 나왔을 때보다 더 선거를 기다리고 반가워한다. 자신의 선택과 행동 하나로 대통령을 끌어내렸고, 새로운 대통령을 뽑은 사람들이다.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자신의 선택을 통해 누군가를 심판하고, 누군가를 새롭게 뽑고 싶어 한다.
이렇게 ‘반가운’ 선거를 앞두고 지금까지 있었던 6번의 지방선거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자세히 보자니 지루하고 요즘처럼 ‘유명한’ 인물이 아닌, 현대사 책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이 많아 재미가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다. 그런 이야기들을 적당히 거들떠보고, 그 와중에 재밌는 부분은 함디비(?) 볼 예정이다. 또 지방선거이니만큼 재밌고 중요했던 핫플레이스는 어디였는지 찾아보고, 그런 결과는 무엇이고 이후에는 정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정리할 생각이다.
이 글은 때로 길이가 길 수도 있고, 재미는 당연히 없을 수 있으며, 내용은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지방선거 예전엔 어땠을까?’ 알아볼 때 뒤적뒤적해볼 수 있는 글이 됐으면 한다.
지선아 ‘졸라’ 반갑다
1995년 제1회 지방선거
거들떠보자
투표율
첫 전국동시 지방선거의 투표율은 68.4%로 나왔다. 내 손으로 직접 지역 단체장을 뽑는 선거에 대한 관심도는 투표율로 드러났다. 70%에 육박하는 투표율은 이후로 쉽게 보기 힘든 숫자가 됐다.
정당구도
여당은 집권 3년차 민주자유당. 야당은 (공식적으론 DJ가 없는) 민주당과 여당에서 떨어져 나온 JP의 자유민주연합. 기본적으로 3당 구도다. 거기에 서울 지역에서는 무소속 박찬종이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1회 지방선거 당시 박찬종 무소속 후보
제1회 지방선거 당시 박찬종 무소속 후보
박찬종
박찬종은 정치 입문을 박정희의 민주공화당에서 시작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영삼과 맞붙어 진 적도 있고, 오히려 중선거구제도의 도움으로 동반 당선돼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 이후엔 야당으로 정치 방향을 옮겨 김영삼-김대중의 신한민주당, 통일민주당에 합류하기도 했고 양김의 후보단일화를 요구하며 탈당했다. 92년 대선에 출마하여 7% 지지율을 얻었으며, ‘무균질우유’ TV CF도 찍었다. 95년 지방선거에 서울시장 무소속 출마 돌풍을 일으켰고, 96년 총선을 ���두고 신한국당에 입당하여 선거를 이끌었다. 이후로도 여러 정당을 오갔고, 현재는 변호사로 활동 중이다. 대표적으로 BBK사건과 판사 석궁테러 사건, 미네르바 사건 등을 담당했다. 최근에는 정치평론가로 출연 중이다.
시기적인 정세
집권 2년차의 문민정부는 초기에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3당 야합이라는 세상 멍청한 짓을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군인 출신 정권을 끝낸 덕으로 볼 수 있을까. 임기 첫 해였던 93년 사회인 인기 투표에서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이 김영삼이다. 취임하자마자 ‘부패와의 전쟁’이라며 시작한 금융실명제와 고위공직자 재산 공개, ‘역사 바로 세우기’ 일환으로 결단을 내렸던 ‘하나회 척결’로 국민의 지지는 하늘을 찔렀다. 임기 내내 날개를 단 듯 날아다닐 줄 알았던 김영삼이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문민정부라서 다르구나”라는 말이 오가기도 했다.
지지율이 높으면 역시 자신감도 높아지고 (생각없이 자신감만 높아지면) 결국 길을 잃고 헤매는 걸까. 임기 초반 그리도 높았던 지지율은 2년차부터 폭망한다. 특히 각종 사고 발생으로 국민은 정권에 대해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서해 페리호 침몰(93.10), 성수대교 붕괴(94.10), 아현동 가스폭발(94.12), 대구 지하철 공사 폭발사고(95.04) 등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오르 내리는 사고가 선거를 앞둔 1,2년 사이에 발생했다. 사고가 발생했어도 제대로 대처하고 사고 예방에 힘썼다면 국민의 지지가 떠날 이유가 없다. 하지만 몇 달 간격으로 발생하는거 보면 김영삼 정부가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사에 대한 처참한 민심과 비교해 정치권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민자당은 국회를 열자는 민주당의 주장을 정치 공세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 자주 보던 여당의 모습이다) YS의 2인자로 불리던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은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세상 상황파악 못한 것을 보이는 YS는 5월 2일 여당 의원들을 부른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개소리를 했다.
