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mgik
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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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을 자는 것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내가 깨어있는 동안 학교에서 무얼 하고 밥으로 어떤 걸 먹고 누구와 마주치고 스쳐 가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듯이 살았다.
내가 겪는 모든 일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며 버텨왔던 정신과 육신이 한계에 맞닥뜨린 순간 난 겨우 고등학교 1학년이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학급 번호 순서대로 자리를 배정했을 때 그 애와 나는 처음으로 짝이 되었다.
그날은 인적 사항을 기록하여 담임 선생님께 내는 날이었다.
제나 그렇듯이 내 종이의 가족관계 칸에는 할머니와 동생의 이름 뿐이었다.
슬쩍 둘러보아도 나 같은 아이는 없었다.
짝이 된 그 애와 나는 태어난 날이 같았다.
며칠이 흐르고 나서야 뜬금없이 그 애가 먼저 말했다.
"너 내 생일이랑 똑같다.” 사실 그때 네 종이 봤어.
라고 작게 덧붙인 말은 안 듣는게 나았다.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올라왔다.
“너랑 나는 같은 지역에서 한 날에 똑같이 울음을 터뜨리며 세상에 나왔는데, 어째서 난, 나는, 왜?
그럼 우리 엄마 아빠 없다는 것도 알겠네.”
한숨처럼 터져 나온 말에 그 애는 적잖이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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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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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우리의 짝꿍 생활 한 달 동안 그 애는 두 번 다시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수업 시간에도 쉬는 시간에도 체육 시간에도 그 애만 봤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드는 내 생활에 의미 있는 일이 생긴 것이었다.
그 애 짝으로 교실에 존재하는 일.
다음 달이 되어 제비 뽑기로 짝을 다시 뽑았을 때 나와 그 애는 또다시 짝이 되었다.
어느 날 그 애는 내 핸드폰 번호를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알려줬던 게 조금 창피했다.
그 애는 심심할 때면 나에게 늘 메시지를 보내왔다.
항상 대화의 마지막엔 “잘 자.” 라고 인사했다.
그 애와 대화할 때의 나는 가장 17살 같았다.
내가 살아온 16년은 달력이 몇 장 뜯겨 나갔는지 추석이 몇 번 지나갔는지 의식하지 않고 지내온 시간이었다.
해가 바뀌면 바뀌는 대로 그냥 그렇게 살았으니까.
나에게 나이라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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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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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그 애는 나의 전부를 이해하고 싶어했다.
그 애가 알 리 없는 외로움과 서러움.
그 애가 그걸 평생 이해 못하길 바랐다.
그 애가 나에게 '힘내'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죽고 싶었다.
차라리 그 애를 알기 전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따지듯이 너 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 애는 주저 없이 "응." 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실로 갔다.
그 후로도 우리는 교회나 문화 센터 같이 피아노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어느 목요일 점심시간.
음악실에서 그 애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을 때,
나의 할머니가 동네 뒷산에서 발을 헛디뎌 돌아가셨다.
내가 상복을 입고 영정 앞에 가만히 앉아있던 3일 동안 그 애는 나를 보기만 하고 돌아갔다.
우리는 그 뒤로 피아노를 찾아가는 일이 없었다.
우리는 한 번도 짝이 되지 않은 적도 없었다.
적어도 1학기 동안은.
유난히 더웠던 그 해 여름이 지나고 2학기가 되었을 때 그 애는 내내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2학기 내내 나는 늘 혼자 앉았다.
우리 동네에서 그 애의 집까지는 버스로 정확히 20분 거리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동네에 가는 버스에 몸을 싣고 20분 동안 울었다.
인적 드문 버스 정류장에서 1시간 30분 동안 앉아 있었을 때 그 애가 왔다.
겨우 두 살 난 동생을 업고 나타난 그 애는,
엄마가 우울증에 걸리셨으니 당분간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다.
그때가 10월이었다.
“우리 생일이 되기 전에 꼭 갈게.”
그 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그 애 품에 안겨 울었다.
내가 이 지옥에 태어난 지 17년만에 생일이란게 생긴 기분이었다.
10월부터 12월까지 시간은 마치 일천겁의 시간 같았다.
11월의 어느 날 그의 두 살 베기 동생이 나의 할머니가 간 길을 따라 멀리 갔다.
그리고 그 애의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기다렸던 12월, 우리의 생일날은 최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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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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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의 12살짜리 여동생이 동네 빵집에서 케이크를 몰래 가져오다가 파출소로 잡혀갔다.
내 생일이라고 동생에게 말한 내 잘못이었다.
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파출소에서 나오면서 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밤이 되면 잠을 드는 일도 더 이상 없을 거라고 동생에게 말했다.
