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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iroquai - Sunny (live at Montreux Jazz 1995)나의 유년기 시절은 01410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모뎀 인터넷에서 집전화를 해도 끊어지지 않는 ADSL로 막 넘어가던 때였고, 덕분에 음악은 테이프나 씨디에서 mp3 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나는 터울이 있는 누나가 있었던 탓인지 또래보다도 대중음악에 조금 일찍 눈을 떴었다. 라디오를 듣다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쓸모없어진 영어교재 카세트 테이프 윗부분을 막아 녹음을 하기도 했고 집에 있는 씨디를 종일 돌려 들으며 앞장에 들어있는 가사를 따라 읽고는 했었다. 그러던 중에 소리바다라는 독보적인 디지털 플랫폼이 등장하면서 완전히 음악 소비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것이다.
소리바다는 단순히 사용자끼리 파일을 공유하는 p2p 시스템이라 지금의 스트리밍 서비스처럼 음원이 정리되어있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그 시절의 훌ㄹ륭한 ‘디깅’이 데이터베이스가 되기도 했다. 나는 새벽 라디오 애청자라 거의 매일 2시에 남궁연의 고릴라디오를 듣고 어쩔 땐 그 뒤 3시에 하는 롤러코스터 방송까지 듣다 자고는 했는데, Jay-Z, Coolio 등 완전 힙합부터 Harvard 같은 시부야K 음악들, 거기다 Daft Punk 까지 그 당시에 굉장히 ‘힙’했을 음악들을 모두 그렇게 접했다. 귀에 잘 들어오는 노래가 있으면 수첩에 잘 적어놨다가 또 비슷한 노래를 찾아들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 같다 . 결론적으로 지금 보면 이 ‘소리바다 디깅’이 어린 나에게 꽤나 다양한 음악 스펙트럼을 가져다 준 게 아닐까 싶다.
오늘 저녁 베네치아에 재즈바 공연에서 Sunny를 부르는데 순간 15년 전 그때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학교 끝나고 서너시쯤 집에 돌아와서 집에 아무도 없으면 먹던 냄비에 남은 김치찌개랑 따뜻한 밥, 케이블티비 27번 엠넷 그리고 43번 케이엠티비 틀면 나오던 주석 뮤직비디오, 그리고 소리바다에서 새로운 노래들 받아서 차례대로 들을 때의 설레던 기분들. 그 중에 ‘( Live)_자미로콰이_Sunny_ Montreux Jazz Festival.mp3)’ 따위의 노래도 있었다. 앨범에도 수록이 됐는지, 몇년도인지, 고음질도 구할 수 있는지 등등 너무 알고 싶었는데 거의 유일한 단서가 Montreux라는 어떻게 읽는 건지도 모르는 어느 먼나라 이름 같아서 거의 포기했었다.
그리고 방금 집에 오자마자 유투브에서 Jamiroquai Sunny 라고만 쳤보니 라이브 영상에다가 관련된 것까지 나와서 몇 개를 쭉 봤다. 어릴 적에 너무 불만이던 32메가짜리 컴퓨터 램이 지금 노트북에 우습게 4기가가 들어가있으니 그도 그럴 일이다. 그리고 나는 9월이면 몽트뢰 바로 옆으로 이사를 가서 벌써부터 친구들에게 내년 Montreux Jazz Festival에 꼭 놀러오라고 얘기를 하고 있다. 그때의 내가 정말로 꿈에도 몰랐던 건 아마도 15년쯤 뒤에 바로 그 재즈페스티벌에 매년 갈 수도 있을 거라는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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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한국에 가는 동안 뭘 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일이 없다면 한국 근대건축을 찾아다니며 포스팅을 하고 싶다. 서울 충정아파트와 약현성당부터 목포 화신백화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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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도시에 왔다. 부활절 주를 전후로 해서 정신없이 프로젝트를 마무리 하고, 정든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친구들과 다음을 기약하고, 그동안 내가 사랑했던 곳들을 다시 한번 찾고 또 미처 가보지 못했던 곳들에 가보고, 물건을 많이 버리고 또 아쉬운 것들을 바리바리 캐리어에 욱여넣고 있을 즈음 부모님이 왔다. 내가 살았던 동네들을 모시고 가고 또 포르투갈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이집 저집 에어비엔비로 옮겨 다니며 여행한 게 한 3주는 됐나. 그리고 지난 주말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기숙사 내 방에서 대청소를 했다. 구정물이 끝없이 나오는 바닥을 걸레로 닦고 전에 살던 놈이 미처 신경쓰지 않았던 곳들의 먼지를 털어내고 나니 다음날은 피곤해서 늦잠을 잤다. 오늘 공휴일을 맞아서 오후에 카페에 오니 이제야 “여기에 내가 사는구나”하며 이사왔다는 게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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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리 동네가 참 좋다. 요즘은 비가 좀 오지만 날씨도 좋고, 밥도 맛있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하지 않고, 주말에 갈 만한 작고 아담한 카페들도 있다. 카페에 오면 내가 좋아하는 커피와 간식거리가 싸서 돈 걱정하지 않고 주문할 수도 있다. 메뉴판에 가격을 보지 않고 주문하는 것은 아마 여기가 처음일 것이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느지막히 일어나 단골 카페에 와서 종일 뭔가를 (항상 ‘뭔가’ 할 것이 있음) 하고, 슈퍼마켓에 들러서 저녁거리를 사다가 집에 간다. 그리고 거실 벽난로 앞에 앉아서 한국 티비나 넷플릭스를 틀어놓고 밥을 먹고 있으면 집주인 할머니가 와서 장작을 넣어준다. 내가 어쩌다가 이 먼 곳까지 오게 될 줄 누가 알았겠냐마는, 요즘같은 날들이면 이대로 흘러가는 게 참 좋기만 하다.
