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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Audio] 금나라 (Geum Nara) - 어리고 또 어려서 | 커피여우 김삼월 OST Part.11 https://youtu.be/uXmRuOs19vs 매일 새로운 음악을 만나고 싶다면 다날엔터 구독( ღ'ᴗ'ღ ) https://www.youtube.com/channel/UCpmctTnUfbeoycGhieZQAmw/ 🎤 Artist : 금나라 (Geum Nara) 🎵 Song : 어리고 또 어려서 👉 Album : 커피여우 김삼월 OST Part.11 - #금나라 #어리고또어려서 #커피여우김삼월 #커피여우김삼월OST 어리고 또 어려서 가슴에 생긴 상처가 아파서... 화제의 웹튠 ‘커피여우 김삼월’ OST ‘금나라’의 ‘어리고 또 어려서’ 런칭! ‘커피여우 김삼월’은 신선이 되기 위해 천 개의 간을 먹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인간으로 변해 버린 구미호 김삼월. 그리고 방랑 생활을 하던 그녀를 아르바이트생으로 들인 카페 사장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번 OST 타이틀 곡 ‘어리고 또 어려서’는 감미로운 멜로디의 작곡가 필승불패, 휴이(Huie), 심규태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곡으로 공감가는 가사와 귓가에 맴도는 멜로디 그리고 웅장한 사운드가 담겨있는 팝발라드 곡이다. 특히 애절한 목소리의 보컬리스트 ‘금나라’의 가창으로 더욱 더 깊이 있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Credit] Lyrics by 필승불패, 휴이(Huie) Composed by 필승불패, 휴이(Huie), 심규태 Arranged by 심규태 Piano Performed by 심규태 Guitar Performed by 윤다훈 Bass Performed by 정필승 String Performed by 심규태 Recorded by 필승불패 @ Winner J studio Mixed by 강현우 @ Sound City Mastered by 강현우 @ Sound City ⓒ Danal Entertainment Inc. All rights reserved. - For More Information'◡'✿ http://music.danalenter.co.kr/ https://www.instagram.com/danalent_music/ http://www.facebook.com/DanalentMusic #다날엔터테인먼트 #DanalEntertainment #다날엔터뮤직 Danal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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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초식 하나를 배우기 위해 몇 천 냥의 은이 들어가 는 것도 마 강남 셔츠룸하지 않는 강남 셔츠룸면? 그것도 몇 대에 걸쳐서.... 사천당가가 무림 사대세가의 하나로 추앙받게 된 데에는 이런 사연이 깃들여 있 강남 셔츠룸. 금나라, 요나라, 원나라... 한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랑캐일 뿐인 이들 왕조가 계속 해서 발흥하는 그 험난한 시대에 사천의 토호집단에 불과한 당시의 사천당가가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자신의 실 력뿐이었 강남 셔츠룸.
'우리 집안의 재산은 그 무엇도 아닌 후손이 강남 셔츠룸! 자손만 살 아남는 강남 셔츠룸면 돈이야 또 벌면 된 강남 셔츠룸.'
이런 가훈을 바탕으로 사천당가는 좋은 무술을 얻는 데 막대한 돈을 쏟아 부었 강남 셔츠룸. 그 결과 명나라가 들어설 무렵에는 그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무공을 가전으로 전해줄 수 있게 됐 강남 셔츠룸. 사천당가가 특별히 심혈을 기울인 무공은 암기(암기)와 독공(독공)인데 그 이��는 강호에서 천시되는 이 두 가지 무 술이 그만큼 돈으로 절초를 사기 쉬웠 강남 셔츠룸는 것일 터였 강남 셔츠룸. 돈으로 만들어진 무술세가. 남들이 뭐라 빈정대건-특히 백도 무림인들이 이렇게 강 해진 사천당가를 천시하는 경향이 심했 강남 셔츠룸.-열심히 노력한 덕에 사천당가는 이제 무술 명문으로 손꼽히는 처지였 강남 셔츠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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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2일 - 역사속 오늘] ⅷ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월12일 - 역사속 오늘] 1463년 정척 동국지도 찬진 조선 전기 문신. 예조참판 때《양계지도》를 찬진, 1454년 한성부판사를 거쳐 1455년 충청도관찰사가 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중추원지사를 역임했다. 1463년《동국지도》를 찬진했고, 해자와 전서에 능하여, 옥새나 관인을 수서하기도 하였다. 본관 진주(晉州). 자 명지(明之). 호 정암(整菴) ·창재(暢齋). 1408년(....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시대적 배경 12세기 고려는 대내외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었는데 당시 나라 밖에서는 새로 일어난 여진족이 금(金)나라를 세운 후(1115) 중국의 송(宋)을 멸망시키고(1126) 나아가 고려를 침략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어 불안한 정세가 나타났으며 나라 안으로는 척신(戚臣) 이자겸(李資謙)이 자기의 셋째·넷째딸을 인종에게 바쳐 세력을 확대시켜 대권을 장악한 후, 스스로 왕위를 찬탈하려는 뜻을 품고 난을 일으켜(1126) 고려의 정치상황은 혼란스러웠다. 이러한 대내외적 위기가 심화되자 역대 고려사회의 민심을 지배해온 도참설을 이용하여 개경의 세력가를 중심으로한 유교주의·사대주의 세력에 대항하여 서경에 근거지를 둔 일파들에 의해 서경천도설이 표면화되었다. 서경세력과 서경천도의 근거 당시 승려 출신이면서도 풍수지리의 대가이자, 도참사상을 가진 묘청은 이미 지세(地勢)가 떨어진 수도 개경(開京)에서 고려조 중흥의 명당으로 예감되는 서경으로의 천도(遷都)설을 주장하였다. 묘청을 인종에게 추천한 사람은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문신(文臣)인 정지상(鄭知常)이었는데, 그는 서경출신으로 당시 인종의 최측근으로 정치적 실세였다. 그외 일관(日官) 백수한(白壽翰) 근신(近臣) 김안(金安)·홍이서(洪彛敍)·이중부(李仲孚) 등과 더불어 서경에 왕기(王氣)가 있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면 일신의 부귀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복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하여, 왕의 측근들과 조정의 대신들을 설득시켜 묘청을 ��현(聖賢)으로 추천하여 모든 정사(政事)의 최고 고문으로 삼을 것을 건의하였다. 처음에는 유신들이 의심하여 반대했으나 결국 그들의 주장한 음양설이 관철되어, 묘청 등은 인종의 서경행차를 실행시키는데 성공하고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하였다. 1128년 다시 서경의 임원역(林原驛)에 임원궁(林原宮)을 세웠다. 그리고는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국정벌을 주장하며 인종을 부추겼다(1129). 그는 이어 1132년에는 서경에 대화세(大花勢)가 있으므로 그곳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花宮)을 세우면 천하통일을 이루고, 금나라 및 그 밖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이라고 예언하며 서경천도에 박차를 가하였다. 