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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문학을 찾게 되는 순간
좋은 문학이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일상이라는 거대한 불안 속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너덜너덜하게 찢기고 부숴져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안식처가 필요하다. 잠깐만이라도 눈과 귀를 편히 식힐 수 있는 그런 곳. 빠르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패스트 푸드처럼 우리는 많은 선택지와 마주하게 된다. 하루종일 자기, 먹기, 친구 만나기, 문화 생활하기. 짧은 시간이나마 불안의 세계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는 패스트 힐링. 나의 안식처는 문학이다.
대학 입시생 시절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너는 이게 재밌어? 사실 그 질문은 내가 한국 문학을 읽으며 스스로 묻곤 했던 질문 중 하나였다.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질문이었지만 나는 친구에게, 나 스스로에게 해줄 마땅한 답을 찾지 못했다. 재밌을 리가 없었다. 세상에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이게 재밌으면 나머지 것들은 재밌다는 말로 표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문학과 접촉할 일이 대부분 사라지고 만다. 또한 교과서에서 접했던 문학 작품들은 권선징악이라는 명백한 주제의식의 소설이 대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황순원 작가의「소나기」나 현진건 작가의「운수 좋은 날」같은 작품들이다. 교훈적 문학작품에 익숙한 상태에서, 확실히 그때의 나에게 좋은 문학이란 기승전결이 뚜렷한 소설과 미학적인 시였다.
좋다는 것. ‘보통 이상 수준이어서 만족하다.’ 지극히 주관적인 평가이자 감상이다. 유명한 문학 작품들에서 보통 이상의 수준을 느낀다고 하여도 만족이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 시절 나 또한 그랬다. 좋다고 생각하면 좋아질 것도 같았다. 남들이 좋다고 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았음에도 좋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이제와서 고백해보자면 그때 읽었던 시집의 절반 이상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문학을 찾지 않게 되는 순간이 여럿 있었다. 억지로 작품을 이해해보려고 애쓸 때, 문학은 스트레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럼에도 문학을 찾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김애란 작가의「너의 여름은 어떠니」와 윤이형 작가의「루카」이다.
고전 문학과 근대 문학에 익숙해져 있는 시야를 확장시켜준 작품은 김애란 작가의「너의 여름은 어떠니」라는 단편 소설이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 소설집「비행운」에 가장 첫번째로 실린「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충격적인 사건이나 강렬한 이미지가 없는 다소 잔잔한 서사의 소설이다. 제목에서부터 작가는 넌지시 물어온다. 너의 여름은 어땠니?
사건은 고향 친구의 부고가 들려온 날, 대학 시절 짝사랑하던 선배로부터 연락이 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늘씬한 대식가와의 먹기 대결에 출연해달라는 것이었다. 몸매에 콤플렉스가 있는 ‘나’는 완곡히 거절하지만 결국 스튜디오에 서게 된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부분은 ‘선배’의 인물 변화와 고향 친구 ‘병만’의 존재 의식이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선배는 ‘나’의 부재를 알아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선배의 앞에서 몸에 달라붙은 옷을 입고 게걸스럽게 핫도그를 먹어치워야하는 치욕스러운 일을,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빨리 끝내려 한다. 자꾸만 움츠러드는 ‘나’에게 선배는 그때처럼 ‘고개 좀 들어, 미영아. 고개 좀 들어, 제발’ 이라고 외친다. 급히 방송국을 빠져 나가는 ‘나’의 팔뚝을 세게 잡은 선배는 고맙다며 계좌번호를 알려달라고 한다. 선배의 연락에 샘솟던 설레고 좋았던 기억이 산산조각 나며 ‘나’는 결국 고향 친구 병만의 장례식에 가지 못한다. 자취방에 돌아온 ‘나’는 불현듯 물놀이를 하다가 익사할 뻔 했던 유년시절 사건을 떠올리게 된다. 손에 걸리는 거라곤 쥐자마자 부서지는 강물이 전부였던 그 순간에, 병만이 ‘나’의 손을 잡은 것이다. 그가 아플 거라는 걸 알았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병만의 팔뚝을 더욱 세게 움켜쥔다. 조용히 가라 앉고 있던 ‘나’를 잡아채준 그 팔뚝. 좁은 자취방에서 가장 강렬했던 여름의 기억을 되살리며 살면서 내가 가장 세게 잡은 누군가의 팔뚝을,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폭우처럼 쏟아져 내림을 느낀다.
