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鷹匠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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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지보 ㉠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邯鄲之步(한단지보) 한단(邯鄲)에서 걸음걸이를 배운다는 뜻으로, 제 분수(分數)를 잊고 무턱대고 남을 흉내내다가 이것저것 다 잃음을 비유(比喩ㆍ譬喩)하여 이르는 말 충선왕 즉위년(1298) 무술년 • 충렬왕 24년 1월 갑진일.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왕을 국왕(國王)으로 책봉하는 한편 충렬왕을 일수왕(逸壽王)으로 임명했다.병오일. 왕이 양위[內禪]를 받아 강안전(康安殿)1)에서 즉위했다.무신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2)“옛날 우리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일하여 큰 이름을 무궁히 빛낸 후 역대 선왕께서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堂構3)] 지금까지 381년이 경과했다. 우리 광문선덕태상왕(光文宣德太上王 : 충렬왕)께서는 세자로 있을 적[潛邸4)]에 백성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마음으로 스스로 단안을 내려 황제의 조정에 입시하여 황녀를 배필로 맞이함으로써 선조의 위업5)을 그대로 잘 이어받아 스물다섯 해 동안 나라를 다스리니[嗣大曆服]6) 승평한 왕업이 이에 융성하게 되었다. 아아! 그러나 하늘이 불쌍히 여기지 않아 나의 모후이신 정민장선인명태후(貞敏莊宣仁明太后)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니 선왕께서는 마음이 울적한 나머지 정무에 권태를 느끼시고 나라의 온갖 중요한 일들을[繁機]7) 어린 나에게 맡기시니 재삼 굳이 사양했어도 허락을 얻지 못하여 결국 새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보잘 것 없는 나는 다행히 선제(先帝 ; 원 세조)의 외손으로, 황제와 황태후의 돌보심을 받아 공주와 혼인하고 마침내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역대 선왕들께서 쌓으신 공덕에 힘입어 나라의 크나큰 기업(基業)을 길이 보전하려면 마땅히 특별한 은혜를 멀고 가까운 곳에 두루 미치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에 금년 정월 21일 새벽 이전의 범죄자 가운데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는 모두 용서한다.1. 카다안[哈丹]이 침략8)해 왔을 당시 모든 주군(州郡)이 소문만 듣고서도 항복해 그들을 맞아들였지만 원주(原州)만은 유독 외로운 처지이면서도 적의 침략을 좌절시켰다. 그런 뒤에야 여러 성들이 원주성을 본받아 적의 무리를 소탕함으로써 삼한이 다시 안정되었고, 선제(先帝 : 원 세조)의 한을 갚았으니 그 공을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당시 방호별감(防護別監)을 지냈으며 판서(判書)로 은퇴한 복규(卜奎)9)와 전사(戰士)인 중랑장(中郞將) 원충갑(元冲甲), 그 고을의 수령, 장리(長吏(鄕吏)) 가운데 공을 세운 자에 대해서는 이미 포상을 실시했지만 오히려 부족한 바가 있으니 높은 관직에 발탁하여 등용함으로써 후대 사람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 고을에 부과되는 상요(常徭)와 잡공(雜貢)10)도 3년 간 면제해 주어야 할 것이다.1.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11) 삼한(三韓) 통일 이후 역대의 벽상공신(壁上功臣), 배향공신(配享功臣),12) 전쟁에 나가 전사한 공신의 자손들 가운데 비천한 기예 밖에 없는 탓에 공인(工人)·상인(商人)·장인(匠人)·악공(樂工)으로 전락한 자나, 공적이 있거나 은택을 받아 진작 양반(兩班)의 반열에 오른 데다 그 부모에게 흠결이 없는 자가 있는지 조사해 관직에 오를 길을 터 줄 것이다.13) 공신전(功臣田)14) 가운데 자손이 엄연히 있는데도 타인이 점유한 경우 연한(年限)에 관계없이 자손에게 돌려주게 한다. 또 동종(同宗)15) 가운데 공신전(功臣田)을 한 집에서 다 차지하고 있는 경우 그 족정(足丁)과 반정(半丁)16)을 구별하여 고르게 나누어 줄 것이며, 공신의 자손으로 남반(南班)17)에 속한 자는 동반(東班 : 문반)으로 고쳐 줄 것이다.1. 문(文)·무(武) 양반과 정로(正路)·잡로(雜路)로서 현재 관직에 있는 자는 등급을 올려준다. 동정직(同正職)18)으로 그 전에 관직을 받지 못했던 자는 이번에 모두 관직을 주도록 하며, 전부터 향직(鄕職)19)에 있던 자는 등급을 올려 주고 향직의 임기가 만료된 자는 향직계를 올려 줄 것이다.1. 각 관청 인리(人吏)들의 인사이동[動靜]은 한 번만 허락하며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관직에 처음 오르는 정원은 50명까지 허용한다. 근시(近侍)와 다방(茶房)20)의 관속들은 등급을 뛰어서 직위를 올려 주고 급사(給事)는 첫 관직에 오르는 것을 허락하며, 남반에 속한 자는 연한 관계없이 동반으로 고쳐줄 것이다.1. 속담에, ‘승려들이 비직(批職)21)에 많이 오르면 나라가 망하고 집안도 패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지금 비직의 수가 지나치게 많으니,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차후 그들의 승진과 폄출에 대한 사항을 철저히 보고하게 할 것이다. 또한 금후로 승려로서 법덕(法德)이 특별히 뛰어난 자가 있으면 법호(法號)를 덧붙여 주도록 할 것이다.1. 현재 유배 가 있는 자들 가운데 반란을 도모한 자, 불충과 불효죄를 저지른 자, 살인 강도범, 고의로 사람을 살해하려 한 자로서 얼굴에 입묵(入墨)하여 상호(常戶)로 충당한 자22)들을 제외한 나머지 죄인으로서 섬으로 유배 가 있는 자들은 육지로 내 보내어 고향에 와서 거주하게 한다. 또 현재 고향에 거주하고 있는 자는 임금을 알현하는 것을 허용하고 일단 알현한 자는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 공사(公私) 간에 잡죄(雜罪)를 범한 자는 몰수했던 직전(職田)23)을 돌려주고, 종신토록 서용을 불허했던 자나, 정직(停職)당해 산직(散職)에 소속되었던 자들도 정상을 참작해 벼슬을 줄 것이다.1. 일본에 호송사(護送使)로 갔다온 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은퇴한 김유성(金有成)과 공역령(供驛令) 곽린(郭麟) 및 그들과 동행했던 관원들의 자손을 관직에 등용24)할 것이다.”기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문한학사승지(文翰學士承旨) 최참(崔旵),25) 학사(學士) 박전지(朴全之), 시독학사(侍讀學士) 오한경(吳漢卿)과 이전(李瑱)이 왕이 은사를 베푼 글을 작성한 공을 기려 각종 비단과 모시베를 각각 15필씩 하사했다.경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26)을 찾아가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왕의 장인인 진왕(晋王)이 평장(平章) 차라티무르[扎刺帖木兒]를 보내 공주의 죽음을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게 했다.임자일. 중방(重房)27)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계축일. 왕이 불은사(佛恩寺)28)에 행차해 궁궐 지을 터를 살펴본 후 그곳을 덕자궁(德慈宮)으로 정했다.을묘일.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덕자궁을 찾아가 선왕에게 전(牋)을 올려 태상왕(太上王)이라는 존호를 바쳤다. 왕은 자포(紫袍)를, 태상왕(太上王)은 황포(黃袍)를 입고 백관들의 하례(賀禮)를 받으니 당시 사람들이 삼한에서 보기 드문 성대한 일이라 칭송했다.○ 평양후(平陽侯) 왕현(王昡)과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이 왕과 일수왕(逸壽王)이 황제에게 사의를 표하는 표문을 가지고 원나라에 갔다.병진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을 찾아가 태상왕(太上王) (충렬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이는 공주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음날 또 태상왕(太上王)과 정화궁주(貞和宮主)를 맞아다가 왕궁에서 잔치를 열었다.• 2월 초하루 무오일. 왕이 처음으로 정동성(征東省)29)의 업무를 보았는데, 재추들과 행성좌우사(行省左右司)의 관리들이 왕을 알현하면서 원나라 조정의 의례에 따랐다.경신일. 아무간[阿木罕]30) 태자(太子)와 옹기라다이[甕吉剌歹]31) 승상(丞相)이 귀국길에 오르자 왕이 금교(金郊)32)까지 나가 전송했다.갑자일. 왕이 태상왕을 정화궁(貞和宮)으로 찾아본 후, “장목왕후(莊穆王后 :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에게 태후의 칭호를 덧붙여야 마땅하니 해당 관청은 의논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정묘일. 왕이 공주와 함께 인후(印侯)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기사일. 