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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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이 병원에 입원하시고 수술 을 기다리는 중이다 . 아버님 문병을 가서 옆쪽에 계시는 분 이 눈에 들어왔다 . 얼굴 빛도 너무 안좋고 계속 식구 들이 옆에서 지켜보시다가 정신도 놓아버리시고 하는 모습에 잠깐 멀리서 커튼 사이로 보이는 환자분의 모습을 봤다 .너무 젊으신 분인데 어쩌다 … 이런 생각이 들었다 .
옆에서 생과사를 넘나들고 있을 시간에 아버지는 열도 정상적이고 진통제가 들어가는 동안이라 곤히 잠 들어 계신다 . 다행이다란 생각도 하지만 과연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시간이 멈춘듯이 사시는 아버님의 모습이 과연 행복하실까 ? 신랑과 나 둘 은 생각이 많아졌다 . 과연 우리는 ?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있으면서 살아 있는것 마저도 행복 이라고 생각하며 살까 ? 과연 그게 나중 자식 들에게 즐거운 모습을 남겨 줄 수 있을까 ? 아버님의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 신랑은 계속 아버님 옆에 남겨 두고 나만 집으로 돌아왔다 .
다음날 의 쓸쓸함 .
아침에 전화벨 울리고 신랑 목소리가 들렸다 . “어제 옆에 분 돌아가셨어 . 어제 밤에 너무 끙끙 얋으셔서 내가 간호원 한테 말해서 옆에 분 너무 힘들어 하시는데 좀 와서 봐달라 했는데 . 진통제 놓아줄때 그분이 간호원이 진통제 하나 놔드려요 하니, 환자가 얼마예요 ? 라 물어보셨단다 . 그말 듣는데 너무 아팠다 . 차라리 그분 얼굴을 안보았더라면 내가 덜 감정적으로 슬프지 않을텐데 . 아픈 몸으로 그 진통제 가격을 물어보셨다고 하니 너무 맘 아팠다 . 신랑 한테 나도 모르게 아 .. 너무 맘 아파 . 우리 그분 명복 빌어드리고 다음 생에는 아프지 않고 오래오래 행복하시길 빌어드리자 . 라고 했다
우리도 잘 모른다 . 채식 , 운동 , 현미밥 .. 뭐 여러가지 좋다는거 다 먹고 챙겨도 얼마나 좋은 효과가 나서 살지는 ? 그냥 주어진 시간에 충실하며 챙겨보며 산다 . 어차피 모든이의 끝은 다 똑같으니까 .
발버둥 치며 살아보겠다보다는 그냥 지금 내 몸 잘 아끼고 다스리며 살아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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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is Randy’s B-day. I just remember WonKok high school and DongSan high school visited Calpoly and it seems like yesterday but it was 15 yrs ago. Oh, boy.. Randy and me went to Korea and Randy had a great speech at DingSan High school. Oh, Randy showed me Duksoo Palace and InSa-Dong since he knew all about them better than me. HaHa. Thank you, Randy. And Have a Great Day today! .. #간호원 #간호사 #조무사 #노무사 #미국간호원 #미국간호보조사 #미국간호조무사 #미국간호노무사 #미국간호사 취업 #미국간호사취업이민 #미국간호보조사취업 #미국간호보조사취업이민 #미국이민 #미국취업 #미국창업 #미국투자이민 #미국취업이민 #미국비지네스비자 #미국영주권 #미국시민권 #미국유학 #미국조기유학 #미국어학연수 #미국일상 #영어공부 #연수 #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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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김일성,김정일 비교분석
아래 내용은 황장엽의 글로써,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분석한 것이다. 북한 역사에서 북한권력자 김일성과 김정일 두 사람을 누구���다도 가까이 지켜보면서 직접 겪은 황장엽이 쓴 이 글은 60년 북한사 권력내부의 흐름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황장엽의 시각도 전혀 문제 없는 것은 아니나, 북한정권의 성격과 내막을 알 수 있는 글이기에 옮겨 왔다. (1) 독재자로서의 김일성과 김정일 수령의 개인독재 체제에서는 수령개인의 자질과 성격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는 1958년 1월초부터 1965년 4월까지는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일하였고 그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서 그의(김일성)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진 관계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연계를 가졌다 그리고 1972년 부터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문제 때문에 그와(김일성) 자주 만나 사업을 같이 하였다. 1979년 부터는 당중앙위원회의 주체사상 담당비서, 과학교육 담당비서, 국제사업 담당비서로서 김일성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이론서기를 할 때 받았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김일성은 근면하고 지혜롭고 위신 있게 행동하였다. 매주 한번씩 거진 빠짐없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무실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는데 우리 서기들은 꼭 참가시켰다. 김일성은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설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말하였다. 그의 특징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도록 쉬운 말로 철저히 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한 다음 참가한 간부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여기서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는 제기된 의견에 대하여 모두 정확하게 해명하여 주었다. 나는 이 정치국 회의에 참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 서기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자기가 공장이나 농촌을 현지지도 할 때에는 꼭 따라다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야 할 사업이 많기 때문에 항상참석이 어려울때도 있었다. 어떤 때에는 그가 먼저 나가 현지지도를 하다가 우리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공장과 농촌에 대한 현지지도 때에도 구체적으로 잘하였다. 노동자,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며 공장과 농촌지도 일군들에게 조금도 압박감을 주지 않고 지도하였다. 몇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58년에 김일성은 지방에 있는 자체의 유휴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성들이 직장에 나와 일할 데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시기에 공장 기업소들과 기관책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김일성은 지배인들에게 가정부인들을 직장에 진출시킬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설명해 주고 각 직장에서 여성들을 대담하게 채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지배인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력이 부족하여도 남자들끼리만 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배인은 "여성을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여성들에게 선전산후에 유급휴가를 주어야 하며(처음에는 90일이었으나 그 후 150일로 늘어났다.), 둘째는 어린아이가 조금 감기만 걸려도 직장에 나오지 않으며, 셋째는 말만 많이 하고 일은 안하며 특히 뒤에서 간부들의 흉을 보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은 그 지배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가 여성들을 직장에 내보내자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이 부족 되어서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집에서 부엌일만 하고 있으면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면 자연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여 방해하게 된다. 사실상 부엌일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들을 부엌에서 해방하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아이들을 기르는데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 모든 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 후 도시와 농촌 곳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가 운영되었고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59년이었다. 그 해에는 공업은 발전되었지만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논의되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김일성은 "나는 여러 가지 잡곡을 다 먹어보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것이 고량(수수)같이 생각되었다. 고량을 사오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든 어려운 생활을 다 겪어 본 분이 다르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어느해 평안북도 창성군의 농촌을 현지지도 했을 때의 일이다. 리(理)당 비서가 김일성을 안내하였는데 리당비서의 집이 지주집을 몰수한 것으로서 좋은 기와집이었다. 리당비서는 해방 전에 그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집을 돌아보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형편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도 들렀다. 그 옆집은 작은 집이었는데 깨끗이 꾸려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가마 안에 점심 밥그릇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밥이 식지 않고 따끈따끈 하였다. 또 장 단��와 채소절임단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리당비서는 "그는 해방 전부터 목수일(목공)을 해온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월수입은 리당비서의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 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있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치대표단들 뿐 아니라 학자대표단, 예술인 등 외국인대표단을 많이 만났다. 김일성은 대중집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부들과 협의회도 많이 하였고 협의회 참가자들의 의견도 열심히 들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였으나 동료들과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회합 이외에 측근자들만 모아놓고 술파티같은 것을 조직하는 일이 없었다. 