이렇게 김애란 작가는 일상에서 일어남직한 사건을 잔인할 정도로 소설 속에 녹여낸다.「너의 여름은 어떠니」는 현실과 거리가 멀고, 특별성을 띈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소설의 고정관념을 깨부숴주었다. 누군가에게는 사소한 일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의 방향을 바꾸어 놓을 정도로 큰 영향을 주고, 그때는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니었던 것처럼. 김애란 작가의 소설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법한 이야기도 소설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내내 동경해왔던 인물의 이면을 발견하고 기억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인물의 면모를 깨닫는 일. 좋은 문학이란, 어쩌면 다른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두 번째로 윤이형 작가의「루카」이다. 2014년 제 14회 황순원 문학상, 2015년 제 6회 젊은 작가상, 2015년 제 5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한 윤이형의「루카」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좋은 문학 작품으로 자리잡혀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루카」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을 읽는 독자로서, 문학을 창작하는 작가로서 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과거 연인 루카의 아버지가 ‘나’를 찾아오면서 시작되는 이 소설은 그간 윤이형 작가가 써온 「대니」,「윈 캠프 루비」와 같은 SF 소���의 작품들과는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 퀴어 영화 모임에서 만난 ‘나’와 루카는 성소수자이다. 스스로 ‘커밍아웃’을 해 성 정체성을 밝힌 나와 달리 루카는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밝혀지게 되는 ‘아웃팅’을 당한다. 작가는 이 지점부터 ‘나’와 루카의 차이를 드러낸다. 또한 ‘나’는 퀴어 관련 활동을 통해 정체성을 찾아가지만 루카는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취미 생활도 미뤄둔 채 학원 강사 일을 늘리게 된다. 둘만의 공간에서 함께 하기를 바랐던 ‘나’는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던 루카를 이해하지 못했고, 결국 그들은 ‘서로 다름’을 극복하지 못해 헤어지게 된다.
이 서사에서 동성애라는 키워드를 빼낸다면「루카」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실패한 사랑 이야기처럼 보인다. 작가는 그 지점을 꿰뚫은 것이다. 많은 동성애 텍스트가 다루고 있는 사회적 폭력이 아닌, 그들도 흔한 연인들처럼 사소한 오해가 불거져 헤어진다는 것. 이해관계에 있어서 서로를 소수자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또한 동성애 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그들의 가족 이야기. 루카의 아버지다. 루카의 아버지는 타지를 헤맸던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털어놓는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편을 들어줄 사람 하나 없는 곳을 묵묵히 걷기만 했던 루카가 실은 죽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만다.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하는 기독교 사회에서 잘못된 믿음으로 자신의 아들을 잃었다는 때늦은 후회. ‘나’에게 찾아와 루카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애원하지만 ‘나’는 그마저 들어주지 않는다. ‘나’ 또한 믿음의 관계에 루카를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루카에게 가장 가깝고도 멀었던 두 사람은 자신의 시선에 갇혀 루카를 잃고 만다.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 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었던 너는.
소설의 마지막 문단은 ‘나’의 체념적 어조로 쓰여진 문장이 나열된다.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떤 사람들과는 그럴 수 없다는 현실적 아픔. 작가는 동성애 서사에서 다뤄야할 지점까지 놓치지 않고 끌어내고 있다.
