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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비티
모든 영화에는 장르가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 또한 그러하다. 일단 우주가 배경이다 보니 SF에 가까울 것이고, 주인공이 90분동안 우주에서 어떻게든 지구로 귀환하는 모습을 담았으니 재난 생존 스릴러일 것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모습일 뿐이다. ‘그래비티’의 본질은 어떤 한 여성, 그리고 한 어른의 성장 드라마이다. 이 글은 ‘그래비티’의 전반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으므로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나, 좋은 영화는 내용을 미리 안다고 딱히 재미가 줄어들지 않는다.
인류는 증기기관을 발명한 뒤 300년이 지나지 않아 우주에 진출했다. 달에 사람을 보내고 태양계 밖을 탐험하는 우주선을 쏘아 올릴 때까지, 인류 문명은 수많은 벽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갔다. 영화 또한 허블 망원경의 통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라이언 스톤 박사(산드라 블록 역)와 코왈스키(조지 클루니 역)가 소속된 팀이 외부에 수리를 하러 나간 시점에서 출발한다. 심지어 스톤 박사의 우주복에서는 메디컬 문제가 있다는 경고음이 지속적으로 울린다. 그리고는 곧이어 러시아의 인공위성 폭파로 인해 잔해가 날아오게 되고, 이 때문에 스톤 박사는 우주 속으로 날아가 산소가 부족한 상황에서 우주 미아가 될 위기에 처한다. 수많은 국가에서 인공위성을 쏘아 올릴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위협할만한 문제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스톤 박사에게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 날은 스톤 박사에게는 우주에서의 마지막 날이다. 스톤 박사는 우주의 고요함이 좋다고 말한다. 이후 밝혀지는 내용이지만, 스톤 박사는 놀이터 사고로 허무하게 딸을 잃었고 그 때의 기억으로 한동안 운전만 하면서 지내다가 지구 밖으로 일종의 회피를 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우주에 나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위성의 잔해는 아직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고 있었고 산소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우주 속을 떠돌던 스톤 박사를 마침내 코왈스키가 발견한다. 그리고 지구로 다시 귀환하기 위해 다른 우주정거장으로 출발한다.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아이처럼 불안해하며 떨어지기조차 무서워하는 스톤 박사를 달래주는 코왈스키의 모습은 마치 아이를 달래는 부모의 모습이다. 코왈스키는 스톤 박사가 정신을 놓지 않도록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말을 시키기도 한다. 심지어 추진조차 할 수 없는 스톤 박사를 이동시키기 위해 연결한 둘 사이의 끈은 마치 탯줄처럼 보인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그렇듯, 코왈스키는 정류장에 도착하는 과정에서 결국 그 줄을 끊고 스톤 박사의 곁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스톤 박사는 혼자가 된다. 코왈스키는 우주 속으로 멀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계속 통신을통해 스톤 박사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쳐준다. 하지만 화면에 코왈스키의 모습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오로지 음성만 나올 뿐이다. 이제는 부모의 품을 떠난 아이처럼, 정말 스톤 박사 스스로 헤쳐나가야 하는 것이다. 가까스로 우주정거장에 도착해 산소를 들이마시고 ��주���은 벗은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스톤 박사에서는 뱃속의 태아의 모습이 보인다. 하지만 설상가상으로 폭발음과 함께 우주선에 불이 나기 시작한다. 전에는 부족했던 산소가 이제는 충분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 한 것이다. 또한 탈출하는 과정에서 우주선이 줄에 감겨 위험해지기도 한다. 스톤 박사를 살려주던 줄이 이제는 장애물이 된 것 또한 역설적이다. 그렇게 또 다른 정거장으로 갈 있다고 생각했던 우주선에 탑승하지만 연료가 부족한지 작동을 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지구와 통신에 성공한 라디오에서는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정체불명의 사람과 개 짖는 소리, 아기의 소리와 자장가 소리가 들려온다. 스톤 박사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소 공급장치의 압력을 낮추고 눈을 감는다.
이 때 창문 밖으로 코왈스키의 얼굴이 보인다. 이 장면은 현실이 아닌 완벽한 환상 또는 꿈이다. 우주선 내부로 들어온 상상 속의 코왈스키의 설득에 스톤 박사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생각해낸다. 착륙 과정을 발사에도 적용시키는 것이다. 훈련 과정에서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시도이다. 하지만 스톤 박사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하는 선택을 한다. 딸의 죽음을 받아드리기 시작하고, 소화기 하나만 들고도 우주로 나가 지구로 복귀할 수 있는 마지막 정거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지구로 떨어지면서 화염에 휩싸인 우주선 안에서 중력을 느끼고 받아드리기 시작한다. 이 때의 ‘I’m ready’라는 스톤 박사의 대사는 그녀가 전과는 다르게 변화되었고 성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침내 호수에 비상 착륙을 한 그녀는 우주복을 벗고 물에서 빠져나와 손가락 마디 사이사이로 흙을 느낀다. 그리고 일어선다. 우주 생활로 인해 힘이 ���어서 넘어지지만 그녀는 비로소 웃어 넘기고 다시 한 발을 내딛는다.