왕이 첨의밀직사(僉議密直司)를 왕궁(王宮)으로 삼으라고 지시했는데, 그 자리가 옛 언창궁(彦昌宮)의 터였기 때문이다. 애초 왕이 차신(車信)의 집을 왕궁으로 삼으려고 진작 공사에 착수까지 했는데, 지관(地官)이 그곳이 길지가 아니라고 주장하므로 결국 이곳으로 정하고 크게 공사를 일으킨 것이다.경오일. 관등(觀燈)33) 행사에 참석차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강안전(康安殿)에 행차했다.신미일. 연등회(燃燈會)34) 참석차 왕이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참(崔旵)·박전지(朴全之)·오한경(吳漢卿)·이전(李瑱)에게 상승국(尙乘局)35)의 안마(鞍馬)를 하사했다. 다음날 대회(大會) 때 신하들이 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술잔을 올렸다. 네 학사(學士)36) 차례가 되자 왕이 그들을 앞으로 오게 한 다음 술을 주면서,37) “그대 학사들은 조금도 숨김없이 직언하라.”고 당부했다.갑술일. 총랑(摠郞) 강용정(姜用丁)을 경상도 안렴사(按廉使)로, 정랑(正郞) 유겸(柳謙)을 그 부사(副使)로, 국학사예(國學司藝) 허유전(許有全)을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직강(直講) 정형(鄭珩)을 그 부사(副使)로, 총랑(摠郞) 이원(李源)38)을 충청도 안렴사(按廉使)로, 낭장(郞將) 백응룡(白應龍)을 그 부사(副使)로 각각 임명했다.정축일. 감찰사(監察司)에서 교서랑(校書郞) 조진성(趙晋成)의 처 조씨(趙氏)를 수감했다. 조씨는 정랑(正郞) 조칭(趙偁)39)의 딸로 자기 친오빠인 조지열(趙之烈)과 간통했는데 모친이 그 사실을 알고 말리자 조지열(趙之烈)이 모친을 구타하고 누이를 은닉했기에 그 모친이 고소한 것이다.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소재도량(消災道場)을 열었다.갑신일. 왕이 백관들을 거느리고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생일을 축하했다.○ 왕이 글을 내려 전 사간(司諫) 이승휴(李��休)를 불렀다.40)○ 이달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기근을 겪자 왕이 수라상의 반찬을 줄이게 하는 한편 내주(內廚)에게 도토리를 올리게 한 다음 그것을 맛보았다.• 3월 무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삼계(三界)에 초제(醮祭)를 지냈다. 중찬(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은퇴를 간청하는 글을 올렸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임진일. 왕이 정화궁(貞和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사일. 왕이 각 도의 안렴(按廉)을 불러 백성을 잘 다스리라고 당부하는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면서 술을 하사한41) 다음 각자의 임지로 보냈다.을미일. 방신우(方臣祐)·이숙(李淑)을 벽상삼한정광(壁上三韓正匡)으로. 오인영(吳仁永)을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로, 홍선(洪詵)을 우부승지(右副承旨)로 각각 임명했다.정유일. 진왕(晋王 : 원나라 진왕 카마라)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42)에서 잔치를 열었다.경자일. 왕이 왕륜사(王輪寺)와 건성사(乾聖寺)43)에 행차했다.○ 장양공(長陽公) 왕지(王潪)44)가 왕의 덕을 찬송하는 시를 지어 바치자 쌀 30석(石)을 하사했다.임자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45)을 열었다.○ 왕이 재신 최충소(崔冲紹)46) 및 한림(翰林)의 네 학사(學士)와 함께 삼교업(三敎業(儒·佛·道))에 대해 토론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을 찾아뵈었다.을묘일. 고당왕(高唐王) 고리기스[闊里吉思]가 사신을 보내와 안평공주(安平公主 : 충렬왕비) 상(喪)의 부의(賻儀)를 전했다.○ 태상왕이 왕비 김씨(金氏(淑昌院妃))의 노비를 위해 내전(內傳)47)을 내려달라고 왕에게 요청했으나 왕은,“제가 즉위하는 날에 백성을 위하여 묵은 폐단을 반드시 없애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는데 내전(內傳)도 그 중의 하나이오니 분부를 따르지 못하겠나이다.”48)고 거절하였다.• 여름 4월 무오일. 우박이 쏟아졌다.○ 학사(學士) 최참(崔旵) 등 네 명과 승지(承旨) 김승(金昇)으로 하여금 관리의 선발[銓選]을 관장하게 했다.경신일. 왕이 친히 강안전(康安殿)에서 인왕도량(印王道場)49)을 열었다.신유일. 왕이 개경에 머물러 있는 지방관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별장(別將) 이하는 본역(本役)으로 복귀시켰다.갑자일. 태사국(太史局)50)에서, “도성에 거주하는 무당들의 음사(淫祀)51)가 날로 극성을 부리니 그들을 도성 밖으로 옮기게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했다.을축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에서 태상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였다.병인일. 왕이 사신(詞臣) 허유전(許有全)·조간(趙簡) 및 은퇴한 신하 김효신(金孝臣)과 최창(崔瑒)으로 하여금 현 정치의 잘잘못에 대해 직언하게 하면서 실책이 있으면 빠짐없이 즉시 상소해 보고하라고 지시했다.무진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서 꽃놀이 잔치를 열었다.경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에 있는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임신일. 또 덕자궁을 찾아갔다.을해일. 전 밀직사사(密直司使) 안전(安戩)이 죽었다.신사일. 우박이 쏟아졌다.○ 첨의사(僉議司)가 왕의 이름과 음이 비슷하여 혼동하기 쉬운[嫌名] 원(元)·원(原)·원(源)·원(騵)·원(嫄)·원(羱)·원(原虫虫)·원(扌原)·원()·원(蒝) 등의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이를 허락하면서 아울러 원(遠)자도 쓰지 못하게 했다.• 5월 병술일. 공주가 조비(趙妃)를 투기하자 공주의 유모가 무뢰배들과 함께 몰래 음모를 꾸며, 공주가 왕에게서 소박을 맞았다고 하면서 코케부카[闊闊不花]·코케다이[闊闊歹]와 대장군(大將軍) 김정(金精)·오정규(吳挺圭) 등을 원나라에 보내 태후에게 고자질 하게 했다.52)경인일. 왕의 초대를 받아 서번(西蕃)의 바가스[八哈思]53) 등 19명이 찾아왔다.신묘일. 왕이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선왕들께서 관청을 설치하고 직무를 나눈 것은 적합한 사람을 얻어 모든 국무를 함께 처리하려는 뜻이었다. 내가 어렸을 때에 상국의 조정에 입시해 몸소 선제(先帝 :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상국의 제도를 직접 상세히 관찰한 바 있다. 이제 외람되게 국왕으로서의 무거운 책임[重寄54)]을 맡아 나라가 당면했던 폐단을 모두 혁파했으나 다만 재상의 숫자가 옛 제도보다 훨씬 초과해 있는 바람에 조정의 의논도 상당 부분 차이가 커서 모든 일이 지체되고 있으니 그 수를 줄여야만 할 것이다.또 최근 들어 상국의 제도를 피해 백관의 명칭도 진작 고친바 있으나 동일한 것을 고치지 않은 것, 동일하지 않은데도 고친 것, 고친 명칭이 옛 제도를 따르지 않아 적절성을 잃은 것이 간혹 눈에 띈다. 즉위한 초기에 기존의 규정을 갑자기 고칠 경우 여론에 어그러질까 우려되기는 하나, 상황에 따라 변혁하는 일은 옛적에도 또한 있었던 일이다. 이제 역대의 관직을 참고하여 상국의 관직명과 관련되지 않는 경우에는 바꾸도록 하고 불요불급한 관청들은 폐지해 하나로 합하면 거의 관청의 숫자가 줄어 일의 처리가 쉬워질 것이다.”○ 이 날에 조인규(趙仁規)를 사도(司徒)·시중(侍中)·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자번(洪子藩)을 좌복야(左僕射)·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홍규(洪奎)를 수사도(守司徒)·영경령궁사(領景靈宮事)로, 정가신(鄭可臣)을 사공(司空)·우복야(右僕射)·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史)·참지광정원사(叅知光政院事)로, 인후(印侯)를 광정사(光政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김혼(金琿)을 검교수사도(檢校守司徒)·영봉상시사(領奉常寺事)로, 차신(車信)와 이지저(李之氐)를 함께 검교사도(檢校司徒)·자정원사(資政院使)로, 김지숙(��之淑)을 동지광정원사(同知光政院使)·참지기무(叅知機務)로, 안향(安珦)을 참지기무(叅知機務)·행동경유수(行東京留守)·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계림부윤(雞林府尹)으로, 유비(柳庇)를 광정부사(光政副使) 겸 권참지기무(權叅知機務)로, 최유엄(崔有渰)을 검교사공(檢校司空)·사헌대부(司憲大夫)로, 이혼(李混)을 검교사공(檢校司空)·서경유수(西京留守)·평양부윤(平壤府尹)으로, 정해(鄭瑎)를 남경유수(南京留守)·광릉부윤(廣陵府尹)으로, 최충소(崔冲紹)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행중경유수(行中京留守)·개원부윤(開元府尹)·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박의(朴義)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민지(閔漬)를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첨광정원사(簽光政院事)로, 