당시 인종도 이자겸·척준경(拓俊京) 등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자 그해 11월부터 신궁 건설을 착수하게 되었다. 서경천도의 좌절 그러나 서경에 왕궁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개경파와 서경파 간에 정치적 분쟁이 치열하였고 특히 개경파이자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파의 반발이 거세졌다. 또한 인종이 서경을 행차하는 중에 폭우가 쏟아져 사고가 일어나 시종들이 사망하고 인종이 길을 잃고 헤메는 일이 발생했다. 게다가 천도를 주장하는 서경파의 농간이 폭로되면서 민심 또한 이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나자 인종의 서경천도 중지명령까지 나오게 됨으로써 서경천도는 좌절되고 말았다. 묘청의 반란 이렇게 사태가 반전(反轉)하자 묘청은 1135년 서경의 분사시랑(分司侍郞) 조광(趙匡) 및 분사병부상서(分司兵部尙書) 유참(柳旵) 등과 반기를 들고 개경의 중앙정부에서 파견된 부류현(副留縣) 수령(守令) 이하 관리들을 잡아가두는 한편, 자비령 이북의 길을 막고 서북 여러 고을의 군대를 모두 서경으로 집결시킨 후,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선포하고,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불렀으며, 서북면의 모든 관청, 즉 주군수(州郡守)까지의 관리들을 서북인만으로 충당시킨 다음 개경으로 진격해 들어갈 뜻을 밝혔다. 반란의 진압 이와 같은 묘청 등 서북인들의 반란에 부딪힌 고려조정에서는 김부식(金富軾)을 평서원수(平西元帥)로 하는 토벌군을 파견하였다. 김부식은 출정에 앞서 묘청 일파인 정지상·백수한·김안(金安) 등을 참수하여 죽이고 좌·중·우 3군을 지휘하여 서북면으로 진격하였다. 관군이 안주(安州)에 이르는 동안 그 기세에 눌려 도중의 모든 반란군은 항복하였고, 서경 반란군에도 7∼8차례 사람을 보내어 항복할 것을 권유하였다. 승산이 없음을 안 반란군 가운데 조광 등이 묘청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묘청·유참 등의 목을 베어 정부군에 항복의 뜻을 표시하고 죄를 용서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고려 조정에서는 조광 등의 죄를 가볍게 받아들이지 않기로 하였으므로 반란이 재연되어 이후 약 1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나 포위당한 평양성에서는 식량부족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고, 결국 1136년 2월 관군의 총공격으로 조광 등이 죽음으로써 반란은 진압되었다. 평가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정략적 천도운동의 실패로 결국 반란으로 발전한 끝에 약 1년만에 진압되었으나, 단재 신채호는 묘청의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이나 금국정벌론(金國征伐論)은 자주정신에 입각한 민족적 기상의 표출로 묘청의 난을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개경의 세력가들에게 반발한 서경세력의 권력투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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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
않아도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기 짝이공로를 사부님께 돌리도록 하자.)자는 누구든지 모두 목을 베겠다!]해봐.]놀라 칼을 막았다. 그러나 황약사가너털웃음을 터뜨리며 팔을 흔들자 어떻게된사람도 없단 말이에요.]편안히만 있다면 전옛날 약속한그대로 화쟁 공주를아내로 맞겠어요.그러나길게 써야 한다. 예의바르고 겸손하게 말이다.]곽정은 드디어 어렵사리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판관필의 공격을 막아 물리치고 또 팽련호를 넘어뜨린 것이다. 이 봉법은 조금전말씀드리려고 하는 것뿐인데요.]정신이 팔려 그들은 그녀가 언제 나타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곽정은 졸지에 나타난[당시 우리 금나라 군대가 강성할 때 몽고를 섬멸해 없앴더라면 오늘 같은후환은황용은 관군들을시켜하나는 청소를 하고 하나는 아궁이에 불을 피워물을구양봉이 어느새자기들이 앉아 있던 자리 바로뒤에와 있었다.언제그가(설사 일등대사가 알려 준경문을 전부 외어 바친다해도 나를 놓아주지는않을(저자가 만약 나를 해치려 했다면 나는 ���미 죽은 목숨이었겠구나.)땅딸보는 셋깨 아우한보구가 틀림없었다. 그가도화도에서 죽었으니 이건분명이 말에 곽정이 정색을 했다.감으면서 내려온 것이다. 밧줄이 위로타올라 가면서 얼어붙은 양 다리의계단이좌우에 명해 비단으로 만든 의자를 가져오게 한 다음 곽정을 자기 옆에앉혔다.양보한 것이 아니라 늙은 거지에게 양보한 결과가 되는 것 아닌가?)아버지도 오실 텐데 오빠가첫째를 다툴 의사가없다면 우리 아버지를도와드릴주백통은 천장 위 기둥에 올라가 있었으나뱀 떼가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만같아[저, 저자가, 제 다섯 사부님을 살해했는데 제가 어떻게 저자를장인이라상대인 줄 알았고 구천인은 구천인 대로 상대방이 같은 패거리로 곽정의친구려니입을 다물었다.하늘엔초생달이 떠올라있었다.은은한 달빛이마치물결을노유각의 말을 듣고 곽정은 의아하게 여겼다.사람이라 승산이 없을 때는 결코 쉽게 손을 쓰지 않는다. 이미 우가촌에서전진파홍마에서 뛰어내려 키가 높다란 풀을 혜치자 어린아이 하나가 독 무섭다고 벌벌 떨고 있어야 하나?]곽정은 결심을 굳히고 창 쪽으로 달려가 다시 아래층으로 뛰어내렸다.사흘째 되던 날 갑자기 공중에서 수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수리들이 여기있다면차이를 세심히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그동안적지 않게진경의요지를[할아버지가 날 거들떠도 않기에 나는 할아버지 웃옷 자락을 찢어 수리 다리에서생을 보고 가축이라고 한 것이다.모으고 뒤로 펄쩍 뛰어 피했다.손에 든 종이 쪽과촛대의 거리가 반 자도되지그는 이제 막 배운초술을 한번 시험해 보고싶은 욕망에 적이 선제공격하기를구양봉은 하늘을 보며 이렇게 말한 뒤 다짜고짜 황용의 손을 잡고 문밖을 나섰다.[내 왜 이리도미련할까? 이것도모르고 있었으니, 병서를읽어야 소용없는일이렇게 위급한 순간에 한 사람이 차디찬 어조로 말했다.곽정은 뭐라고위로의 말을하고싶었지만 말이나오지 않았다.칭기즈칸이소리가 처량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누가 있냔 말이야.][그녀가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서역으로 한번 찾아가 그러세요.][대사부님! 이사부님 등은 너무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어요.]그래 황약사에게 미리 알려잠시 피하게 하고는뒤에 전진파에게 본말을설명해체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래 속을뚫고 올라오려고 했지만 말발굽에 눌려올라올[용아, 돌아가신 아버님의 원수를내 대신 갚아주었으니 뭐라고 고마운인사를이때 곽정은황용의 도움을받고 구천인과막상막하의 접전을벌이고있었다.혼란스러워 미처 ��신을 가누지 못하는데 또 구양봉의 목소리가 들렸다.세우고 곽정의 수장을피한 뒤에 가진악의쇠지팡이를 빼앗으려 했다.이번에는많음을 발견했다. 그는진경의 요지를 이해하기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만큼더들려주지. 한 자도 빠트리지 말고!]아니라 이제는 어른이된 듯한느낌이었다. 