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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The Razor's Edge)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친구의 추천으로 처음 읽게 된 서머싯 몸의 소설. 꾸밈 없는 전개와 위트로 정말 재미있게 끝까지 빠르게 읽었다. 고전 중 이토록 현대에 적용할 수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맛볼 수 있을까? 나는 더 없다고 본다. 이 소설이 몸의 마지막 작품이라 하니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하루키의 '도시와~벽' 역시 그의 젊은 시절 패기와 노년기의 포용이 결합된 아름다운 대서사시인 것처럼.
나는 이 많은 인물들 중에 이사벨이 내 마음에 가장 와닿았다. 머리로는 알지만, 자꾸 튀어나오는 마음 속 말들이 나에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남자를 붙잡는 데에서 그렇다. 결국 이사벨은 자신이 그리는 이상적인 삶을 선사해줄 남자와 결혼하지만 래리를 재회했을 때 여전히 강렬한 욕망과 끌림을 느낀다. 특히 자동차를 타고 뒷좌석에서 래리를 바라보는 이사벨을 관찰하는 서술자의 표현(313쪽)이 압권이다. 이처럼 한 명 한 명 펄떡이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을 거두지 않고, 각 인물이 선택한 삶을 긍정하는 방식이 매우 매력적이었다. 노년기 작가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포용인지도 의문이 들지만, 모든 선택과 인물이 그래도 된다고 모두 원하는 것을 추구했고, 얻었으니 그 자체로 성공담이 아닌가하는 결말이 마음에 들었다. 특히 긴 글들이 한숨에 읽히는 놀라운 필력은 말할 것도 없다. 서머싯 몸의 다른 작품들을 더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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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The Razor's Edge)
"면도칼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니라."
본래 사람을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을 제대로 알기는 더더욱 힘들다. 사람이란 오로지 그 사람 자체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난 지역, 처음으로 걷는 방법을 배운 아파트나 농가, 어릴 적 하던 놀이, 자연스럽게 들으며 자란 민간 속설들, 먹는 음식, 공부한 학교, 좋아하는 스포츠, 읽은 시들, 믿는 신 등이 그 사람을 만든다. 이러한 모든 요소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규정한다. 이것들은 그저 남에게 전해 들어서는 알 수 없고 직접 경험해야만 알 수 있다. 스스로 겪고 생활해야만 알 수가 있다.
이따금 이사벨의 눈길이 그에게 머물곤 했는데 그때 그녀의 표정을 보면 그냥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푹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칠 때면 그의 눈빛에도 말할 수 없는 다정함이 묻어났다. 세상에 사랑하는 젊은 연인들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없으리라.
하지만 무엇보다도 행복한 것은 조그만 테이블에 래리와 함께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신이 나서 재잘거리는 자신을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는 래리가 사랑스러웠다. 래리와 있으면 그 누구와 있을 때보다도 편안하다는 사실이 행복했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에 막연한 불안감도 있었다. 래리 역시 편안해 보이긴 했지만, 꼭 그녀와 함께 있어서라기보다는 주변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가 한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그런 것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래?" "지식을 얻는 거지." 그는 미소를 지었다.
'오디세이아'를 원문으로 읽는다는 게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 몰라. 뭐랄까, 발끝으로 서서 손을 한껏 뻗으면 별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두려워서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나는 등줄기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인간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진실한 감정을 마주했을 때 흔히 그러는 것처럼 약간의 경외심마저 느껴졌다.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이런저런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지독하게 괴로워하면서 도저히 극복하지 못할 것처럼 생각해. 하지만 바다가 얼마나 유용��지 알면 놀라게 될 걸."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나의 ��점 가운데 하나는, 못생긴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것에는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사벨은 과거에 그를 잃었다. 하지만 그를 다시 만났을 때, 아무리 상황이 변했다 할지라도 당연히 예전의 래리 그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며 그가 아직 자신의 남자라는 느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약간 당황스러웠다. 마치 햇살을 손에 쥐어 보려고 애써도 잡자마자 이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나는 이사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나는 래리의 균형감 있게 붙어 있는 양쪽 귀와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에 머무는 그녀의 애정 어린 눈빛을, 그의 마른 관자놀이와 홀쭉한 뺨을 바볼 때 미묘하게 변하는 그녀의 표정들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야위고 기다란 그의 손가락을, 마르긴 했지만 여전히 강하고 남성미가 느껴지는 그 손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은 표정을 풍부하게 담은 잘생긴 입술, 육감적이진 않지만 적당히 통통한 그 입술에, 그리고 깨끗한 이마와 윤곽이 뚜렷한 코에 한참 머물렀다. 그는 새 옷을 입고 있었지만, 엘리엇처럼 완벽한 세련미를 풍긴다기보다는 마치 1년 동안 매일 입던 옷을 입은 사람처럼 무심해 보였다. 그의 모습이 이사벨의 모성애를 자극한 것 같았다.
"그 사람에게 특히 매료된 것은 무엇 때문이었나?" 래리는 대답하기 전에 한참 동안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그의 눈은 마치 내 영혼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볼 것처럼 날카로웠다. "성스러움이요." 나는 약간 당황스러웠다. 고급 가구들로 장식하고 벽에 아름다운 그림들이 걸려 있는 방에 울려 퍼진 그 한마디는, 마치 위층 욕조에서 흘러넘쳐 천장으로 스며 똑 떨어진 물 한 방울 같았다.