김일성은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서기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 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 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굳이 부정적인 면을 찾는다면..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1945년부터 1974년까지는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공고화되는 였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일성·김정일의 2중 정권시기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제2인자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는 지위가 달랐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김정일이 제2인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는 처음부터 실권자였다. 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정치강령으로 내놓은 에는 "수령(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는 후계자(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에 의하여서만 담보된다."는 것이 명기되었다. 이는 김정일의 영도적 지위를 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와 라고 표현은 좀 달리 하였지만 진의도는 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소한 보고도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의 지시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아래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실현될 수도 없게 되었다. 첫 시기에는 김일성이 자기의 권력을 김정일에게 자진하여 넘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자 김일성도 김정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이 되고 말았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은 부자지간이고, 또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고 김정일은 김일성의 권위를 이용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양자간의 모순이 표면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1974년부터 1985년경까지는 2중 정권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의 2중 정권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경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자기의 부하들을 통하여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선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1991년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는 전당과 전국가가 무조건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김일성이 오히려 김정일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92년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김일성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부왕이 왕세자를 칭송하는 송시를 써 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정치논리의 냉혹성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 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으며 자기 아들의 "권력"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만일 김일성이 1980년대 중반까지만 활동하고 한 생을 끝마쳤더라면 가짜 김일성이건, 진짜 김일성이건 관계없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도 살아났을 것이며 해방후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역사도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일성의 한 생을 그르치게 한 데에는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일반적으로는 김일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족점을 극복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만큼 비록 계급적 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여도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북한에서는 현실적으로 정권의 세습적 승계가 실현되었다. 점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땅에서 군정훈련도 받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에 대한 상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더 귀여운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거든"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는 민주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개인 독재기간이 장기화되고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권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과 같이 여기는 사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김정일은 절대적인 독재자의 가정에서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1949년에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김일성의 후처(김성애)는 김일성에게 복무하던 여성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김정일에 대하여 계모의 입장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받들어 주는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한 김정일 스스로가 아버지에게 자기는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로 부르겠다고 제기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왕자와 같이 행세하였으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늘 자기를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대리인으로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그는 커가면서 자기 밸대로만 행동하는 품성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1959년에 내가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김정일도 같이 갔다. 그는 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와 같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가 17세의 소년답지 않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침에 김일성이 공식행사를 위하여 숙소를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아버지의 몸을 부축하여 현관까지 모시고 나와 구두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겨주었다. 그때 김일성은 47세였는데 청년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원기왕성하였으나 김정일이 몸을 부축해 주고 신발을 신겨주는데 대해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저녁에 아버지가 숙소로 돌아올 때 반갑게 마중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주치의사와 간호원, 부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그들이 김일성을 어떻게 모셨는가를 물어보고 다음날 계획과 주의사항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김일성을 수행한 고위급 간부들이 많았으나 김정일은 아버지의 활동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는 입장에서 하나하나 간섭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김정일이 앞으로 반드시 자기 삼촌을 내쫓고 자리에 앉게 될 것이며 혹 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예감을 가졌다. 이란 권력의 세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때는 설마 그렇게 까지야 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때는 세습이라는 개념도 없었으니깐.. 나는 김정일에게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정치는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유학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모든 언행으로 보아 권력을 세습적으로 승계 하는데 있어서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이 더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보면 김일성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김정일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기 어렵다. 김일성의 혁명활동 즉 일제때 항일무장투쟁은 사실이지만, 역사의 곳곳 왜곡 날조하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터무니없이 강화하여 정권을 김일성 일가의 세습정권으로 만든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또 김일성의 영도 밑에 축성해 놓았던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다 망쳐먹고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전변시킨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그리고 북한의 문화를 수령절대주의 문화로 전환시킨 것도 김정일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한 사회에 변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소하고 북한 사회를 전체주의와 봉건주의를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개인독재체제로 전변시킨 책임이 바로 김정일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적의 면에서 평가한다면 김정일은 (0)도 못되고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사업방법과 작풍의 면에서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독재자로서의 성격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 보면 김일성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독재자라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성격상 타고난 독재자 같이 보인다. 