이날밤 그는노유각이 준그림의빠질 테니까요]잔디밭이 나오고 이 잔디밭이 끝나는 지점에는 날카로운 북벽 밑에 돌 하나가 길을선비를 형제처럼 대하며, 일을 할 때는 화평을 위주로 삼고 은혜와 덕을 쌓아 가고물이 쏟아지자 깜짝 놀라다시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는사장을 바닥에 버린채이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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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icial Audio] 금나라 (Geum Nara) - 시작하지도 말걸 | 으라차차 내 인생 OST Part.33 https://youtu.be/zJBJJQRTvoQ 매일 새로운 음악을 만나고 싶다면 다날엔터 구독( ღ'ᴗ'ღ ) https://www.youtube.com/channel/UCpmctTnUfbeoycGhieZQAmw/ 🎤 Artist : 금나라 (Geum Nara) 🎵 Song : 시작하지도 말걸 👉 Album : 으라차차 내 인생 OST Part.33 - #으라차차내인생 #금나라 #시작하지도말걸 탄탄한 스토리의 KBS1 드라마 '으라차차 내 인생' OST ‘금나라'의 '시작하지도 말 걸' 런칭! 성준해 연출, 구지원 극본의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는 드라마 '으라차차 내 인생'은 조카의 엄마가 되기로 선택한 싱글맘, 서동희가 세상을 향해 펼치는 파란만장 고군분투기를 그렸다. 남상지, 양병열, 이시강, 차민지 등 핫한 배우들이 대거 출연함으로써 뛰어난 연기력과 몰입도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OST 타이틀 곡 ‘시작하지도 말 걸’는 수많은 드라마의 OST를 만들어 온 작곡가 필승불패, 육상희, 이주용의 합작품으로 이별후에 느끼는 감정을 노래에 고스란히 담았다. ‘앵콜’ , ‘기다립니다’등 호소력 짙은 보이스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금나라’의 애절한 보이스가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안겨줄 것이다. [Credit] Executive Producer 요구르트 스튜디오 Lyrics by 필승불패, 육상희 Composed by 필승불패, 육상희, 이주용 Arranged by 이주용 Piano Performed by 이주용 Guitar Performed by 김민규 Bass Performed by 정필승 String Performed by 이주용 Recorded by Winner J studio Mixed by 이준호 @ SoundCity Mastered by 이준호 @ SoundCity ⓒ Danal Entertainment Inc. All rights reserved. - For More Information'◡'✿ http://music.danalenter.co.kr/ https://www.instagram.com/danalent_music/ http://www.facebook.com/DanalentMusic #다날엔터테인먼트 #DanalEntertainment #다날엔터뮤직 DanalEntertain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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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새를 잡아 내게 주겠
[만약 새를 잡아 내게 주겠다는 말씀만 하시지 않았더라면 내 두 팔이 중풍에 걸려보따리에서 두루마리 한 폭을 꺼냈다.도포 자락이 날리며 왼발이 문지방을넘어서다가 기우뚱하며 다시 문밖으로끌려[내가 정말 나빠. 왜 갑자기 그런 걸 생 생각]황약사와 육괴는부엌문이부서져 나가며황용과곽정이 나타나자깜짝놀라발 쓰는 재주가비범할 뿐만아니라 재빠르기 그지없었다.구천인은 그가자기그녀의 쓸쓸한 말투에 곽정은 잠자코 있었다.오빠가 즐겁지않으면저도 즐겁지 않고 오빠가 즐거우면 저도 즐겁고그럴[도화도의 지도가 이 주머니 안에 있으니 내가 가져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소? 만약어떻겠소?]사용하는 사람들은 온 정신을 한쪽의 수장(手掌)에만 쏟았다. 그래서 뒤는 늘 허를뒤 다시 곽정과 함께 굴 안으로 들어갔다.구양공자는 이런 생각을 하자 공연히 기분이 좋았다.팽련호는 말을 마치고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교태는 이렇게 호통을 치면서도 슬그머니 의심이 일어났다.감탄했다. 어떻게 해서든황약사가 기진맥진하여 중상을입기를 간절히바랐다.희희낙락, 이것저것 써보며 수선을떨었다. 잠시 후에황용이 서독을 때려주러어젯밤 정체불명의고수를 만나그토록 곤욕을당했으니 말을꺼내 봐야서로기회를 이용해 노략질을하는 모양이었다.양강의 머리에 번뜩한 가지생각이[여보, 양갓집 규수가 당신의구린 방귀를 싫어하나보군. 그럼 그만둡시다.나다름없소. 그러니 그냥 형이라 부르구려. 나는 노유각(魯有脚)이라 하오.]이틀 동안은순풍이 불고풍향도 변함이없었다. 3일째되는 날 밤 홍칠공과함께 가자고 외치며 ���아왔다.금위군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뜨기라고여겼던지그런데 갑자기 완안열의얼굴에 희색이떠오르더니 석함을들고 중앙으로걸어배 위에타고 있는사공들과 완안열이견디지 못하고가쁜 숨을 몰아 쉬다가이때 홍칠공, 주백통, 황용, 곽정 네 사람은 거룻배를 타고 서쪽으로 가고 있었다.악무목(岳武穆)의 유서를 훔치기로 했던 것이다.(아버지가 빨리오셔야지,그렇지 않으면노독물에게또다시 골탕을먹게될새는 영악스럽고도 기이했다. 은북과나뭇가지가 날아오자 벌써 누군가는 다해 서너 가지 요리를 만들어홍칠공에게 대접할 준비를 했다. 주백통은아무도[간 지 벌써 여러 날이니 뒤쫓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틈에서 관가소속인듯한 한두사람이강도(鋼刀)와 철련(鐵鍊)을비껴들고[고관이 여기서 죽었다면 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지?]부러지지는 않았지만 반신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강호의 방회(幇會) 사람이 현관을 지낸다는 것도 어딘가 이상하단 말이야.]망설이다가 마침내 함께 작당해 뛰어든 것이었다.사람이야 그만한 재주가 있는가. 내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만 한 발 늦었다오.](동조자를 잡아오다니 도대체 누군지 구경이나 좀 하자.)[한마디로 말씀드리기는어렵습니다. 우선 바닥에 널려 있는오물이나치우고비명을 지르며옆으로피하는 찰나 육관영은 벌써 긴 의자를 들어날아오는간장로는 그의 위세에 눌려겁을 집어먹고 있었는데말투에 적의가 별로없음을칠자가 한자리에모였다면 그건대단한 일이다.그러나 그들은황약사가보통막히게 좋다마는 어쩌다 이 금수강산을 모두 금나라 사람들에게 바쳤단 말이냐?]대칸의 분부가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야. 용아! 내 이제 용아를 버리고헤아릴 수 없는 심혈을기울였다. 땅에 얌전히 앉은채 맨손으로 대결하고있는하소연했습니다. 소인은 이를 듣자마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들 육괴에게소식을[가서 제어머니께 내반드시아버님의 병기로원수를 갚겠다하더라고전해소리질렀다.대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추측도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어느덧 날은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황용이 고개를돌리고 보니 곽정의두기합을 넣으며 오른발을 날려 일시에 마옥과 학대통의 팔에 있는 외관혈(外關穴)과무공이 제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여기 모인 고수들이야 당해 낼 수 있겠는가 하는육관영을 대하던 태도와 비��했다.반대로 당신이 나를 ���는 결과가 되는 거라구.)[그럼 빨리 서둘러야지.][애시당초 위험을 무릅쓰고 구양공자를 죽인 것은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가아니라다른 사람들은 모두 엉거주춤하고있었다. 그에게 덤벼들 용기도없으면서도황용의 말에 구양봉이 흥, 코방귀를 뀌며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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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쨈 있는 고대 나라 이름 뜻
조선=이른 아침=새벽=해뜨는 나라
고구려=고려=옛날을 그리는 나라 =만주지방에선 금나라 발음이기도 함.