지난 해 여름 갓 이곳에 왔을 때만 해도 미국병에 한국패치가 되어있던 바람에 진로 걱정에 사로잡혀 꽤나 경직되어있었다. 그리고 지난 겨울 크리스마스 연휴를 계기로 진로에 대해서 또 삶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뀌게 되었다. 같은 반 동료들이 친구가, 이 낯선 작은 도시가 우리 동네가 되면서 도시에서 자라며 배웠던 치열한 가치들과는 다른 시각이 생긴 것이다. 누나와 매형과 하던 여행을 하면서 카디프에서 바스로 향하던 차 안에서의 긴 시간은 그 떠오르는 생각들을 정리할 최적의 기회었을 것이다. 그리고 방학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언젠가부터 내 주변사람들이 내가 바뀌었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그렇다. 요즈음의 나는 마음도 훨씬 안정되었고 몸도 정신도 아프지 않고 덜 절망하고 하루하루 더 배우며 충만하게 살고 있다.
내가 한국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원으로 진로를 정했을 때 배운 것들은 대부분 좋은 학교에서 박사 후 성공적인 리턴,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위의 것들이었다. 이를테면 미국의 10위권 탑스쿨에서 박사를 해야 하고, 어느 학교가 동문이 많으니 자리잡을 때 유리하며, 결혼은 언제쯤 하는 것이 좋고, 그러기 위해서는 최상위권 학부에서 좋은 성적과 GRE 고득점이 필수라는 것들. 처음으로 준비를 시작할 때의 나는 그 중 무엇도 없었던 데다가, 그 중 대부분은 이미 바꿀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매번 절망적이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언제나 가장 알고 싶은 것은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였다.
이 조언들이 치열하고 지극히도 현실적인 것은 그도 그럴 것이 조언을 구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 국내 현직 교수들이었고, 그 말인즉슨 모두 시스템에서 살아남은 엘리트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른바 ‘서연고’에서 공부를 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해 동대학원 석사까지 마치고 미국 유명 공대를 졸업한 사람들. 하지만 그들이 몇 등으로 졸업을 했고 박사를 몇 년 만에 끝내고 SCI 논문을 몇 편을 내서 교수가 되었는지 하는 말들을 들어도 나는 한 번도 공감이 되고 동기부여가 된 적이 없었다. 나는 애초에 그저그런 서울의 학교를 나왔고 학점도 좋지 않은 데다가 교환학생도 뜬금없는 프랑스로 다녀왔고 공부보다는 멋 부리고 노는 데 관심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불안한 마음에 살다시피 했던 고우해커스 같은 인터넷포럼들에는 정신적으로 건강할 수가 없는 살벌한 글들이 가득했다.
그 과정들을 어떻게 다 지나 미국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 진학에 실패한 채 유럽에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러 왔을 때, 나는 돈만 낭비하고 스스로를 증명하지 못했다는 패배의식에 쩔어있었지만 그래도 명문대에서 공부했다는 알량한 자존심이 있었다. 작년에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타이밍이 맞아서 흥미가 있던 차에 잠깐 지나쳐갈 뿐이라는, 그래서 내년이면 다시 나의 선배들이 지났던 그 영광의 길로, 그러니까 미국으로, 토목과로, 지반공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무의식 중의 생각들. 나도 유명 대학 이름으로 프로필을 장식하고 한국에 돌아오면 괜찮은 자리는 있겠지 하는 상상들. 비록 지금 내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게 오랫동안 공부하고 싶었던 바로 그 분야였고, 지원해놓고 나서 가슴 뛰었던 날들이 분명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어쨌든 그런 마음으로 ‘될 것 같고’ 그리고 ‘살 만한 것 같은’ 무려 11개 학교에다가 원서를 욱여넣었다. 그리고 나서 문화재 보존이 좋아 뭐가 됐던 관련 일을 하고 싶다는 친구, 자기 나라에 대사관이 없어 옆 나라까지 비행기 타고 가서 비자를 받아왔다는 친구, 그냥 패션이 좋아서 공부하러 왔다는 친구들과 얘기하면서, 문득 왜 나는 내 이야기의 끝을 ‘한국에서 자리 잡아 남들처럼 벌어 먹고 사는 것’으로 한정지었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왜 나는 동기에서 목표가 생긴 것이 아니라 목표에서 동기가 생겼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질문을 찾다보니 어느새 내가 맹목적으로 좇던 것들에 대해서 심지어 약간의 환멸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예전에 마쳤어야 했던 “나는 뭘 하고 싶지?” 라는 심오하고 어려운 질문을 다시 해야했다.
할머니가 넣어준 장작불 앞에서 몇날며칠을 그 질문들을 노려보며 생각을 되새기고 나서야, 인터넷 유학 포럼에서 하는 온갖 순위 매기기와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서 조금이나마 코웃음 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유없이 정해놓은 미래 때문에 하기 싫은 걸 참고 하지 않기로 했다. 재미없는 전공을 학교 이름 때문에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이른바) 보장된 미래 때문에 내 인생의 5년을 살기 싫은 도시에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지금처럼 좋은 사람들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즐기며 살기로 했다. 굳이 뭐든 1등이 하고 싶지도 않고 미친놈처럼 스트레스 받으면서 학교에서 밤 새는 것도 그만하기로 했다. 새로운 기회가 조금 생뚱맞은 곳으로 나를 안내할지도 모르겠지만 되기만 하면 하지 않을 이유가 있나.
마지막으로 이런 글을 가끔이나 쓰는 이유는 후에 내가 보기 위함도 있지만 언젠가 내가 그럴 만한 위치가 되었을 때 나와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해서이다. 사실 운이 좋게도 너무 좋은 곳에서 인터뷰 요청을 일찍 받게 되어서 곧 그렇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지금은 너무 신이 나 있다. 얼마 전 인도 친구가 내 손금을 보고 수개월 내로 큰 변화가 생길 거라고, 좋은 기회가 올 거라고 했는데 그게 이게 정말로 그거일려나. 내 손금만이 아니��� 내 마음도 읽은 거라고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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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새해를 맞았다. 별일이 없으면 글도 안 쓰는지라 그동안 빈 공간이 많다. 지난 겨울 박사지원을 했다가 모두 떨어졌고, 졸업 즈음에 썸머 리서치/경과에 따라 박사과정 제안을 받았지만 지도교수와 펀딩 문제로 수락하지 않고 그냥 졸업을 했다. 그러다 마침 우연한 기회에 오래 관심이 있었던 문화재 보존 분야의 석사과정을 찾아 지원했고 다행히 장학금과 함께 오퍼를 받았다. 여름동안은 한국에서 지반공학회 연구소 인턴 자리를 찾아 2개월 동안 일했고, 포르투갈에서 두번째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또 미국 박사과정에 지원을 시작해 지금은 원서접수를 거의 끝마쳐놓은 상태이다.
