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블 (2022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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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블 (2022년) | 5,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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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7일 일요일이다. 비는 오지 않았다.
#1
분명 비 소식이 있었는데 비가 안 왔다. 내가 못 본 사이에 온 것 같지도 않다.
#2
어제는 대청소 하는 날이라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한바탕 했다. H 때문에 계속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청소를 정말 정말 열심히 했다. 더웠지만 정말 더웠지만 슬픔에 빠지기보다 몸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인지 엄청 슬프지도 않다.
누군가와 멀어지는 게, 살 부비던 연인과 바로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는 게 감당 못할 정도로 슬픈 적이 있었다. 마음에 장마가 온 것처럼 눈물로만 수분을 배출하고 온 몸에 슬픔을 휘감고 다니던 때. 근데 이제는 남이 되어도,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도, 헛헛하고 씁쓸할 뿐 마구 슬프지는 않다. 슬픔에 무뎌진 건지, 내가 두터워진 건지, 둘 다인지는 모르겠다.
#3
몇 주 전부터 일요일엔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꼭 모모에서. 집에서도 충분히 볼 수 있지만 집에서 보면 일단 멈추게 될 확률이 높고(난 웬만하면 멈추지 않지만 그래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보다는 확실히 몰입도가 떨어진다. 집에서 가까운 CGV를 갈 수도 있겠지만 일단 인기 있는 영화가 아니면 상영을 안 하고 무엇보다 난 뭘 먹는 소리가 들리는 게 정말 싫다. 대다수 인디 영화관이 그렇듯 모모도 물을 제외한 모든 음식물은 반입이 금지다. 그래서 보고 싶은 영화가 없어도 상영시간표를 보고 괜찮아 보이는 걸 보기로 했다. (게다가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불을 켜지 않으니까! 정말 인디 영화관 만만세!)
오늘은 <베르히만 아일랜드>를 봤다. 실존 인물인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 집에 머물며 시나리오 작업을 하는 어느 감독 남녀의 이야기였다(굉장히 부부 같아 보이지만 왠지 결혼은 안 했을 것 같다). 둘 다 베르히만의 팬이었기에 베르히만이 살던 곳에서 살고, 베르히만이 촬영한 곳을 가보며 작업을 하는 일정이었다. 남자는 시나리오를 거침 없이 써내려가지만 여자는 굉장히 막막해한다. 여자는 안 풀리는 작업 대신 이런저런 야외 활동을 더 많이 한다. 그러다 떠오른 이야기를 남자에게 들려주지만 남자는 잘 듣지 않는다. 여자가 떠올린 시나리오는 실제로 영화에서 ‘영화’로 나온다.
영화의 스토리보다 더 눈에 들어온 건 영화 속 배경이었다. 왠지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바람과 온 섬을 휘감고 있는 초록들과 무성하게 자라 거침없이 흔들리는 갈대들. 점프수르틀 입은 여자가, 셔츠에 청바지에 백팩을 멘 여자가 그 풍경을 뛰다닌다. 여자는 바다에 풍덩 빠지고, 비를 쫄딱 맞기도 한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해변 사우나를 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바다에 뛰어든다. 물론 그들 모두의 욕망은 하나도 실현되지 않지만. 영화 속 풍경은 아름��지만 영화와 삶의 흐름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4
모모는 영화 상영하기 몇 ��� 전에 오로지 영화 대여섯 편의 광고를 보여준다. 진짜 보고 싶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광고 보니까 더 보고 싶었다)와 처음 본 <멋진 세계>가 기억에 남는다. <멋진 세계> 광고를 보니 일단 타이가가 나오고 무려 니시카와 미와 감독 작품이었다. 난 그의 영화가 아니라 책의 굉장한 팬이라 아주 관심이 갔는데 <멋진 세계>는 정말 너무 심하게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멋진 세계>를 예매했다.
영화 광고 말고 극장 가기 장려 같은 공익광고도 틀어주는데(어디 주최인지 기억이 안 난다) 이 광고를 볼 때마다 너무 좋다. 어린 여자와 무해한 남자 두 명이 교차로 나오는데 남자 두 명이 아무래도 커플 같아서다. 정말 누구나 환영받을 수 있고 다치지 않을 수 있는 곳이야말로 인디 극장 아닌가 싶다.
#5
오늘도 영화 보고 나서 틈새라면 먹으러 갔다. 영화관에서 너무 덜덜 떨어서인지 라면 먹으러 걸어가는 10분? 정도 동안 땀을 안 흘렸다. 다음 주엔 겉옷 챙겨가야지.. (지난 주엔 너무 더운 상태로 들어가서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춥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6
어제 청소하다 책장에 눕혀놓은 큰 각양장 모서리에 이마가 긁혔다. 진짜 아팠는데 나중에 보니 위쪽 이마에 3센티미터 정도 상처가 났다. 머리를 잘 넘겨서 자꾸 그 상처를 건드린다. 책장 넘기다 베고 책에 부딪치고 긁히고 책 만들다 눈이랑 어깨랑 허리 버리고. 책 때문에 몸이 성하질 않는다.
#7
며칠 전에 《아무튼, 술집》을 다 읽었다. 아무튼 시리즈가 언젠가부터 재미가 없었는데 이번 건 좋았다. 아니, 한국 에세이 자체를 잘 읽지 않게 됐는데 그건 아마 ‘이 사람 하나도 안 솔직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던 것 같다. ‘이렇게까지 써도 되는 거야?’ 싶을 정도로 적나라하게 쓰는 영미권 작가들의 회고록이나 에세이를 읽다 보면 한국 에세이가 절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봤자 술집 얘기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술집 얘기를 쓰든 술 얘기를 쓰든 양말 얘기를 쓰든 저자가 방어적으로 ���느냐 아니냐에 따라 책의 품질은 달라진다.
어떻게 보면 치부일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툭 까는 저자들에게는 당연히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아무튼, 술집》이 좋았다. 글도 매우 맛깔나게 잘 쓰고. 글 잘 쓰는 사람이 진짜 없는 것 같은데 어떤 날에는 또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다.
#8
오늘 이동하는 내내 전에 읽다 만 《리얼리티 버블》을 읽었다. 이걸 읽으면 정말 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이 지구에 너무 큰 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끊임없이 나오는 비닐과 플라스틱, 하루에도 몇 번은 내려보내는 배설물, 거의 매일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 그런데도 나는 또 옷을 샀다. 이제 진짜 올해는 사지 말아야지, 라고 생각했는데······ 근데 정말 정말로 이제 올해는 안 사야지. 끝 끝 진짜 진짜 끝 끝
#9
이제 책 읽다 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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