원경(元卿)을 중경유수(中京留守)·과의군도지휘사(果毅軍都指揮使)로, 민종유(閔宗儒)를 전조상서(銓曹尙書)·숭복관사(崇福館使)로, 허평(許評)을 민조상서(民曹尙書)로, 윤보(尹珤)를 홍문관학사(弘文館學士)·의조상서(儀曹尙書)로, 최참(崔旵)을 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형조상서(刑曹尙書)로, 전승(全昇)을 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병조상서(兵曹尙書)로, 유욱(柳栯)을 병조상서(兵曹尙書)·응양군(鷹揚軍) 상장군(上將軍)으로, 오한경(吳漢卿)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좌산기상시(試左散騎常侍)로, 이진(李瑱)을 사림학사(詞林學士)·시우산기상시(試右散騎常侍)로, 홍자한(洪子翰)을 금오위(金吾衛) 섭상장군(攝上將軍) 겸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장석(張碩)을 광정도승지(光政都承旨)·봉상경(奉常卿)으로, 김순(金恂)을 광정부사승지(光政副使承旨)·성균제주(成均祭酒)로, 조서(趙瑞)를 광정승지(光政承旨)·전객경(典客卿)으로, 이승휴(李承休)를 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시비서감(試秘書監)·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로, 심봉길(沈逢吉)을 사헌중승(司憲中丞)으로, 권영(權永)을 사림시강학사(詞林侍講學士)·시위위경(試衛尉卿)으로, 조간(趙簡)을 형조시랑(刑曹侍郞)·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으로 각각 임명했다.55)계사일. 왕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승려는 이미 출가한 사람이라 위로는 군왕에게 절하지 않고 아래로는 부모에게도 절하는 않는 법이니 하물며 그 나머지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지금부터 승려와 속인들이 서로 절할 경우 법에 따라 엄중히 처벌할 것이다. 비록 자기 집에 거처하는 하찮은 승려라도 관청의 부역에는 차출하지 말도록 하라.”갑오일. 왕자 의충(宜忠)56)을 영가군(永嘉軍) 승선사(承宣使)로 의효(宜孝)57)를 강릉군(江陵軍) 승선사(承宣使)로 임명했다. 또 종실(宗室) 왕현(王眩)58)을 평양군공(平陽郡公)으로, 왕유(王維)59)를 함녕공(咸寧公)으로, 왕미(王亹)60)를 광릉군후(廣陵郡侯)로, 왕원(王元)61)을 한산군후(漢山郡侯)로, 왕지(王禔)62)를 통의군(通義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화(王和)63)를 단양군(丹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관(王���)을 계양군(桂陽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상(王祥)을 임해군(臨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구(王玖)64)를 한남군(漢南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빈(王贇)65)을 순정군(順正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헌(王軒)을 연평군(延平軍) 관찰사(觀察使)로, 왕형(王珩)66)을 시흥군(始興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숙(王璹)67)을 정산군(定山軍) 관찰사(觀察使)로, 왕마(王麻)를 영해군(寧海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광(王侊)68)을 강음군(江陰軍) 관찰사(觀察使)로, 왕온(王溫)을 진강군(晋江軍) 관찰사(觀察使)로, 왕기(王琪)를 보녕군(保寧軍) 관찰사(觀察使)로 각각 임명했다. 허경(許卿)을 한양군(漢陽軍) 관찰사(觀察使)·천우위(千牛衛) 상장군(上將軍)으로 각각 임명했다.갑진일. 공주가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냈다.을사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소상(小祥)을 맞아 왕이 선효사(禪孝寺)에 행차해 분향했다.병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을사일. 왕이 사람을 시켜 공주에게 테리[徹里]를 원나라에 보내지 말라고 설득하게 했으나 공주는 듣지 않았다.임자일.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 유승(柳陞)이 죽었다.을묘일. 왕과 공주가 서번의 승려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새 궁궐의 건축 공사를 중지시켰다.○ 왕이, “이후로 모든 관료들은 모든 일에 대해 일일이 품의를 올리지 말고 재추들과 상의해 방침을 정한 후에 보고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6월 초하루 병진일. 태상왕 및 국왕과 공주가 서번(西蕃)의 승례에게 계(戒)를 받았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왔다.정사일. 원나라에서 우승(右丞) 아릭쿠이[阿里灰]·홍중희(洪重喜), 중서좌승(中書左丞) 양염룡(楊炎龍)을 보내 왔는데 역마를 타고 수행한 인원이 백 명을 넘었다. 그들은 조인규(趙仁規)를 국문69)한 후 원경(元卿)을 데리고 감찰사(監察司)로 가서 새로 제정한 관제(官制)를 철회시켰다.70)무오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기미일. 다시 테리[徹里]를 원나라로 보냈다.○ 첨의중찬(僉議中贊) 정가신(鄭可臣)이 죽었다.71)계해일. 승지방(承旨房)72)을 다시 설치하고 전 승지(承旨) 장석(張碩)·홍선(洪詵)·전승(全昇)으로 하여금 업무를 보게 했다.갑자일. 양염룡(楊炎龍)이 생성고(生成庫)를 봉인했는데 이곳은 왕궁의 진귀한 보물들을 소장해 둔 창고였다.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마팔국(馬八國)73) 왕자인 보카리[孛哈里]가 사신을 보내 은실로 만든 관모, 금실을 수놓은 수박(手箔), 침향(沉香) 5근 13냥, 토산품 베 2필을 바쳤다. 그 전에 왕이 채인규(蔡仁揆)의 딸74)을 원나라 승상 셍게[桑哥]에게 시집 보냈는데 셍게가 처형당한 후 황제가 그 여자를 보카리에게 내려주었다. 보카리가 자기 나라 국왕과 사이가 벌어지자 원나라로 망명해 천주(泉州)에 살았는데 이때에 와서 채씨와의 인연을 빌미로 사자를 보내 교통하게 한 것이다.무진일. 태후75)가 첨추밀원사(僉樞密院事) 홍군상(洪君祥)과 티무르부카[帖木兒不花]를 보내왔다.임신일. 왕이 수녕궁(壽寧宮)에 행차하여 토번(吐蕃)의 승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액운을 없애달라고 축원했다.갑술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 뵈었다.을해일. 왕이 보살계(菩薩戒)를 받았다. 왕과 공주가 태상왕을 모시고 원나라 사신을 위해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정축일. 양염룡(楊炎龍)이 원나라로 돌아가자 왕이 선의문(宣義門)76) 밖까지 나가 전송했다.계미일. 안평공주(安平公主)의 생일을 맞아 왕과 공주가 태상왕(太上王)을 모시고 수녕궁(壽寧宮)에서 잔치를 열었다.갑신일. 천변(天變)이 자주 나타나므로 죄질이 경미한 죄수는 석방하고 중죄인은 형벌을 한 등급 낮추어 주었다.• 7월 정해일. 왕과 공주가 덕자궁(德慈宮)의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테리[徹里]가 원나라로부터 돌아오는 편에 황제가 8월에 국왕과 공주가 함께 입조하라는 지시를 내렸다.신묘일. 홍군상(洪君祥)이 궁 안에서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다.임진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뵙고 다음날 공주와 함께 다시 찾아갔다.○ 홍군상(洪君祥)이 잔치를 열었다.무술일. 다시 관제(官制)를 고쳤다.77) 홍자번(洪子藩)을 삼중대광(三重大匡)·첨의중찬(僉議中贊)·판전조사(判銓曹事)로, 인후(印侯)를 중대광(重大匡)·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병조감찰사사(判兵曹監察司事)로, 김혼(金琿)을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판민조사(判民曹事)로, 한희유(韓希愈)를 수사공(守司空)·중경유수(中京留守)·개성부윤(開城府尹)·상의도첨의회의도감사(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로, 차신(車信)을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판의조사(判儀曹事)로 김지숙(金之淑)을 첨의첨리(僉議僉理)·판공조사(判工曹事)로 안향(安珦)을 첨의첨리(僉議僉理)·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감수국사(監修國士)로, 이지저(李之氐)를 자정원사(資政院使)·지도첨의사(知都僉議事)로, 최유엄(崔有渰)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이혼(李混)을 밀직사사(密直司事)·전조판서(銓曹判書)·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수국사(修國史)로, 정해(鄭瑎)를 지밀직사사(知密直��事)·병조판서(兵曹判書)·보문각대학사(寶文閣大學士)로, 유비(柳庇)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좌상시(左常侍)로, 