그동안 여러 경험을 했고 다양한 사람들과 내 대화를 했고 많이 고민했다. 겨울방학은 그것들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볼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또다시 나는 기로에 선 것 같다. 박사를 해야겠다면, 어디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지? 그래서 그동안 했던 걸 비교해보려구요.
코넬에서의 석사과정 1년은 양질의 코스웍과 첫 미국 경험을 제공했다. 경험 많은 교수들의 수업은 분명 값진 것이었으나 기존의 지오텍, 특히 나이가 많았던 코넬의 교수들 수업은 미친듯이 지루했다. 돌이켜보면 수업 시간에 쏟아지는 눈커풀에 허벅지를 꼬집으면서 "다시는 이걸 안 하겠다”고 분노에 찬 다짐을 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히려 흥미로웠던 것들은 역학, 특히 수치해석이나 지진 쪽을 연구하는 젊은 교수들 수업이었고 내 재능 역시 그곳에 있는 걸 확인했다. 석사 프로젝트 로 접했던 Corbin Building 은 특히 흥미와 열정을 자극했는데 문화재 보존 석사과정 SAHC에 지원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했다. 미국 생활은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니었다. 고립된 도시에 살면서 많이 외로웠고 좋은 친구들도 만났는데도 대부분 그랬다. 덕분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었고 언젠가는 내 모습을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절대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경험이다.
지반공학회 인턴은 단지 2개월이라 그랬는지 몰라도 굉장히 좋은 시간이었다. 연구소 사정으로 당초 계획했던 일을 다 하지는 못했고 오히려 오랜 기간 동안 회계 정리만 하다온 꼴이 되었지만 일 자체는 재미있었다. 무엇보다 어딘가에 소속된 기분이 좋았고 나를 알아주는 곳에서 일하는 것이 즐거웠다. 분야는 아무래도 좋았던 것 같지만 재하시험은 생각보다 굉장히 재미있었다. 학회에 있다 보니 요직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나름 사회생활도 맛봤는데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1년만에 돌아와서 그랬겠지만 한국에서의 생활은 더할나위 없이 재밌었다. 한국에 돌아온다는 가정하에 현실적인 연구원으로서의 가능성을 봤고 더군��나 현실패치가 좀 되었다.
포르투갈에서의 SAHC 과정은 결론적으로 너무 즐겁다. 전반적으로 주제가 흥미롭고 강도가 너무 세지 않아서 적당히 흥미를 자극하는 정도이다. 다만, 어느새 뼛속까지 공돌이가 되었는지 너무 건축쪽인 것은 좀 생각보다 답답한 감이 있고 역시 수치해석 쪽이 재미있다. 단점이라면 낮은 지적 자극(?)과 작은 학교 규모 덕분인지 코넬에 비해 내가 ���아서 공부해야하는 점이 있다. 한국에 돌아간다고 가정했을 때 낮은 학교 인지도와 새로운 분야 의 전공 덕분에 위험부담이 있다. 유럽 생활은 불평할 것이 하나도 없다. 날씨는 대체적으로 좋고 음식도 맛이 있고 또 물가가 싸서 걱정할 것이 없다.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 어느때보다 주변 사람들과 깊이 교류하고 있고 누나와 매형과 가까이 사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다.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나는 분명 각각의 경험에서 좋았던 것 그리고 나빴던 것을 정확히 알고 있다. 나빴던 것들은 피하고, 좋았던 것만 따르면 될 일이다. 한번 경험했던 걸 부정하고 다시 시도해 볼 필요는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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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끝나가는 요 며칠은 ‘이 꿀같은 봄방학을 빈둥빈둥 보냈구나. 나는 뭘 했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콜롬비아에 갔던 친구가 돌아와서 그간 찍은 백여 장의 사진을 보여줬고, 아이슬란드에 놀러간 친구들이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들을 볼 때 특히 더 그랬다.
오늘은 느지막히 일어나 꽤 공을 들여 밥을 만들어 먹으며 무한도전을 봤다. 그리고 무작정 나오니까 자연스레 김미커피로 발걸음이 닿았다.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니 전세계적으로 날씨가 좋은 날인가 보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4월의 벚꽃을 잔뜩 올려댔고, 영국에 있는 누나와 매형도 동네 공원에 간 모양이다. 이타카도 간만에 20도가 넘는 봄날이 찾아왔다. 카페 테라스에 앉아있다가, 공원 나무 밑에 기대있다가, 물가 벤치에 가서 누워있었다.
벤치에 누워서 가만 보니 나무가 바람 부는대로 움직이더라. 물 흐르는 소리 사이에 종종 새소리도 섞여 들리고. 아마도 나는 갖가지 다른 순간들을 생각하느라 이 모든 것들을 놓쳤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나의 봄방학이 그들의 여행보다 훌륭하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불과 30초 전까지 내가 그랬듯 의미없이 흘려보낸 순간들 때문이리라.
조금이라도 마음이 약해지는 날은 어김없이 헤어진 애인 생각이 나고, 양말을 신다가도 우리 동네 쇼핑몰에 양말 사러 함께 가던 엄마 생각이 난다. 아름다웠던 어린 날들과 한껏 멋부리고 누비던 서울의 동네들이 차례차례 떠오른다. 서울 서울 서울! 지금 그곳으로 돌아가면 행복할 수 있을까? 아니, 정말로 그때는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기억 속의 그 순간들이 아름다웠을지언정, 그때는 사실 행복한 줄도 몰랐다. 홀로 심사가 꼬여 애인에게 차가웠고, 엄마와 양말을 사고는 금세 친구들 만난다고 훌쩍 나가버렸던 것 같다. 서울의 맛집들, 예쁜 카페들에 앉아 있던 순간에는 그 행복을 미래의 나에게 양보한답시고 사진이나 찍는 게 다이기도 했다. 지금 돌아그곳에 가더라도, 아니 어디에 있더라도, 내 시간이 작년의 어딘가에 또는 내년의 모를 곳에 머물러 있다면 똑같은 일의 반복일 게 뻔하다. 어쩌면 이타카에서의 느긋한 날들을 그리워할지도 모른다.