김일성이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김정일은 독재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1958년부터 1965년 4월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로서 당중앙에서 당생활을 하였다. 그때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내가 1979년에 당중앙의 비서로 다시 중앙당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김정일이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중앙당으로 다시 돌아와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중앙당 생활이 국가의 최고 수뇌부에서 사는 기쁨과 긍지를 주는 생활이었다면 다시 체험하게 된 중앙당 생활은 바로 옆에 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이전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당생활만 통제하는 본부 당위원회라는 상설적인 조직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와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본부당 위원회가 신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과와 사상생활을 지도하는 과 그리고 비밀정보사업을 지도하는 과 등을 두고 중앙당 일군들의 생활을 2중, 3중으로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고 오직 자기 한사람에게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당조직 생활을 강화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을 엄격히 세우는 한편 회의를 열고 당원들이 서로 비판하게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다. 상호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지게 된다. 그는 당생활에서 무풍지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어떤 자그마한 결함이 나타나도 그것을 큰 사건과 같이 만들어(이것을 과 를 빈번히 벌이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김일성은 회의에서도 긍정적인 예를 많이 들어 사람들을 고무해주고 부정적인 것은 적게 비판하였다. 그는 늘 "긍정으로 감화하는 방법으로 부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부정을 비판하는 것을 위주로 할 것을 요구하며 강한 상호비판의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회의가 분위기 속에서 잘 되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또 회의에서 비판에 잘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혁명성이 없다고 배격하며 남의 결함을 목청을 돋구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혁명성이 강하고 수령에게 충실한 당원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부 당위원회에서 중앙당적인 나 을 조직하도록 지시한 다음에는 자기 집무실에 앉아서 (폐쇄회로 화면)을 통하여 회의 정형을 자세히 살펴본다. 김정일은 정치적 지도에서는 각 부서들이 정책안을 제의서 형식으로 올려 비준(결재)받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문제와 원칙적인 문제는 예외 없이 제의서를 제출하여 비준받도록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이것은 김일성때에는 거진 없었던 현상이다. 당중앙위원회 안에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위시하여 여러 부서들이 있다. 부서에는 여러 개의 과가 있으며 몇 개과를 지도하는 부부장이 있다. 부서 책임자인 부장이 있고 몇 개 부서 또는 한 개 부서를 담당하여 지도하는 비서가 있다. 비서가 한 개 부서만 지도할 때에는 부장을 겸하게 되는데 대체로 큰 부서인 경우에 비서가 부장을 겸한다. 큰 부서에는 자기 부문 사업에서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제1부부장이 몇 명되기 때문에 부장이 여러명 있는 것과 같다. 제1부부장은 부부장과 동격이 아니라 부장과 동격이라고 볼 수 있다. 매개 과에서는 정책과 관련된 제의서 또는 정세자료보고를 작성하여 부부장, 부장을 거쳐 비서에게까지 올라와 통과되면 매주 한번씩 부서별로 문건을 김정일에게 올린다. 현재는 그가 당총비서이지만 그 전에는 총비서대리인으로서 사실상 총비서나 다름 없었다. 당중앙 각 부서들에서 올리는 제의서들과 보고서들의 양은 방대하다. 내가 사업한 국제부만 해도 매주 30건40건이 되었다. 중앙당 외에도 내각과 외무성, 군대, 사회안전성, 국가안전보위부 등 직접 제의서를 올리는 단위들이 있다. 김정일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제의서는 모두 자기가 직접 보고 결론을 준다. 심지어 비서들이 직접 올린 문건인 경우 내용이 중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비준한 문건을 직접 자신이 특수한 봉투에 넣어서 친필로 비서이름을 쓰고 봉인하여 내려 보내준다. 이 모든 것은 방대한 작업량이지만 김정일은 이 사업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한다. 김정일의 중앙당 부서와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를 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제의서를 비준해 주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김정일이 자기 이름과 날짜를 친필로 써 준 것은 무조건 집행해야 할 법적 문건으로 된다. 날자만 써준 것은 제의서를 올린 부서가 책임지고 집행할 수 있다. 줄만 두 개 써준 것은 집행해도 좋고 안해도 좋으니 부서결심에 따라 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부서들에서는 1주에 한번 제의서를 올리는 것 이외에 매일 수시로 모사전송기를 통하여 김정일에게 보고 올려 결론을 받는다. 이와 같이 김정일은 직접 사람을 대상(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라는 문건을 통하여 사업한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의 정치는 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은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이다. 김정일은 를 자주 조직하는데 여기에는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공연을 한다. 원래 이 파티는 김정일이 자기의 을 꾸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자기가 신임하는 일군들을 참가시켜 술을 먹여놓고 그 성품도 검열하며 특히 측근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술파티인만큼 술을 잘 먹고 잘 놀 줄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참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도 듣고 말하게 되면 그것이 곧 정책으로 될 때가 있다. 술파티에서 술이 좀 취한 후에는 김정일 한 사람에 대하여서만 절대적 경의를 표할 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직위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술파티에서는 김정일 한사람밖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말라는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의 요구가 철저히 집행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일은 이런 자리에서 집행하기 어려운 지시를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조령모해(朝令暮解)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래 김정일은 이해타산을 빨리 잘하지만 성격이 너무 급하고 변덕스러워 즉흥적으로 불합리한 명령과 지시를 내릴 때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그는 한때 외국에 출장을 나가는 사람은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한 국산품 시계를 차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되는 시계는 매우 낙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시계를 차고 외국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여성들이 흰 저고리에 까만색 치마를 입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으나 중앙당의 여직원 이외에는 이 지시에 잘 따르지 않고 있다. 그는 겨울에는 눈이 있어야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중앙당 구내에서는 눈을 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지시까지 하였다. 김정일은 자기가 친필로 비준하여 준 제의서도 그 후에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제의서를 올린 사람을 비판하고 처벌한다. 중앙당 조직지도부 교시편찬 과장은 김정일이 학생 때부터 비범한 사상이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하여 김일성종합 대학 교수들을 동원하여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김정일 문헌집을 만들었다.(물론 이것은 100%조작한 것이다.) 과장은 하나하나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 출판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 내용이 어느 개인의 권위를 높여주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제기되자 과장과 문헌집필에 동원된 교수들을 처벌하고 문헌집을 전면 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쓸데없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사람들을 수령에게 절대 복종시키기 위한 형식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축하문 같은 것을 최상의 정중성을 다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김일성의 동상과 열사능에 화환을 증정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하였다. 명절 때마다 각 직장들에서는 수령께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모임을 하��� 된다. 이때에는 먼저 김일성을 칭송하는 노래와 김정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선서가 끝날 때는 김일성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와 김정일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김일성 때는 아래 사람들한테 선물을 보내거나 자기가 차리는 연회에 초청할 때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명절에 선물을 받을 때도 선물명세서를 책임간부들이 나가서 전달하고 배려에 보답하겠다는 을 5명 정도에게 시킨다. 