이런 사안에 대해 비판하는 야당을 전적으로 무시하는 ���습도 보였다. 대통령도 여당도 무시하며 야당의 비판을 ‘정치공략’ 정도로만 생각했다. 권력 비리는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지만 비리를 잡는 모습은 볼 수 없고 야당 주요 인사나 차기 주자를 타겟으로 삼는 표적 사정만 나왔다. 모든 부분에서 수구화 된 여당의 모습만 나타났다.
자민련 창당대회 김종필 총재
자민련 창당대회 김종필 총재
게다가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에서 JP 계열, 그러니까 당내에서 ‘공화계’로 불렸던 신민주공화당 인사들이 대거 탈당한다. 3당 합당 때 차기 주자로 김영삼을 밀어주며 ‘차차기’를 바라봤던 김종필을 김영삼은 물론이고, 당 내 YS 계열인 ‘민주계’도 김종필을 ‘개혁정권에 어울리지 않는 구 시대 인물’로 퇴진을 요구한다. 이렇게 탈당한 JP와 ‘공화계’는 충청을 기반으로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한다. 이때가 불과 지방선거를 3개월 앞둔 95년 3월 30일이었다.
정부와 대통령을 향한 국민의 지지율 하락, 정치적 수구화 그리고 보수 세력의 분열로 점점 김영삼과 여당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95년 6월 28일, 한겨레 1면
함디비보자
요약
95년 지방선거의 결과를 요약하자면 ‘YS 정부 집권당인 민주자유당의 참패’, ‘DJ의 후광을 업은 민주당의 선전’, ‘JP의 자유민주연합 돌풍’이다. 광역단체장 당선인 숫��로는 민자당이 우세하지만, 여야로 따지면 5:10 더블스코어로 패배했다. 기초단체장은 숫자에서도 민자당이 밀린다. 민자당 69, 민주당 84다. 광역의원으로 가보자. 민자당 284, 민주당 353이다. 사상 첫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누가 봐도 철저하게 ‘정권 심판, 여당 심판, YS 심판’이었다.
앞서 ‘거들떠보자’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취임 초 지지율이 하늘 높은 줄 모르던 김영삼은 2년 차에 무너지기 시작했다. 처참한 지지율은 결국 임기 3년 차 중간 평가나 다름없는 지방선거에서 여당의 완패로 이어졌다.
특히 서울의 결과가 충격이었다. 이전 정부 국무총리까지 했던 민자당의 정원식 후보는 겨우 3위에 머물렀다. 2위도 아니고 3위다. 그마저도 다른 정당에 밀린 게 아니라 무소속 박찬종 후보에게 밀려 3위다. 게다가 자민련은 서울시장 후보를 공천하지도 않고 조순을 지지했다. 굳이 꼬집어서 설명을 덧붙이자면 1위 조순, 2위 박찬종에게 밀려 꼴찌를 한 거다. 집권 여당의 서울특별시장 후보가.
1991년 6월 한국외대에서 교수직 사퇴 당시 정원식 총리
1991년 6월 한국외대에서 교수직 사퇴 당시 정원식 총리
여기서 잠깐 ‘정원식’이라는 이름이 낯선 사람들에게 짧게 설명을 덧붙여본다.