"뭐라고 하시든 상관 안 해요. 그냥 제 직감을 믿을래요."
예술은, 관습을 그 자체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때 성공하는 법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그런 종류의 일은 도저히 할 수 없었어요. 너무 하찮게 느껴졌거든요. 그땐 생각할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끊임없이 질문했죠.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 어차피 내�� 살아 돌아온 건 단지 운이 좋아서였잖아요. 그래서 제 삶을 십분 활용하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죠. 그 전까지 저는 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때부터 신을 생각하기 시작했어요.
누군가를 정말 좋아하면 그 사람의 잘못을 비난하긴 해도 그 사람��� 대한 애정이 식지는 않거든. 이사벨도 나름대로 나쁜 여잔 아니야. 게다가 누구보다도 우아하고 매력적이잖아. 그 아름다움이 완벽한 취향과 가차 없는 결단력이 합쳐지는 결과임을 깨닫게 되었다고 해서 내가 너를 덜 아름답다고 생각할 순 없어.
결국 내가 등장 시킨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 원하는 바를 얻지 않았는가? 엘리엇은 사교계에서 명성을, 이사벨은 막대한 재산을 확보하여 활동적이고 교양 있는 지역사회에서 확실한 지위를 얻었으며, 그레이는 안정적이고 수익성 높은 직업과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여 6시에 나설 수 있는 사무실을 얻었다. 수잔 루비에는 안정을, 소피는 죽음을, 래리는 행복을 얻었다. 물론 '자칭' 지식인들은 거드름을 피우며 트집을 잡겠지만, 우리 같은 평범한 대중은 모두 성공담을 좋아한다. 그러니 나의 결말도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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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설의 주인공이 이토록 솔직할 수 있을까. 일기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존재가 인간이기에 조금 비도덕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만나면 내가 품었던 못된 생각들을 곱씹는 해방감을 느끼곤 했었는데, '이방인'의 주인공은 감히 공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건조하고 무심하다. 그러나 그 건조함을 따라가다보면 그 끝에는 삶에 대한 찬란한 경탄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추락의 해부'에서 재판의 세계를 해부한 것과 같이, 범죄보다 용의자의 심리를, 용의자의 가족을 낱낱이 해부한 것 같이 주인공 역시 엄마의 장례식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많은 이들의 비난을 산다. 그리고 그는 법정의 공기와, 그리웠던 바깥 세상의 소리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한 구절을 잘라내는 것이 참 어색하다. 한 구절을 타이핑하다 보면 다음 장, 그 다음 장까지 어느샌가 눈으로 읽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한다. 전체가 소설 그 자체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서래와 해준이 볶음밥을 같이 먹는 씬을 누군가에게 똑 떼어내어 보여준다면, 불륜하는 주인공들 혹은 죽은 피해자들의 사진을 보며 저녁식사를 하는 이상한 형사라고 보여질 수 있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장례식날 느꼈던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음미해야만 단순히 그 한 줄을 넘어서는 삶에 대한 처절한 진실을 발견할 수 있다.
감옥에 수감된다는 것은 인생에서 겪기 어려운,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다. 특히나 아주 작은 범죄조차 연루되지 않았던 나로서는 범죄자를 어떻게 처벌하는지, 교화하는지에 대한 이론은 흥미롭게 바라보면서도 그 수감되는 범죄자가 나라는 상상은 결단코 해본 적이 없다. 이 주인공을 따라가다 보면 내가 마치 수감된 것처럼 생생하게 법정과 감옥의 공기가 느껴진다. 그 찐득한 여름에서 카뮈는 사형을 선고 받고 감옥에 누워 여름 밤의 뱃고동 소리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어머니를 마침내 이해하며, 본인이 살아왔던 무관심한 삶의 태도 역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꼭 모든 삶의 장면들을 아름답게, 동화처럼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 무관심한 태도조차 하나의 태도인 것이다. 아주 일반적으로 인간은 인간을 사랑하고, 자식은 부모의 죽음에 세상을 잃은 듯 슬프고, 도덕적인 인간은 범죄자가 될 수 없고, 범죄자는 사회에서 악랄한 비난을 받아야 마땅하고, 인간은 이유 없이 사람을 살해하기 어렵다는 것. 이 한 줄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던 소설이었다. 종종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말을 꽤 많이 하는데,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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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이방인
불로 지지는 태양의 열기가 내 두 뺨으로 확 번졌고 땀방울들이 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내가 엄마의 장례를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고, 그날처럼 특히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줄들이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펄떡거렸다.
하지만 구금 생활 초기에 가장 힘든 점은, 내가 자유로운 사람처럼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가령 나는 바닷가에 가 있고 싶었고 바다 쪽으로 내려가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곤 했다. 발바닥 밑으로 밀려드는 첫 파도의 소리, 몸이 물속으로 들어갈 때의 느낌, 그리고 물속에서 맛보는 해방감을 상상하다 보면 나는 문득 내 감옥의 벽들이 얼마나 내 가까이 있는가를 실감하는 것이었다.