연회초대장도 책임간부들 이 나가서 일정한 의식을 진행한 다음 초대장을 수여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령의 배려로 느끼도록 하기 위한 의식이 많다 보니 김일성,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감사문을 올리는 모임도 자주 가지게 된다. 연말인 12월 31일 밤에는 국가적인 송년회 또는 신년맞이 모임이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 김정일은 공식모임에는 참가하지 않고 측근자들, 파티멤버들을 모아놓고 따로 논다. 그러다가 밤 12시나 새벽에 중앙당 부서 책임자들에게 "지난해에 모두 일을 잘했다. 새해에 더욱 분발하여 큰 승리를 이룩하자"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을 모사전송기로 보내준다. 그러면 정월초하루인 명절날에도 부서 책임자들이 비상소집을 하여 김정일의 신년 축하 편지를 받드는 의식을 하고 결의문이나 맹세문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김정일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김정일은 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강조하게 한다. 그 하나는 당의 비밀을 지키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적 간부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공개적인 것보다도 비밀리에 무엇을 하기 좋아하며 남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질투하는 것은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 같이도 생각된다. 김정일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연회를 차리는 것보다 자기 측근자들을 모아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그는 낮에 일하는 것보다 밤에 놀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하다. 김일성은 자기에게 충실한 부하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았다. 그는 건방진 사람은 미워했지만 자기에게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은 대중의 신망이 높다고 하여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충실한 부하도 대중의 신망이 높으면 질투한다. 또 다른 나라에서 일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 지도자가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아도 질투한다. 물론 이러한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은 결국 그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상관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자질을 높이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원칙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과 모략의 방법으로 자기에 대한 환상을 조성해보려고 애쓴다. 그는 남한과의 경쟁에서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고 테러와 모략의 방법으로, 그리고 무력 침공의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으며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행을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비행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생활에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라고 하면서 신문에 공개된 것 이외는 모두 비밀이기 때문에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밀이 새나간다고 하여 당중앙의 부부장 이상 간부들의 부인은 원칙상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김정일은 자기에 대한 우상화를 위하여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간부들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숭배를 반대한다고 한다. 자기는 인민�� 영도자이기 때문에 이 아니지만 다른 간부들은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개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도당 책임비서가 일을 잘하여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게 되면 꼭 교체해버린다. 때로는 인민들 속에서 개인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여 의 모자를 씌워 숙청해 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 외의 인간관계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주의, 지방주의를 이라고 배격하며 동창회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친목회를 모두 반대한다. 심지어 그는 사제지��� 관계나 선배후배관계를 따지는 것도 반대한다. 그의 요구는 "수령과 가까운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고 수령과 먼 관계에 있는 사람과는 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를 반대하도록 전당에 조직적으로 지시하여 김일성의 후처 아들들인 이복동생들을 대중과 절연시키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웠다. 김정일의 이복동생들로부터 사소한 선물을 받거나 편지를 받았다 하여 직위에서 파면되고 추방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반대중은 대상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서 악수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반대로 김정일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한 호의를 표시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노한다. 그는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있는 가무단을 매우 사랑한다. 원래 이 가무단들은 김정일을 위하여만 복무하게 되어 있지만 때로는 김정일이 당중앙 일군들에게 를 돌려주어 그 공연을 보여 줄 때가 있다. 이때 중앙당 간부들이 박수를 잘 치지 않았다 하여 김정일은 중앙당 일군들 속에서 사상투쟁을 벌이도록 지시한 일이 있다. 그 후부터는 김정일이 사랑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볼 때는 중앙당 간부들이 손이 아프고 팔이 저릴 정도로 오랫동안 박수를 쳤으며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몇 번 막이 올랐다 내렸다 할 때까지 박수를 치고 더 이상 공연자들의 반응이 없어야 자리를 뜨게 되었다. 김정일은 자신을 무조건 따르는 추종분자들을 동원하여 자기를 세계가 공인하는 대정치원로로 21세기의 태양으로, 만능의 천재로 떠들게 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이 떠드는 북한의 수령의 위대성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은 천양지차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확실히 김정일의 독재는 가혹하고 그의 독재 능력은 탁월하다. 그는 바로 이 독재능력으로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북한 사회를 망쳤으며 그를 추종하는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 앞으로 그가 이 탁월한 독재능력에 의거하여 남한과 외국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고 7천만 우리 동포들에게 유례 없는 재난을 가져오지 않을 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 끝. ~~ 이 내용,글이 혹시 내가 거짓이나 또는 내가 속은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을수도 있지만 다시말하지만 난 그냥 사실그대로.. 그대로 글을 올렸습니다. 못믿으면 직접 알아보고 찾아보세요.. 북한 이야기만 나오면 하도 부정적이고 삐닥하게 보고 내가 죽일놈이 되는것을 몇번 경험해봐서 그래요.. 난 북한과 아무 관련없고 하물며 제 외할아버지가 6.25때 공산군한테 장사한다는 이유로 총살 당했어요. 이런 내용까지 말하는건 하도 어이��는 말들이 많아서요.. 그리고 이건 실제로 황장엽 선생님의 말과 글이에요. 제가 알기론 황선생님의 가족들도 좋지 않게 된걸로 아는데.. 설마 황장엽 선생님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서 글을 올립니다.(끝) 2019-11-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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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주사주입 피부질환이 확산은 방지하지만 치료가 진전이 없었는데 종합피부질환을 소개하겠다.누가 세레스톤G 방문따고 훔쳐갔는데 다시 책상에 가져다 놓았다.피부테러에 항상 연고를 발라도 특수제작크림연고여서 무식한 연고를 사용하기로 한것이다.곰팡이균과 습진의 복합균을 제거하기 위해서 말이다.성분에 황산염과 인산은 종합연고 공통으로 사용된다.위염에 관련 아버지 노인네 PH농도 관련글이 이제야 이해가 갈거다.2100년 집도의는 아무렇지 않게 암세포덩어리를 주사주입후 2차 수술시 작아진 원핵을 제거한다.그리고 2주분량의 항암캡슐을 처방해준다.간단한 시술로 암이 이렇게 변해야한다.국책의료사업의 일부분으로 권력의 힘이 필요하다.암신약캡슐 내 생각엔 반세기면 충분하고도 남는다.물론 사회기득권의 한 부분인 의사협회에서 상당한 반발이 예상된다.여신강림 만화를 슬쩍보며 힌트를 얻었다.현재 수간호사 및 간호원 인력은 부족한 상태이고 전문의는 과잉포화상태이다.의사 레벨승급은 인턴,레지던트,주치의,전문의,의학박사 교수로 업그레이드된다.먼저 의사기득권들의 양보와 협조가 필요하다.참여 자원 스펙은 유전공학과 관련,약학과 관련,화학공학과 내 생물응용화공이 기본 베이스로 참여 의학과관련 지휘 협조가 필요하다.대구 의료산업복합단지가 우선 선정대상이다.발생원인도 알아야된다.조직검사는 암발생 진행과정을 알수있다.암덩어리를 제거하는 방식에서 생체동물이식이 우선시한다.대상은 쥐,원숭이,소,염소,코끼리등 단순 흰색쥐에 의존하는 실험방식에서 벗어나야한다.이에 응용 사형수에게 생체실험후 성공적이면 사형수면책특권까지 주면된다.연구해서 노벨상이라도 받아라.걸그룹 동영상보고 여신강림이나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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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 날은 올 수 있을까
미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은 채
그리워진 서로의 마음 위에
물먹은 풀꽃 한 송이
방싯 꽂아줄 수 있을까
칡꽃이 지는 섬진강 어디거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한강변 어디거나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모래알이 아름다워
뜨거워진 마음으로 이 땅 위에
사랑의 입술을 찍을 날들은
햇살을 햇살이라고 말하며
희망을 희망이라고 속삭이며
마음의 정겨움도 무시로 나누어
다시 사랑의 언어로 서로의 가슴에 뜬
무지개 꽃무지를 볼 수 있을까
미장이 목수 배관공 약장수
간호원 선생님 회사원 박사 안내양
술꾼 의사 토끼 나팔꽃 지명수배자의 아내
창녀 포졸 대통령이 함께 뽀뽀를 하며
서로 삿대질을 하며
야 임마 너 너무 아름다워
너 너무 사랑스러워 박치기를 하며
한 송이의 꽃으로 무지개로 종소리로
우리 눈 뜨고 보는 하늘에 피어날 수 있을까.