정원식은 서울대 사범대를 졸업했고, 육군 장교를 했으며, 공무원 생활을 했다. 세상 엘리트 코스도 이런 코스가 없다 미국 유학도 갔다 오며 모교에서 교육학과 교수도 했고, 사범대학장까지 맡았다. <조선일보> ‘머리를 써서 살아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책으로 묶어 출판했는데 100만 권이 팔리기도 했다. 좋은 길만 쭉쭉 간다 이후에 방송위원회 산하 방송심의위원장을 지낸 뒤 노태우 정부에서 문교부 장관(88.12. – 90.12)을 지냈다.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공안정국에 동조하며 학생운동과 사학 분규에 강경하게 대응했고, 전교조에 대해서는 불법단체로 규정하고 구속/해임 등 불이익 조치를 강하게 취했다. 91년에는 국무총리로 임명됐다. 한국외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학생들에게 달걀, 페인트 세례를 받았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를 ‘집단 폭행’으로 보도했다. 조선일보가 보도한 것으로 봤을 때 학생들의 행동은 정당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잠깐 해본다. 조선일보껀 살짝 비틀어봐도 좋지 않나. 그때나 지금이나 김영삼 당선 직후엔 대통령직인수위원장도 맡았고 드디어 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무려 이명박을 이기고 후보에 올랐다. 그러나 본선 결과는…
서울보다 더 충격일 수 있는 지역을 꼽자면 대구다. 민주당은 후보조차 내지 못한 대구시장 선거에서 민자당 후보는 서울처럼 꼴찌를 했다. 혹시 까먹었을까 봐 이야기하는데 민자당은 집권여당이다. 심지어 당선은 무소속 문희갑 후보가 했다. 2위는 자민련 이의익 후보였고 3위도 무소속 이해봉이다. 집권 여당 민자당 후보인 조해녕은 16.87%의 득표율로 꼴찌를 차지했다. 한편으로는 보수세력의 분열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제대로 보면 집권여당에 대한 심판이다. PK(부산-경남) 출신 대통령이 TK(대구-경북)를 홀대한다는 ‘TK 홀대론’의 결과로 분석하는 의견도 있다. 게다가 선거 한 달 여 전 발생한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로 대구 지역의 반 민자당 정서도 크게 작용했다.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
1995년 4월 28일 대구 달서구 상인동 상인네거리에 있는 대구 도시철도 1호선 상인역 공사 현장에서 도시가스 폭발사고가 발생했다. 50m에 달하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400m에 달하는 건설현장이 무너졌다. 사망 101명, 부상 202명 등 3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차량 150대 이상, 건물 80여 채 이상이 파손되는 대참사다. 특히 사건 현장이 학교 근처에 있었고 등교 시간에 발생한 사고로 많은 학생 사상자가 나왔다. 100여 명의 사망자 중 영남중학교 학생이 42명이다.
참사 이후 민심은 흉흉했다. 사고 다음 날 <조선일보>는 ‘또 대참사’라는 제목의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수많은 인명과 재산의 손실이 있었던 기억들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번에는 지하철 공사장의 폭발사고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육-해-공의 모든 부문에서 대참사가 났으니 이제는 지하의 사고만 남았다는 국민들의 자조 섞인 탄식이 드디어 현실화했다. 어쩌면 우리가 우리에게는 과분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 마저 들 정도다.
참사에 대한 처참한 민심과 비교해 정치권 분위기는 ‘개판’이었다. 민자당은 국회를 열자는 민주당의 주장을 정치 공세 수준으로 받아들였다. (얼마 전까지 자주 보던 여당의 모습이다) YS의 2인자로 불리던 김덕룡 민자당 사무총장은 “야당이 이번 사고를 정략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너무나도 똑같은 모습이다) 게다가 세상 상황파악 못한 것을 보이는 YS는 5월 2일 여당 의원들을 부른 자리에서 “대구 사고는 몇 사람의 무책임한 짓 때문에 아까운 많은 희생자를 냈다. 정부도 공동의 피해자다”라고 개소리를 했다.
‘거들떠보자’에서 말했던 대로 각종 사건 사고는 95년 지방선거를 김영삼과 민자당에 대한 심판으로 갈 수밖에 없게 자초했다. 단순히 사고가 발생해서 그 결과로 민심이 떠났다는 것이 아니다. 제대로 된 내용도 없이 재탕 삼탕을 반복하는 말뿐인 대책 발표에 지쳐 떠났다. 선거 이후에도 각종 사고가 이어졌다는 것을 떠올리면 더 크게 아작(?)나지 않았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야 했을 거다.
어쨌든, 첫 번째 전국 동시 지방선거는 ‘여당 심판의 날’로 끝났다.
숫자
자, 숫자만 하나씩 따져보자.
광역단체장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 5, 민주당 4, 자유민주연합 4, 무소속 2로 결과가 나왔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숫자만 단순히 비교하면 민주자유당이 이겼다고 할 수 있다. (뭐 사실상 승리라든가… ‘이 정도면 선방했다, 뽜이야’라든가…) 그러나 민자당은 집권 여당이고 국회에서 과반 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참패 중의 참패로 봐야 한다. 여/야 구도로 보면 5:10 더블스코어 완패다.
기초단체장 선거는 숫자 싸움에서도 졌다. 민주당 84, 민주자유당 69, 자유민주연합 24, 무소속 53으로 민주당에 제대로 패했다. 여/야 구도로 보면 이번에도 거의 뭐 더블스코어나 마찬가지 수준이다.