이 영화는 연출적으로도 굉장한 우주적 체험을 가져다 준다. 산드라 블록의 연기와 조지 클루니 특유의 능청스러운 캐릭터는 물론이고 오프닝을 장식하는 롱테이크 씬, 광활한 우주의 장관, 그리고 이를 이용해서 사물의 크기 변화를 통해 화면을 전환하는 방식은 알폰소 쿠아론과 엠마누엘 루베스키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래비티’는 단순한 우주 영화가 아니다. 우리가 중력에 맞서서 일어서는 방법은 반대쪽으로 힘을 줘 버티는 것밖에 없다. 영화의 제목이 ‘그래비티’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영화 속에서 스톤 박사의 주변에 존재하는 수많은 문제는 사실 중력처럼 어디에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가 대처해야 하는 방식은 회피하는 것도 부정하는 것도 아닌 발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스톤 박사는 정신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불능의 상태에서 시작해 혼자의 힘으로 일어설 때까지 성장한다. 이는 우리 모두가 거쳐왔던 과정이며, 앞으로 계속 겪어야 할 과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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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한번씩은 째고 살자
세상에 문제는 많다. 돈이 없을 수도 있고, 상사든 교수든 윗사람이 스트레스를 줄 수도 있고, 인간관계나 연애가 힘들 수도 있고, 하려는 일이 뜻대로 안 될 수도 있다. 그리고 특히 돈 없고 능력 없는 20대에는 이런 문제가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오늘 나에게 이 모든 종류의 문제가 한꺼번에 닥쳤다는 것이다.
솔직히 짜증이 안 난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일어났나 싶고, 되돌아보니 좀 더 열심히 현명하게 살았으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텐데 싶기도 하고, 그러다가도 나름 잘 살았는데 이건 너무하다 싶기도 한다. 화나고 열받는데 한편으로는 내가 원망스럽고 슬프고, 근데 또 일단 오늘은 넘기고 싶고, 그런다고 내일이 딱히 다를 것 같지도 않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문제는 어떻게든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담배 하나를 물고 가만히 생각한다. 문제는 해결하는 데는 많은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외로, 운이 좋은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의도치 않은 일자리가 찾아온다거나, 내가 고민하던 문제가 사실은 오해였다거나, 갑작스러운 행운이 날아온다거나 등등. 그리고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운이 좋아서 풀린 문제가 꽤 많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노오력. 솔직히 노력해서 안될 일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리고 노력에는 간단하지만 잔인한 논리가 있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내가 충분히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일종의 자책 또는 자기합리화가 가능하다. 꽤 유용하면서도 꽤 아픈 논리다.
하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었으니, 바로 ‘배째라’이다. 딱히 해결 방법이라고 부르기는 뭐하지만, 때로는 배를 한번씩 째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도 불가지론자에 가깝지만 때로는 신의 존재가 유용하기도 하다. 너가 만들었으니까 너가 책임져라. 나는 모르겠다. 난 돈이 없으면 라면 먹을거고, 사람 때문에 갈등이 생기면 걔네가 알아서 풀게 해라. 물론 이게 장기적인 선택지가 되면 곤란하다. 하지만 운도 따라주지 않고 내가 뭘 하기도 지친다면 하루 이틀쯤은 그냥 넘기자.