- ‘바닥에서도 아름답게’, 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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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자대학교목동병원의료법인, 이화여자대학교정형외과의사와 간호원 및 원무과직원을 '의료살인방기죄' 및 '생명권에 대한 -의료인이 환자에 대한- 명백한 '직무의무위반'으로 '즉각구속'하여 '형사구금'상태로 '형사사건조사 및 형사처벌'을 할 것을 관련 '의료기관감독기관 및 조사.감사 국가기관,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바른정당'에게 요구한다. 연락처 : [email protected] [email protected] 전화 : 010-5576-9450 2017년 3월 23일 수요일 20:55 의료사고피해자 및 진정.고발인 '김대원' 작성. "상기 사건은 사실과 다름 없으며, 사실과 다를 경우 민.형사상 사법적책임을 질것을 본인 김대원이 증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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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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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르포]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가다
아름다운 ‘봄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황량한 사막과 지평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의 전부다. 버려진 평야 곳곳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장갑차와 전차의 형해가 나뒹굴고 폭격으로 지붕을 잃은 폐가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영일 < 한민족복지재단 아프가니스탄 의료지원단장 >
전쟁으로 폐허가 된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은 신음하고 있었다.
3월8일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를 떠나 아프가니스탄의 북부 도시 마자르 이샤리프로 향했다. 일행은 한의사 1명을 포함한 4명의 의사와 3명의 간호원, TV취재기자 3명과 한민족복지재단의 홍보대사인 탤런트 정영숙씨, 인솔책임을 맡은 필자까지 모두 12명이다.
우즈벡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타슈켄트의 고려인 마을 백지미르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우즈벡 최남단의 국경도시 테르메스에 도착했다. 장장 780km에 달하는 육로이동이었다. 사마르칸트를 통과하는 바로 이 길이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즈칸이 지나갔다는 그 유명한 실크로드다.
우즈벡 군인들의 수많은 검문을 받으면서 일그러진 포장도로를 14시간 동안 달려서 겨우 테르메스에 닿을 수 있었다. 들녘엔 봄기운이 완연했지만 파미르고원 서남단에서 뻗어내려온 산등성이엔 아직도 흰눈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아프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나무 한 그루 없는 산들이 시야를 채웠고, 산도 들도 아닌 낮은 구릉과 초원이 이어졌다.
풀밭 위에선 양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2000년 봄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본 풍경과 매우 흡사했다. 이곳 농부들은 춘분 때부터 시작되는 이슬람의 정월을 기점으로 농사일을 시작한다. 터번을 둘러쓴 농부가 말라빠진 나귀를 타고 가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띈다.
유엔에 등록된 NGO를 통해 입국허가를 신청한 사람과 단체에 한해서만 초청장과 아프간 비자가 발급된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의료선교와 문화선교를 하는 IACD(Institute of Asian Culture and Development)의 도움으로 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이 단체의 리더들은 의료선교사 혹은 목사로 한국의 교회들과 긴밀히 협조하고 있다.
일행은 서울 온누리교회에서 보낸 의료선교사 고세중씨의 가이드를 받으면서 이동했다. 고씨는 테르메스에서 저녁식사가 끝나자마자 아프간 입국시 주의사항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요지는 다음과 같다.
“아프간에선 중앙정부의 지시를 지방정부가 따르지 않고, 부족간에 반목과 갈등이 심하다. 민간인들도 전쟁 때 지녔던 무기를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지니고 있어 사실상 무법천지나 다름없다. 따라서 누구도 안전을 보장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
고씨는 또 아프간에 도착하면 개인행동은 물론 저녁 6시 이후에 숙소 밖으로 나가서는 안된다고 경고했다. 그가 하는 말을 듣는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아프간 여행을 줄곧 반대하던 아들과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 내가 인터넷을 통해 파악한 정보는, 알카에다 소속의 외국인 병사들이 아프간으로 다시 집결하면서 카불 남쪽 가데즈 지방에서 최후의 저항을 시작했고 미군은 알카에다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아나콘다’ 작전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아프간 북부지방은 비교적 안전하다는 게 필자의 판단이었다.
“북부지방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고씨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필자는 그런 말을 듣고 동행한 사람들의 표정을 살펴봤다. 단단히 각오하고 왔는지 신앙이 돈독해서인지 모두들 아무런 동요가 없어 보였다. 일행 대부분이 유고슬라비아의 코소보, 인도 등지에서 의료봉사에 참여한 경험이 있고, 정영숙 홍보대사도 ���말리아와 미얀마에서 구호사업에 나선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크게 당황하지 않는 눈치였다. 필자는 속으로 벌벌 떨었지만, 유엔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아프간을 장악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위하면서 ‘여기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다짐했다.