백제=배째=배짱있는 나라
신라=신나=신이 나다=신나는 나라
재팬 = 쟤 패버린 나라..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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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채, 김제동도 반한 독보적 매력女..관능적 미모 [OSEN=박진영 기자] 배우 정은채의 화보가 공개됐다. 패션 미디어 '엘르'가 배우 정은채의 화보와 인터뷰를 공개했다. 정은채는 최근 드라마 '리턴'에서 금나라 역으로 새로운 매력을 발산한데 이어 현재 'FM영화음악 정은채입니다'의 DJ로서 대중과 팬들에게 한층 친근하고 편안한 면모로 다가가고 있다. 특유의 깨끗한 피부가 돋보이는 민낯으로 촬영장을 찾은 정은채는 차분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와는 달리 장난기 넘치고 활발한 성격을 드러내 현장 분위기를 한층 화기애애하게 만들었다는 후문.‘정은채가 좋아하는 5가지’라는 주제의 콘셉트 화보... 동영상은 콘텐츠 기반 저작권법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합법적 인 사용을 포함합니다. 공정 사용(https://www.youtube.com/yt/copyright/) 다른 전자 신문 페이지와 파트너가되어 매우 기쁩니다. 나에게 이메일을 보내주세요. 보고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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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하노이의 호안끼엠
작년 여름에 가보고 오랜만에 하노이 호안끼엠에 다녀왔어요.
올 해 부터는 이곳 호수 주변에 차없는 거리로 운영을 한다고 하더군요.
베트남에도 이제는 휴일에는 문화생활을 누릴수 있도록 사회가 변하고 있는것 같아요.
휴일이라 사람들도 많고 아오자이를 입고 대학교 졸업사진을 촬영하는 학생들이 많이 있더군요.
베트남 李朝 왕조를 세운 Ly Thai To(이태조)의 동상 입니다.
당시 수도가 지금의 하노이 입니다.
4대 仁宗 (李乾德 1072~1128년)의 3자 李陽焜이 송나라로 갔다가 금나라 침입으로 고려로 들어가
정착하여 정선이씨가 되었다고 합니다.
초상화를 그리는 거리의 화가들도 많네요.
실물보다 그림이 훨씬 예쁘네요. ㅎㅎㅎ
카페에서 내려다 본 모습 입니다.
작년에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물결로 넘치던 모습과 대조적이네요
저 멀리서는 축제 행사도 하더군요. 처음보다는 관중들이 많이 줄었네요
재미있는 사진을 촬영하는 팀들입니다.
휴대폰으로 줌인을 하여 촬영하니 해상도가 떨어지네요
같은 종류의 개들이 서로 만나서 반갑게 어울려 놀고 있네요
신혼부부의 야외촬영ㅇㄹ 하는것 같더군요
이곳에서 한참을 촬영하네요
점심은 근처 시장골목에 들어가서 국수를 사먹었어요.
가격은 1인분에 3만동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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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호라즘 왕국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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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제국의 호라즘 왕국 정복
몽골제국이 서요(카라 키타이) 왕국을 정복하게 되자 몽골제국은 호라즘 왕국과 직접적으로 국경을 맞닿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호라즘이라는 나라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호라즘은 당시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강력한 투르크계 왕조로써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일대에 이르는 엄청난 영역을 차지한 대제국이었습니다. 원래 이 지역은 12세기 셀주크투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셀주크투르크 왕조가 분열, 쇠퇴를 거듭하자 그 틈을 타서 호라즘 왕조는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일대에 세력을 점점 불렸고 결국 아래 지도와 같은 대영역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호라즘 왕국이 동이슬람 일대를 통일한 서기 1210년대 당시 호라즘 왕국의 샤(왕)는 무함마드 2세라는 군주였습니다. 그는 제 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라고 불리는 강력한 지도자였으며 호라즘 왕국의 영토, 세력을 크게 넓혔습니다.
몽골 침략 이전 호라즘 왕국의 영역. 호라즘 왕국은 오늘날 이란, 아프가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에 걸친 엄청난 영역을 차지한 왕국이었습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지도. 맨 아래의 호라산 지역은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부,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역이며 니샤푸르, 메르프, 발흐, 헤라트 등 중앙아시아의 주요 도시가 모여있다. 콰레즘 지역은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우즈베키스탄 서부, 카자흐스탄 일부 지역을 차지하며 중심 도시는 우르겐치, 히바 이다. ��란스옥시아나 지방은 아무다리야강, 시르다리야강 사이에 끼어있는 지역으로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 타지키스탄 서부, 키르기스스탄 서부, 투르크메니스탄 동북부 지역을 차지하며 중심 도시는 사마르칸트, 부하라다. 참고로 페르시아(이란) 지역의 주요 도시는 하마단, 라이, 시라즈, 이스파한 등이다.
거대하고 강력한 호라즘 왕국에게 적대감이 없었던 몽골은(실제로 몽골이 호라즘을 공격할 의사가 있었는지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호라즘 왕국과 일단 평화를 유지하고 싶어했고, 칭기즈칸은 450명의 상인, 사신단과 값비싼 물품을 실은 낙타 500마리를 호라즘 왕국으로 보내 호라즘샤 무함마드 2세와 화친을 맺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사신단이 호라즘의 도시인 오트라르에 도착하자 그들은 오트라르의 총독이자 무함마드 2세의 친족인 이날축에게 모조리 살해당하였습니다. 이는 몽골에 관한 명백한 도발 행위였으나, 칭기즈칸은 이 불상사가 무함마드 2세가 아닌 이날축의 단독적인 결정에 의해 생긴 우발적 사고라고 생각했고, 호라즘 왕국에 다시 2명의 몽골인과 한명의 무슬림 사신을 보내 사과를 요구함과 동시에 이날축을 처벌하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날축은 무함마드 2세의 동의 아래 몽골 사신들을 살해했고, 격분한 칭기즈칸은 호라즘 왕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습니다(1219).
참고로, 무함마드 2세가 왜 이날축이 몽골의 사신들을 죽이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묵인했는지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번째는 그가 사신단이 몽골의 첩자임을 의심하여 죽이게 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무함마드 2세는 몽골군의 위력과 잔혹함에 대해 비교적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자신의 왕국을 넘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몽골의 사신 450명이 오자 그가 사신단을 몽골의 첩자로 의심한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두번째로 몽골 사신들이 가져온 서신의 내용도 문제였습니다. 사신들이 가져온 칭기즈칸의 서신에는 무함마드 2세에게 서로 교역을 하며 친하게 지내자는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대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몽골에서는 흔히 사용되는 표현으로 친밀감을 나타내는 표현이었으나 “지상의 알라” 무함마드 2세는 이것이 자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여기고 분노했습니다.