하하, 이 지긋지긋한 날들이 말이다. 멋부리고 예쁜 카페에 가고 좋은 영화 보고 전시 보고 가끔 술 취해 노래방 가는게 행복인 나로서는 이타카 생활이 퍽퍽한 건 사실이지만, 좋아하지도 싫어할 필요도 없이 그냥 흔들리는 나무 보듯 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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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내가 지각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도 남보다 늦었고 사회진출도, 결혼도 남들보다 짧게는 1년, 길게는 3∼4년 정도 늦은 편이었다. 능력이 부족했거나 다른 여건이 여의치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렇게 늦다 보니 내게는 조바심보다, 차라리 여유가 생긴 편인데, 그래서인지 시기에 맞지 않거나, 형편에 맞지 않는 일을 가끔 벌이기도 한다. 내가 벌인 일 중 가장 뒤늦고도 내 사정에 어울리지 않았던 일은 나이 마흔을 훨씬 넘겨, 남의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겠다고 결정한 일일 것이다. 1997년 봄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가면서, 나는 정식으로 학교를 다니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남들처럼 어느 재단으로부터 연수비를 받고 가는 것도 아니었고, 직장생활 십수년 하면서 마련해 두었던 알량한 집 한채 전세 주고, 그 돈으로 떠나는 막무가내식 자비 연수였다. 그 와중에 공부는 무슨 공부. 학교에 적은 걸어놓되, 그저 몸 성히 잘 빈둥거리다 오는 것이 내 목표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졸지에 현지에서 토플 공부를 하고 나이 마흔 셋에 학교로 다시 돌아가게 된 까닭은 뒤늦게 한 국제 민간재단으로부터 장학금을 얻어낸 탓이 컸지만, 기왕에 늦은 인생, 지금에라도 한번 저질러 보자는 심보도 작용한 셈이었다.
미네소타 대학의 퀴퀴하고 어두컴컴한 연구실 구석에 처박혀 낮에는 식은 도시락 까먹고, 저녁에는 근처에서 사온 햄버거를 꾸역거리며 먹을 때마다 나는 서울에 있는 내 연배들을 생각하면서 다 늦게 무엇 하는 짓인가 하는 후회도 했다. 20대의 팔팔한 미국 아이들과 경쟁하기에는 나는 너무 연로(?)해 있었고 그 덕에 주말도 없이 매일 새벽 한두시까지 그 연구실에서 버틴 끝에 졸업이란 것을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무모했다. 하지만 그때 내린 결정이 내게 남겨준 것은 있다. 그 잘난 석사 학위? 그것은 종이 한장으로 남았을 뿐, 그보다 더 큰 것은 따로 있다. 첫 학기 첫 시험때 시간이 모자라 답안을 완성하지 못한 뒤, 연구실 구석으로 돌아와 억울함에 겨워 찔끔 흘렸던 눈물이 그것이다. 중학생이나 흘릴 법한 눈물을 나이 마흔 셋에 흘렸던 것은 내가 비록 뒤늦게 선택한 길이었지만, 그만큼 절실하게 매달려 있었다는 방증이었기에 내게는 소중하게 남아있는 기억이다. 혹 앞으로도! 여전히 지각인생을 살더라도 그런 절실함이 있는 한 후회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손석희 - 지각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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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troduction
이틀만에 집에서 나왔고 발걸음이 찾은 곳은 역시나 김미 커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그나마’ 안식을 주는 곳, 무기력 속에서 텀블러에 글이라도 쓰게 만들어주는 곳. 지금쯤이면 뭐든 해놓고 놀고 있을 줄 알았던 4월 첫째주의 봄방학이다.
여담이지만 원래는 지난 일요일쯤 캐나다에 가려고 했으나 칠칠치 못하게 I-20를 집에 놓고 오는 바람에 가는 길에 우회를 했고 뜻밖의 여정으로 처음 보는 할머니네서 자고 집에 왔다. (이건 다음 포스팅에 자세하게 쓰는 걸로..)
다시 어디라도 가려고 했지만 그새 올라버린 가격에 헉 하고 머릿속으로 경비 계산만 하다가 차마 예약을 못 하고 결국 이틀동안 집에서 나오지를 못 했다. 한국 예능을 섭렵(윤식당 존잼 정유미 존예)하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난 건 좋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니 다시 무기력과 감정기복의 악순환의 림보에 빠지는 것이 보이기 시작했다.
1.1. 나는 올 5월 말 졸업을 앞두고 있고, 가을학기 입학하는 박사과정에 지원을 했지만 대부분에서 탈락을 했다. 아직 발표가 나지 않은 곳이 세 개 있지만 이미 4월 첫째주인 것을 고려했을 때 희망이 없다고 판단, 가능한 대안을 고려하고자 한다. 당장의 커리어 문제가 지금으로서는 매우 커 보이기는 하나,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고 마주쳐야 할 산이며, 이런 불안함을 마주하지 못하고 매번 실의에 빠져있다면 어떤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1.2. 따라서, 이 글의 궁극적 목적은 현 상황에서 가능한 대안을 찾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더욱 근본적인 물음에 답하는 것이다. 그 물음은 1) 어떻게 불안함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2)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 가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질문에 충실히 답할 경우 현 상황에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자연스레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2. Methodology
천천히 문제를 보니 그동안 여러 사람들과 애가하면서 들었던 조언들, 일상생활에서 얻었던 작은 깨달음들이 다시 한번 생각났다. 1) 가넷에서 정신과 의사 Myler와 만난 것, 2) 누나 소개로 엑시터에 계신 한국인 교수님과 얘기한 것, 그리고 3) 우리 연구실 포닥이 프레젠테이션 마지막에 했던 말 등이 그것인데, 이 세 가지 주제들에 맞춰서 생각을 정리해볼까 한다.