민지(閔漬)를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원후(元珝)를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민조판서(民曹判書)로, 원경(元卿)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공조판서(工曹判書)로 김변(金賆)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의조판서(儀曹判書)·동수국사(同修國史)로, 허평(許評)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판봉상사사(判奉常寺事)로, 오인영(吳仁永)을 밀직부사(密直副使)·판위위사사(判衛尉寺事)로, 민종유(閔宗儒)를 밀직부사(密直副使)·형조판서(刑曹判書)로, 윤보(尹珤)를 밀직부사(密直副使)·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수문전학사(修文殿學士)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로, 설경성(薜景成)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대복시사(判大僕寺事)로, 김부윤(金富允)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사진시사(判司津寺事)로 각각 임명하고 모두 상호군(上護軍)을 겸직하게 했다. 또한 최참(崔旵)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우상시(右常侍)·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장석(張碩)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판외부시사(判外府寺事)·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 유욱(柳栯)을 자정원부사(資政院副使)·판내부시사(判內府寺事)로, 박전지(朴全之)를 삼사좌사(三司左使)·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오한경(吳漢卿)을 삼사우사(三司右使)·사림학사(詞林學士)로, 홍선(洪詵)을 밀직사지신사(密直司知申事)·병조판서(兵曹判書)·지전조사(知銓曹事)로, 홍자한(洪子翰)을 지감찰사사(知監察司事)로, 전승(全昇)을 좌부승지(左副承旨)·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로, 이승휴(李承休)를 판비서시사(判秘書寺事)·숭문관학사(崇文館學士)로, 김순(金恂)을 우승지(右承旨)·성균좨주(成均祭酒)·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지민조사(知民曹事)로, 이전(李瑱)을 좌승지(左承旨)·비서윤(秘書尹)·지병조사(知兵曹事)·사림학사(詞林學士)로, 권영(權永)을 밀직사우승지(密直司右承旨)·예빈윤(禮賓尹)·지공조사(知工曹事)·사림시독학사(詞林侍讀學士)로 각각 임명했다.기해일. 왕과 공주가 신효사(神孝寺)78)에 행차해 우란분재(盂蘭盆齋)79)를 열었다.계묘일. 홍군상(洪君祥)이 원나라로 돌아갔다.을사일. 왕이 삼대장소(三大藏所)에 행차해 오대부경(五大部經)을 필사하라고 지시했다.병오일. 왕과 공주가 안국사(安國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경술일. 왕과 공주가 함께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계축일. 왕이 덕자궁(德慈宮)으로 태상왕을 찾아뵈었다.• 8월 초하루 을묘일. 왕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정해(鄭瑎)를, 행성(行省)에서는 석말에센티무르[石抹也先帖木兒]를 각각 원나라에 보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게 했다.경신일. 태상왕(太上王)이 장군(將軍) 최중경(崔仲卿)80)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갑자일. 원나라가 보롤[孛魯兀] 등을 보내와 왕과 공주의 입조(入朝)를 재촉했다.○ 유비(柳庇)를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박전지(朴全之)를 밀직부사(密直副使)·중경유수(中京留守)로, 김순(金恂)을 삼사좌사(三司左使)로, 허평(許評)을 동지자정원사(同知資政院事)로, 유복화(劉福和)를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이승휴(李承休)를 밀직부사(密直副使)·감찰대부(監察大夫)·사림학사승지(詞林學士承旨)로 임명한 뒤 은퇴시켰다.무진일. 안평공주(安平公主)를 인명태후(仁明太后)로 추존했다.신미일. 왕과 공주가 원나라에 가면서 참형과 교수형 이하의 죄수를 사면했다.임신일. 태상왕이 금교(金郊)에서 왕 일행을 전송하면서 술자리가 무르익자 갑자기 사신 보롤[孛魯兀]이 황제의 명령이라며 국왕인(國王印)을 빼앗아 일수왕(逸壽王 : 충렬왕)에게 주었다. 이에 태상왕이 복위했다.81)원나라에 간 충선왕은 그 후 모두 10년간 숙위(宿衛)했는데 원나라의 무종(武宗)과 인종(仁宗)이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 전에[龍潛82)] 늘 그와 함께 지내면서 밤낮으로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충렬왕 33년, 황제의 조카인 아유르바르와다태자[愛育黎拔力八達太子]83)와 우승상(右丞相) 다르칸[答刺罕]84)과 원사(院使) 베크부카[別不花]가 왕과 함께 회령왕(懷寧王) 카이샨[海山]85)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그러나 좌승상(左丞相) 아쿠타이[阿忽台]와 평장(平章) 바두마신[八都馬辛] 등이 안서왕(安西王) 아난다[阿難達]를 황제로 받들려고 반란을 계획했다. 태자가 그 음모를 알아차리고서 하루 전에 먼저 아쿠타이 등을 체포해 대왕 두라[都剌]와 원사(院使) 베크부카 및 왕으로 하여금 죄를 추궁하게 한 다음 이들을 처형시켰다. 그해 5월 황제의 조카인 회령왕이 황제에 즉위하니 이 사람이 무종(武宗)이다.• 충렬왕 34년 5월 무인일. 황제를 옹립한 공86)을 기려 원나라에서 왕을 심양왕(瀋陽王)으로 책봉하고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아아! 그대 추충규의협모좌운공신(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정동행중서성좌승상(征東行中書省左丞相)·부마(駙馬) 왕장(王璋)은 세조(世祖)의 외손이자 선왕의 귀한 사위로서 짐이 황위를 계승하던 초기에 짐을 도와 큰 공로를 세웠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큰 절의를 길이 지켜나가기 위해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을 적용하여 그대에게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태자태부(太子太傅)·상주국(上柱國)·부마도위(駙馬都尉) 관작을 특별히 내려주며 아울러 심양왕(瀋陽王)으로 승진시켜 책봉한다.”또 왕으로 하여금 중서성(中書省)에 들어가 국정의 논의에 참여하게 했으며, 금호부(金虎符)·옥���(玉帶)·칠보대(七寶帶)·벽전금대(碧鈿金帶) 및 황금(黃金) 5백 냥, 은 5천 냥을 하사했다. 황후와 황태자도 왕을 총애한 나머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진기한 보물과 비단을 선물로 주었다.二十四年 正月 甲辰 元遣使, 冊爲國王, 以忠烈爲逸壽王. 丙午 受內禪, 卽位於康安殿. 戊申 敎曰, “昔我太祖, 一統三韓, 熙鴻號于無窮, 堂構相承, 于今三百八十有一年矣. 逮我光文宣德太上王, 在潛邸時, 爲安黎庶, 斷自睿慮, 入侍帝庭, 得配王姬, 光紹前寧, 嗣大曆服, 二十五年, 昇平之業, 於斯爲盛. 噫, 皇天不弔, 俾我母后貞敏莊宣仁明太后, 奄忽賓天, 上心鬱鬱, 倦于聽政, 以軍國繁機, 歸于幼冲, 牢讓再三, 不獲兪命, 新卽王位. 惟予小子, 幸爲先帝外甥, 又承皇帝·皇太后眷顧, 嘉與公主, 聿來于玆. 倘賴積累之功, 永保社稷丕丕之基, 宜以殊恩, 覃及遐邇. 自正月二十一日昧爽以前, 二罪以下, 咸宥除之.一, 哈丹之闌入也, 州郡望風迎降, 唯原州, 以孤城, 摧挫賦鋒. 然後, 諸城效之, 掃盡賊儻, 致三韓之再安, 敵先帝之所愾, 其功萬世難忘. 其防護別監判書致仕卜奎, 戰士中郞將元冲甲, 其邑守倅, 與長吏之成功者, 雖已褒賞, 尙有慊然, 宜加擢用, 勸勵後人. 其邑常徭雜貢, 宜復三年.一,87) 三韓壁上功臣, 三韓後代代壁上功臣, 配享功臣, 征戰沒陣而亡功臣子孫等, 以賤技, 落在工商匠樂者, 凡以功與恩, 已屬兩班, 而父母無痕咎者, 宜推明許通, 其功臣之田, 如有孫, 外人占取者, 勿論年限, 依孫還給. 同宗中功臣田, 若一戶合執者, 辨其足丁·半丁, 均給功臣子孫, 屬南班者, 改東班.一, 文武兩班, 正·雜路, 凡有職者, 加次第. 同正職前恩未蒙者, 幷以今恩許蒙, 前有鄕職者, 加次第, 鄕職官滿者, 加鄕職階.一, 諸司人吏動靜, 許一度, 吏兵部入仕者, 各許五十人. 近侍·茶房員吏, 超等加職, 給事許初入仕, 南班屬者, 年限勿論, 改東班.一, 諺曰, ‘僧多批職, 亡國敗家.’ 今批職之數過多, 令有司, 褒貶申���. 今後有法德殊勝88)者, 方加法號.一, 前所配者, 除謀亂國家, 不忠不孝, 殺人强盜, 謀故劫殺, 鈒面充常戶外, 其餘入島者, 出陸餘鄕. 餘鄕者通朝見, 朝見者量用. 公私雜罪者, 還其職田, 終身不叙, 停職屬散者量用.一, 日本護送使副知密直司事致仕金有成, 供驛令郭麟, 一行員將子孫錄用.”己酉 移御壽寧宮, 王, 以文翰學士承旨崔旵, 學士朴全之, 侍讀學士吳漢卿·李瑱, 修撰宥旨, 賜綾絹紬紵各十五匹. 庚戌 王詣德慈宮, 奉逸壽王, 宴于壽寧宮. 王舅晋王, 遣平章扎剌帖木兒來, 弔公主喪, 仍致祭. 壬子 重房宴王. 癸丑 幸佛恩寺, 相營宮之地, 置德慈宮. 乙卯 王率百官, 詣德慈宮, 奉牋, 上尊號, 曰太上王, 王衣紫袍, 太上王衣黃袍, 受賀, 時稱三韓罕有之盛事. 平陽侯昡, 大將軍金精, 齎王及逸壽王謝表, 如元. 