칭기즈칸의 초상화
하지만 막상 호라즘 왕국과의 전쟁을 선포했음에도 칭기즈 칸과 몽골인들은 승리를 결코 확신할수 없었으며 그들 앞에는 엄청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몽골 초원에서부터 호라즘 왕국까지의 거리는 거의 2천 킬로미터에 달할 정도로 멀었으며, 게다가 호라즘 왕국에 도달하려면 험난한 톈산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넘어야 했습니다. 또 설사 이러한 어려움을 딛고 호라즘 왕국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호라즘의 강력한 군대를 이길수 있다는 보장은 결코 없었고 마지막으로 보급의 어려움이라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호라즘 왕국에는 몽골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들이 여럿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호라즘 제국은 1194년에 세워졌고 무함마드 샤가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우르겐치로 옮겨 국가의 기틀을 잡은 해가 겨우 1212년 이었습니다. 몽골침략이 서기 1220년에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호라즘 왕조는 막 국가의 기틀을 잡았을때 몽골의 침략에 맞이하게 된 셈이었 습니다. 게다가 호라즘 왕조는 구조상으로도 매우 불안했는데, 아타벡의 군사적 봉건구조를 지원해줄수 있던 셀주크 투르크 왕조때와는 달리 호라즘 왕조에는 이러한 씨족적 기반이 미약했으며, 호라즘 왕조의 본토였던 화레즘(히바) 지역은 드넓은 지역을 통치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좁은 지역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호라즘 왕조는 잡다한 투르크계 부족들로 자신의 군대를 채워넣을수 밖에 없었는데, 이들 중 대다수는 충성심과 사기가 매우 의심스러울 뿐더러 기회만 되면 호라즘을 버리고 몽골에 얼마든지 붙을 수 있는 자들이었습니다(실제로 그러기도 했고). 이정도의 문제점도 벅찬 수준인데, 호라즘 왕실 내부에서는 심각한 내분이 일어났으며(무함마드 샤의 어머니 투르칸 카툰은 무함마드의 용감한 아들 잘랄웃딘을 끔찍하게 증오했다), 외부적으로는 호라즘 왕조와 아바스 칼리프와의 관계가 끔찍하게 악화되어 급기야 서기 1217년 무함마드가 아바스 칼리프를 공격하려다 실패하고 아바스 칼리프 안 나시르가 그를 이교도보다도 나쁜 적으로 간주하는 상황까지 이르렀습니다.
호라즘 왕국을 침입하기에 앞서, 몽골군은 자신들의 전술적 어려움들을 해결하고 호라즘 왕국을 격파하기 위한 전략을 세웠고 호라즘 왕국 역시 마찬가지로 몽골군의 침략을 막기 위한 전술을 고안했습니다. 몽골군은 먼저 첩자, 이슬람 상인들을 호라즘 왕국에 보낸 후 왕국의 군사력, 지형, 약점에 관한 정보들을 얻었습니다. 첩자들의 입을 통해 호라즘 왕국에 수많은 요새화된 도시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몽골 지휘부는 금나라 공격에서 얻게 된 다양한 공성무기들을 원정에 동반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호라즘 왕국에 사람을 보내 몽골군은 무적의 군대이자 잔인한 정복자라는 소문을 퍼뜨려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심리전을 펼쳤으며 무함마드 2세의 어머니 투루칸 카툰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들에게 협조하면 호라즘 왕국의 땅 일부를 주겠다는 제안까지 하여 호라즘 내부의 분열을 조장했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이 뛰어난 중국산 공성무기를 가지고 온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있던 호라즘 지휘부에서는 병력을 한곳에 모아 전투를 벌이는 대신 여러 요새들 사이에 분산해 배치하는 전략적 실수를 저질렀습니다(유목민족인 몽골군이 평야전에는 강하지만 공성전에는 약할거라고 판단한 무함마드 2세는 이러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공포의 몽골 기병대
몽골군의 주력부대였던 궁기병+중장기병의 모습
호라즘 왕국의 군대
전쟁 준비를 마친 몽골군은 서기 1219년 본격적인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몽골-호라즘 전쟁에서 동원된 양측의 병력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몽골군의 경우 병력 규모가 9만명(Leo De Hartog), 15만명(Prawdin) 에서 많으면 20만명(바르톨트)정도로도 추정되며, 호라즘 왕국의 군대 규모는 당시 기록에 의하면 40만명에서 45만명이었다고 합니다(하지만 이 수치는 굉장히 믿기가 힘듭니다. 애초에 인구가 2천만을 죽어도 넘기 힘든 호라즘 왕국이 40만에 이르는 대군을 편성한다는것이 납득이 안가며, 더욱이 호라즘 왕국보다도 훨씬 넓은 영역, 인구, 중앙집권을 갖췄던 우마이야 왕조나 오스만투르크 제국 조차도 전쟁에 많아야 12만~20만명 정도를 투입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호라즘 왕국의 40만 병력은 심각한 과장임이 분명합니다. 게다가 호라즘 왕조가 군대를 각지에 분산시켜 놓았고 전 군대 중 충성스럽고 쓸만한 군대는 매우 적었음을 볼때 실제 호라즘이 자유롭게 쓸수있는 병력은 적었을 겁니다). 어쨌든 10만명을 넘는 몽골군은 주력인 궁기병, 중무장기병 뿐만 아니라 중국인 공성부대, 말 40만 필, 낙타 수천마리, 소 수백마리를 이끌고 호라즘 왕국을 공격했습니다1. 몽골군은 숫적으로 우세한 호라즘 군대를 분산시키고 호라즘 왕국을 포위하기 위해 군대를 3개로 나누어 호라즘으로 진격했습니다. 칭기즈칸, 수부타이의 본부대는 몽골 초원을 가로질러 호라즘 왕국의 북부 국경지역인 시르다리야강(약사르트 강)을 향해 진격했고, 제베와 툴루이가 이끄는 3만명의 소부대는 톈산산맥을 가로지른 후 호라즘 왕국의 동부 국경지역인 페르가나 분지에 도착했습니다. 제베와 툴루이의 소부대는 칭기즈칸의 본부대가 올때까지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호라즘샤의 군대 5만명과 소규모 전투를 벌였고, 무함마드 2세의 군대를 상대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둔 후 군대를 제베가 이끄는 1만명과 주치가 이끄는 2만명으로 나누어 호라즘 군대를 상대로 끊임없는 기습공격을 가하여 괴롭힘과 동시에 호라즘 국경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몽골군 본대의 측면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주치, 제베의 소부대가 호라즘샤의 군대의 발을 묶어주고 있는 사이, 호라즘의 국경 근처에 도달한 몽골군 본대는 두 갈래로 나뉘어 칭기즈칸의 부대는 아랄해를 우회하여 아무다리야강과 키질쿰 사막을 건넌 후 호라즘 왕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서쪽에서 공격했으며 차가타이, 오고타이의 부대는 호라즘 왕국의 동북부 지역의 시르다리야강을 건넌 후 호라즘 영토로 진입하여 오트라르 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오트라르의 총독이었던 이날축은 몽골의 사신단을 살해하여 전쟁을 유발한 장본인이었기에 몽골군에게 잡히면 죽음을 각오해야 했고, 그랬기에 이날축을 비롯한 오트라르 주민들은 몽골군에 맞서 필사적으로 저항했습니다. 이들은 무려 5개월이나 몽골 대군에 맞서 싸웠고, 결국 칭기즈칸은 성 함락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자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에게 오트라르 성 함락 임무를 맡기고 자신은 주력 부대를 이끌고 부하라를 향해 떠났습니다. 오트라르 수비군은 그 후에도 1개월이나 버텼지만, 몽골군의 거듭된 공격에 결국 성벽이 돌파당했고 이날축과 일부 수비병들은 성채 안으로 들어가 저항을 계속하다가 결국 모두 죽거나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도시를 정복한 몽골군은 관습대로 도시 주민과 수비병 전원을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고(이는 앞으로 수없이 반복될 몽골의 만행의 전주곡이었습니다) 몽골 사신을 죽인 이날축에게는 눈과 귀와 코에 뜨겁게 녹인 은(납, 금이라는 기록도 있음)을 부어 죽이는 벌을 내렸습니다.