연락 오지 않는 아빠의 소식을 기다리며 매일 우편함 앞에 서있는 일도, 할머니가 굴러 떨어진 뒷산 바위에 올라가는 일도, 내 생일이라고 케이크를 훔쳐 오는 일도 절대로, 절대로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18층짜리 낡은 아파트의 옥상에 섰을 때 동생은 울었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더 이상 그 애의 소식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고 우리의 생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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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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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렇게 생각하니 태어나서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아픔을 느꼈다.
심장을 조이고 피가 터지는 느낌이 내 숨통을 졸랐다.
내 소매를 붙들고 다시는 안 그럴 거라며 울부짖는 동생을 안고 도망치듯 옥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독감에 걸려 열이 39도까지 치솟았고 머리끝까지 덮은 이불 속에 나의 뜨거운 숨이 나를 감쌌다.
나는 아직도 그것이 독감이었는지 사람들이 말하는 열병이었는지 모르겠다.
며칠 후 우리 집 우편함에 꽂혀 있는 손편지를 받고서 열이 내린 걸 보면 아마도 열병이었던 것 같다.
그 애의 편지었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고 했다.
수능을 치르고 대학에 꼭 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잘 자라는 말. 편지 내용은 그뿐이었다.
그의 편지는 나를 다시 살게 할 충분한 이유였다.
어쩜 이렇게 운이 없을 수가 있는지 신기할 정도로 우리는 힘든 길로만 흘러갔다.
내가 걷지도 않았는데 그저 그렇게 흘러갔다.
어쩌면 그런 수많은 불운 속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유일한 행운이 되어주라는 하늘의 뜻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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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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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우리는 그 후로 823일 동안 허공에 대고 대화를 했다.
나는 종종 그 애의 전화 번호로 전화를 걸어 없는 번호라는 안내 메시지를 들으며 하루를 얘기했다.
가끔은 그 애가 죽어버린 건 아닌지 생각했다.
20살이 되던 해, 나는 대학교 입학을 포기했다.
당장 등록금을 댈 길이 없었다.
그래도 그 학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면 그 애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그 학교 교정에 개나리가 막 필 무렵 그 애를 만났다.
뜨겁고 약하고 하얗던 내 첫사랑.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한참 쳐다보다가 그 애의 집으로 갔다.
3년 만이었다.
이곳저곳 빨간 딱지가 안 붙은 곳이 없는 그 애의 집에는 차갑고 노란 공기만 맴 돌았다.
그 애 엄마의 꿈이자 그 애의 꿈이었던 피아노에 끔찍하게 들러 붙어있는 빨간 딱지를 보고 더 이상 그 애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 애는 피아노 앞에 앉아 한참을 멍하니 그렇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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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5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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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내가 그 애와 함께 하기에는 너무 괴로운 삶이었다.
신이 정말로 있다면 내가 태어난 데에도 진실로 타당한 이유가 있냐고 묻고 싶었다.
우리는 처음으로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애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에게 딱 편지 2통을 보내왔고 나는 그 애가 군대에 가있는 동안에 200통이 넘는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항상 ‘잘 자.’ 라고 썼다.
그 애가 보내온 첫 편지는 그 애가 상병이었을 때 다리를 다쳐 많이 아프다는 내용이었고, 마지막 두 번째 편지는 대학교 4학년일 때 사회에 나가기 두렵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그 애의 빨간 딱지 가득한 집에 갔을 때 이미 알았다.
그 애를 이 삶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거란 걸.
지금도 난 잘 모르겠다.
그 애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조차도.
그저 가끔 생각한다.
내가 그 애에게 보낸 편지에 썼던 말을.
..
“네가 만일 그곳에서 총을 맞아 한쪽 팔을 절게 된다 해도, 한 손으로 치는 서툰 피아노 소리라도 꼭 다시 듣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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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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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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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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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감성과 차가운 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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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6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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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
나에게 소중한 영감이 되어주고
얼어붙은 냉장고를 부실 수 있게 도와줘서
가까이 가면 꼭 붙어버려 열병이 나지만
더 이상 내가 못 참도록 추워지면
그런 날에는 제발 거기 그대로 가만히 있어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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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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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그냥 쉽지 않아
왜 그렇게 설렁하지
난 사실 헌신이 제일 어려워
그니까 그냥 그렇게 떠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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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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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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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온 모든 것들에 대하여
예민하다
혼자하는 것을 즐긴다
독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밝은 조명을 꺼려한다
관찰한다
감정이 생생히 와 닿는다
군데군데 통증을 자주 느낀다
큰 소리 나는 것을 아주 싫어한다
결정하는데 한참 걸린다
창조적인 활동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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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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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내 새벽 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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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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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ssung77 · 7 yea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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