2.1. 지난 번 가넷에서 Nutriotionist 추천으로 Myler와 첫 상담을 했다. 그동안의 일과 나에 대해서 한 시간 가량 얘기를 나눴고, 그 얘기를 듣고는 내가 매사에 너무 descriptive 하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나로서도 굉장히 납득이 갈 만한 말이었고 지금까지의 고민들이 많이 설명이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런 분석적인 관점이 조금 더 합리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하겠지만 가끔은 그것을 따르지 않는 것도 좋겠다는 얘기로 마무리를 했다.
2.2. 엑시터에 계신 토목과 교수님은 내공이 어마어마하신 분이였는데, 현실적인 커리어 조언 보다는 인생얘기를 더 많이 들었다. 그 당시만 해도 눈에 보이는 조언을 구하던 터라 졸업하고 뭘 해야 할까요? 라는 나의 질문을 일축하고, 박사는 단기 목표일 뿐이지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없으므로 정말 어떤 것을 하고 싶은지 깊게 생각해보고 천천히 그 목표를 향해 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덧붙여 내 글만 봐도 내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것 같은데, 잘 생각해보고 마음부터 정리하는 것이 좋겠다고도 하셨다. 하하 아닌 척 하려고 해도 고수 앞에서는 다 탄로가 나는 법이리라.
2.3. 지난 번에 우리 연구실 포닥이 일본에 다녀온 걸 주제로 발표를 했다. 미국에서 지진이 나면 국내 지진 전문가로 팀을 구성해 현지에 조사단을 파견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에 가입을 해놓고는 쟁쟁한 전문가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미루고 있다가 포닥 시작하고 나서 자신감을 얻어 그냥 한번 지원을 해봤는데, 정말로 선발이 되어서 레전드급 성님들과 함께 다녀왔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께서는, do whatever it is not because you can do it but because you want it. 이라고 했다.
3. Result
3.1. 그동안의 내가 결정을 내리는 과정은 철저히 장단점을 따지고 가장 효용이 높은 것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저녁 메뉴를 정할 때도, 진학할 학교를 정할 때도, 연인 관계에 있어서도, 나는 가능한 옵션을 머릿속에 열거한 뒤 장단점을 따졌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Myler가 재미있는 얘기를 해줬는데, 어떤 SF소설의 내용이다. 훗날 인류가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을 개발해 무한한 모든 경우의 수를 계산하는 로봇을 개발했는데, 결국 그 로봇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못 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인간의 ‘하고 싶다’라는 감정이 추가되어야 했다. 분명하게도 이 스토리가 시사하는 바는 결국 나도 장단점과 효용보다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우선이 되어 결정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에 추가로 Mindfullness 라는 책 일부를 보내줬는데 귀찮아서 정독은 안 했지만 대략 내용은 내면에 집중하라는 얘기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에 씨리얼을 먹는데 문득 그 시원한 우유에 씨리얼 한입이 너무 맛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그동안의 나는 밥 먹으면서는 다른 걱정 하느라 이 ‘맛’들을 놓치고 그저 빨리 먹고 나가기에 바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종종 눈 앞에 음식을 가져다 놓고 먹는 것 자체를 즐기려고 노력했고, 결과적으로 먹는 행위 자체가 많이 즐거워졌고 일상에 즐거움도 더 생긴 것 같다. 더불어 맛있게 먹으니 과식을 안 해도 되고 군것질 생각도 준 것 같다.
3.2. 엑시터 교수님과의 얘기로 돌아가 나의 목표가 무엇인지 대답할 수 있을까. 지난 학기에 돌연 SHM을 하겠다고 탑스쿨에 원서를 욱여 넣을 적에 나는 5년을 바쳐도 좋겠다는 확신이 있었는가. 사실 지금도 모르겠다. 확실한 건 지오텍은 아니고 스트럭쳐쪽이 좋으며, 지진이나 수치해석쪽도 괜찮다. 매트랩 짜는 건 언제나 재밌고, 머릿속으로 밤늦게까지 고민하고 나만의 코드 짜는 건 언제나 즐겁다. 당시에 SHM 연구 주제를 보건대, 내가 재밌던 것들을 다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지원을 했다.
연구주제야 당연히 너무너무 중요하지만, 나한테는 환경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말인즉슨, 연구가 좋다한들 시골에서 5-6년 파묻혀서 공부할 양반은 못된다. 단지 싫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런 환경에서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런 면에서 이타카는 그런 환경을 제공하지 못했고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에 대해서도 반감이 생긴 것 같다. 그 반동으로인지 지금은 유럽 또는 한국에서라도 ���찮다고 생각한다. 졸업 후 진로에 있어 미국이 대세인 것은 확실하지만 그런 건 뭐, 개의치 않는다.
문득 작년 이맘 때 코넬에 오기로 한 마음을 떠올려봤다. 숱한 고민 속에 어렵게 내린 결정이었다. 당시에도 워드로 표를 짜 장단점을 나열하고, 주변 사람들이 힘들만큼 얘기를 하다가 결국 내린 결정의 이유는, 그냥 코넬이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코넬이라는 ���름이 주는 팬시함이 좋았고, 진보적인 학풍이 좋았다. 여기 오면 Historic Preservation이나 Architecture 같은 과목도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막상 오니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결정이 실패였다고 생각치는 않는다. 덕분에 더 다양한 연구주제를 접하게 됐고, 너무 늦지 않았을 때 1년 만에 방향을 바꿀 수 있었으니까.
지난 겨울 SOP를 쓰면서 정말 신이 났었다. 겨울에 뉴욕에 갔을 때는 친구가 놀랄 정도로 거기에 빠져있었다. 어디에도 없는 독보적인 연구를 하는 교수들에게 빠져서 그 생각만 했다. 보스턴의 오래된 벽돌 건물들과 로마의 유적을 복원하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던 엔지니어를 건축가로, 공학을 예술로 끌어올리는 것들, 그리고 나는 덕수궁 석조전을 연구해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을 보존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정말이지 심장이 뛰었다. 그러고 나서 금세 그것들을 잊어버렸다.