거듭 말하지만, 문제는 오로지 시간을 보내는 일이었다. /// 상상력을 동원하여 방의 한구석에서 출발해 그리로 다시 돌아올 때까지 지나는 길에 놓여 있는 것을 전부 마음속으로 꼽아 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금방 끝나 버렸다. 그러나 다시 되풀이할 적마다 조금씩 길어졌다. 왜냐하면 거기 있는 가구를 하나하나 기억해 내고, 그 가구 하나하나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또 그 물건 하나하나마다 그 모든 세부들을, 그 세부들마다 그 자체의 어떤 상감이나 갈라진 틈을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심문이 끝났다. 법원을 나와 호송차를 타러 가면서, 나는 짧은 한순간 여름 저녁의 냄새와 빛을 기억해 냈다. 굴러가는 감옥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가 좋아했던 한 도시의, 그리고 이따금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어떤 시각의 귀에 익은 그 모든 소리들을, 마치 내 피로의 밑바닥으로부터 찾아내듯이 하나씩 되찾아 냈다. 이미 고즈넉하게 가라앉은 대기 속에서 들려오는 신문팔이들의 외치는 소리, 작은 공원 안의 마지막 새소리, 샌드위치 장수들의 호객하는 소리, 시내 고지대의 굽은 길에서 울리는 전차의 마찰음, 그리고 항구 위로 어둠이 기울기 전 하늘의 저 술렁이는 소리, 그러한 모든 것이 나에게는 소경이 되어 더듬어 가는 행로를 재구성해 주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내가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곤 했던 그런 시각이었다. 그때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언제나 가볍고 꿈도 없던 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무엇인가 달라져 있었다. 왜냐하면, 다음 날에 대한 기대와 더불어 이제 내가 다시 대면한 것은 바로 나의 감방이었으니 말이다. 마치 여름 하늘 속에 그려진 낯익은 길들이 우리를 감옥으로 데려갈 수도 있고 순진무구한 잠으로 데려갈 수도 있다는 듯이.
비록 피고인석에 앉아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을 듣는 것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이다. 검사와 변호사 사이에 논고와 변론이 오가는 동안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아마 내 범죄에 대해서보다 나에 대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그토록 악착스럽게 덤벼드는 것은 의외였다. 나는 다정스럽게, 거의 애정을 기울여, 나는 원래 진정으로 무엇을 뉘우쳐본 적이 없다고 그에게 설명해 주고 싶었다. 나는 언제나 앞으로 일어날 일, 오늘 일 또는 내일 일에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빠르게, 좀 뒤죽박죽이 된 말로,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말인 줄 알면서도, 그것은 태양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법정 안에서 웃음이 터졌다.
���국 내가 기억하는 것은 오직 변호사가 이야기를 계속하는 동안, 거리로부터, 다른 방들과 법정들의 전 공간을 거쳐서, 아이스크림 장수의 나팔 소리가 나의 귀에까지 울려 왔다는 것뿐이다. 나는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게 된 어떤 삶, 그러나 나로 하여금 가장 초라하지만 가장 끈질긴 기쁨을 맛보게 했던 어떤 삶에의 추억에 휩싸였다. 여���의 냄새들, 내가 좋아하던 거리, 어느 저녁 하늘, 마리의 웃음과 옷. 그러자 내가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그 모든 무용한 짓이 목구멍까지 치밀고 올라와 숨이 막혔다.
밤 냄새, 흙냄새, 소금 냄새가 내 관자놀이를 시원하게 식혀 주었다. 잠든 그 여름의 그 신기로운 평화가 밀물처럼 내 속으로 흘러들었다. 그때 밤의 저 끝에서 뱃고동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것은 이제 나와는 영원히 관계가 없게 된 한 세계로의 출발을 알리고 있었다. 엄마가 왜 한 생애가 다 끝나갈 때 '약혼자'를 만들어 가졌는지, 왜 다시 시작해 보는 놀음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뭇 생명들이 꺼져 가는 그 양로원 근처 거기에서도, 저녁은 우수가 깃든 휴식 시간 같았다. 그토록 죽음이 가까운 시간에 그곳에서 엄마는 마침내 해방되어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무도, 아무도 엄마의 죽음을 슬퍼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그 커다란 분노가 나의 고뇌를 씻어 주고 희망을 비워 버리기라도 했다는 듯, 신호들과 별들이 가득한 이 밤을 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세계의 정다운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가 그토록 나와 닮아서 마침내 그토록 형제 같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전에도 행복했고, 지금도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낄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처형되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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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로제는, 아마도, 가끔은 그녀를 필요로 하리라..... 하지만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잠들고 깨는 데 필요하다거나 열정적으로 필요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만 필요로 할 뿐임을 그녀는 때때로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가만히, 가슴 아프게 고독을 되씹었다.
하지만 그는 걷고 싶었고, 거리를 가로지르고 싶었고, 이리저리 배회하고 싶었다.
그녀는 이 불편한 자동차 안에서, 그녀에게 매혹된 것이 분명한 이 낯선 청년과 함께 있는 그녀 자신과, 자동차 덮개를 통해 들어와 그녀의 연한 색 외투를 더럽히는 빗방울이 아주 유쾌하게 느껴졌다.
문득 그는 길을 건너 그 여자에게서 모자를, 기다란 핀들이 꽂힌 그 끔찍한 모자를 잡아채는 동시에 일로부터 그녀를 끌어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새벽부터 일어나 행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쇼윈도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하는 그런 삶으로부터 그녀를 끌어내고 싶었다.
가을이 아주 부드럽게 폴의 가슴에 차올랐다. // 그녀는 자기 팔을 잡고 있는 이 말 없는 청년에게 애정 같은 것을 느꼈다. 이 낯선 청년이, 일시적이지만 그녀의 동반자가 되어, 한 해의 끝 무렵에 황량한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산책의 동반자든 인생의 동반자든, 자신과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그녀는 언제나 애정을 느꼈다.