丙辰 王與公主, 詣德慈宮,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爲公主誕日也. 翌日, 又奉迎太上王及貞和宮主, 宴于王宮.二月 戊午朔 王始署征東省事, 宰樞及行省左右司官吏謁見, 用元朝禮. 庚申 阿木罕太子及甕吉剌歹丞相還, 王餞于金郊. 甲子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王命, “莊穆王后宜加太后之號, 有司, 其議以聞.” 丁卯 王與公主, 移御印侯家. 己巳 命以僉議密直司爲王宮, 盖古彦昌宮基也. 初王欲以車信家爲宮, 旣興工, 相地者以爲不吉, 遂卜於此, 大興工役. 庚午 以觀燈, 王與公主, 奉太上王, 幸康安殿. 辛未 燃燈, 王如奉恩寺, 賜文翰學士崔旵·朴全之·吳漠卿·李瑱, 尙乘鞍馬. 翌日大會, 群臣上壽. 次至四學士, 王使之前, 賜巵酒, 謂之曰, “惟爾諸學士, 直言無隱.” 甲戌 以摠郞姜用丁爲慶尙道按廉使, 正郞柳謙副之, 國學司藝許有全爲全羅道按廉使, 直講鄭珩副之, 摠郞李源爲忠淸道按廉使, 郞將白應龍副之. 丁丑 監察司囚校書郞趙晋成妻趙氏. 趙氏正郞偁之女也, 與兄之烈通, 其母知而止之, 之烈歐母匿妹, 其母訟之. 親設消災道場于康安殿. 甲申 王率百官, 賀太上王生日于德慈宮. 王下書, 徵前司諫李承休. 是月 , 王以歲凶民飢, 減膳, 命內廚進橡實, 嘗之.三月 戊子 親醮三界于康安殿. 中贊鄭可臣上章乞退, 不允. 壬辰 王朝太上王于貞和宮. 癸巳 王召諸道按廉, 諭以治民之事, 爲之流涕, 賜酒遣之. 乙未 以方臣祐·李淑爲壁上三韓正匡, 吳仁永副知密直司事, 洪詵爲右副承旨. 丁酉 王與公主, 以晋王生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庚子 幸王輪·乾聖二寺. 長陽公潪, 進頌德詩, 賜米三���石. 壬子 親設功德天道場于康安殿. 王與宰臣崔冲紹及翰林四學士, 論三敎業. 癸丑 王朝于德慈宮. 乙卯 高唐王闊里吉思遣使來, 歸安平公主之賻. 太上王爲妃金氏奴婢, 求內傳于王, 王曰, “臣於卽位之日, 爲民, 請命于天, 革去宿弊, 內傳其一也, 臣不敢奉命.”夏四月 戊午 雨雹. 命學士崔旵等四人及承旨金昇, 掌銓選. 庚申 親設仁王道場于康安殿. 辛酉 王命撥還外吏之在京者, 別將以下, 勒還本役. 甲子 太史局言, “城中巫覡, 淫祀日盛, 請徙郭外.” 乙丑 王與公主, 上壽德慈宮. 丙寅 王命詞臣許有全·趙簡, 及致仕金孝臣·崔瑒, 直言時事, 凡有愆違, 卽以聞. 戊辰 王置賞花宴于壽寧宮. 庚午 王朝德慈宮. 壬申 亦如之. 乙亥 前密直司使安戩卒. 辛巳 雨雹. 僉議司請避王嫌名, 元·原·源·騵·嫄·羱····蒝等字, 從之, 仍命幷諱遠字.五月 丙戌 公主妬趙妃, 公主之乳媼, 與無賴之徒潛謀, 以公主失愛, 遣闊闊不花·闊闊歹, 與大將軍金精·吳挺圭等如元, 告大后. 庚寅 西蕃八哈思等十九人來, 王所招也. 辛卯 敎曰, “先王設官分職, 盖欲得人, 而共圖庶務. 孤於幼歲, 入侍天庭, 躬承先帝之訓, 目覩大都之制, 旣詳矣. 及叨重寄, 凡諸時獘, 一皆蠲罷, 惟宰執之數, 倍於古制, 公家議論, 多少異同, 事事稽滯, 宜當減省. 又頃者, 因避上朝之制, 百官名號, 早曾改之, 然或有同而不改者, 有不同而改之者, 所更之號, 亦不師古, 容有未稱. 孤當卽位之初, 遽革成規, 懼乖物議, 然隨時沿革, 古亦有之. 載按歷代官職, 不涉上朝官號者, 而易置之, 或罷不急之司, 合於一局, 庶幾官省, 而事易理也.”是日, 以趙仁規爲司徒侍中叅知光政院事, 洪子藩爲左僕射叅知光政院事, 洪奎守司徒領景靈宮事, 鄭可臣爲司空右僕射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叅知光政院事, 印侯爲光政使叅知機務, 金琿檢校守司徒領奉常寺事, 車信·李之氐並檢校司徒資政院使, 金之淑同知光政院使叅知機務, 安珦叅知機務行東京留守集賢殿大學士雞林府尹, 柳庇爲光政副使兼權叅知機務, 崔有渰檢校司空司憲大夫, 李混檢校司空西京留守平壤府尹, 鄭瑎爲南京留守廣陵府尹, 崔冲紹同知資政院事行中京留守開元府尹果毅軍都指揮使, 朴義同知資政院事, 閔漬集賢殿大學士簽光政院事, 元卿爲中京留守果毅軍都指揮使, 閔宗儒爲銓曹尙書崇福館使, 許評爲民曹尙書, 尹珤爲弘文館學士儀曹尙書, 崔旵爲詞林學士承旨刑曹尙書, 全昇爲崇文館學士兵曹尙書, 柳栯爲兵曹尙書鷹揚軍上將軍, 吳漢卿爲詞林學士試左散騎常侍, 李瑱爲詞林學士試右散騎常侍, 洪子翰爲金吾衛攝上將軍兼司憲中丞, 張碩爲光政都承旨奉常卿, 金恂爲光政副使承旨成均祭酒, 趙瑞爲光政承旨典客卿, 李承休爲詞林侍讀學士試秘書監左諫議大夫, 沈逢吉爲司憲中丞, 權永爲詞林侍講學士試衛尉卿, 趙簡爲刑曹侍郞右諫議大夫.癸巳 敎, “僧人旣已出家, 固當上不拜君王, 下不拜父母, 況其餘乎? 自今, 僧俗相拜者, 重論如法. 雖至居家庸僧, 勿差官役.” 甲午 以王子宜忠爲永嘉軍承宣使, 宜孝爲江陵軍承宣使. 以宗室眩爲平陽郡公, 維爲咸寧公, 亹爲廣陵郡侯, 元爲漢山郡侯, 禔爲通義軍觀察使, 和爲丹陽軍觀察使, 琯爲桂陽軍觀察使, 祥爲臨海軍觀察使, 玖爲漢南軍觀察使, 贇爲順正軍觀察使, 軒爲延平軍觀察使, 珩爲始興軍觀察使, 璹爲定山軍觀察使, 麻爲寧海軍觀察使, 侊爲江陰軍觀察使, 溫爲晋江軍觀察使, 琪爲保寧軍觀察使. 許慶爲漢陽軍觀察使千牛衛上將軍.甲辰 公主遣徹里如元. 乙巳 王以安平公主小祥, 幸神孝寺行香. 丙午 詣德慈宮. 王使人請公主留徹里, 不聽. 壬子 都僉議參理柳陞卒. 乙卯 王與公主, 受戒于蕃僧. 罷營新宮. 敎, “自今百寮, 凡大小公事, 並除狀申, 從宰樞商議處決, 然後以聞.”六月 丙辰朔 太上王及國王·公主, 受戒于蕃僧. 徹里還自元. 丁巳 元遣右丞阿里灰·洪重喜, 中書左丞楊炎龍來, 凡乘傳者百餘. 鞫趙仁規, 遂與元卿, 往監察司, 收新定官制. 戊午 王朝德慈宮, 宥二罪己下. 己未 復遣徹里如元. 僉議中贊鄭可臣卒. 癸亥 復置承旨房, 以前承旨張碩·洪詵·全昇爲之. 甲子 楊炎龍封生成庫, 乃王府珍寶所臧也. 乙丑 王朝德慈宮. 馬八國王子孛哈���遣使來, 獻銀絲帽, 金繡手箔, 沈香五斤十三兩, 土布二匹. 先是, 王以蔡仁揆女, 歸丞相桑哥, 桑哥誅, 帝以蔡氏, 賜孛哈里. 孛哈里, 與其國王有隙, 奔于元, 居泉州, 至是, 以蔡氏故, 遣使通之. 戊辰 太后遣僉樞密院事洪君祥及帖木兒不花來. 壬申 幸壽寧宮, 飯蕃僧, 祓呪咀. 甲戌 王朝德慈宮. 乙亥 王受菩薩戒. 王與公主, 奉太上王, 宴元使于壽寧宮. 丁丑 楊炎龍還, 王餞于宣義門外. 癸未 王與公主, 以安平公主誕日, 奉太上王, 宴于壽寧宮. 甲申 以天變屢見, 放輕繫, 減重罪一等.七月 丁亥 王與公主, 朝德慈宮. 徹里還自元, 帝命國王公主, 以八月入朝. 辛卯 洪君祥享王于內. 壬辰 王朝德慈宮, 翌日, 偕公主又朝. 洪君祥設宴. 戊戌 復改官制. 以洪子藩爲三重大匡僉議中贊判銓曹事,印侯爲重大匡僉議侍郞贊成事判兵曹監察司事, 金琿爲僉議侍郞贊成事判民曹事, 韓希愈守司空中京留守開城府尹商議都僉議會議都監事, 車信爲僉議贊成事判儀曹事, 金之淑爲僉議參理判工曹事, 安珦爲僉議參理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 李之氐爲資政院使知都僉議事, 崔有渰判三司事, 李混爲密直司使銓曹判書集賢殿大學士修國史,鄭瑎知密直司事兵曹判書寶文閣大學士, 柳庇知密直司事左常侍, 閔漬同知密直司事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元珝同知資政院事民曹判書, 元卿同知密直司事工曹判書, 金賆同知資政院事儀曹判書同修國史, 許評同知密直司事判奉常寺事, 吳仁永爲密直副使判衛尉寺事, 閔宗儒爲密直副使刑曹判書, 尹珤爲密直副使成均大司成修文殿學士, 劉福和爲密直副使判禮賓寺事, 薛景成爲資政院副使判大僕寺事, 金富允爲資政院副使判司津寺事, 皆兼上護軍. 崔旵爲資政院副使右常侍詞林學士承旨,張碩爲資政院副使中京留守判外府寺事集賢殿學士, 柳栯爲資政院副使判內府寺事, 朴全之爲三司左使詞林學士承旨, 吳漢卿爲三司右使詞林學士, 洪詵爲密直司知申事兵曹判書知銓曹事, 洪子翰知監察司事, 全昇爲左副承旨判秘書寺事寶文閣直學士, 李承休判秘書寺事崇文館學士, 金恂爲右承旨成均祭酒寶文閣學士知民曹事, 李瑱爲左承旨秘書尹知兵曹事詞林學士, 權永爲密直司右副承旨禮賓尹知工曹事詞林侍讀學士.己亥 王與公主, 幸神孝寺, 設盂蘭盆齋. 癸卯 洪君祥還. 乙巳 幸三大藏所, 命寫五大部經. 丙午 王與公主, 幸安國寺, 觀水戱. 庚戌 王與公主, 朝德慈宮. 癸丑 王朝德慈宮.八月 乙卯朔 遣知密直司事鄭瑎, 行省亦遣石抹也先帖木兒如元, 賀聖節.庚申 太上王移御將軍崔仲卿家. 甲子 元遣孛魯兀等來, 趣王及公主入朝. 以柳庇判密直司事, 朴全之爲密直副使中京留守, 金恂爲三司左使, 許評同知資政院事, 劉福和爲密直副使, 李承休爲密直副使監察大夫詞林學士承旨, 仍令致仕. 戊辰 追尊安平公主, 爲仁明太后. 辛未 王與公主如元, 宥二罪已下. 壬申 太上王餞于金郊, 酒酣, 使臣孛魯兀, 以帝命, 取國王印, 授逸壽王. 於是, 太上王復位. 王如元宿衛, 凡十年, 武宗·仁宗龍潛, 與王同臥起, 晝夜不相離.忠烈王三十三年 皇姪愛育黎拔力八達太子, 及右丞相答刺罕·院使別不花, 與王定策, 迎立懷寧王海山. 左丞相阿忽台, 平章八都馬辛等, 謀奉安西王阿難達爲亂, 太子知其謀, 先一日, 執阿忽台等, 使大王都刺, 院使別不花及王, 按誅之. 五月 皇姪懷寧王, 卽皇帝位, 是謂武宗.三十四年 五月 戊寅 元以定策功, 封瀋陽王, 制曰, “咨! 爾推忠揆義協謀佐運功臣開府儀同三司征東行中書省左丞相駙馬王璋, 世祖外孫, 先朝貴壻, 方朕纘承之始, 寔參翊贊之功. 以賞善罰惡之至公, 保孝父忠君之大節, 可特授開府儀同三司太子太傅上柱國駙馬都尉, 進封瀋陽王.” 又令入中書省, 參議政事, 賜金虎符·玉帶·七寶帶·碧鈿金帶, 及黃金五百兩, 銀五千兩. 皇后·皇太子亦寵待, 所賜珍寶錦綺, 未可勝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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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岡愛之助が5役踊り分け 「壽初春大歌舞伎」大阪松竹座で開幕
#歌舞伎 #片岡愛之助 [SANSPO]妻で女優の藤原紀香(48)が1階ロビーでひいき筋と応対するなど劇場全体が新春らしい華やいだ雰囲気の中、片岡愛之助(47)は昼の部「大津絵道成寺」で藤娘、鷹匠、座頭、船頭、鬼の5役を踊り分け。 また、世話物「艶容女舞衣(はですが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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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凡爾賽宮的空中鳥瞰圖,攝於2013年。���
別信旅行社的廣告或者地產商售樓中心的鼓吹,今天請大家跟筆者一起來觀察一下有代表性的、繁華背後路易十四時期的“法國風情”。
首先,請深呼吸,這是一位和“優雅”絕緣的路易十四,這是一座和“優雅”無關的凡爾賽。
(凡爾賽的部分外觀。)
一:“啥都舍得大價錢,唯獨沒有洗手間”;