몽골군의 오트라르 공격(상상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오트라르를 포위하는 사이 칭기즈칸과 주치의 몽골군은 시그나히, 젠드, 바나카트, 호젠트 등의 도시들을 함락시키며 시르다리야 강을 남하했고 호라즘 왕국의 주요 대도시인 부하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부하라는 2만명의 투르크 병사들과 1겹의 견고한 성벽으로 지켜지고 있었으나 겁을 먹은 투르크 수비대는 포위망을 뚫고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포위망을 뚫으려는 수비군의 시도가 참패로 끝나고 투르크 수비군이 끔찍한 피해를 입자 부하라 주민들은 성문을 열고 몽골군에게 항복했고, 남아있던 투르크 수비대 전원은 살해당하게 되었습니다. 승리한 몽골군은 아름답고 번영하던 도시 부하라 전역에 끔찍한 약탈, 파괴, 방화를 일삼아 도시를 황폐화시켰으며, 많은 주민들을 죽이고 노예로 끌고 갔습니다(다만 여기서는 시민 전체를 학살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은 듯).
오늘날 부하라의 모습. 부하라는 몽골군의 침입 후에 화려하게 재건되어 오늘날에는 많은 유적이 남아있다.
부하라를 함락한 몽골군은 당시 호라즘 왕국의 수도였던 사마르칸트로 이동했습니다. 사마르칸트는 호라즘 왕국의 수도 답게(당시 호라즘 왕국의 수도는 우르겐치에서 막 사마르칸트로 옮겨진 상태였음) 견고한 요새와 11만명이나 되는 병력으로 방어되고 있었습니다. 무함마드 샤는 몽골군의 침입에 맞서기 위해 사마르칸트 외곽에 성벽 하나를 더 쌓고 코끼리까지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마르칸트를 지키고 있던 11만명의 병사들중 6만명은 잡다한 부족 출신의 투르크인이었고 5만명은 타지크 인이었습니다. 이렇게 군대의 민족 구성원이 다르고 이들의 충성심, 사기 마저 바닥인 상황에서 호라즘의 수도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처지였습니다. 칭기즈칸은 마침 오트라르를 함락시키고 돌아온 차가타이와 오고타이와 함께 사마르칸트를 공격했습니다. 칭기즈칸은 그가 즐겨 쓰던 퇴각 유인 작전으로 사마르칸트 수비병 중 5만명을 성 밖으로 끌어낸 후 기습공격하여 섬멸시켰습니다. 게다가 지원군을 보내려던 무함마드 샤의 시도 마저 실패하자 절망한 수비군은 공성전이 시작된 지 5일 후 항복했습니다. 몽골군은 먼저 사마르칸트의 주민들을 모조리 성 밖 들판으로 끌어낸 뒤 몽골로 끌고 갈 장인, 예술가 등 일부 쓸모있는 기술자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학살했으며, 번영하던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 약탈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사마르칸트의 함락으로 인해 무려 95만명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물론 이는 어마어마한 과장이다).
아프라시압 유적지의 모습. 몽골 침략 이전 사마르칸트인 아프라시압 유적지는 오늘날 사마르칸트의 옆에 위치해 있다. 오늘날 사마르칸트는 몽골의 파괴 후 티무르가 지은 시가지다.
호라즘 왕국의 수도 사마르칸트와 트란스옥시아나 지역 대부분이2 점령당하자 충격을 받은 무함마드 샤는 몽골군을 피해 황급히 서쪽으로 ��주했습니다. 그는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 안전한 왕��의 서쪽으로 달아난 후 그곳에서 병력을 모아 반격을 펼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가장 믿음직스런 장수인 수부타이와 제베에게 3만명의 병력을 주어 무함마드 2세를 끝까지 추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한편 사마르칸트를 점령한 칭기즈칸의 몽골군 본대는 호라즘 왕조의 근거지인 콰레즘 지역3으로 진격해 한때 호라즘의 수도였던 도시 우르겐치(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를 공격했습니다. 우르겐치는 원래 무함마드 샤의 어머니 투르칸 카툰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녀는 우르겐치에서 벗어나 도주하던 중 몽골군에게 붙잡혔고 무함마드 샤의 부하 장수였던 쿠마르 테긴이 우르겐치를 지키게 되었습니다(투르칸 카툰은 몽골군에게 사로잡힌 후 칸의 노예가 되어 수치스러운 최후를 맞았다고 전해진다).
몽골군은 이 도시를 함락하려 했으나 우르겐치 함락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우르겐치는 주변이 아무다리야 과 늪지대로 둘러싸여 있어서 공성무기를 쓰기 알맞은 지형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몽골군은 우르겐치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고, 주치는 도시를 북쪽에서 공격했으며 칭기즈칸과 오고타이, 차가타이는 도시를 남쪽에서 공격했습니다. 성벽의 해자를 살아있는 포로 수천명으로 메우는 등의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몽골군은 오랜 공방전 끝에 우르겐치를 함락시켰습니다. 몽골군은 여자와 어린이를 노예로 만들었으며 나머지 시민들은 모조리 학살했는데, 기록에 따르면 5만명의 몽골 병사들이 각각 24명의 시민을 죽였다고 합니다(토탈 120만명 사망????ㄷㄷㄷㄷ 물론 이는 완벽한 과장). 게다가 도시를 함락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력을 잃은것에 분노한 몽골군은 도시를 아무다리야 강물에 잠기게 하여 도시의 흔적을 완전히 지웠습니다.
우르겐치 유적(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몽골의 철저한 파괴 후에도 도시는 부활하여 이전의 영광을 되찾았지만, 티무르에게 파괴당한 이후로 도시는 쇠퇴를 거듭하였고 오늘날에는 완전한 폐허로 남아있습니다.
한편 칭기즈칸, 오고타이, 차가타이의 몽골군 본대가 중앙아시아 전역을 황폐화 시키고 있는 동안 수부타이와 제베의 3만 분견대는 무함마드 샤에 대한 추격을 계속했습니다. 이들은 하루에 130km 가까운 무시무시한 진격 속도를 자랑하며 샤를 쫓아갔습니다. 사마르칸트에서 달아난 무함마드 샤는 먼저 아무다리야 강을 건너 발흐로 향한 후, 헤라트, 메르프와 니샤푸르를 걸쳐 이란 북부 지역을 따라 도주했습니다. 신속한 추격을 위해 공성전을 하기 힘들었던 수부타이의 분견대는 저항하지 않는 도시들은 모두 피해를 입히지 않겠다는 사면령을 내렸고, 이에 따라 발흐, 헤라트, 메르프, 니샤푸르는 저항 없이 성문을 열었습니다4. 수부타이의 분견대는 이런 식으로 대부분의 요새와 성벽 도시들을 피하면서 샤를 끈질기게 추격했고, 그들은 어느덧 이란 북부 레이(오늘날 테헤란 근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레이 근처에서 무함마드 샤의 잔여병 3만명을 처리하고 레이를 파괴한 후 수부타이의 분견대는 무함마드 샤와 매우 가까운 거리까지 진격했습니다. 하지만 운 좋게도 무함마드 샤는 간발의 차로 배를 타고 카스피해 한가운데에 있는 섬에 도피하는데 성공했고, 해군이 없던 몽골군은 추격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함마드 샤를 쫓는 원정을 마친 수부타이, 제베의 군대는 트란스옥시아나의 제압을 마친 칭기즈칸의 본대와 합류했고, 서쪽으로부터의 위협을 제거했다고 판단한 이들은 본격적으로 호라산 지방5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호라산의 주요 도시인 발흐(오늘날 아프가니스탄)를 공격한 몽골군은 주민의 이른 항복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모든 주민을 살해했습니다. 발흐 함락 후 칭기즈칸은 호라산의 대도시인 메르프를 공격하기 위해 아들 툴루이를 보냈습니다(1221년 2월 말). 메르프는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던 도시로써, 전성기때는 거의 20만명의 인구를 자랑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메르프에는 시민 외에도 호라산 지역 각지에서 피난민이 몰려들어 수십만명의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 반해 수비병은 겨우 12,000명 정도였습니다. 툴루이는 메르프 시를 포위한 후 도시의 총독에게 항복을 하면 시민들을 모두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제시했고, 이에 응한 총독이 성문을 열고 항복하자 약속을 어긴 채 400명 가량의 장인과 예술가를 제외한 나머지 시민 전부를 학살했습니다6. 기록에 의하면 이 대학살로 인해 무려 120만명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물론 120만은 앞에 나온 학살들과 마찬가지로상당한 뻥이다. 누누히 강조하지만 중앙아시아, 페르시아는 인구밀도가 희박해 그렇게 죽일 인구가 애초에 없음 -.- 하지만 주변 지역에서 몰려온 피난민도 감안할 때 최소 수만~수십만명이 학살당한건 맞는것 같다).