광역단체장 결과
This slideshow requires JavaScript.
그렇다면왜
3년 전 겨울, 92년 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김영삼이 이겼고 김대중은 졌다. 김대중은 패배에 대해 바로 승복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신문 지면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뉴스화면
92년 대선 직후 김대중 후보 은퇴 선언 뉴스화면
저는 또 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저의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저는 김영삼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하는 바입니다. … 국민 여러분,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막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간 국민 여러분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김영삼 정부의 성공을 바라며 ‘역사의 라이벌’이 물러났다. 사람들은 김영삼에 대해 기대가 컸고 집권 1년 차 때만 해도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거들떠보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임기 초 지지율이 80%를 넘었다. 93년 사회인 인기투표에서 연예인들을 제치고 1위에 오른 사람이 바로 당시 대통령 김영삼이다.
하지만 집권 2년 차였던 1994년부터 각종 문제점을 드러내면서 탄탄했던 지지율은 무너졌다. 각종 비리와 사건 사고로 인해서 우리 국민은 문민정부에 대해 기대를 접었다. 무능한 정부는 결국 해결책보다는 회피책만 찾았다. 이전 군사정부와 크게 다르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결국 은퇴한 김대중에 대한 향수만 불러일으키게 된 셈이다.
역사의 선택일까, 인물의 선택일까. 김대중이 93년 말에 낸 수필집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는 무려 65만 ��가 팔렸다. (뭔가 제목은 사실상 정계 복귀를 꿈꾸는 느낌적인 느낌?) 94년 5월에는 미국에서 있었던 연설에서 대북 문제 해결책을 제시하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과 (성사에는 실패했지만)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끌었다. 김대중은 은퇴 이후 국내외에서 이전보다 더 깊은 지지를 얻게 됐다.
이때부터 김대중은 적극적으로 국내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아태재단 설립을 시작으로 인적 네트워크 구성도 갖춰나갔고 95년 지방선거에서도 일찌감치 민주당 지지를 선언하며 사실상 복귀를 가늠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민주당 대표는 이기택이었지만, 민주당 지지자들은 이기택보다 김대중을 바라봤다. 이 갈등이 오히려 좋은 결과를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
김대중은 선거에서 ‘서울은 조순, 경기는 이종찬’이라는 구도를 짰다. 하지만 이기택은 자신이 당 대표라며 경기지사 후보에 장경우를 지지했다. 그런데 장경우는 경기지사 경선에서 ‘돈 봉투 살포’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었다. 그렇지만 이기택이 김대중을 찾아 “만약 장경우 후보가 경기도지사에 떨어지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끝내 밀어붙였다. 김대중이 구상한 ‘서울 조순, 경기 이종찬’ 구도가 깨진 데다가 조순은 박찬종에게 밀리고 있었다. 이 상황은 오히려 김대중이 보다 적극적으로 선거 유세에 뛰어들게 했다.
당 차원에서, 후보 개인 차원에서 김대중을 찾아 지원 유세를 요청했다. 후보들은 선거 홍보물에 ‘김대중과 각별하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바빴다. 분위기가 이렇게 흘러가니 이기택도 김대중을 찾았고, 장경우 마저도 김대중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사실상 김대중이 민주당 선거를 이끌게 됐다. 당시의 분위기는 아래와 같다.
95년 지방선거 민주당 지원유세 현장에서 김대중 당시 아태재단 이사장
나는 다시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를 했다. 유세장에는 예상 밖에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수도권 지역에서는 어디를 가도 몇만 명이 모여 있었다. 유세가 끝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라치면 나를 둘러싸고 이름을 연호했다. 나는 김밥을 먹어 가며 하루에 많게는 11곳을 돌았다. 곳곳에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나는 김영삼 정권의 위선적 행태를 꾸짖었다. / 김대중 자서전. 605페이지.
‘우리는 김대중을 기다린다’ 이 한 문장이 선거 결과를 보여준다. 결국 DJ 때문이다. 은퇴한 DJ가 대통령 YS를 이겼다. 민주당이 완승하진 않았지만 완승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대통령은 김영삼이었지만 국민의 지지는 김대중을 향해 있었다. 보수-수구화된 문민정부. 이전 군사정부와 별 다를 게 없었던 태도에 완벽하게 견제했다. 95년 지방선거는 철저하게 YS 정부 심판으로 끝난 것이다.