아무다리오강을 건너다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은 아무다리오강을 경계로 국경을 마주한다. 아무다리오강은 파미르고원과 톈산산맥이 만나는 곳에서 발원, 아알해로 들어가는 긴 강이다. 이 강의 양안을 잇는 철교의 중앙엔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할 때 군대를 이동시켰던 단선 철도가 깔려 있다.
취재기자는 우즈벡군이 촬영금지구역으로 정해 놓은 강변지역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했다. 일행을 방패 삼아 강변의 곳곳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다. 우리는 우즈벡 초병이 촬영 모습을 망원경을 통해 보고 있는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다리 중간쯤에 이르렀을 때, 이곳을 경비하던 군인들이 몰려와 비디오 카메라를 조사한 후 기자를 연행해 갔다. 다행히 필름만 압수당하고 기자는 무사히 풀려났지만, 이 사건으로 아프간 입국이 1시간 가량 지연됐다. 약을 담은 큰 짐은 차편으로 보내고 수하물은 각자 끌거나 메고 2km 가량의 다리를 도보로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의 남단엔 영어로 ‘웰컴 투 아프가니스탄’이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세관 앞에 이르렀을 때 반가움과 두려움이 함께 교차했다. 아프간 외무성에서 나왔다는 관리는, 영어로 “당신들을 환영한다”고 말하고 친절하게 입국절차를 설명해줬다. 우즈벡 세관의 까다로움과 비교하면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아프간 관리 덕택에 긴장했던 마음도 다소 가라앉았다. 군복을 입은 관리들이 입국자의 이름과 여권번호를 기재하는 것만으로 입국 통관절차가 끝났다.
마침내 아프간 최북단 국경도시 아이랏돈에 들어온 것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기중인 차에 짐을 옮겨 싣고 우즈벡에서 사온 물과 빵, 삶은 계란으로 점심을 때운 뒤 아프가니스탄의 3대도시로 알려진 마자르이샤리프로 향했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북쪽 지방의 풍경은 조금 전에 지나온 우즈벡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아름다운 ‘봄 초원’은 온데간데 없고 황량한 사막과 지평선이 눈에 들어오는 것의 전부다. 이날엔 사납기로 유명한 사막의 모래바람까지 거세게 불어와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이곳에서 우리를 맞으러 나온 홍성집 목사(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에 파송된 재미교포 목사로 IACD의 책임자다)와 고세중씨가 운전하는 두 대의 차에 나눠 타고 마자르이샤리프로 출발했다.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
사막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는 소련군이 아프간을 침공하기 위해 닦아 놓은 아스팔트길. 바람이 심하면 모래가 날아와 쌓여 ‘모래밭’으로 변한다. 모래 위를 달리는 차는 마치 눈 위를 달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차가 모래에 빠지면 바퀴가 헛돌았고 브레이크를 밟을 때마다 차체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쌓인 모래를 치워주면서 팁을 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로의 모래청소부들은, 이처럼 사막의 열기와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모진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두텁게 두른 남자가 눈을 뜰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불어오는 모래바람 속에서 낙타에 땔감을 가득 싣고 걸어가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사막에 죽어 넘어진 나무의 가지들을 모아 시장에 땔감으로 파는 사람이란다.
우리 일행을 태운 차는 앞에 가는 대형 화물트럭을 피하려다가 시동이 멈추는 바람에 한동안 승강이를 해야 했다. 차를 밀기 위해 잠시 차에서 내렸다. 5분 남짓 차 밖에 나와 있었을까. 귓속엔 금세 모래가 굴러다녔다. 바람 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리면 숨 막힐 정도의 강풍이 얼굴을 때린다. 사막을 빠져나오는 데 1시간30분 가량 걸렸다.
마자르이샤리프로 가는 3시간 동안, 자동차 차창을 통해 본 아프간은 ‘버려진 땅’ 그 자체였다. 우즈벡처럼 중앙정부의 주도로 관정(管井)이나 저수 등 관개수리사업을 제대로 추진했다면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한 옥토가 그대로 버려져 있다.
버려진 평야 곳곳엔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가 그대로 남아 있다. 길가에 버려진 탱크나 대포, 군용차의 녹슨 차체들이 나뒹굴고 폭격으로 지붕을 잃은 폐가가 군데군데 흉측하게 서있다.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알카에다 사령부 터엔 장갑차와 전차의 형해(形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미군의 폭격이 비교적 정확해 알카에다 시설 외에 다른 건물들은 피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공사가 중단된 건물인지 폭격에 무너진 건물인지 구별할 수 없는 ‘폐허더미’가 끝없이 이어졌다.
사막을 벗어나 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오자 이곳에도 봄은 찾아와 있었다. 23년간 계속된 전쟁으로 신음하는 ‘죽은 땅’에도 희망을 상징하듯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돌덩이 사이로 얼굴을 살짝 내민 풀을 뜯고 있는 양떼의 모습이 평화롭다.
북부동맹의 본거지
마자르이샤리프는 아프간 말로 ‘왕자의 무덤’이란 뜻이다. 8세기경 마호메트의 조카 알리가 이곳에 묻혀 붙은 이름으로 회교 성지의 하나로 꼽히는 도시.
마자르이샤리프는 아프간 북부동맹의 본거지로, 1995년 탈레반이 정권을 잡은 뒤에도 북부동맹이 3년 동안 장악했고 1998년이 돼서야 탈레반 정권에게 넘어간 곳이다.
북부동맹은 탈레반에게 도시를 빼앗기기 직전, 탈레반 동조세력이라는 이유로 파슈툰족 4000여 명을 학살했고 탈레반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곳을 점령한 후 몽골계의 하자라족 8000여 명을 몰살시켰다.
인구 150만명의 이 도시는 북부동맹군 총사령관이던 타지크족 출신 마수드 장군의 영향력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도처에 마수드 장군 깃발이 눈에 띄었고 달리는 자동차의 창문에도 그의 사진이 많이 붙어 있었다. 마수드 장군은 미군의 반(反)탈레반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 기자회견석상에서 카메라 기자로 위장하고 들어온 알카에다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했다.
마수드 장군이 사망한 이후, 우즈벡 족인 도스툼 장군이 도시를 관장하고 있으며 현재 그는 카불 정부에서 국방차관을 맡고 있기도 하다.