편견없이 나와 다른 사람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문학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작가의 시선은 어떤 이들을 가두고, 또 해방 시키기도 한다. 좋은 문학은 내면에 자리잡힌 관념을 건드려 균열을 생성한다. 윤이형 작가의「루카」는 사회 구성원으로서, 창작자로서 가지는 시선의 폭력성을 환기 시키는 좋은 문학 작품이다.
2. 좋은 문학에 대해서
세 가지의 하위 목록은 문학을 배우기 이전의 내가 품었던 오해들이다. 좋은 문학이 가져야 할 필수 요소라고 생각했던 세 가지의 하위 목록을 재해석하는 식으로 구성해보았다.
① 좋은 문학은 아름다워야 한다.
몇몇의 사람들은 문학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대중적으로 비춰지는 미학적인 시의 영향때문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구절에서 우리는 충분히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사람들에게 황병승 시인의「여장남자 시코쿠」를 읽어보라고 한다면 그들은 어떻게 말할까?
좋고 나쁨의 사회적 객관성처럼 ‘아름다움’은 나름대로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의 세계에서 ‘아름다움’은 천차만별적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떤 이는 상상의 확장판이라고 여겨지는 문학 작품에서 아름다움의 희열을 느끼고, 또 어떤 이는 인간에 대한 고발적인 서사를 다룬 문학 작품에서 기이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현대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작 알고 있었을 사실이다. 아름다운 단어의 나열��� 이루어진 작품은 사전적 의미 외에 어느 것도 포괄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을 것이다. 문학이 마냥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문학의 기괴한 단면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 그 속에서도 아름다움은 분명 존재한다. 미학적 아름다움이 아닌 생애 느껴보지 못한 아름다움의 여러 갈래를 우리는 문학 속에서 찾을 수 있다.
② 좋은 문학은 어려워야 한다.
문학은 삶의 틈을 예리하게 표현해내는 예술 작품이다. 우리의 삶이 쉽게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문학도 그렇다. 답이 쉽게 도출되지 않는 문제를 보고 우리는 ‘어렵다’고 표현한다. 현실의 문제만으로도 머리 아파 죽겠는데, 문학 속 사건들까지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문학이 어렵다는 생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학은 삶을 보관하는 ‘원더박스’이자 사위가 ‘밝아지기 전에’ 빛을 제공하는 촛불이기도 하다. 삶의 실상을, 일상의 부조리를, 관계의 뒤틀림을, 상상의 실마리를 낱낱이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좋은 문학의 조건이다.
먼저, 편혜영 작가의「원더박스」를 보자. ‘원더박스’란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는 진기하고 매혹적인 수집품들로 채운 장식장이나 전시실을 가리킨다. 줄거리는 이렇다. 사고를 당해 다리를 다친 수만과 그런 수만을 간호하는 소영. 문제는 그 사고를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지만 피해자는 존재하는 상황. 작가는 명확히 찾을 수 없는 잘못의 형상을 원더박스라는 제목을 도구로 활용해 더욱 예리하게 포착하고자 했다. 김이 모든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죽어 마땅한 인간이라고 했다. 몸이 멀쩡했다면 ���적한 김을 직접 찾아다녔을 거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보상과 사과를 받아내야겠다고 했다. 수만이 끝도 없이 탓을 해왔던 김. 오랜 도피 생활을 하던 김이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수만은 자책에 빠지기도 한다. 그간 퍼붓던 비난이 모두 진심이었다는 걸 소영은 안다. 소설이 마무리 되면서 작가는 이렇게 서술한다. ‘또 다시 알 수 없는 어떤 방식으로 인생에게 속아 넘어갔다는 느낌이었다. 소영은 이것이야말로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었다.’ 우리는 자주 그런 상황과 부딪치곤 한다. 또 나의 잘못을 누군가의 탓으로 떠넘기고 싶어하기도 한다. 원망의 대상이 사라지고 난 후의 허망함. 어디에서부터 오는 지 모를 부채감.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악순환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였는지 작가는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을 소설화 시켜 삶의 실상을 명백히 드러냈다.