여기가핫플
서울특별시
시민들이 처음으로 뽑는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인만큼 첫 서울특별시장으로 누가 ���히느냐가 굉장히 관심을 모았다. (아 4.19 이후에 잠깐 11대 서울시장이 민선으로 뽑히긴 했다) 특히나 마지막 관선 시장인 최병렬이 ‘성수대교 붕괴사고’로 임기를 시작해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사고는 선거 이틀 후)’로 임기를 마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위기가 어수선할 수밖에 없었다. 서울시민들은 제대로 된 인물을 자신들의 시장으로 만들고 싶어 했을 것 같다. 정말로 ‘지선아 반갑다’ 외칠 정도랄까.
거���떠보자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민주자유당에서는 정원식 후보가 출마했다. 노태우 정부 국무총리까지 한 인물이다. 집권당에서는 나름 나쁘지 않은 카드를 낸 셈이다. 민주당에서는 조순이 나섰다. 정원식이 총리까지 했다면 조순은 노태우 정부에서 경제부총리를 지냈고, 한국은행 총재를 지냈다. 3당인 자유민주연합은 후보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바람을 일으켰던 무소속 박찬종 후보가 초반 지지율 1위를 달렸다. 정원식은 그냥 처음부터 꼴찌를 유지했다.
초반에는 정말 박찬종이 당선될 줄 알았다. 거들떠보자에서도 얘기했지만 이미 국회의원을 여러 차례 했고, 박정희의 공화당에서 정풍운동도 했었고, DJ-YS 사이에서 단일화 운동도 했으며, 92년에는 대선 출마도 했고, ‘무균질 우유’ CF까지 찍었으니 나머지 후보보다 인지도가 높았던 효과였다.
조순 전 서울시장
95년 지방선거 당시 민주당 조순 후보 포스터
하지만 선거가 진행되면서 김대중이 암묵적으로 조순을 지지하며 각종 유세 나섰고, 후보를 내지 않은 자민련의 사실상 조순 지지 선언으로 인해 후반부로 가면서 지지율이 뒤집혔다. 민주당 고정 지지층에다가 서울에 많이 있는 호남 출신 시민들의 지지, 충청 출신 시민들의 지지까지 포함됐으니 결과가 뒤집히지 않는 게 이상한 거다. 물론 정원식은 그냥 꼴찌를 끝까지 유지했다.
게다가 선거 유세를 하면서 가장 인기 있던 대만 드라마 ‘판관 포청천’을 컨셉으로 잡아 젊은 층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사진 을 보면 알겠지만, 조순의 눈썹이 포청천의 눈썹과 비슷해서 나온 컨셉이었는데 당시로선 파격적인 선거 유세였다. (최근 사례를 굳이 뒤적뒤적해서 찾아보자면 19대 총선 동대문을 지역구에서 보여준 홍준표의 ‘홍그리버드’를 꺼내볼 수 있다)
홍그리버드,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
첫 번째 지방선거의 서울시장은 조순이 당선됐다. 서울 전체 지역에서 골고루 높은 표를 얻었다. 부재자투표에서는 역시 초반 지지율 1위를 달렸던 박찬종이 압도적으로 앞서 있었다. (선거 당일 투표를 못 하거나 놀러 가는 젊은 층에게 인기를 끌었던 거다. 그만큼 선거 유세 중반과 막바지에 조순이 뒤집기를 한 결과다.) 물론 정원식은 그냥 꼴찌를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했다.
그래서다음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여당인 민주자유당은 정말 정신 차리고 ‘열일’하기 시작한다. (진��� 잘하지..) 선거 직후인 95년 8월 15일, 광복 5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를 상징하는 건물인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다. 물론 3.1절 기념식에서 이미 밝혔던 철거 계획이었기 때문에 반드시 선거 결과로 인한 노력으로 볼 순 없다. 그러나 각종 사건 사고에다가 선거 결과까지 봤던 국민에게 정부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다시 심어주게 된 계기가 됐다.
또 95년 12월 21일에는 5.18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 법을 통해 쿠데타 혐의와 비리 혐의로 전두환, 노태우 두 사람을 구속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또 한 번 지지도 회복에 성공한다. (전두환, 노태우는 단순히 전직 대통령이나 반란 수괴를 떠나서 민주자유당을 창당시키게 된 사람들이다. 민자당 창당 당시 전두환은 전직 대통령이지만 사실상 민주정의당을 이끌고 있었고, 노태우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민자당 창당 당시 총재를 맡았고, 그다음 순서로 김영삼이 대표였다. 일종의 ‘배신’이거나 ‘뒤통수’ 느낌이었기 때문에 TK 민심은 민자당을 향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의 실패(또는 지지도 하락)한 정당이 그렇듯 당명도 바꾼다. (예를 들면 새누리당이 자유한국당으로 바꿨다랄까) 김영삼 정부의 상징적인 캐치프레이즈였던 ‘신한국 창조’에서 본뜬 ‘신한국당’으로 바꿨다. 물론 그 이름이 오래가진 않았다.