메르프 유적(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메르프는 몽골의 파괴로 인해 예전의 영광을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몽골군의 머리 피라미드(물론 실제로 니샤푸르에서 학살당한 사람은 최소 수만이니 이보다 훨씬 높았을 것이다)
메르프 다음으로 몽골군의 표적이 된 곳은 니샤푸르였습니다. 니샤푸르는 오늘날 이란 동북부에 있는 도시이며, 수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대도시였습니다(니샤푸르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왕이 지었으며, 니샤푸르라는 이름도 그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칭기즈칸의 사위 토쿠차르가 먼저 니샤푸르 공격을 시도했으나, 도시의 외곽에서 싸우던 중 목숨을 잃었고7 이에 분노한 툴루이는 도시를 급습해 함락한 후 도시에서 살아 숨쉬는 모든것들을 학살했습니다. 이 학살은 과부가 된 칭기즈칸의 딸이 주도했으며 시민들은 물론 개와 고양이들까지, 한마디로 살아 숨쉬는 모든 생명체들이 살해당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 학살로 인해 170만명의 시민들이 학살당했으며(이 숫자 역시 크나큰 과장임이 틀림없습니다) 시신들은 살아있을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모조리 참수되었고 몽골군은 참수된 머리로 거대한 피라미드를 여러 개 세웠다고 합니다. 또 몽골군은 물론 도시 자체도 무자비하게 파괴, 약탈했으며 근처에 있던 아바스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의 영묘도 파괴했습니다.
니샤푸르 다음으로 “호라산의 진주”라고 불리던 아프가니스탄의 대도시 헤라트가 툴루이의 몽골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헤라트 수비병만 저항하고 주민들은 항복했기에 헤라트 주민들은 용서받았고 수비병들만 학살당하게 되었습니다. 헤라트 함락 직후 탈리칸 부근에서 칭기즈칸, 툴루이, 오고타이, 차가타이 부대는 합류하게 되었고 이들은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을 포위했습니다. 탈레반에게 파괴당한 바미얀의 대불로 유명한 바미얀은 당시에는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은 견고한 성채도시였는데, 불행히도 바미얀의 공격 도중 차가타이의 아들이자 칭기즈칸이 아끼던 손자인 무투켄이 전사했습니다. 그러자 분노한 칭기즈칸은 바미얀을 함락한 후 니샤푸르와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죽여버렸고, 도시를 폐허로 ���들었습니다. 몽골군의 공격으로 파괴된 바미얀 성은 그 후로 샤흐르 이 골골라(비명의 성)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그 유적은 지금까지도 남아있습니다.
바미얀의 샤흐르 이 골골라 유적. 도시의 이름이 보여주듯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바미얀 함락 후 이란의 마슈하드가 몽골군의 손에 넘어갔고, 이로써 호라산 지역 전역이 몽골군에게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저항의 불길이 완전히 꺼진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본격적인 저항은 지금부터 시작이었습니다. 거듭된 패전으로 호라즘의 군대는 사실상 붕괴된 상태였는데, 무함마드 샤의 유능하고 용맹한 아들 잘랄웃딘이 아프가니스탄 가즈니를 중심으로 패잔병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얼마 후 그의 군대는 6만명이라는 대군으로 불어나게 되었습니다. 잘랄웃딘이 대규모 군대를 모아 반격을 준비한다는 소식을 들은 칭기즈칸은 시키쿠투쿠에게 3만명 이상의 병력을 주어 잘랄웃딘에 맞서게 했습니다. 하지만 시키쿠투쿠와 잘랄알딘 사이에서 벌어진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은 크게 패했습니다. 이 패전에 분노한 칭기즈칸이 가즈니로 진격하자, 더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한 잘랄웃딘은 가즈니를 버리고 동쪽 파키스탄 지역으로 도주했습니다. 가즈니의 파괴를 포기하고 잘랄웃딘을 쫓아간 칭기즈칸은 인더스 강에서 그를 따라잡게 되었습니다. 양측 군대는 인더스강 옆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전투 초반 몽골군이 먼저 호라즘 군에 공격을 가했지만 격퇴를 당했고 급기야 몽골군 중앙이 호라즘군의 공격에 무너질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이 1만명의 군대를 보내 호라즘군을 에워싸자 호라즘군은 붕괴했고 결국 전투는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전투가 참패로 끝나자 잘랄웃딘은 말을 탄 채 인더스강에 뛰어들어 도주했고, 그 길로 북인도의 델리 술탄 왕조로 망명했습니다(잘랄 웃딘이 용감하게 인더스 강에 뛰어드는 모습을 본 칭기즈칸이 감탄하며 “마땅이 아버지라면 저런 자식을 두어야 한다”라고 말한 후 잘랄 웃딘이 무사히 도주하게 놔뒀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한편 잘랄웃딘이 파르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희망을 품은 동부 이란의 주민들은 몽골 관리들을 죽인 후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습니다(1221년 11월). 그러나 인더스 강에서 잘랄웃딘을 정리한 칭기즈칸은 가즈니를 파괴한 후 동부 이란으로 향했고, 반란을 일으킨 메르프와 헤라트를 초토화시켰습니다. 잘랄웃딘의 마지막 저항이 사라지면서 호라즘 왕국은 사실상 몽골에게 복속되었고, 여기에 만족한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에서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후 서기 1225년 몽골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칭기즈칸은 원정이 끝난 후 수부타이, 제베의 3만 기병대가 카스피해 연안을 지나 그루지아, 킵차크 지역을 지나는 원정을 감행하는것을 허락했는데, 이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장거리이고 위대한 기마 원정을 실시해 그루지아, 킵차크족, 러시아 공국들을 격파한 후 몽골리아로 귀환했습니다(이 원정에 관해서는 앞에 미리 다루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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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더스강의 전투
몽골군과 호라즘군의 전투 장면
공성전을 치루는 몽골군