被人以“歐洲時尚風向標”看待的法國宮廷在那個時代來說也是令人不適、相當不舒服的。人們囿於成見,認為“衛生習慣”就應該是不講衛生。身居九五的路易十四(Louis XIV或者人稱路易大帝,全名Louis de Bourbon、路易·德·波旁;筆者註)在4歲半時即位,在他牙牙學語時就被灌輸“君權神授”的思想;父親路易十三和母親奧地利的安妮(其實屬於西班牙王族,出自歐洲最有權勢王室之一–哈布斯堡家族;筆者註)婚後的第23年才等到這個王儲,“好事成雙”的是又來了次子菲利普大親王,然後路易十三便匆匆病故了。
(路易十四之母,奧地利的安妮,出身於哈布斯堡家族;頭銜為西班牙公主、奧地利女大公、法國王後與攝政太後。根據當時“全歐洲王室沾親帶故”的近親通婚法則,貴不可言的安妮給波旁王族帶來了巨大利益和很多遺傳病因子。在路易十四出生前,安妮流產四次,所以全國對於太子視同於“彌賽亞”–救世主、小耶穌一樣珍貴。)
(路易十三,兒子與其同名,均為路易·德·波旁。路易十三酷愛打獵、芭蕾,結婚很早;不得已成了“晚育”糢範;有了一對兒子後,於41歲時英年早逝。)
【小路易十四和弟弟菲利普即小奧爾良公爵的畫像(長大後的奧爾良公爵被尊稱為“菲利普大親王”或“大先生”)。畫像作於在路易十四即位之前。】
1:“誰說朕矮跟誰急”
傳說中路易十四“發明”高跟鞋;以掩飾他那不盡人意的海拔。不過這說法是“欺負人”,在彼此封閉的東西���文明體系里��平均身高更秀氣的東方人早就發明了各種高跟的或者厚底的鞋;在早於路易十四百年左右的英國都鐸王朝時代,倫敦人為了出門不踩到污物,已經普及了像踩高蹺的木底鞋。路易十四對自己的身高耿耿於懷,在路易的引領下,有後跟的鞋被發揚光大。大家明白在世襲制的專制時代,君主的形象是國家的面子。做夢都惦記形象宣傳的路易十四不允許別人提及他實際上只有1.54米高,“濃縮的都是精華”。
(路易十四的常見形象。1701年,他威脅畫家把早已年老體衰的自己描繪成雄風不減的芭蕾男一號;以芭蕾舞“第四站位”最大程度展現雙腿的修長健美。)
2:“朕是太陽朕是光,法國最帥沒商量”
(路易十四剛登基的樣子,年齡大致相當於“幼兒園大班”,由安妮太後攝政,馬紮然主教輔佐。)
在路易十四的時代,一位君主登基,通常伴隨的是其至親長輩的離去。一般都是沒了父親、祖父等長輩才能輪得到王冠,作為很大程度上親情缺失的兒童,路易十四是孤獨的。
一邊倒的溢美之詞可能對於路易已經不稀罕。路易享受到了那個時代的至高無上的待遇,也背負著那個時代別人沒有的風險。
(路易十四的出生地,聖日耳曼宮。)
1638年9月5日,路易生於聖日耳曼宮。作為被寄予厚望的王太子,取名為Louis Dieudonné ,意思是“神賜的路易”。
五歲時,在馬紮然主教幫助下,路易十四出席了他的第一次國務會議。路易雖不算怯場,不過他有點說不清楚那些對他來說太長的句子。
路易十四的母親作為封建王後來說比較罕見,她親自帶孩子,而不是隨便聽聽乳母的匯報而已。安妮偏愛長子,善於平息政治矛盾。安妮太後在次子菲利普十四歲之前,都把他打扮成女孩。有些學者以為,這造成了菲利普的同性戀傾向,其實性取向是天生的;不幸的菲利普大親王迫於壓力,長大後還是結了兩次婚並留下了子女。很多人嘲笑王弟“娘娘腔”,但菲利普曾經替哥哥禦駕親徵,沖在第一線、腿部兩次中槍;在凱旋時,巴黎的市民高��“大親王萬歲”;路易十四還很嫉妒了一陣兒。
不論王弟菲利普是否“娘娘腔”,若是路易十四在留下嫡親子嗣之前駕崩,王位將傳給弟弟。
路易十四在約10歲時,國內發生叛亂。
史稱“福隆德運動”(Fronde);共有兩次:第一次為1648–1649年,第二次為1650–1653年。這場叛亂主要針對掌權的安妮太後與馬紮然主教(這兩位都是外籍人士,招致法國本土力量不滿;筆者註),又稱為“投石黨叛亂”。叛軍們利用當時流行的投石機,打碎他們反對的貴族家門窗(當時的玻璃可貴了),逐漸發展成真正的暴亂。
(權臣、紅衣主教馬紮然/CardinalJules Raymond Mazarin,政客、外交官。由於遭到嫉妒,很多人說其與安妮太後“曖昧”。)
太後帶孩子們避難、生活一度顛沛流離,更談不上衛生保健。小國王在沒得挑的時候睡過稻草堆和石頭地,甚至和叛軍面對面接觸過。
有一個流傳已久的說法,來自安妮太後的證詞:叛軍逼宮,要求“面聖”談判,和一個小學生年紀的孩子能談什麼不好說;被逼無奈的安妮讓叛軍見到了入睡的小路易十四。
據說當時叛軍頭目見到臉蛋像奶油一樣光潔的孩子熟睡著,他們心軟了,便解除了武裝。
安妮太後完全是為了面子胡扯的。全法國都知道,當時他們的路易陛下剛剛挺過一場天花,滿臉的坑趕得上月球表面的環形山。
發育不良、身高抱歉的路易十四的臉蛋不僅不像奶油一般細膩,還有著哈布斯堡王族的一半血統(特徵明顯的突出下頜)與低額頭、鷹鉤鼻;周圍的人昧著良心說陛下英俊、瀟灑、風流倜儻完全是阿諛奉承,其中只有“風流”可能是對的。
經過四年左右不懈的努力,亂黨終於被肅清。路易覺得國內有資格歌舞升平,為了宣傳他“朕即國家”的“主體意識”,路易親自主演了一場芭蕾舞劇『夜芭蕾』。
生愛跳舞的路易十四在年輕時是“舞林高手”。他懂得揚長避短,扮演金光閃閃的阿波羅,穿戴著金色面具和盔甲,並革命性地在芭蕾表演中用了女性。當路易十四像“為���己代言”一般出現在高高的舞台上,很多受邀前來的舊貴族認可了年輕國王的力量,就像“清晨八九點鐘的太陽”。
過去的古典芭蕾都是由體格小的男演員來反串女性角色,因為女人在舞台上踢腿似乎“有傷風化”。自路易十四開始,芭蕾舞開始有了現代的樣子。路易十四贊助藝術,開設了芭蕾學校,還關愛退伍傷殘軍人,建立了“榮軍院”,此院現在還在運營。
(1660年制作之路易十四的青銅半身像,在西方稱為胸像。只有地位崇高之人士才有資格制作這種像。現存於英國倫敦維多利亞與阿爾伯特博物館。)
(路易十四的大理石彫像。他喜歡自詡“太陽王”,最愛打扮成太陽神阿波羅的樣子。)
(被描繪成太陽神阿波羅的路易十四。)
(被精心美化的路易,糢仿羅馬天神朱庇特的造型。)
(鏡廳,凡爾賽里最具特色的大廳。法國宮廷建築師威尼斯“綁架來”的玻璃工匠貢獻出當時的技術機密,這種商業間諜行為是高層默許的。)
(鏡廳的天花板,有極盡精美的壁畫。)
(凡爾賽內部的陳設。其中有以宮廷請來的“文化人”的真實樣子當糢特的諸神青銅群像。拉封丹、呂里、莫里哀等人都為路易十四服務過。)
路易十四27歲時,出於政治考慮,也因為童年經历叛亂的威脅,他決定在離原來王宮稍遠一點的地方修建新的宮殿,把辦公機構搬過來。
曾經的盧浮宮和聖日耳曼宮等不是不夠好,路易十四想要一個如同“衛星城”一般的地點,既可以理政,又不能離人群太近,年幼時被叛軍找到的記憶伴隨了路易十四一輩子。路易十四經過考慮把宮殿選在凡爾賽,當時的這里只是鄉邨,泥地加沼澤與肆虐的蚊蟲,可能比龍須溝還髒。這里有過路易十三的狩獵行宮,有路易十四人生最早的記憶,蚊子再多也得克服。他力排眾議,最終修建了法國“人間罕見、只應天上有”的凡爾賽宮。
預算超過了今天的核潛艇,在當時可是天文數字。路易十四採用了“信封”式的款式,整個宮殿群宏大、整齊,視野開闊。這里還有據信是最早的近代動物園,不像古羅馬那樣為了屠殺,而是觀賞。
路易很開心,帶著王族家眷以及宮廷情婦們遷居凡爾賽。
當時貴族們一邊擴建一邊入住,熱鬧非凡的凡爾賽是個喧鬧的工地、富麗堂皇的舞台以及超大號的“皇家公共洗手間”。
凡爾賽後來修好時有700多間大小房間,沒有一間洗手間。路易十四說,“那是浪費錢”。
貴族們一邊抱怨,一邊擠破了頭往凡爾賽跑。在外省自己領地上有莊園的貴族們寧可自掏腰包行賄,到凡爾賽哪怕住偏房、每天聽樓梯嚮、裝修的聲音;就為了離國王近一點。
如果用一個詞語形容法國貴族之間的交往,就是“臭味相投”。很多法國人承認,發明香水的初衷是因為按照天主教的教義,法國人尤其不愛洗澡。
路易十四自己已經“招蒼蠅”了,他在香水這一項的開支有時巨大到了需要“大會表決”才能通過。後來可能是“自暴自棄”,在貴族聚會時,路易索性開窗戶,看著大臣們散發著混合型的味道,一邊趕蚊子玩。
(1661年的路易十四,身穿鎧甲,為了補正身上欠缺色彩,畫家把他的臉色畫得格外健康。這時路易已經離不開他最愛的假發了。)
(1673年的路易十四,如現今的明星一樣,每個姿勢都是精心擺出的,就為了從視覺上顯得高一點、再高一點。)
如果路易說“這位我從未見過”,那就意味著失寵和心灰意冷。路易不對貴族們進行威逼利誘,只是客氣地“邀請他們”來凡爾賽住,就像上班包住宿一樣。
這一招很精明,貴族們搶著給國王獻殷勤,每天國王起牀、吃飯誰把手巾遞給路易都是一種殊榮。
陪同國王用膳和日常生活,經常還有晚宴、舞會、宵夜和打牌;貴族們的年金怎麼也得輸給路易一些,或者給路易的左近一些意思意思。
用這種軟刀子,路易控制住了原來蠢蠢欲動的貴族和軍閥們,貴族們住進凡爾賽,如同今日到大城市打工的北漂,他們和老家有了距離,也沒時間經常回家;與人質沒兩樣的生活雖然沉悶,如果追求進步,就能得到多多的實惠。由於路易十四即位早,大家覺得他是好運氣的君主,只要把路易伺候好了,可能法國會“長治久安”。
不過在那個時代醫學不靠譜,健康基本靠運氣,我們看到法國國家圖書館所藏厚厚的王室醫療記錄里,路易十四的人生經常伴隨病痛,生活質量一點也不高。
(1685年5月15日的路易十四與廷臣們。路易自稱優雅,把芭蕾的姿勢引入到他的日常生活里。圖中可見白銀打造的家具和王座,這些珍品多數被性格豪爽的路易在戰爭中拿去熔化、充作軍費;剩下的在他百年之後新朝廷嫌樣子過時也“折舊回收”了。)
二:“多災多難老路易,艱難活到七十七”
根據很多醫學史學家的研究,在17世紀有三種死亡方式:戰爭、瘟疫和被醫生治死,其中第三種最高發。
(Charles de Lorme,查爾斯·德·拉莫,三朝元老,活到高壽94歲,他告訴王室病人們,飲酒有益健康,可能醫生自己很幸運,誰信了的自己就看著辦吧。)
(曾經的倫敦大瘟疫時流行過的防止感染的醫生面具與套服。德·拉莫得到了靈感。)
1:“早婚早育、傷筋動骨;吃點補藥、變成禿瓢”
童年出天花大難不死的路易十四在加冕後(法國封建君主當時習慣在13歲後加冕),算是大人了,其實還是青少年;太後已經開始和馬紮然等重臣在考慮王朝的未來。和現代很多家長諱莫如深不同,法國王室把成人的事情毫不避諱地展示給少年國王,並“選秀”一般找來貴族少女和路易一起“進行性教育”。在封建時期,君主的風流事是男子氣概的表現,法國人尤其這麼認為;以至於後來上斷頭台的路易十六因為沒有養情婦還一度被人憐憫過。
古人早婚早育很大一個原因就是預期壽命短。任何一點小病、感染也能要人命,作為君主盡早生育,以防不測,才是對國家負責。
17歲左右,路易出現了淋病的癥狀,禦醫們用了很多有腐蝕性的藥劑,效果不明,當路易似乎有所好轉時,他又開始高燒、上吐下瀉;可能是傷寒,在大家都打算改口稱菲利普為陛下時,有的醫生給路易吃了一些含有金屬銻的藥劑,路易繼續嘔吐,之後居然奇跡般地緩解了。
普遍衛生意識欠缺的十七世紀,路易的醫師們已經是最高水準。也就是說,他們推薦病人喝“補酒”、服用重金屬和不衛生的草藥、用水蛭吸血、切割放血和把發燒的病人捂在被子里……沒有微生物學、傳染病學等知識,醫師和患者一樣兩眼一抹黑。如果活下來,他們感謝上帝,如果不幸死亡,那也只能是上帝的意思。
路易十四幸運地活到了成年,由於可怕的金屬藥劑,路易的頭發基本都不見了。“太陽王”真的“發光了”。和東方人的玩笑不同,法國那時覺得頭發多才是“男人能力強的表現”。路易開始定做各種極其誇張的假發,對於他們連自己都懶得清洗的時代,假發是各種微生物的大本營。頭頂“小生態園”的路易和貴族們還是一邊幹洗頭發和撲發粉一邊嚴格遵醫囑“水太髒,我們不洗澡”。當時的歐洲的水源通常是和隨意排污連在一起的。就連凡爾賽,金碧輝煌的外表下,是農場散養動物的氣味。在等待覲見時,身穿華貴長裙的貴婦們會偷偷攜帶“女士之友”,也就是一種精致的用來小便的瓷器,有些關系好的女士們會彼此借用。至於下水道,在17–18世紀的宮廷里沒有這一說。在庭院里散步的貴族們總是避開窗台和陽台等“有效射程區域”,並且那時的陽傘也不僅是遮陽用的。
大家可能看過很多介紹路易時期的影視劇,那時的貴族淑女們臉上經常擦著厚厚的鉛汞超標的化妝品,並用絲綢剪成圖案貼在臉上當作“美人痣”;戴著高聳入雲的假發、手里拿著精致的小扇子。很“優雅”是嗎?