탈레반이 몰락한 이후 마자르이샤리프는 다시 활력을 찾아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고 한다. 시장도 활기가 넘쳤다. 깔때기를 들고 다니면서 휘발유와 경유를 파는 사람들, 싱싱한 당근으로 즉석에서 주스를 만들어 파는 상인들, 맛 좋은 귤을 쌓아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장사치로 장터는 와글거렸다.
시장통에서 환전상들이 아프간 화폐 아프가니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달러로 바꿔주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언뜻 보면 암달러상 같지만 은행이 없는 이곳에선 그들이 은행 노릇을 하는 셈이다. 1달러를 내면 6만5000아프가니를 거슬러준다. 작은 물건을 사는 데도 돈을 뭉치로 내야 했다.
큰 도로는 버스, 군용트럭, 자전거, 오토바이, 우마차로 북새통을 이뤘다. 달리는 자동차의 트렁크에도 사람들이 겹겹이 타고 있었고 트럭이나 차량의 뒤칸에 매달려 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거리의 간판들에는 글자표시와 함께 팔 물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압도적으로 높은 문맹률 때문이란다.
민간인 복장을 한 사람이 자동소총이나 기관단총을 어깨에 걸치고 몰려 다니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추운 날씨인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누더기 차림에 신을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열악한 주거환경
아프가니스탄은 어른이 아이를,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는 사회다. 탈레반 정권 시절엔 여성들은 학교에 다닐 수도 없었고 투표권도 없었다. 여성들이 살갗을 외부로 노출하면 현장에서 매를 맞는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탈레반 몰락 직후 외신이 전한 내용과는 다르게 여자들은 모두 차드르와 부르카로 얼굴을 가리고 거리를 오갔다. 회교근본주의 세력이 물러갔지만 언제 다시 정세가 바뀔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차드르나 부르카를 버린 ‘간 큰’ 여성을 보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마자르이샤리프에 잠시 머문 우리 일행은 발크흐로 향했다. 발크흐는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도시로, 실크로드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고도(古都)다. 한적한 변두리 주택가에 자리잡은 흙으로 지은 2층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숙소는 발크흐 보건소장인 의사 나지블라의 소개로 얻게 된 곳이다. 독실한 이슬람교도인 그는 식사와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해줬고 군부대와 접촉해 야간보초까지 구해줄 정도로 우리를 극진히 대접했다. 9·11사태 이후 6개월 동안 봉급을 전혀 받지 못했다는 그가 베풀어준 호의에 탄복할 따름이다.
우리는 나지블라가 가져온 ‘논’이라는 둥그런 밀가루 빵을 나눠 먹으면서 여행의 피로를 풀었다. 논은 밀가루 반죽을 화덕에 부쳐 만든 것인데 조악한 겉모습 과는 달리 맛이 괜찮았다. 계란과 요구르트를 빵에 발라 먹었는데 이방인에겐 별미였다. 이국적인 냄새가 밴 향채와 잘게 썬 홍당무, 후식으로 나온 특이한 맛의 사과와 귤도 방문객의 입맛엔 안성맞춤이었다.
아프간 사람들의 거주지는 예상대로 열악했다. 관광 온 것이 아닌 터라 각오하기는 했지만 견디기 힘든 경우도 있었다. 우선 화장실이 형편없었다. 마당 귀퉁이에 자리잡은 변소의 시설(?)은 흙을 파놓은 구덩이가 전부였다. 한번 일을 보고 나오면 다시는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 남자들은 그럭저럭 변소에 익숙해졌지만, 함께 온 여자들은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다. 집 근처 우물이 바닥을 드러내 멀리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우리를 위해 매일 숙소를 지키던 군인들이 물을 실어왔지만 양이 매우 적어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밖에 할 수 없없다.
또 한 방에서 10명이 침낭을 덮고 잤는데 아프간의 봄추위가 얼마나 매서운지 새벽이면 모두 추위에 잠을 깼다. 처음엔 불평이 많았지만, “지난 겨울 이곳 난민들은 영하30℃의 혹한에 담요 한 장 없이 들판에서 밤을 지내야 했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누구도 춥다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끝없이 몰려드는 환자
발크흐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지블라의 보건소를 빌려 진료소를 마련했다. 간판은 보건소지만 약도 의료장비도 전혀 없는 곳이었다. 가져간 의약품과 장비로 5개의 진료실을 만들었다. 가정의학 전문의 이용훈, 안정희 박사는 제1, 2진료실을 맡았고 우즈벡에서 합류한 외과전문의 김수호 박사는 제3진료실을, 신경정신과 전문의 박종철 박사는 제4진료실을 맡았다. 한의사인 강영건씨가 제5진료실을 책임졌다. 약국은 간호원으로 온 김정희, 김여정, 이윤숙씨가 맡았다.
진료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소문을 듣고 환자가 몰려드는데 질환별로 분류해서 진찰표를 주는 데도 손이 모자랐다. 진찰표를 받지않고 막무가내로 진료실로 몰려드는 환자들과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진찰표를 받지 못한 환자들은 보건소가 문을 열기 전부터 몰려와 치료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환자 이외에도 카레아(아프간 말로 한국)에서 온 외국인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아이들과 주민들도 있었다. 어린 시절 곡마단이 마을에 왔을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
필자와 정영숙씨는 의료지식이 없지만 놀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한의사 강영건씨를 돕기로 하고 약봉지에 환약을 넣는 일, 침 맞은 환자의 환부를 약솜으로 닦고 ��� 뽑는 일, 처방전에 따라 환부에 파스를 붙이고 뜸을 뜨는 일을 도왔다.
보조 수준의 일이었지만 진료에 적잖은 도움을 줬다고 자부한다. 남자가 등과 허리에 파스를 붙여주는 것을 거부하는 여자 환자들은 정영숙씨의 몫이었다. 나지블라는 보건소에서 일했던 동료 의사들을 불러왔다. 영어에 익숙한 이들의 도움으로 환자들을 상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어장벽 때문에 더 많은 환자를 돌보지 못한 게 지금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튿날에는 1000여 명의 환자들이 찾아왔다. 만성적인 영양실조와 질병에 시달리는 이곳 주민들에게 좋은 진료와 고급 영양제를 무료로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있는 것이 아니다. 하얀 차드르를 둘러쓴 여자환자들이 몰려올 때는 미국 영화 벤허의 한 장면이 연상됐다. 동행한 기자는 그림이 너무 좋다면서 부지런히 카메라의 앵글을 맞추었다.