두 번째로 한강 작가의「밝아지기 전에」를 보자. 소설의 전체적 키워드는 죽음이다.「밝아지기 전에」가 수록된 한강의 단편 소설집「노랑무늬 영원」의 키워드이기도 하다. 소설은 ‘나’와 ‘나’의 아들 윤이, 은이 언니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나’는 항암 치료를 끝내 생과 죽음의 경계에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인물이며, 윤이는 죽음과는 거리가 먼 생의 기운이 펄럭이는 인물이다. 동생의 죽음을 방치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은이 언니는 세계를 떠돌다 죽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인물이다. 인상적인 부분은 소설의 첫 머리라고 할 수 있다. 윤이와 산책을 하던 ‘나’는 풀숲 쪽에서 얼굴을 가슴 쪽으로 파묻고 죽어있는 흰 새를 발견한다. 윤이가 다가가 새를 만지려 하자 ‘나’는 그런 윤이를 제지한다. 만지면 안 되냐는 윤이의 질문에 ‘나’는 ‘죽었잖아.’ 라고 답한다. 죽었으면 만지면 안 돼? 윤이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는 그 길을 벗어난다. 또한 ‘나’는 은이 언니의 설득어린 질문과 고백에 냉정할 정도로 호의적이지 못한다. 고개를 젓고 외면한다. ‘나’는 죽음과 마주했었고, 죽음과 어떠한 연결고리도 두고 싶지 않은 ‘윤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은이 언니가 뎅기열로 죽게 되고 ‘나’는 은이 언니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은이 언니에게 차마 해주지 못했던 말들, 삶에게 내던지는 말들을 서슴없이 털어놓는다.「밝아지기 전에」는 생과 죽음을 부채꼴로 형상화 했을 때 각자의 자리에서 대표할 수 있는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놓았다. 작가는 관계의 본능적인 민낯을 ‘나’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③ 좋은 문학은 고발해야 한다.
대게의 문학 작품이 고발적 특성을 띈 것은 사실이다. 긍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텍스트는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에도 우리가 따뜻하게 얻어갈 수 있는 희망적 요소가 존재한다. 아직 살아갈 수 있다고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 이번 목차에서 소개할 작품은 김중혁 작가의「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이다.
전국 바닷가를 돌아다니며 지��의 오차를 발견하는 일을 하는 ‘나’는 모친상을 당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에 살고 있는 삼촌으로부터 소포를 받게 된다. 다시 출발 지점으로 돌아가서 달리기를 시작하기엔 너무 지쳤고 너무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함께 달릴 만한 사람도 없다. 어머니는 이제 레이스를 마친 것이다. ‘나’는 어머니를 잃은 충격에 소포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다가 일주일 후 회사로 돌아와 소포를 뜯게 된다. 종이 상자 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나무 조각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나무 조각의 촉감에서 어머니의 손등을 발견한다. ‘나’는 뒤늦게 나무 조각이 지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삼촌의 전화에 그것이 에스키모의 지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삼촌은 ‘나’에게 캐나다에 와서 함께 지도를 연구하며 지내자고 제안 하지만 ‘나’는 ‘제가 거기서 뭘 할 수 있겠어요?’ 라고 말한다. 삼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어떤 때는 공간을 옮기는 것만으로도 많은 게 바뀌는 법이란다. 네가 할 일은 거기에서 여기로 이동하는 것뿐이야.’ 라며 ‘나’를 설득하고 자신이 지내고 있는 툴레로 올 것을 권한다.