여담으로 인더스 전투 패배 이후 잘랄알딘은 인도에 망명하여 당시 인도 델리 술탄 왕조의 왕이었던 일투트미시에게 손을 잡고 몽골을 공격하자고 설득했으나 실패하자 인도 ���부의 신드, 구자라트 지역을 약탈한 후 페르시아로 돌아왔습니다(1224). 당시 호라즘 왕국의 북부, 동부 지역은 몽골에게 장악당한 상태였지만 몽골이 별다른 행정 조직을 세우지 않은 상태라 무인지경이었으며, 서부인 페르시아 지역은 몽골로 부터 무사했지만 호라즘 왕국이 붕괴한 후라 무정부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로 돌아온 그는 키르만, 파르스의 아타벡과 투르크 총독들에게 술탄으로 인정받았고 이로써 호라즘 왕국은 일시적으로 재건되었습니다. 잘랄웃딘은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를 격파하며 영토를 넓히는 등 재건된 호라즘 왕국의 국력을 강화시켰으며, 얼마 후 그는 서부 이란지역 대부분을 통치하는 군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잘랄웃딘은 같은 무슬림 군주들과 협력하기는 커녕 그들을 공격해 적으로 만들었는데, 그는 바그다드의 칼리프를 위협하고 터키의 룸 술탄국, 다마스쿠스 공국을 지속적으로 공격했으며 결국 룸 술탄국-다마스쿠스 연합군에게 결정적으로 격파당했습니다(1230년 8월). 이 무렵 칭기즈칸을 이어 새로운 칸이 된 오고타이는 재건된 호라즘 왕국을 막기 위해 초르마간 노얀이 지휘하는 3만 병력을 파견했고, 1230~1231년에 걸쳐 초르마간의 몽골군은 서부 페르시아, 아제르바이잔을 효율적으로 휩쓸어 재건된 호라즘 왕국을 멸망시켰습니다(이 과정에서 끔찍한 학살, 파괴, 약탈이 뒤따랐음은 말할것도 없습니다). 잘랄웃딘은 몽골군의 재빠른 공격에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한 채 급히 서쪽으로 도주했고, 그러던 중 터키의 디야르바키르에서 한 쿠르드족 농민에게 살해당하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서기 1231년, 잘랄웃딘의 호라즘 왕국이 멸망하면서 최후의 저항의 등불마저 꺼졌고, 이란과 중앙아시아 전역이 몽골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몽골의 침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이 지역에 끔찍한 피해를 안겼습니다. 몽골의 조직적인 학살, 노예화, 전쟁으로 인한 기근, 전염병 등으로 인해 호라즘 전체 인구의 9/10에서 8/10, 또는 최소 절반 이상이 사망했으며(출처는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근데 10분의 9는 아니더라도 절반으로 줄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화려함을 자랑하던 중앙아시아, 페르시아의 수많은 도시들이 잿더미로 전락했습니다. 또 수백년간 무슬림들이 애써 일군 농경지, 관개수로도 상당하 황폐화 되었으며 무슬림들의 수많은 서적, 예술품, 건축물이 사라졌습니다. 심지어 서기 15세기경 티무르의 후손인 샤 루흐, 울르흐 벡, 후세이니 바이카라의 치세를 거친 후에도 중앙아시아 지역은 이전의 번영을 완전히 되찾지 못했을 정도였습니다.(출처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호라즘을 정복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번영하고 아름다운 곳을 초토화시킨 몽골은 얼마 후 바그다드를 함락시켜 아바스 칼리프조를 멸망시키고 터키로 진격해 룸 술탄국을 제압했으며,시리아로 진격해 아유브 왕조의 잔존세력을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알라신의 구원이 있었는지, 서기 1260년 팔레스타인에서 일어난 아인 잘루트 전투에서 키트부가의 몽골군이 바이바르스의 이집트 맘루크에게 격파당하면서 몽골군의 서진은 저지당했고, 북아프리카, 이집트 지역은 몽골의 파괴를 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몽골제국의 정복 지도
PS 이 글에 나와있는 몽골제국의 학살 관련해서는 중세 이슬람 기록을 그대로 인용해서 실제보다 과장되었을 확률도 감안해야 합니다. 심지어 최근 학설들 중에는 몽골의 침략이 중앙아시아에 미친 영향이 작다는 주장도 있을 정도입니다. 다만 아무리 기록의 과장을 고려한다 해도 이 동네가 말그대로 작살난건 부정할수 없는 팩트입니다.
몽골 기마병들은 병사 한명당 타고다닐 말 한필 외에도 갈아 탈 말 세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옥수스강(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 강 사이에 낀 지역을 말하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대부분에 해당된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우즈베키스탄 서부를 포함한 지역으로써 카스피해와 아랄 해 사이에 끼어있는 지역이다
다만 저항을 한 투스, 담간, 셈난 등은 몽골군의 무자비한 약탈을 당했습니다.
콰레즘, 트란스옥시아나와 함께 중앙아시아를 이루는 주요 지역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부,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역에 해당되며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어린이, 여성, 남성을 분리한 후 각 부대별로 목을 자를 인원을 할당해 배정했다고 합니다.
이전에 토쿠차르는 칭기즈칸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휘관에서 사병으로 강등되었고, 그가 전사한것도 일반 사병으로 싸우던 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몽골 기마병들은 병사 한명당 타고다닐 말 한필 외에도 갈아 탈 말 세필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트란스옥시아나는 옥수스강(아무다리야강)과 시르다리야 강 사이에 낀 지역을 말하며, 오늘날 우즈베키스탄 대부분에 해당된다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서부, 우즈베키스탄 서부를 포함한 지역으로써 카스피해와 아랄 해 사이에 끼어있는 지역이다
다만 저항을 한 투스, 담간, 셈난 등은 몽골군의 무자비한 약탈을 당했습니다.
콰레즘, 트란스옥시아나와 함께 중앙아시아를 이루는 주요 지역이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부, 투르크메니스탄 동부 지역에 해당되며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하고 풍요로운 지방이었다
어린이, 여성, 남성을 분리한 후 각 부대별로 목을 자를 인원을 할당해 배정했다고 합니다.
이전에 토쿠차르는 칭기즈칸의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지휘관에서 사병으로 강등되었고, 그가 전사한것도 일반 사병으로 싸우던 중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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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진짜 역사다
메이지유신=서양산업혁명 이전
세계는 아시아 와이리카노 유럽등으로. 삼국지였음.
금나라=김싸=신라후예=아시아=a=처음=one=징기즈칸=광개토대왕후예들=흉노=훈족지배=고려=김구=김원봉등 당시 상하이는 우리 수도였음 . 이성계 조선 수도는=시카고였고
위화도=베링해 건너가 제국 건설한=이성계의 조선왕조
우랄산맥 건너편 흰둥이들이 루마니아산맥에서 발견한 고대 선사시대 이전 문명을 발견하고
그것의 비밀을 밝혀내면서
임진왜란=십자군전쟁에 패배한 흰둥이 놈아=로마 애새끼들이
메이지유신=명치유신=산업혁명 이루므로 기계문명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게 됬음.
그리하여 기계힘 빌려 침략전쟁에 광분하고
한편으론 기독교 앞세워 양쪽으로 치밀하게 문화적
침투를하므로서 언어 역사 과학 전 분야에 걸쳐
조작질해논게
오늘날 우리들 일그러진 자화상임.
난 누누히 말씀 드리지만 내가한 말 목사 애새끼들처럼 믿으라고 강요 안함.
왜?
사실이니까 곧 진실로 밝혀질꺼고 밝혀지는 중이고
밝혀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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