"저는 당신을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저는, 그러니까 저는, 당신에게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랑을 스쳐 지나가게 한 죄, 핑계와 편법과 체념으로 살아온 죄로 당신을 고발합니다. 당신에게 고독형을 선고합니다."
그의 목덜미 너머로 정적과 냉기에 싸인 서글픈 계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그녀의 집중력은 옷감의 견본이나 늘 부재중인 한 남자에게 향해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아를 잃어버렸다. 자기 자신의 흔적을 잃어버렸고 결코 그것을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 마찬가지로 어쩌면 그녀는 로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한다고 여기는 것뿐이지도 모른다. 아무튼 경험이란 좋은 것이다. 좋은 지표가 되어 준다.
"익숙해질 거예요." 시몽이 찬탄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악과 진 덕택에 그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에 빠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이 불가피하게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없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데에서 오는 끔찍한 쾌감을 경험했다.
시몽의 비단처럼 부드럽��� 매끄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그녀는 때때로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머리카락 속으로 손을 밀어 넣듯이 이런 삶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을 거라고.
그녀는 여전히 로제를 사랑하고 있었다. 식당 문 앞에서, 특유의 고집스러운 태도를 지닌 그를 보자마자, 그녀는 그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는 한 번 더 그를 품에 안고 그의 슬픔을 받쳐 주었다. 이제까지 그의 행복을 받쳐 주었던 것처럼. 그녀는 자신은 결코 느낄 수 없을듯한 아름다운 고통, 아름다운 슬픔, 그토록 격렬한 슬픔 속에 있는 그가 부러웠다.
"욕망을 실현한다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때, 더 이상의 만남이 불가능해지는 때, 머릿속에서 분방한 생각들이 오가는 가운데 아침 추위로 이가 딱딱 부딪치는 때. // 지금 유일하게 안타까운 것은 읽고 싶은 책들을 다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뿐."
그녀가 집중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 덧없고 변하기 쉬우며 불안정하고 미묘한 사람 사이의 감정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엄정하고 깊숙하고 철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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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오랜만에 빠른 호흡으로 다른 책 안 끼고 단숨에 읽었다. 너무 재밌기 때문에. 스무살 때 학교 도서관에서 추천 도서로 접하구 읽었다가 하나도 이해가 안가고 이게 뭔 내용인지 재미도 없어서 관뒀던 책이다. 여러 번의 사랑을 나름 해보고 읽으니 이런 역작이 없다.
사강이 이 책을 스물다섯에 썼다는게 충격적이다. 서른아홉의 무기력함과 사랑에 대한 냉소를 이렇게 잘 묘사하다니. 이 책을 읽으면서 내내 시몽이 아닌 폴에 몰입하는 내가 싫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시몽이었을텐데 그 시절이 지나버린 것 같다. 폴보단 시몽이 행복할 거다. 그 젊음이 부러운 마음이 뭔지 드디어 지난 사람을 이해하게 됐다. 그래서 쓸쓸했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현실에서 이 정도로 사랑해 보지 않은 자, 불쌍해! 내 유일한 자랑거리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시원하게 상처 받고 열정적으로 사랑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사강처럼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이 있을 거다. 그게 언제가 됐든 꼭 써볼 생각이다. (이 책을 읽고 그 충동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내 옆에 시몽이 있다. 나를 너무 좋아해 주는.. 그 아이에게는 폴이 그랬듯 상처 주고 싶지 않다. 나는 과거의 사랑과 다른 역사를 쓸 자신이 있다. 사강은 그의 에세이에서 사랑이 없다고 했지만, 이 소설을 보고 확신하게 된 건 그녀는 전심으로 상대를 사랑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죽기 직전까지 빛나는 소설을 남기지 않았을까?
현재가 중요하지. 찰나라 소중한 거구.. 라라랜드의 엔딩이 새드가 아닌 해피엔딩이라는 걸 이제서야 깨닫는다.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은 어쩌면 그 어려운, 나의 노력에 대한 사랑이다.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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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썬
1. 부녀관계란,
부녀관계에 다양한 모양과 색깔이 있겠지만 한국의 부녀관계는 보통 아빠가 딸바보라 졸라 애지중지 키우거나 좀 엄하게 아빠가 무게잡는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나와 아빠의 사이가 딱 소피와 캘럼 정도의 온도라서 나는 더욱더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물론 울아빠는 눈치 있게 내 등에 선크림 발라준 적은 없지만.. 지금은 같이 살지 않아서 가끔 밥 먹고 카페 가는 정도로 가까운 친구 정도로 지내지만… 딱 소피 나이 정도까지는 아빠와 꽤 친밀했다고 기억한다. (이 영화의 포인트는 ‘기억한다’다.)
결국 내가 기억하는 아빠와 내가 함께했던 시절과 아빠가 기억하는 우리는 시차가 존재하고 우리 둘 사이에는 인간의 생애 주기상 만날 수 없는 나이의 간극이 있다. 내가 컸다는 건 아빠도 죽음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서 노화로 인한 죽음을 다뤘다면 그냥 신파 영화로 끝났을 것 같다. (전형적인 국제시장st..) 그것보다는 아빠와 나의 기억의 시차에 집중한다.