由於傳染病高發,很多人失去過兄弟姐妹,活到20歲的人只有50%比例;他們臉上可能有各種天花、水痘和梅毒等等痕跡。塗脂抹粉、貼美人痣只是為了遮醜,有時欲蓋彌彰。口腔衛生也是大問題:對於如路易這樣失去牙齒的人,想要一副假牙,除了有經濟實力還得做好強大的心理準備。您嘴里的假牙可能來自木頭、含鉛的合金、河馬的、囚犯嘴里強行拔下的、窮人被迫賣掉的、戰場上的死人嘴里偷來的……有的假牙,戴上會感染,患者可能死於沒牙、進食少的營養不良;也可能死於各種感染。風靡歐洲17–18世紀的折扇在貴族手里像是一種說話的輔助道具,人們用扇子來表示各種“啞語”,因為貴族們一張嘴能嚇死人,他們不是用扇子捂住慘不忍睹的牙齒就是擋住彼此的口臭。很多人對於路易十四的狀態從吹捧變成了心照不宣的同情。
2:“古風時尚不洗澡,全家一起喂蝨子;無齒之徒悔當初,胡吃海塞不節制”
(當時放血的標配器具。沒���毒手續,而且全身各處均可操作。)
路易十四的醫療記錄里有數百次“灌腸治療”和蒸汽水療,另有數百次“放血記錄”。
但是,“一生一世,洗澡三次”。
(這是超出國王的待遇啊!)
一生中,路易十四也沒解決洗手間問題。侍從們總是抬著馬桶隨叫隨到。據信公務繁忙的路易十四坐在馬桶上會見過英國大使,對方被這種“親密的殊榮”快感動哭了。
換句話說,在醫療手段並不發達時,生活方式不健康的路易十四能活到高齡,身體素質底子算是很不錯了。
年歲漸長,路易十四也不是鐵打的,他的病历里出現了多次“頭疼”、“齲齒”、“行走不便”、“排出縧蟲”、“皮膚潰爛”、“壞疽”與“痔瘡”……能推測出來,不節制的隨時進食和甜食不限量供應(吃得起奶油與糖類是特權階層的象徵)給國王帶來糖尿病以及一系列嚴重並發癥。口腔問題不是因為甜點吃得太多了,而是沒有良好的清潔習慣。
寄生蟲感染與糖尿病造成了不正常的食欲,消化不良在那時只有催吐和灌腸這種“治療”。還是未成年時,路易十四和貴族們就是“酒當成水喝”(當時飲用水很不衛生);酒精加劇了痛風等疾病發展。路易十四早早地用上了手杖,並且不得不忍受拔牙失敗的嚴重後果。1685年,路易十四的上顎與牙牀被醫生不慎弄裂,拔牙時連著一片骨骼被揪掉,形成經久不愈的瘻管,一直感染的路易從鼻孔流膿,並且再也不會咀嚼,只能喝稀的。很傷自尊的路易要求醫生治好他,他得到了當時最好的手段–一根燙烙鐵,沒有任何麻醉劑,連鴉片酒都不用(不講衛生、醫療落後的下場還不止這些)。剛進入中年(真的中年,不是網絡用語)的路易十四變成彎腰駝背和癟著嘴沒有牙的小老頭兒,除了失去牙齒,醫生們不規範的灌腸保健手段讓路易患上嚴重痔瘡和肛瘻–17世紀的感染不亞於絕癥。
醫生們開發了一種器械,在一些類似的患者身上進行了手術。然後路易十四接受了劃時代的“痔瘡手術”,全歐洲很多王室又佩服、又失望,老路易又一次挺過來了。據記載,任何麻醉措施都沒有,但堅強的國王並沒有慘叫,手術當晚,路易坐在軟椅子上出席了國務會議(手術前,路易一沾椅子就喊疼)。人民和大臣們對於路易十四的精神感到欣慰和放心,這也是為何雖然當時英國政局改變而法國還能��忍國王的原因之一。
再複雜一點的疾病則用手術也難以挽救,因為沒有各項技術支持,首先出血與感染這兩項就是鬼門關。路易十四的母親安妮太後晚年乳房出現“硬塊狀物”(很可能是癌癥)、醫生們決定做手術,路易和菲利普都到場觀看手術。像魯迅的文章寫的那樣,他們悲痛欲絕地祈禱痛苦能夠盡早結束;盡管這麼思考是違背教義的。在那時條件太有限,全部手術器械等同於一把沒有消毒、類似於剃刀的刀具,以及取決於醫生手的動作有多塊。該手術肉眼看去似乎成功了,不過腫瘤可能早已擴散。安妮太後爭取到了一點時間和親人告別、進行宗教程序,之後離開了人世。
(1674年,路易十四在銀幣上的側面像。甜點心與酒精飲料正在害得路易變成“雙下巴”。)
(1709年,路易十四在金幣上的側面像。當時他早已沒有牙齒,實際上還不如這個樣子。)
(現存於凡爾賽的路易十四側面蠟像,這是西方貴族在沒有照相技術時通用的一種倒糢技術,如3D打印一樣呈現人立體的相貌。這是路易十四相對比較真實的樣子。能看得出經過調制的顏色,比其本人應該略好一些。長期服用莫名其妙的補藥,路易的老臉開始變得幹癟松弛、一堆褶子。)
3:“朕的壞腿爬不上天堂”
很多人對於“朕即國家”這句話理解為路易的專制,其實這是路易的國家主權意識覺醒。路易生在思想啓蒙開始的時代,受過當時最好的教育,於1667年建造皇家天文台等科技設施,觀察天象不再是“講述命運”的占星術;開始進行地球經度的測量等研究。巴黎天文台現在還在使用。路易做了很多事情,對文化發展有自己的貢獻。
路易十四在登基時,法國普通人還不具備國家觀念,說起工作、勞動來只是“為國王效忠”;在路易離去時,法國群眾有了國家意識,人們知道了要求權利、和為國家奮鬥。
諷刺的是,路易的精神遺產最終導致法國君主制被推翻了。
路易十四晚年逐漸變得保守,和以前的情婦分道揚鑣;路易與孩子的女家教曼特農女士(虔誠的寡婦)再婚,但因其不是王族出身,不能加冕為王後。
路易十四的統治時期(1643年–1715年)長達72年110天。這���有文字記載的历史中,創下統治時間紀錄的君主。
整整一代人,在他們的生命里面還沒見過其他君主,太陽要西沉了。全歐洲都有點不習慣。
路易十四的晚年飽受疾病折磨,一條腿已經由於糖尿病完全���爛致殘。人們為了讓老國王開心,專門制造了木制輪椅,垂暮的路易十四甚至可以自己操作。大家看著開心的路易,看得出曾經回旋自如的芭蕾男一號已經行將就木。
(著名的路易十四的輪椅,在當時可是“高大上”的奢侈品,就算變成“殘障人士”,路易十四還是要求畫像的時候要延長他的肢體線條,盡可能突出他是“焦點”的美感。)
1715年8月10日起,一直抱怨腿疼的路易說,“腿沒了感覺”。檢查發現,腿變成黑色,腫脹的程度有平時兩倍。全身感染、高燒,公主說老路易就像一片幹枯的木頭一樣憔悴。禦醫們給患者的“驚奇偏方”是驢奶,據說可以補足體內所缺失的某種“氣”。路易十四這時喝什麼都只剩一口氣了。內科醫師法貢堅持說只是坐骨神經疼,曼特農女士覺得不對,把外科醫師馬雷沙叫來了。馬雷沙沒再說什麼。路易說,“朕想要截肢”。來不及了。大家委婉地告訴他,“這是您在人世最後的病痛。”(當時內科醫師比外科醫師級別高,有診斷權和決定權。筆者註。)路易作為天主教徒和國王不能要求提前解脫,就算生不如死,自殺是嚴重犯罪。由於路易十四的家人都先他故去,母親、王後、弟弟、王太子和直系王孫先後離世,路易十四只好把王位傳給五歲的曾孫小路易十五。“历史驚人地相似”的是,路易十五的壽命超過了兒子,於是王位落到了王孫路易十六頭上。知道自己回天乏術,路易十四單獨向每個近侍、廷臣致謝,“人之將死,其言也善”;雖然場面感人,還是有人作證說,房間里垂死的人已經開始提前腐爛。君主的死亡也像在政治舞台的謝幕,臨終前十天左右,只愛芭蕾、不愛說話的路易十四說了幾十年欠下的話。
在告誡小路易十五不要好戰,要爭取和平、熱心民生之後,路易十四說,“朕將離去,但國家永存。”
1715年9月1日早上8點23分,當太陽高照的時候,路易十四的生命之火熄滅了。他還差4天滿77周歲。
路易十四和他的祖先們一起葬在聖丹尼斯大教堂,這是簡單的墓志銘。1793年10月14日,法國很多著名先王先後的遺骨在法國大革命的風暴中被“鞭屍”,人們摧毀了墳墓,將遺骸拖出來扔進土坑,撒上生石灰。王權的覆滅是太陽王路易十四看不到的。
(“路易大帝”的簽名,不完全是個性飛揚,主要是因為痛風和其他老年病,讓路易的字跡越來越“瀟灑”。)
“太陽王”路易十四的遺產之一:此為法國領土擴張示意圖,橙色部分表示在路易十四統治時期取得的“豐功偉績”。
法國在路易十四時期建立國王委員會議事、建立海軍,邊境更加安全、文藝蓬勃發展;國家也不再僅僅是一國之君的國家。在醫療衛生方面,經過了多年的經驗總結,建立在國王病历上的教訓讓人們開始註意修建排污設施及公共衛生設施;對傳染病的防治也有新的思考和進步。路易的例子也有力地證明了醫療衛生事業需要科學思維,需要跟上時代,而不是躺在傳統上吃祖宗的老本,那樣的行醫叫做草菅人命。
路易十四可以算是“髒死的”,但他沒有白死。後來,“勤洗澡澡身體好”以及衛生防疫的概念終於深入人心。這是路易大帝沒有想到的另一筆遺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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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噗浪點題] 隨筆
#雙狐 #原創 #RO #物後
妻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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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快亮了,本來應該要聞到的是露水的氣味、但充滿鼻腔的是很輕很輕的山茶花香氣。
當審神者將整夜燃燭的整備室開了一縫,擔憂地望向鳴狐時,被包裹在山吹色外衣中、再覆上男人肩背的少年困難地自抱擁裡伸出手,將食指疊於唇上。 噓。 然後搖了搖頭。 望著審神者皺起眉頭、敲了敲著手上那份被整理過的戰損診斷書,左手上臂脫臼、右掌挫傷、右腹箭矢穿刺傷都只做了緊急處置,雖然沒有那些現在已經陷入好眠中的短刀們嚴重,但也不是能夠輕易忍耐的疼痛啊。 但鳴狐只是難得地拿下面甲,張開還有著黑紅血痕的嘴做出嘴型。
交
給
小
狐
丸
然後人子嘆了口氣、咚一聲拉起障子。 那聲脆響讓屈身而眠的小狐丸驚醒,確認懷裡的少年仍然酣眠(自然是沒看見將面甲戴上以及裝睡的機動力了)、而整備室還是傳來審神者的輕聲與刀匠那傳來的鏗鏗細響,他又把少年裹得紮實了些即便現在是夏夜。
又有誰知道雨什麼時候會停呢?