그래서 나는 오늘만큼은 배 한번 째기로 했다. 난 내 성에는 차지 않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살았다. 오늘은 운도 더럽게 없고 짜증나는 사람도 있었다. 통장 잔고는 텅텅 비었고 그 와중에 빠져나갈 돈은 쌓여있다. 딱히 방법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넘길 수 만은 없을 것 같다.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근데, 오늘은 그냥 잘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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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이냐 재능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성공하고 싶다. 성공의 정의와 기준은 각자 다 다르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다 저마다의 성공을 하고 싶다. 돈도 많이 벌고 싶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싶고, 큰 상을 받거나 어떤 위치까지 올라가고도 싶다.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흔히 말하는 성공의 문턱을 넘어서는 사람은 수많은 사람들 중 몇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성공을 이룬 몇몇 사람들을 보고는 그 원인을 찾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노력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재능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노력 없이는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타고난 사람은 이기지 못한다고도 한다. 이건 마치 밤하늘에 떠있는 아주 밝은 별을 보는 것과 같다. 지표면에서 별을 바라보면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별이 실은 가까워서 밝게 보이는 건지 멀리 있지만 그 자체로 강력한 빛을 내서 밝게 보이는 건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유일한 방법은 우주로 날아가서 확인해 보는 건데 슈퍼맨이 아닌 이상 불가능�� 보인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재능으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고, 노력으로 성공했다고 하면 타고난 유전자가 어땠는지 모르는 것이다. 이 글은 반농담 반진담으로 성공을 만드는 요인이 노력이냐 재능이냐를 분석해본 것이다. 그냥 가볍게 일어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가설이 있다. 첫 번째로, 노력이 성공을 만든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사실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세상은 공평한 게임인 것이다. 잘나고 싶으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면 여기서 주의해야할 점은, 노력이 꼭 시간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논리 안에서는 노력이 재능의 라이벌로써 그라운드 위에 있으니, 선천적인 것과 반대되는 후천적인 모든 것을 노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꼭 10시간 공부한 놈이 1시간 공부한 놈을 이기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이 정량적인 차이와 반대되는 결과가 단지 지능의 차이에서만 비롯된 것도 아니다. 방법의 차이다. 계속 같은 방법으로 공부하는 놈은 같은 내용을 계속 같은 시간을 들여 공부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공부 방법을 시도해보면, 처음에는 성과가 나지 않더라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더 좋은 공부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10시간짜리를 이기는 1시간 공부하는 놈이 되는 것이다. 노력이 꼭 시간과 양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주의하자. 사실 도전과 시행의 반복이 질적으로 노력의 더 큰 부분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성공의 원인이 재능이라고 가정해보자. 골치가 아프기 시작한다. 세상이 불공평해진다. 나보다 더 똑똑하고, 잘생기고, 부모님이 잘나가고, 환경이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노력이야 부족하면 내 탓이라도 할 수 있지만 태어나면서 가지고 있는 것은 내 선택권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어쩌라고.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 어쩔 수 없다. 따지려면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신을 찾아가서 따져야 한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우리에게는 다시 두 가지의 선택지가 있다. 본투비(born to be)에 불평하거나 만족하면서 사는 것, 그리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아직 알아내지 못한 내 잠재력을 찾는 것.
사실 세상은 칼로 자르듯 두 가지로 나눌 수 없다. 성공의 원인은 노력도 일부 있고 재능도 일부 있고 또 다른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와 같이 두 가지로 생각해볼 때,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분명히 있다. 가만히 있거나 움직이는 것, 둘 중 하나를 선택하면 된다. 간단하면서 간단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 외의 선택지는 없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 누가 성공을 하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이루려면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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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처럼
이 글은 전반적으로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에 관한 글이다. 물론 기생충에 대한 해석을 하려고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지금도 유투브에는 기생충 세 글자만 치면 자잘한 의미를 설명하는 수많은 영상이 나오지만 사실 그런 거 다 필요 없다. 수석의 의미가 뭐니, 왜 짜빠구리가 나오고 왜 하필 기택의 가족 중에 기정만 죽었는지를 하나하나 분석해 보는 것도 좋지만, 사실 아무 생각 없이 두 시간동안 보고만 있어도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다. 그래서 기생충이 잘 만든 영화이고, 봉준호나 타란티노 같은 감독이 좋은 감독인 것이다. 좋은 영화는 예술성과 상업성이 적절히 섞여야 한다. 한 쪽이 과하면 지루하고, 다른 한 쪽이 과하면 진부하다. 전자의 경우는 영화관에 걸리는 것조차 힘들고, 그 빈자리를 메우는 후자의 경우는 수없이 양산되어 돈을 벌고 있지만 이 또한 점점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봉준호의 기생충은 작품성은 물론이거니와 한국 영화 시장에 미치는 파급효과 또한 크다.