3.3. 왜냐하면,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당장 그 연구실에 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공백 없이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 하는 것이 걱정이었다. 그래서 그 가슴 뛰던 순간들을 뒤로 하고 적당히 ‘될 것 같은’것들도 둘러봤다. 그랬던 나였기 떄문에 그 순간 브래드의 말에 움찔 하며 깊숙히 다가왔을 것이다.
브래드는 어떻게 하면 그걸 이룰 수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론 그 뒤에 그 분야의 박사가 되기 까지의 인내와 노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만큼 준비해서 지원했고, 뽑혔다’ 대신 ‘하고 싶어서 했는데, 됐다’ 는 것이다. 지금의 나로서 지난 겨울 가슴 뛰던 일들은, 가능해 보이지 않고, 실제로 일어나지도 않았다.
4. Discussion
최근에 스스로 많이 생각하는 말이 있다. 좋아하는 것을 두고 타협하지 말자. 크고 작은 결정에도 그 말을 되뇌이고 있다. 먹고 싶은 걸 먹고,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여행이 가고 싶으면 가자. 설령 안 될 지언정, 뭐가 되어도 상관은 없으나 이게 효용이 제일 크니까 한다는 변명은 하지 말자.
1) 할 수 있기 때문에 하면, 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난다. 하지만, 하고 싶어서 하면 안 된다고 불안할 이유가 있을까.
2) 나는 멋진 걸 하고 싶다. 지난 SOP에 썼던 대로, 오래된 건물들을 공부하고 내가 생각하는 도시의 아름다운 것들을 공부하고 싶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고 보면, 당장 어디에 가서 뭘 하는지는 덜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올 가을의 나는 어디에서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슴 뛰며 쓰던 Statement of Purpose 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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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얼마 전 미국 온 지 처음으로 감자칩을 사다 먹었는데 아, 이렇게 맛있을 수가.. 요즘 스트레스 줄이기의 일환으로 가끔 집에 일찍 와서 케틀칩 먹으며 넷플릭스 보면서 쉬고 있는데 오늘 먹은 허니디종도 맛있었다. 이번 주는 확실히 종종 과감하게 하던 일 끊고 운동도 가고 집에도 오고 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하다. 주중에 밤 새고 나서 도로묵 되었던 컨디션이 금방 돌아온 듯하다.
2. 고기를 먹기 시작했고, 음식에 변화도 주고 가끔 나가서 사 먹기도 하고, 운동도 자주 가고, 집에 와서 놀기도 하고, 대체적으로 안 참고 일부러 더 놓아주고 있다. 군것질에 기대는 것도 많이 사라졌고, 속도 꽤 편안해 졌고, 기분도 훨씬 좋아진 듯하다. 어제는 간만에 코넬시네마에 영화도 보러 갔고 오후에 졸리고 집중 안 된다 싶을 때는 나가서 커피에 디져트를 사먹었다.
3. 그러고 보니 영국에서 밤마다 감자칩 먹던 게 꼭 작년이다. 그때는 석사 어드미션 기다리며 하루하루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딱 1년만에 또 이런 상황이 될 줄이야. 분명히 이번엔 조금 나을 줄 알았고, 이쯤되면 뭐든 나왔을 줄 알았다.
3. 지난 2주 간 리젝만 두 개를 받았고, 그것도 가장 가고 싶었고 가능성 있다고 생각했단 곳에서 떨어졌다. 겉으론 쿨한 척 했지만 아무렇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어드미션 공유하는 인터넷 포럼 등에 관심 안 가지기로 다짐했지만 조바심이 나서 하루에 몇 번이고 열어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러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당연히 자신감은 떨어지고 회의적이 됐다. 더군다나 매일매일 샤워할 때마다, 잠들기 전마다 꿈꿨던 때문인지 두 곳에서 리젝을 받고 나니 다른 곳도 딱히 관심이 없어졌달까..
4. 상황이 이렇다보니 자연스레 플랜비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직인들 쉬울까, 미국에선 자격증도 없고 이런저런 까다로운 조건들 맞추다 보면 적당한 게 없었다. 설령 찾는다고 해도, 잡 어플리케이션은 해본 적이 없다 보니 엄두가 나지도 않았다. 그나마 플랜비까진 다행이다. 플랜씨까지 생각하다 보면 숨이 턱턱 막혔다.
5.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지난 번에 자신감에 차서 김미커피에서 썼던 글처럼, 뭘 하고 싶은지 알겠으니 그렇게 두렵지도 않다. 죄다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다고 길이 없고 어디 하나 비빌 곳도 없을까. 어디든 가서 뭐라도 하고 내년에 또 도전하고 싶으면 그러면 되겠지. 혹시라도 엑시터에 가서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면 프레타망제에서 파트타임으로 공짜 샌드위치 먹으며 공부해도 너무 재밌을 것 같고, 혹시 대전으로 가게 된대도 주말마다 케이티엑스타고 서울서 놀고오면 나름대로 재밌을 것 같다. 뭐 만에 하나라도 그것도 어려워 모교로 돌아가더라도, 그리운 회기에서 기람이형이랑 같이 학교 다니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6. 실의에 빠져서 또 소화불량-우울-무기력 의 림보에 빠지지 말자. 나도 이해못할 정도로 감정기복이 사인곡선이라 언젠가는 또 반대쪽 밑으로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너무 내려가지 않도록 중심을 더 위에 두자. 이 도시가, 보이지 않는 압박이 나를 집어삼키지 못하게 하자! 그래서 이 5월의 끝에는 원래의 나처럼 멋도 부리고, 좋은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종종 때깔 좋은 브런치도 해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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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조작되고 때로는 미화되기 마련이라, 나중에 볼 수 있도록 여기에 적어놓기로 했다. 이 동네가 싫고, 미국이 싫고, 가끔은 이 모든 게 별로 재미가 없다. 간절하게 바랐던 박사조차 연락이 오던지 말던지 이제는 관심도 없고, 심지어 오면 어쩌나 걱정이 들 지경이다. 5년씩이나 이렇게 살아야 한다면, 아무리 명예로운 박사학위를 받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 맨정신으로 끝까지 해낼 수나 있을까.