2. 여행
여행이라는 소재는 영화에서 늘 매력적인 소재다. 시간의 제약이 있고, 애정을 느끼지만 결국 곧 떠나야 하고, 나의 새로운 점을 발견하고, 등장인물들의 관계가 깊어지거나 아예 바닥을 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여행이라는 이유만으로 관객을 납득시킨다.
이 영화는 둘의 여행으로 깔끔하게 끝난다. 굳이 이후 이야기를 설명하거나 여행의 시작 전 가방을 싼다거나 하는 장면이 없다. 스토리 면에서는 기억이 조각나있기 때문에 숭덩숭덩 잘린 느낌이 들겠지만 밀도 면에서는 필요한 스토리만 있어서 나는 하나도 안 지루했다.
여행의 시작되며 영화가 시작되고 여행이 끝난 후 공항에서 캠코더로 서로 인사를 하며 여행이 끝난다. 이렇게 끝내서 일부 관객에게는 영화가 불친절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근데 나는 이렇게 끝날 걸 예감했고 ㅠㅠ 그래서 공항씬에서 눈물이 너무 났당..
3. 기억의 시차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여행을 기억하는 소피 시점으로 주로 전개된다. + 열한살의 소피가 기록된 캠코더 영상이 교차편집되어 있다.
열한살의 소피는 서른한살 아빠의 슬픔과 우울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서른한살 아빠가 소피가 없을 때 하는 행동들은 관객만 알고 있다. 소피에게 흡연의 위험함을 설명하지만 밤에 담배를 뻑뻑 피고.. 소피가 보지 않을 때 소피가 담긴 영상을 여러 번 돌려보며 울기도 한다… 그렇기에 관객은 소피가 되기도 하고 캘럼이 되기도 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슬픔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독하고 우울하고 찐득거리고 기분 나쁜 삶의 이면들을 하나씩 꺼내는 것,, 소피가 비로소 아빠의 나이가 되었을 때 아빠의 여행을 되짚으며 그를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기억의 시차에서 감독은 모든 걸 공개하지 않는다. 남은 여백은 관객의 사적인 경험으로 채워지는 영화다. 관계의 시를 다룬 영화로 <헤어질 결심>이 지금 생각나는데, 헤결이 정교하게 한 음 한 음 쌓아올린 교향곡이라면 애프터썬은 피아노 하나로 데모 영상 띡 보낸 느낌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에 따라 가득 채워질 수도 있고, 그냥 남 얘기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감하게 여백을 남겨준 감독에게 너무 고맙다.. 이런 영화 너무 귀해…. 덕분에 잊고 있던 나와 아빠의 유년기를 어렴풋이 떠올리게 됐고 예상치 못한 위로를 받았다.
4. 우울
나는 이 영화가 남긴 몇 가지 의문에 대해 자유롭게 내 해석을 말해보자면,
1) 캘럼이 바다에 뛰어든 건 우울 때문이다
캘럼 왼쪽에 쌓아둔 책들을 보면 명상책이 수두룩하다.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것 같고, 그 밤에 파도에 혼자 가서 뛰어든 건 ���말 죽으려고 뛰어든 것 같다. 소피 생각에 다시 나왔던 것 같다. 약을 먹었거나 혹은 정말 갑작스럽게 우울 증세로 ㅠㅠ
2) 캘럼은 소피와 여행이 끝난 직후 죽었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자살했을 것 같다. 그러니 문득문득 소피가 없을 때 소피의 사랑스러운 영상을 돌려보면서 심란했을 것이고, 편지를 쓰고 침대에 앉아 엉엉 울었을 것이다. 이 장면이 너무 안쓰러워서 안아주고 싶었다 ㅠㅠ
정신적으로 불안정하고 연약한 사람인데 아빠의 포지션으로 있어서 그나마 소피와 마지막 추억을 남길 목적으로 여행을 떠난 것 같다.
3) 소피가 클럽에서 만난 아빠는
소피와 아빠가 포옹하며 춤추던 마지막날, 그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소피는 지금 열한살의 소피 시점이 아닌 서른한살의 캘럼을 바라본다. 당시에는 보지 못했던 아빠의 그늘을 이해하고 춤추던 그 장소에 상상으로나마 다시 가서 서른한살의 아빠를 서른한살의 소피가 안아준다.
너무 아름답다.. 진짜 눈물난다…..
영화가 줄 수 있는 체험 아닙니까 이게..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랑이라니 ㅠ.ㅠ
5. 연약하고 불안정한 사람이 아빠라는 것
나는 우리 아빠가 나에게 딱 이런 사람이다. 아빠라는 역할을 맡기에는 부적절한 사람. 영화를 좋아하고 CD를 모으고 와인을 즐기지만 아빠로서 강인함이 없다. 아빠의 성향을 알기에 누군가에게 기대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성향 탓도 있겠지만~) 그래서 소피가 열한살임에도 또래와 놀기보다 언니오빠들이랑 어울리고 싶어하고 아빠가 사과해도 제대로 받기보다 괜히 장난치는 모습들이 이해가 갔다. 아빠가 미성숙하면 아이가 금방 성숙해진다. 안쓰럽기도 하고 ㅠㅠ
어릴 땐 몰랐다. 주말마다 로마의 휴일 같은 고전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하는 아빠를 엄마가 왜 그렇게 답답해하는지. 나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였는뎅 ㅠㅠ 근데 크고 나니까 현실적인 엄마 눈에 아빠가 얼마나 답답했을지 이해가 간다. 이게 바로 또 이해의 시차다.