이곳 주민들의 평균 수명은 44세. 여자들은 15세 정도면 결혼해 30세쯤 되면 적게는 7∼8명, 많은 경우엔 13~15명까지 아이를 낳는다. 전쟁으로 인해 여성 상당수가 과부고 아이들 셋 중 하나는 고아다. 환자들의 공통된 특징은 우리나라에서 보는 것 같은 성인병은 거의 없고 영양실조 탓에 생긴 병이 대부분이었다.
평생 동안 의사에게 진료를 받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환자들도 많았다. 의사들은 가능한 한 많은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잠시도 쉬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보고 절로 숙연해졌다. 어려운 사람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모습이 아니라 환자들은 섬기는 자세로 일했기 때문이다.
사만간 난민촌의 참상
필자와 정영숙씨, 3명의 기자, 박종철 박사가 팀을 이뤄 IACD의 책임자인 홍성집 목사의 인솔로 마자르이샤리프 서남쪽에 위치한 사만간 난민촌을 방문했다. 약칭 IDP(Internally Displaced Persons)로 불리는 곳이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어색하지만 내지유민촌 정도로 부를 수 있다.
아프간에는 유엔의 도움을 받는 난민촌이 있고 사만간처럼 유엔의 지원을 받지 않고 전쟁으로 떠도는 사람들이 모인 내지유민촌이 있다. 필자와 정씨가 1000달러씩 갹출해 위문품을 준비했다. 맨땅에 거주하는 400세대와 담요 한장 없이 밤을 보내는 500세대를 위해 카페트와 담요를 구입하고 ‘논’ 1만5000개를 트럭에 싣고 난민촌을 찾았다.
카불로 이어진 길을 따라 1시간쯤 달리면 힌두쿠시산맥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산맥 주변은 미국의 그랜드캐니언(Grand Canyon), 중국의 장강 삼협처럼 우람한 천애(天涯)의 절벽들이 병풍처럼 이어져 있었다. 협곡을 통과해서 30분 정도를 달리자 난민촌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나자마자 때 묻은 천을 머리에 감고 누더기를 입은 난민들이 떼지어 몰려왔다. IACD가 고용한 아프간인 바리올라가 방문 취지를 설명해주자 난민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물건의 분배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담요에 빵을 받아 각 세대를 돌아���니면서 똑같이 나눠주는데 집안에서 풍기는 악취와 빵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의 몸에서 나는 체취가 무척 역겨웠다. 난민촌 부근에선 마실 물조차 찾을 수 없었다.
비닐하우스 비슷한 움집에서 풀을 뜯어 죽을 쑤고 있는 여인들이 눈에 띄었다. 풀을 뜯어먹고 다니는 아이들은 각기병에 걸렸는지 배가 불쑥 튀어나왔고 대부분이 머리에 부스럼을 갖고 있었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손가락으로 발을 가리키면서 신발을 사달라고 졸라댔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주고 싶었으나 그런 행동은 삼가라는 사전 교육을 받은 터라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 소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다.
난민촌 여자들은 차드르도 부르카도 걸치지 않았다. 차드르나 부르카를 살 돈이 없기 때문이란다. 난민촌 사람들은 살아남는 것을 목표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들은 구호물자를 가져오는 사람들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한 노인은 도시에서 버려진 빵을 주워 모아놓은 마대자루를 우리에게 보여주면서 “당신들 덕에 새 빵을 먹게 돼 고맙다”고 말했다.
언덕 위편으로 잔돌을 깔아 만든 공간이 있는데 메카를 향해 절하는 곳이라고 했다. 먹을 것이 없어 하루하루 라마단(이슬람교에서 한 달에 한 번씩 해가 떠 있는 시간 동안 음식을 먹지 않는 의식)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도 신에 대해 절하는 것이 이들의 빼놓을 수 없는 일과다.
거점진료에서 이동진료로
발크흐에서의 진료사업은 비교적 원만하게 시작됐다. 그런데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우즈벡족의 대부격인 도스툼 장군의 군대가, 친 탈레반적인 파슈툰족 집단거주지에 머물면서 파슈툰족이 운영하는 보건소에서 진료를 하고 있는 우리를 떨떠름하게 생각한 것이다.
진료를 시작한 다음날 군복을 입은 장군이 부하들과 함께 진료소에 나타나 “당신들 같은 훌륭한 사람들이 우리를 도우러 온 것을 크게 환영하고 매우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현재 당신들이 사용하는 숙소는 안전에 문제가 많으니 그곳을 떠나 군부대 점령지로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압력을 가해왔다.
일행은 장군의 권고를 어떻게 처리할지 진지하게 토론했다. 나지블라는 장군의 얘기에 괘념치 말고 이곳에서 계속 의료활동을 하자”고 했지만, 우리로선 장군의 권고를 무조건 무시할 수도 없었다.
부족들간의 반목이 심하고 언제든 내전이 발생할 수 있는 곳에서 군부의 권고를 무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3일째 진료부터는 진료를 한번 받은 사람들이 다시 찾아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점들을 고려해서 결국 일정한 거점을 정해놓고 하는 의료봉사보다는 이동 진료방식이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주 1회씩 발크흐 보건소를 방문하여 오전 진료를 맡겠다”며 나지블라를 설득했다. 나지블라는 마지못해 동의하면서도 떠나 보내고 싶지 않은 표정이 역력했다.
나지블라의 ��해를 얻은 후 서둘러 쉐베르간으로 이동했다. 북부동맹군 사령관인 도스툼 장군의 관저가 있는 쉐베르간은 북부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로 알려진 곳이다. 도스툼 장군의 거주지 근처에 마련된 주택은 발크흐의 숙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처음부터 이곳으로 왔다면 아프간의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쉐베르간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남는 팀과 귀국하는 팀으로 나뉘었다. 의료진은 대부분 아프간에 남아 이동진료를 계속했고, 필자가 속한 팀은 3월14일 쉐베르간을 출발, 폐허가 된 ‘수난의 땅’ 아프가니스탄을 뒤로 하고 우즈벡의 테르메스 공항에 도착했다. 어렵고 힘든 이웃을 돕고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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