거의 수 년을 끼고 살았던 소화불량과 식도염이 여기 온 뒤에 심해져서 큰 고생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에는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껴 병원을 방문했다. 식단을 이리저리 바꿔 보기도 했지만 전혀 답을 찾지 못하다가, 병원에서 추천으로 만나게 된 Behavioral Consultant 를 만나며 생각의 전환이 있었다. 이 문제를 단지 뭘 먹느냐가 아니라 전체적인 밸런스의 문제로 이해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내가 느꼈던 것도 이런 사이클이었다. ��화가 되지 않으면 잠을 잘 못 자고 기분이 다운되며, 다음날 심한 피로와 무기력함으로 이어져 능률이 급격히 떨어지고, 자괴감이 밀려오고 그걸 메꾸려 무리해서 학교에 남아있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트레스만 쌓이고 그마저도 생산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최근 비교적 우울감에 빠져 있엇고 필요 이상으로 불안에 시달렸다. 이 문장을 쓰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 (사실 지금도 별 거 아닌 걸로 엄살 부리는 것 같아 조심스럽기는 하다.) 그동안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소화불량으로 병원 방문 전 Survey 작성을 하다가 깨닫게 된 것이다. 친한 친구나 엄마에게 내가 좀 변한 것 같다느니 우울해 보인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 때도 잘 몰랐다. 해가 뜨지 않을 때(사실 떠도 오피스에만 있으니 의미는 없다)도 몰랐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오랜만에 해가 쨍하고 떴을 때, 아무 이유 없이 조증 환자처럼 흥분한 나를 발견했다. 기분이 좋아 학교 앞 벤치에 나가 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런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고, 원래 내 모습이었다는 것을.
갑자기 좋아진 날씨와 햇살 때문일까, 아니면 삶의 태도를 좀 바꾸고 즐기며 살자고 다짐했기 때문일까. 요 며칠은 그럭저럭 소화도 잘 되고 피로도 훨씬 덜하고 괜찮은 날들이었다. 학교에 왔다가 도시락이 지겨워질 즈음에는 싸왔던 빵은 버리고 밖에 나가서 사먹기도 했다. 지난 주말에는 (이 시점에 왜 방학이 있는지 깨달았다) 친구가 마침 오게 되어서 큰맘먹고 뉴욕에 다녀왔다. 너무 돈 생각 않고 맛있는 것도 먹었고, 레코드 샵 가서 평소라면 안 샀을 음반도 샀고, 커피도 마시고 학교 생각이라고는 조금도 안 했다. 이제야 나에게도 ‘삶’이라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늘,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또 무기력에 집에서 나오지 못했다. 때아닌 중2병 처럼 창가에 앉아서 노래를 틀어놓고 아무것도 안 했다. 아니, 못 했다. 고기를 굽고 스토브를 청소하지 않은 룸메에게 괜히 화가 났고, 묻는 말에 무표정하지 않게 대답하는 게 어려웠으며, 오후에 약속은 취소하고 싶었고, 밥은 먹었는데도 자꾸 뭔가가 먹고 싶었고, 벌써 다 본 글인데도 애꿎은 인터넷 포럼만 자꾸 또 읽고 있었다. 뭘 찾고 있었던 걸까. 박사 어플리케이션 결과? 아직 나올 시기가 아니라는 것 알고 있고, 오늘 아침만 해도 그깟 거 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께 그리고 어제 꿈을 꿨다. 뜬금 없는 내용들이기도 했고, 과거의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다시 나타나기도 했지만 분명 무서웠다. 꿈 생각을 하다가 평소처럼 밥을 먹고 싱크대 청소를 하고 나서는, 대뜸 너무 외롭다고 생각이 들거나 누군가와 얘기하고 싶기도 했다. 그리고 누구하고도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에 잡힌 상담사 예약을 바꿔볼까 생각했다. 우울한 노래를 들었는데 오히려 위로 받는 것 같았다. 2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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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6일, 무려 2017년.
1. 매우 오랜만에 쓰는 텀블러 포스팅. 한동안 꽤나 열심히 이것저것 올렸었지만 학교일 바빠지면서 뜸해졌다. 지금 보니 돼지고기 파티가 마지막 포스팅인데 그 뒤로 찍었던 사진들 모두 캐치업 할 수 있을까.
2. 학기 마치고 나서 2주동안 뉴욕 가서 놀다가 30일인가 돌아온 뒤로 약 일주일간 폐인생활을 지속하고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내가 원한다기 보다 타의에 의한 칩거생활이고 이틀 정도 좋았으나 너무 지루하고 나랑은 잘 안 맞는다는 것.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너무 싫으면서도 나는 끝없이 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경향이 있어서 고독이 길어질수록 점점 사람 만나기도 귀찮아지는 지경에 이른다. 심심하니까 먹는 것에 좀더 집착하게 되고 또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급격하게 살도 찌고 몸 상하는 게 느껴진다. 악순환.
3. 지난 학기중에는 정말 내일 닥친 일만 하느라 내내 바빴고 점점 바빠지다가 기말고사 즈음에는 격일로 집에 갔다. 하루는 책상이나 의자에서 몇 시간 대충 자고 다음 날은 집에 가서 씻고 세 시간 정도 자고 나오는 생활의 반복. 그래도 돌이켜 보면 어떻게 그걸 해냈다는 사실에 뿌듯하고 결과적으로 성적도 나름 잘 받아서 지금 생각하면 좋기는 하다.
4. 유난히 바빴던 가장 큰 이유는 분명히 어플리케이션을 병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데드라인이 12월 초부터 있어서 시험기간이랑 겹치는 바람에 학기중에 부랴부랴 틈틈히 준비해야 됐던 데다가 추천서 등등 생각하면 이게 또 할일이 여간 많은 게 아니라.. 게다가 시간적인 바쁨 이상으로 정신적인 압박이 또 엄청났고. 이것도 뭐 어떻게 꾸역꾸역 해서 시간 맞춰서 다 욱여넣었다. 지난 4일을 끝으로 모두 지원을 마쳤고 이제 결과만 기다리면 되는 상황. 아 후련하다!