나도 점점 현실적인 어른이 되어가면서 (난 정말 낭만보다는 현실파에 가깝다) 아직도 나를 만나서 낭만을 이야기하는 아빠가 답답했다. 그리구 몸도 멀어져서 더 미웠다. 근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마음 한 켠이 시큰거렸던 건 아빠랑 놀았던 예전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약하고 불안정한 아빠지만 그래도 내 아빠니까 아빠를 나도 사랑하고 있었다는 걸! 글구 그런 아빠가 나의 많은 낭만적인 어린 기억들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그동안 까먹고 살았다.
아빠가 그랜드캐니언 꼭 가보라고 해서 갔는뎅 그 곳이 가장 좋드라…. 유전자인가 이것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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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돌아가신 아버지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강한 사람들은 원하는 것은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아무리 강한 사람일지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는 없다고. 나는 그렇게 강하지는 않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온난한 해류와 해저 화산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얼음같이 차가운 깊은 바다 밑 어느 지점에 이르면 때로 따뜻한 동굴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때 나는 오빠가 가지고 있는 쥘 베른의 해저 이만 리를 읽고 또 읽었다. 재미있는 몇 밤에는 초록색의 찐득한 바다생물들 사이에서 깊은 수로와 어둠을 헤치고 비밀 통로를 발견하여 따뜻한 동굴의 문을 두드리기도 했다. 그곳은 나의 집이다.
말을 하자마자 그는 다시 커다란 자기 외투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목이 메었고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모욕당한 기분이었다. 굴욕적이고. 겁에 질리고.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나는 그를 몰랐다. 전혀.
돌아가신 아버지는 가끔 이런 말씀을 하셨다. 보통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삐져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다.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
사실 이 시기에는 우리 사이에 일종의 불편한 타협 같은 것이 존재했다. 우리들은 마치 장거리 기차여행에서 운명적으로 옆자리에 앉게 된 두 명의 여행자들 같았다. 서로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어야 하고, 예절이라는 관습을 지켜야 하고, 서로에게 부담을 주거나 침해하지 않아야 하며, 서로 아는 자신들의 사이를 이용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예절바르고 이해심을 발휘해야 하고. 어쩌면 가끔씩은 유쾌하고 피상적인 잡담으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해야 하고.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으며. 때로는 절제된 동정심을 보이기도 하면서.
미카엘이 집을 나서면 나는 눈물로 목이 멘다. 나는 이 슬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어느 저주받은 곳에 숨어 있다 나와서 슬며시 기어들어와 나의 고요하고 푸른 아침을 망쳐놓는지를. 서류 정리하는 사무원처럼 나는 수많은 무너져가는 기억들을 분류한다. 모든 숫자를 긴 줄에 늘어놓는다. 어딘가에 심각한 실수가 숨어 있다. 이건 환상인가? 나는 어딘가에서 지독한 실수를 찾아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들을 보냈다. 새벽이면 나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지치고 따뜻해져서 올 것이다. 땀과 거품의 냄새를 풍기면서.
후반부로 갈수록 꿈과 현실이 뒤섞여서 꿈 부분은 거의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문장들이 힘 있게 좋아서 기록해둔다. 누군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혼자 그 모든 사랑을 주고 났을 때 혼자 남겨진다. 결혼이라는 제도도 그렇게 한 사람을 망가뜨릴 수 있으니 모두 신중하게 생각하거나, 아예 선택하지 않는 거다.
그래도 꿋꿋하게 지치고 따뜻해져서 올 거라는 말이 좋았다. 옛 영화에서 기차역에 아이를 두고 떠나는 부모가 할법한 거짓말이지만, 꼭 기다리면 올 거라는 말. 물론 그건 그 부모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지만, 그렇게 사랑은 순환하는 거다!
목이 메이게 슬펐을 때가 지난 달이다. 그리고 벌써 초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맛있는 과일을 먹고 여러 번 질릴 정도로 여름을 욕하다 보면, 선선한 가을이 오리라 믿는다. 그 당연한 계절의 순환이 나에게는 꼭 구원 같이 느껴진다!
2023. 6. 2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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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 달래기
넘쳐두 구리고 비어도 구리다
찰랑거리는 정도로 차 이써야 가장 빛나는듯ㅎㅎ
어케 풀 건데 내가 원하는게 몬데
그걸 생각하고 행하는거다
그럼 쫌.. 멋져질거라고 생각한다
메이비 ㅋㅋ
2023. 8. 18. 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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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고 있는 패를 뾰족하게
왜 안 자고 이런 뻘글 쓰는지 나도 모르겠는데
사람마다 다 가지고 태어나는 성향이 정해져있고
그래서 누구는 평생 자기 능력이 뭔지 모르다가
어디가서 욕만 처먹다 죽을수도 있는거고
운 좋게도 내가 만약 도배를 졸라 잘해
그럼 도배사로 월천 벌 수도 있는건데
여튼 중요한건
자꾸 내 천성과 재능이 넘 익숙해서
이게 뭐 그렇게 대단한거냐 하고 넘기고
나에게 없는 것들만 죽도록 좇다가
반고흐처럼 생 마감할 수도 있음
원하는 게 있다면
왜 원하는지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제일 가까워질 수 있는지
내가 가진 내 재능으로 가는 빠른 루트가 뭔지
이걸 생각하는 게 개쩌는 지름길 아닐까 생각했음
결국 우리는 시간이 돈이다
지금 나도 자야되는데
데블스 플랜 정주행하느라고
이시간됨
근데유의미했다
데블스플랜존잼임
그럼 이만
2023. 10. 2.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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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1. 무엇보다 스승은 내게 죽음이 생의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어 했다. 정오의 분수 속에, 한낮의 정적 속에, 시끄러운 운동장과 텅 빈 교실 사이, 매미 떼의 울음이 끊긴 그 순간 우리는 제각자의 예민한 살갗으로 생과 사의 엷은 막을 통과하고 있다고. 그는 음습하고 쾌쾌한 죽음을 한여름의 태양 아래로 가져와 빛으로 일광욕을 시켜주었다.