鳴呦。 他垂下頭低喃、撒嬌似地朝他的頸輕蹭。 即便不喜歡夜黑、也別睡過了整夜,令人擔心吶。
後天一早一起輪值農務呢,你在旁邊看著就好、不要緊。 晚些天明得去幫您為小雲雀梳洗,血痕流到馬腹上去了,這對白馬來說是惡運呢。 午後得去趟萬屋,吃點稻荷壽司就會稍微有些元氣了。 明晚的戰務會議還得出席,就像現在這樣睡吧、多睡點主子也不介意的。 ��晚建議主子調整戰備取消遠征便好了,明晚還能到你那裡去。 帶上一點酒、拿顆今天沒被長谷部殿下清點的西瓜……
「真的?」 閉著眼,少年出聲問道。刻意放輕了音量、讓懷裡同樣沾染血跡的狐繼續安眠,鳴狐唇角忍不住曲成極力忍耐的僵硬形狀。 小狐丸苦笑著嘆了口氣,刻意揉過他有著裂傷的嘴角、假以責備口吻問道。 「既然醒了,看起來也好得多了,也就不必如此照應了。」 「真的?」 垂下眉掙扎著起身、吻了口男人刻意抬高的下顎,少年因為疼痛而縮了下肩。 見到戀人的疼痛,他終究像是痛覺神經也被制約那樣的皺起眉,慌張地回頭看望依然未被開啟的整備室,口調焦慮的回應。
「做什麼你會好些?快說。」
鏡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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他閉上眼、將手置放於鏡面。 對著自己的倒影說了十聲百聲千萬聲「讓我過去」。
在數不盡的言語之間,鏡子對面的身型彷彿跳脫了所映之人的意識輕顫了下、接著從內側探出手來,一把將他的手緊緊抓住。 感覺到手臂被緊縛的力道,他張開了金澄如同滿月的眼、反手抓住了男人的手掌,順勢被帶入古鏡之中。
在違背力學的虛幻空間中,他脫去了繁複厚重的外衣和腰帶、仰頭看著明顯高出他至少兩顆頭的男人……或者該稱為妖物。 有著狐妖姿態的男人滿臉不悅,終於出聲責備。 「就那麼想死、非要過來『這裡』不可?」 「嗯。」 花了將近五年蓄起長髮的少年點頭,仍然揪著他的手不放。 「兩個人都死掉、這樣更好。」
粉圓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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凝視桌上那碗比白雪透明許多、澆滿了棕色球體和甜膩糖水的食物,老實說、這把平安時期的古刀相當困惑。
另外兩隻比較大的狐狸倒是毫無顧忌地大口吞食。舔著手指的模樣,就和大廣間裡其它各自成圈的刀們如出一轍——對著淋了糖水的冰粉,還有一大碗的青蛙蛋麼? 「小的,左顧右��會被偷襲吶。」 最大的那隻狐狸眼睛瞇起的弧度看起來絕對不懷好意,手中木筷飛快地挾持走差點就要崩解的冰山頂尖、隨即送進嘴裡。 盤起長髮成髻,第二柄來到本丸的大狐則是適時的給予警告。 「您那顆悶熱的腦袋是被毛給塞滿了麼?古參的鳴狐殿下說過——」
這警告終究是太遲了些,一只黑色、鑲著金邊的手套「啪」一聲抓住了那只惡質狐狸的後腦。他的手不大、練度達到最高的力量還是不得小覷。 鳴狐肩上的狐已經懶得說話,以無奈眼神看著闖禍者,第二柄的小狐代替發言說完了關於被交覆過數次卻不曾被他記得的禁則事項。
「鳴狐殿下說過,不准欺負小的、不可以、絕對不行,不然。」
他沒有說完,因為也沒有必要。 跟隨著被拖出大廣間的第一柄狐刀們,第二柄和第三柄的鳴狐也跟隨著所有人視線終點跑去,留下正在化水的午後甜食。
皺起眉頭,第二柄撐著頰對根本來不及反應這一切的第三柄小狐丸建議。 「這東西平安京沒有的,上面這些也不是青蛙蛋。是主子出身的南方島嶼來的冰品,一口氣帶了百多份肯定相當費事。別浪費,化成水就不好吃了。」
然後他們一起看向了第一柄還剩著半座冰山的碗,有默契地同時露出小牙笑了出來。
百合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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面對據說是因為難以理解的心思、患上重症而被隔離的少年,他是感覺不甘心的。不甘心所帶來的悔意無法以口傳達,因此幾乎衝得眼眶發熱、結出比體溫還要高的水珠。 那樣的熱意讓喉嚨也疼得發慌,他終於按耐不住滿溢而出的言語,對著患病已久的少年附耳低語。 這讓白金髮色的少年一愣,縮起身體發出含糊的笑音。他抿抿唇口,理解了這大概就是被稱為「失戀」的事吧? 即便如此、現在胸口所得到的疼痛或許也不及咳嗽著的少年那樣、被大將稱作「不治之症」,所有的疼痛都能被某些事物醫治。(例如他笑著的模樣,只是今天好像突然沒了效力)
那麼他的病又到底是怎麼回事呢? 關於「愛情」,到底是什麼模樣?他還是懵懵懂懂、無法理解的太多。
足以清晰說出的、告訴總為他人帶來幸運的少年的,也僅只是如此而以、還附加了難以停止的眼淚。
但幾乎要被晨光溶解的少年手上,開綻了一朵如同月光的銀色百合花。
眼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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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關於眼睛的事 1. 無法戴隱形眼���,上課時戴無框、在家裡是黑框。(教唆她換紅框吧) 2. 丹鳳眼、標準的單眼皮,睡差了水腫得特別厲害。 3. 睫毛又密又長、常常睫毛倒插。 4. 有時候笑起來好像狐狸一樣。(但不常笑) 5.
突然想起交雜寫著帳目和日記的手帳上空缺著的第五項,她是有些著急的想填上第五點的。 自從搬來小小的家之後、她那個充滿迷團的小戀人總會在意外的地方放了點解答的頭緒。而這是第一次、第一次,她不清楚她是否也曾仰躺在其它人腿上,緊皺著眉和眼宣稱她準備好了。
看起來輕鬆交扣在腹上的手指,指尖看起來有些泛青。
嗯,她在「-關於身體的事」裡面曾經寫過,她不習慣身體接觸(約半年前),現在似乎也是和啤酒一樣變得習慣了。 所以眼藥水嘛…… 還是別習慣好,自己是能懂是有多喜歡這雙眼睛的。雖然皺著眼眉也很可愛,但果然還是張開眼時、平靜到能把她的身形納入那兩潭黑水的姿態是最能滿足的了。
低下頭,她輕輕吻了口毫無防備的她。 她疑惑地、或者說驚訝地張開了眼,然後水滴像是窗外的大雨那樣落進左方的深潭。 這樣的把戲,面對那麼聰明的她還能有第二次機會嗎?
「……在此之前妳每次都閉著眼睛。」 按了按流了點餘水的左眼,她說。 得意地搖了搖手中的小罐,她笑著回答。 「妳一直都張著眼,那麼接下來也要繼續保持喔!好孩子。」
睡前的小動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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智者的床位從他十多年前住在這裡後、就再也沒有搬動過。他不知道前任主人是誰,也不清楚為什麼床會那麼剛好的座落窗台旁、把窗扇打開後剛好能遮蓋月光的位置。 吉芬的夏日只要夜半清朗,月光就幾乎像是日光那樣明亮得把影子曬得漆黑、落在他的地板上。噴水池旁長的橡樹隨著南風輕輕搖曳,招搖的模樣讓他想起剛入住沒多久時,對於古舊城堡的印象還停留在各種幽靈竄行,卻怎麼也不會關上窗戶的事。
對了,為什麼不關窗呢?
起身、他伸手推了推窗扇,然後一陣很輕很輕的、玄黑的微風吹拂,帶來了沙塵的氣味和屬於禽鳥的��熱——昨天也是這樣呢,起身想要關上窗卻沒有。前天也是。大前天、甚至前年、五年前、十年前也是。
從他來到這裡的第一天便是如此。
回來了。青年的嗓音很輕、像怕吵醒沉睡的夢;而他也沒打算戴上眼鏡把多年的解看得透徹,只是笑著接過他的手。 「歡迎回來。」
他的窗是白鷹的巢穴入口,他於桌邊放上的燈火是指引他歸巢的燈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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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岡愛之助が5役踊り分け 「壽初春大歌舞伎」大阪松竹座で開幕
#歌舞伎 #片岡愛之助 [SANSPO]妻で女優の藤原紀香(48)が1階ロビーでひいき筋と応対するなど劇場全体が新春らしい華やいだ雰囲気の中、片岡愛之助(47)は昼の部「大津絵道成寺」で藤娘、鷹匠、座頭、船頭、鬼の5役を踊り分け。 また、世話物「艶容女舞衣(はですが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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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初春大歌舞伎が開幕、片岡愛之助が5役を踊り分け 藤原紀香も ...
#歌舞伎 #片岡愛之助 [SANSPO]妻で女優の藤原紀香(48)が1階ロビーでひいき筋と応対するなど劇場全体が新春らしい華やいだ雰囲気の中、片岡愛之助(47)は昼の部「大津絵道成寺」で藤娘、鷹匠、座頭、船頭、鬼の5役を踊り分け。 最後で鬼の愛之助に松本幸四郎(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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片岡愛之助が5役踊り分け 「壽初春大歌舞伎」大阪松竹座で開幕
#歌舞伎 #片岡愛之助 [SANSPO]妻で女優の藤原紀香(48)が1階ロビーでひいき筋と応対するなど劇場全体が新春らしい華やいだ雰囲気の中、片岡愛之助(47)は昼の部「大津絵道成寺」で藤娘、鷹匠、座頭、船頭、鬼の5役を踊り分け。 また、世話物「艶容女舞衣(はですが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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壽初春大歌舞伎が開幕、片岡愛之助が5役を踊り分け 藤原紀香も ...
#歌舞伎 #片岡愛之助 [SANSPO]妻で女優の藤原紀香(48)が1階ロビーでひいき筋と応対するなど劇場全体が新春らしい華やいだ雰囲気の中、片岡愛之助(47)は昼の部「大津絵道成寺」で藤娘、鷹匠、座頭、船頭、鬼の5役を踊り分け。 最後で鬼の愛之助に松本幸四郎(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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