지방선거에서 서울, 인천 등에서 당선하며 자리를 잡은 민주당은 오히려 그 결과 때문에 갈라지기 시작한다.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은 지지자들의 적극적인 요청과 자신의 결단을 통해 95년 7월 정계 복귀 선언을 한다. 김대중은 선거 과정에 있었던 이기택 대표와의 갈등으로 민주당으로 복귀하지 않고 외부에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민주당 의원 중 동교동계는 대부분 국민회의로 옮겼고, 옮기지 못하는 전국구 의원들도 당적은 민주당에 있으면서 사실상 국민회의 활동을 했다. (최근에 이런 뉴스가 많이 나온다는 것을 볼 때 정치는 그대로인 것 같다) 이로 인해 김대중의 국민회의는 창당과 동시에 제1야당을 차지한다.
이렇게 지방선거 이후 야권은 결국 민주당과 국민회의의 단일화 실패로 분열, 96년 15대 총선에서는 여당인 신한국당이 승리한다. 신한국당은 TK에서는 자민련에 자리를 내줬지만 다른 지역에서 완승했고, 끝끝내 무소속과 자민련 소속 의원을 영입해 과반 의석을 차지한다.
이번에도 숫자로는 신한국당의 기분 좋은 승리로 볼 수 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지방선거 참패 이후 각종 당 내외 개혁작업으로 지지도를 얻었고, 야권의 분열로 인해 어부지리로 이긴 곳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미로 따져보면 DJ와 국민회의의 승리다. DJ는 비록 원내 1당이나 100석 이상의 자리를 차지하진 못했지만 70석 이상 당선하며 여전히 제1야당 위치를 유지했다. 반대로 이기택의 민주당은 15석에 ���물며 또다시 ‘꼬마민주당’으로 돌아섰다. DJ는 이번 선거를 기반으로 숫자로는 신한국당에 밀리지만 자기만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반면에 신한국당은 과반 의석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었지만 ‘국회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은 결국 96년 12월 25일에 있었던 ‘노동관계법 및 안기부법’ 날치기 파동으로 국민의 지지를 다시 한번 잃었다.
신한국당의 지지율은 회복이 어려웠고 97년 외환위기에다가 당내 대선 경선에서 이인제의 경선 불복 등 악재가 겹쳤다. 그리고 국민회의 김대중은 신한국당의 저런 모습과 DJP 연대의 결과로 97년 대선에서 50년 만에 사상 첫 여야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루어낸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대-김대중 국민회의 총재-박태준 자민련 총재, DJT연대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 당선
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지선아반갑다 #1. 은퇴한 DJ가 대통령 YS를 잡다 (1995) 서문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자연스러운 실험은 주권 의식을 고취시켰다. ... 주민의 투표로 임기가 보장된 일꾼이 어디를 보고 일하겠는가.
0 notes
Link
KBO 연합팀, 프로 못간 일본 사회인 야구팀 투수에 ‘17k+13k’ 굴욕당했다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AWB)[인사이트] 전준강 기자 = 슈퍼스타는 없지만, 그래도 '프로'인 한국프로야구(KBO) 연합팀이 일본 사회인 야구 선수에 창피를 당했다. 일본 은행원 투수에서 17개의 삼진을 당하며 '완투패' 당했던 KBO 연합팀은 사흘 만에 가진 재대결에서 또다시 10개가 넘는 삼진을 당하고 말았다. 지난 29일 KBO 연합팀은 대만에서 일본 사회인팀(실업리그 소속)과 2018 아시아 윈터 베이스볼(AWB) 5차전 경기를 가졌다. 이날 선발로 나온 일본 투수 가와노 류세이(20)는 7이닝 동안 2피안타 3볼넷 1실점 ... ▶유튜브 구독하기: https://goo.gl/JQ1f1j 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K #B #O #연 #합 #팀 #프 #로 #못 #간 #일 #본 #사 #회 #인 #야 #구 #팀 #투 #수 #에 #‘ #1 #7 #k #1 #3 #k #굴 #욕 #당 #했 #다
0 not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