2. "의무감으로 책을 읽지 않았네. 재미없는 데는 뛰어넘고, 눈에 띄고 재미있는 곳만 찾아 읽지. 나비가 꿀을 딸 때처럼. 나비는 이 ��� 저 꽃 가서 따지. 1번 2번 순서대로 돌지 않아. 목장에서 소가 풀 뜯는 걸 봐도 여기저기 드문드문 뜯어. 풀 난 순서대로 가지런히 뜯어먹지 않는다고. ... / 오랜 친구라고 그 사람의 풀스토리를 다 알겠나? 공유한 시절만 아는거지.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도 모르는 거야. 책 많이 읽고 쓴다고 크리에이티브가 나오는 것 같아? 아니야. 제 머리로 읽고 써야지. 일례로 번역은 창조지만 학술 논문은 창조가 아니거든. "
3. "우리가 진짜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다시 우리 곁으로 불러와야 한다네. 눈동자의 빛이 꺼지고, 입이 벌어지고, 썩고, 시체 냄새가 나고... 그게 죽음이야."
4. "결정된 운이 7이면 내 몫의 3이 있다네. 그 3이 바로 자유의지야. 모든 것이 갖춰진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행위, 그게 설사 어리석음일지라도 그게 인간이 행사한 자유의지라네. 아버지 집에서 지냈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굳이 집을 떠나 고생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어차피 집으로 돌아올 운명일지라도, 떠나기 전의 탕자와 돌아온 후의 탕자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네. 그렇게 제 몸을 던져 깨달아야, 잘났거나 못났거나 진짜 자기가 되는 거지. 알겠나? 인간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수만 가지 희비극을 다 겪어야 만족하는 존재라네."
5. - "항상 지적 대치 상태 같은 긴장을 요구하셨으니까요. 온유하기보다는 서늘했을 겁니다."/-"그래서 외로웠네."
6. "뜬소문에 속지 않는 연습을 하게나. 있지도 않은 것으로 만들어진 풍문의 세계에 속지 말라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어 진실에 가까운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하네. / 중력과 질량만 봐도 그렇잖아. 지구에선 중력이 곧 질량이지만 달나라에선 아니잖아. 지구에서 사과를 밀고 던지는 것, 달나라에서 밀고 던지는 것, 화성에서 밀고 던지는 것, 다 다르잖아. 환경이 달라지면 기준도 달라져."
7. "생각이 곧 동력이라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중력 속 세상이야. 바깥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중력을 받고 살아. 억압과 관습의 압력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생각하는 자는 지속적으로 중력을 거슬러야 해. 가벼워지면서 떠올라야 하지. 떠오르면 시야가 넓어져."
8. "살아 있는 것은 물결을 타고 흘러가지 않고 물결을 거슬러 올라간다네. 관찰해보면 알아. 하늘을 나는 새를 보게나. 바람 방향으로 가는지 역풍을 타고 가는지. 죽은 물고기는 배 내밀고 떠밀려가지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작은 송사리도 위로 올라간다네. 잉어가 용문 협곡으로 거슬러 올라가 용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 그게 등용문이야. 폭포수로 올라가지 않아도 모든 것은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원하는 데로 가지. 떠내려간다면 사는 게 아니야."
8. '타자를 나의 ���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 '지금 저 사람이 피를 흘려서 얼마나 아플까?' 그건 자기가 아픈 거야. 자기 마음이 아픈 거지. 우리는 영원히 타인을 모르는 거야. 안다고 착각할 뿐. / 가령 김승옥은 이런 식으로 써. '시골에 갔다. 성묘는 안 했다. 비가 와서 하루 더 묵었더니 심심하더라. 할 일이 없어 어머니 산소에 갔다. 비가 나를 효자로 만들었다.'"
9.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10. 사형수한테는 쓰레기도 아름답게 보인다네. 다시는 못 보니까. 날아다니는 새, 늘 보는 새가 뭐가 신기해? 다시는 못 본다, 저 새를 다시는 못 본다.... 내 집 앞마당에 부는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스쳐간다네.
11. 나는 사람들이 책 읽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생각하네. 내가 모르는 걸 발견하려고 읽는 사람이 있고, 내가 아는 걸 확인하려고 읽는 사람이 있어. 대부분은 확인하려고 읽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12.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생각해보게나. 자기한테 효도하는 큰아들 놔두고, 집 떠났던 작은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니 반가워하잖아. 탕자이기 때문에, 집을 나갔기 때문에, 그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나? 아흔아홉마리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 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지 멋대로 놀다가 길 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13. 삶의 고통은 피해가는 게 아니야. 정면에서 맞이해야지. 고통은 남이 절대 대신할 수 없어. 오롯이 자기 것이거든.