5. 시험 끝나고 나면 이번 학기 복습도 하고 데드라인 늦은 학교 어플리케이션은 좀더 공들여 쓰고 또 다음 학기 과목들도 좀 들여다 보려고 생각했으나.. 분명히 너무 야심에 가득찬 계획이었다. 그냥 쉬라고 시간 줄 땐 남들처럼 좀 쉬고 그러는 게.. 이럴 거면 한국이나 갈 걸 싶기도 하고. 첫학기에 겨울방학에 간 지 4개월 밖에 안 됐는데 이렇다할 성과도 없이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분명 여기 오기로 결심했을 땐 큰 무리해서 오는 만큼 야심찼고 그냥 팔짜 좋게 방학 때 집에 와서 쉬기에는 면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매번 뭐가 되었든 놀랄 만한 소식을 들고서 금의환향하는 꿈을 꿨었다. 지금도 역시 그렇고, 뭐 그런 것들이 그간의 나를 지탱해 주는 가장 큰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6. 아직도 남은 2주동안 뭘 할지는 모르겠다. 다음학기 과목들 좀 들여다 볼까 싶기도 하고 논문도 읽으려고 뽑아놨고 책도 보스턴 갔을 때 한 권 사왔지만 들고만 다니지 좀처럼 손에 잡히지가 않아서. 당장 밖에 나오는 것부터 너무 귀찮고 핸드폰으로 올라오지 않는 새 피드만 들여다 보는 중이라..
7. 이렇게 하릴없이 노트북 들고 카페를 전전하는 상황들이 오자 작년 봄쯤 결과 기다리며 전전긍긍하던 날들의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는 정말 많이 불안했던 것 같고 지금보다 자존감이 낮았었는지 더 외롭고 더 불안했었다. 어드미션 결과 받고 나서는 내내 머릿속에 어디로 가야하는지 고민만 가득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 와서 좋은 영항 참 많이 받았고 걱정에 비해서 열심히 잘했다. 그래서 그때 그 결정도 잘한 것 같고.
8. 이제 어떻게 될지는 두고봐야겠지만 분명히 작년만큼 불안하지는 않다. 확실히 이번 어플리케이션은 두 번째인 데다가 주변 도움도 많이 받아 조금 더 수월하게 깊이있는 글을 썼던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원 과정동안은 나를 돌아보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들이 내 글에서 보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하게도 왜 이것이 하고 싶고 뭘 하고 싶고 어떻게 할 것인지 였으니까. 내가 하고자 하는 연구에 대한 명확한 목표나 생각이 없고는 도통 제대로 쓸 수 있지가 않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계속 무엇을 왜 하고 싶은지 또 어떻게 할 건지 되물어 봐야만 했다.
돌이켜 평가하기에 그동안 내가 왔던 길은 아마 뭘 하고 싶다라기 보다 뭘 하기 싫어서 반대쪽으로 왔던 것 같다. 대학원 가겠다고 애초부터 생각은 했었지만, 막상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는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다기에는 뭘 할지 잘 몰랐었다. 오히려 취직이 싫었기 때문에 대학원에 가기로 결심을 했던 것 같다. 뭘 전공할지 선택해야 됐을 땐 꼭 지반 전공을 하고 싶다기 보다 다른 게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어서 그나마 아버지 덕에 친숙한 지오텍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 결과로 작년 자기소개서는 글 쓰는 것도 어려웠고, 당연히 그만큼 깊이도 없었다. 원서에다가 다른 게 하기 싫어서 일단 당신네 프로그램에 한번 지원해 봅니다. 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리고 지원하고 나서는 너무 불안했었는데 그건 아마 리젝션에 대한 불안감이라기 보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서 그랬던 것 같다.
이번에는 불안하기 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 가을 학기에 우연히 들었던 수업 중 하나가 너무 재밌어서 특별히 열심히 했고, 자연스레 관련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러면서 예전부터 막연하게 하고 싶다고만 생각했던 건축이나 오래된 구조물 복원하는 분야에 걸쳐서 연구하는 사람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른 게 싫어서 반동적으로 오게 된 지금 이 분야는 내가 정말 원했던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5년 동안 나의 젊을을 바칠 만한 주제 역시 찾을 수가 없었다.
새로 지원하는 박사과정은 내 석사과정 프로그램이랑은 동떨어진 분야고, 그래서 해당 분야에 백그라운드 부족하다. 이걸 하겠다고 지도교수를 찾아갔을 때 지도교조차 도박이라며 날 이해하지 못했고 나한테 물었다. Is this subject more important to you? or is PhD more important to you? 나는 이미 작정을 어느정도 하고 간 터라 전자라고 못받았다. 아마 그 순간이 그동안 내 인생에 있어 주체적인 결정을 하게 된 분수령이 아니었을까. 객관적으로 봐도 작년보다 어쩌면 더 큰 도박을 하는 게 분명하다. 하지만 이제는 이게 하고 싶으니까 글도 더 진실되게 쓸 수 있었고 쓰는 과정에서 나 스스로도 너무 가슴 뛰고 신났다. 그래서 그런지 안 되도 이제는 상관이 없다. 이게 난데, 나를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다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최소한 이제는 어디로 가는지를 아니까 이번 기회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대략 3월 즈음 되면 얼추 결과가 나오지 싶다. 그럼 올 여름부터 앞으로의 약 5년간의 내 생활도 어느정도 윤곽이 정해질 거고, 나는 이제 나의 삽십대의 그림을 그려야겠지. 좋은 소식 들고 믿고 응원해준 가족들 친구들에게 좋은 소식 전하는 순간이 찾아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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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은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없어서 하루종일 연구실 냉장고에 있는 피자(지난 학생회 선거에서 남은 것 친구가 가져다 놓음) 먹으면서 실리콘 밸리의 스티브잡스가 된 기분을 느끼며 새벽까지 숙제를 했고, 그 결과 이번 주도 수요일 오후에 완전이 퍼져 버렸다. 뭔가 후레쉬한 바이브를 느끼고 싶어서 건축과도 놀러가고 네스퀵도 사들고 아트 건물도 가서 앉아있었다. 이 건물은 심지어 물도 맛있어서 요즘 자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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