솔직히 말해서 최근에 극장에서 본 한국 영화중에 기생충과 몇몇 영화를 제외하고는 만이천원이라는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영화가 없었다. 물론 영화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근래에 개봉하는 한국영화들이 문제가 있는 것은 명백해 보인다. 예고편만 봐도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고 결말이 어떻게 날것인지 뻔히 보이고, 개연성이라고는 없으며, 치는 개그는 재미가 없고, 완성도는 더 이상 말할 필요 없다. 그 와중에도 기생충은 입소문을 타 천만관객의 선택을 받았고, 오스카 수상 이후에는 흑백판으로 재개봉하여 여러 신작들을 제치고 박스오피스 1위를 갱신했다. 과연 이게 정말 좋은 작가와 감독이 없어서일까. 이런 질문에 항상 나오는 말이 2003년이다. 무려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장화 홍련, 지구를 지켜라 같은 영화들이 같은 해에 개봉했다. 이때만 해도 지금은 거장으로 불리는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 감독은 신예 감독이었고, 밀정과 놈놈놈(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을 만든 김지운 감독과 1987의 장준환 감독도 잘 알려지지 않았을 때였다. 지금이라고 이런 작가와 감독들이 없을까. 드라마 시장을 봐도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같은 공식을 반복하던 작품들 사이에서 tvN과 JTBC 같은 상대적 마이너 채널에서 시그널, 도깨비, 스카이 캐슬과 같은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판도 자체가 바뀌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정말로 좋은 감독과 작가가 없는 것일까. 혹시나 극히 상업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영화판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에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많다. 사실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그것이 물질적인 이득이든 자신의 정신적 합리화를 위해서든(보통 이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들을 쉽게 이용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에게 쉽게 흔들리고 상처를 받는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각자의 방법으로 대응할 수도 있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나 할 일 잘하는 것이다. 마치 한국 영화의 ���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버린 봉준호처럼. 봉준호 감독도 몇 년 뒤에는 또 다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도 있고, 할리우드의 모 거장 감독처럼 다음 영화의 투자를 못 받을 수도 있고, 그 외의 수많은 외부적인 문제에 부딪힐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의 차기작이 끝내주게 좋은 영화일 거라는 것이다. 만약 내 꿈이 외부적인 원인에 의해 흔들린다면, 내 할 일이나 하자. 봉준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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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낙서장 - be myself
be myself. 직역하자면 ‘자기 자신이 되라’. 얼핏 보면 대단한 아무개의 명언이나 오글거리는 자기계발서의 한 문장 같지만, 사실 내 노트북 비밀번호다. 몇 년 전, 지금은 전원도 잘 들어오지 않는 이 노트북이 갓 나온 새 모델이었을 때, 고등학교를 들어가는 기념으로 이놈을 선물 받은 나는 비밀번호를 어떤 걸로 할까 고민하다가 이 여덟 글자를 입력하고는 아직까지 그대로 쓰고 있다. 그 때는 별 생각 없이 썼던 이 문장은,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관 중에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전과 마찬가지로 같은 노트북 앞에 앉아 어떤 주제로 글을 써볼까 고민하는 나는, 이 간단한 두 단어에 대한 생각을 가볍게 적어보려 한다.
자기 자신이 되라. 어떻게 보면 웃긴 말이다. 김치볶음밥을 시켰는데 김치볶음밥이 나오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는 당연히 각자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종종 이 당연한 명제에 의심이 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자의는 타의든 사회에 속해 있고, 사회로부터 그 구성원이 되라고 요구받는다. 구성원이 되려면 때로는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요구받는 방식은, 특히 이 나라의 신입생들에게는, 그렇게 관대하지 않다. 당장 이제껏 살아왔던 시간만 되돌아 봐도 그렇다. 나는 입시 준비 시절을 포함한 약 8년간 그 방식을 아주 충실히 시행해왔다. 전쟁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입시 전쟁에서 승리하고 ���리나라에서 최고라고 하는 대학교에 들어갔다. 학부 특성 상 내가 원하는 학과는 어디든 언제든 들어갈 수 있고 열심히만 한다면 취업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남들이 말하는,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졸업해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는 인생의 반을 이미 이뤘다. 하지만 이제 와서 느끼는 건데, 별로 좋지 않다. 움직이는 거대한 자동차의 바퀴가 열심히 노력해서 모터가 된 기분이다. 타이어는 나가면 갈아버리면 그만이지만, 그것들의 원동력인 모터가 나가면 그리 작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그래봤자 타이어든 모터든 기름주면 돌아가는 건 똑같다. 나는 부품이 아니라 사람이다. 기름이 아닌 밥을 먹고, 공장이 아닌 엄마 뱃속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냥 나로 살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내 방식대로 살기로 했다. 그렇게 되었다. 어떤 게 나 다운 거냐고 묻는다면, 지금까지 지나갔던 모든 모습이 나다. 행복했던 장면도, 부끄러운 장면도, 무엇인가를 이룬 장면도, 용기가 없어서 실패조차 못 했던 장면도, 한 편의 영화처럼 모두 내 모습이다. 인정하고 나면 자존감이 떨어질 일도, 두려워 할 일도 없다. 앞으로 뭘 할지는 모른다. 그냥 이것저것 할 생각이다. 그러다가 진짜 재밌는 게 생기면 평생 할 생각이다. 주변에는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고, 응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상관없다. 벽 밖의 세상을 알아버린 트루먼처럼 그냥 이렇게 살 수 밖에 없다. 나는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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