14. 버지니아 울프도 병에 대해 유명한 글을 썼어. 곡괭이가 자기 머리를 파내는 것 같다고. 자기 몸이 폐광 혹은 금광이라면, 통증은 곡괭이로 그 안의 금을 파내는 것 같아고. 그렇게 순전한 고통이 주는 통찰의 세계가 있다는 걸 인정하네.
15. 남이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남이 이랬다고 화내고 남이 저랬다고 감동해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남하고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경지를 동양에서는 군자라고 해. 군자가 되는 것이 동양인들의 꿈이었지.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스스로 알고 깨닫는 자. 홀로 자족할 수밖에 없는 자... 그래서 군자는 필연적으로 외롭지.
16. 라스트 인터뷰에서 자네가 썼잖아. 내가 사라진 극장에 '엔드 마크' 대신 꽃 한 송이를 올려놓겠다던 얘기를. 나는 자네의 그런 맥락을 좋아했다네.
17. 바다에 일어나는 파도를 보게. 파도는 아무리 높게 일어나도 항상 수평으로 돌아가지. 아무리 거세도 바다에는 수평이라는 게 있어. 항상 움직이기에 바다는 한 번도 그 수평이라는 걸 가져본 적이 없다네. 하지만 파도는 돌아가야 할 수면이 분명 존재해. 나의 죽음도 같은 거야. 끝없이 움직이는 파도였으나, 모두가 평등한 수평으로 돌아간다네. 본 적은 없으나 내 안에 분명히 있어. 내가 돌아갈 곳이니까. / 촛불은 끝없이 위로 불타오르고, 파도는 솟았다가도 끝없이 하락하지. 하나는 올라가려고 하고 하나는 침잠하려고 한다네. 인간은 우주선을 만들어서 높이 오르려고도 하고, 심해의 바닥으로 내려가려고도 하지. 그러나 살아서는 그곳에 닿을 수 없네. 촛불과 파도 앞에 서면 항상 삶과 죽음을 기억하게나. 수직의 중심점이 생이고 수평의 중심점이 죽음이라는 것을.
18. 내가 느끼는 죽음은 마른 대지를 적시는 소낙비나 조용히 떨어지는 단풍잎이에요. 때가 되었구나. 겨울이 오고 있구나. 죽음이 계절처럼 오고 있구나. 그러니 내가 받았떤 빛나는 선물을 나는 돌려주려고 해요. 침대에서 깨어 눈 맞추던 식구, 정원에 울던 새, 어김없이 피던 꽃들. 원래 내 것이 아니었으니 돌려보내요. 한국말이 얼마나 아름다워요. 죽는다고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합니다. 애초에 있던 그 자리로, 나는 돌아갑니다.
덮어놓고 떠밀려 살지 말고, 내 마음을 멀리서 관조할 것.. 직면할 것..... 간만에 우아하고 힘 있는 한국 작가의 솔직한 글을 읽으니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너무 많은 '척'하는 글들에 질렸다. 가장 잘 팔리는 건 자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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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맨날 나 왔어!!! 나 갈게!!! 이래서 그런지 안녕하세요 명복을 빕니다 이런 말이 너무 어색하다 할아버지 나 다시 혼내줘 나한테 소리질러두 돼 할아버지 밉다고 소리 질러서 미안해 고기 먹고 싶을때만 할아버지한테 연락해서 미안 할아버지 맨날 왜 먼저 나가서 기다리냐고 밥 먹다 나가버리지 좀 말라고 짜증내서 미안해
왜 마지막까지 할아버지는 내 생각만 하는건지 우리 아침에 다 모인다고 알람도 열개나 맞추고 설레는 마음으로 잤단 말이야 세시간만 더 기다리지 그랬어 자식들 앞에서 그런 꼴 안 보이고 싶어서 간거지? 자존심 진짜 쎄 ~~ 할아버지 그래서 내가 많이 좋아했어 지금도 좋아하고 심술 부리는데 결국 다 나 편한대로 해주잖아 어떤 나뭇잎이 살랑살랑 불어서 나한테 오면 할아버지겠구나 하고 생각할게 나 어떻게 사는지 잘 지켜봐봐 할아버지가 내 생일때 나 보러 혼자 서울 왔을때 밥상에 발가락 찧은거 아직도 옅은 두겹으로 자란다? 할아버지도 나 한 손에 잡다가 손가락 그렇게 됐잖아 비슷한 상처두 우리 둘이 공유한거야 내가 많이 애교 안 부려도 내 맘 알지? 우리 비슷한 타입이니까 하라버지 난 이제 다른 할아버지들 지나가는 것만 봐도 질투날 것 같아 오늘 장례식장에 사람들 진짜 많이 왔는데 다 정정해서 짜증나더라 우리 할아버지 진짜 쎘는데 왕 쎘는데!!! 할아버지 거기에서 좋아하는 사막 동물들 많이 보고 놀고 있어 나 가면 나랑만 놀자
2023. 12. 10. 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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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시기가 알맞게 익어서 호주에 왔다
오랜만에 듣는 영어에 설레고
느려터진 인터넷에 속이 터졌다
비행이 길어져서 숙소에 오자마자 쓰러져잤다
겨울에 여름인 나라로 여행왔다는 건 큰 행운이지 생각하면서도 땀이 흐르면 짜증이 나는 내 자신이 웃겼다
내일은 나시를 입고 바다에 발을 담궈야지
아직은 낯선 시드니 아트북 서점에 파묻히고 싶다
2023. 12. 14. 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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