툴레는 세상의 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위치만 바꾸어 보아도 커다란 위로가 될 수도 있다는 것. ‘나’가 자신이 현재 위치한 곳이 세상의 끝 같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쩌먼 모두가 세상의 끝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고 작가는 위로의 말을 던진다. 위태롭게 흔들리지만 언제나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지침과 같이, 지침을 붙드는 힘과 같이 무엇이 우리는 이토록 살아가게 만드는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지침이 다른 방향을 가리킬 때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작가는 문학으로써 독자들을 위로한다.
이렇듯 우리가 위로 받는 순간은 단순하다. 괜찮아 질 거야, 걱정하지 마.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장식적인 말보다는 나와 같은 사람, 나처럼 살아왔고 그럼에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우리는 작은 위로를 얻게 된다. 문학은 그러한 지점에서 가장 우수한 역할을 해내고 있다.
현재 내가 있는 위치에서 느껴지는 좋은 문학을 여러 작품에 빗대어 토로해보았다. 소제목에 알맞은 단편을 추리는 과정에서 많은 단편들을 놓친 것 같아 마음이 쓰리다. 좋은 문학이란 추상적인 산물이며 정의하고 싶지 않은 개념 중 하나다. ‘좋은 문’학은 앞으로 창작자의 길을 걸음에 있어서 수도 없이 바뀔 것이고, 그 의미가 불분명해질 것이다. 그러길 바란다.
17년 1학기 중간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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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 속에서 살아가기
김금희, 박솔뫼, 최은미, 최은영, 황정은의 소설로 본 우리 시대 소설)
필자가 생각하는 우리 시대의 키워드는 ‘재난’이다. 국가적 재난과 개인적 재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시대를 대표하는 소설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국가의 재난이 곧 개인의 재난이었던 고전 소설에는 권선징악과 세태풍자, 그리고 조국 광복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쏟아져 나왔고, 암울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한 희망적인 서사의 작품들이 쓰여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 군상(群像)의 싸움이 되었다. 현대 소설은 사회의 일원인 개인에게 초점을 맞춰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와 그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을 담아내는 데 집중했다. 태어난 이상 누구나 재난을 맞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떤 인물을 소설적으로 승화시켜 이 시대를 대변할 지는 온전히 작가 개인의 몫이 되었다. 필자는 이 점에 착안해 젊은 소설가들의 다섯 작품―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 최은미의 『눈으로 만든 사람』,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을 이야기해보려 한다.
ⅰ. 지긋지긋한 시뮬라크르
최은미의 소설 「눈으로 만든 사람」을 보자. 주인공 강윤희는 어릴 적 당한 성폭행으로 외음부의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겨 임신 중일 때를 제외하고 소염진통제와 항생제를 달고 살아야하는 삶이 되어버렸다. 강윤희는 그 기억에 대해 ‘몸의 증상을 빼면 그만큼 그 일은 현실감이 없었다’고 진술한다. 또한 가해자 강중식은 ‘온갖 집안 대소사 속에서 아무렇지 않게’ 피해자 강윤희를 대해왔다. 자신의 아픈 아들 강민서를 강윤희에게 맡기는 뻔뻔한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가족 내 성폭행의 현실적인 내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재난을 맞이하는 인물들이 태도인데, 먼저 강윤희는 여덟살 밖에 되지 않은 딸 백아영이 성 조숙증을 진단 받자 트라우마에서 발발된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바깥으로 표출한다. 그 방식은 딸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행하는 폭력적인 과잉 보호의 형태로 나타난다. 강중식은 과거 자신이 강윤희에게 저지른 악행이 ‘징악’의 형태로 자신과 자신의 아들 강민서에게 되돌아오자, 죄를 인정함과 동시에 자신이 받는 징벌의 크기에 대해 부당함을 호소한다. 또 강윤희의 남편 백은호는 어떤가. 딸 백아영과 강민서가 가깝게 지내는 것에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아내를 눈치없이 자극하기도 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강윤희와의 약속을 쉽게 저버리고 만다. 딸이 성 조숙증을 진단 받고, 틱 증상을 보여도 일관성 있게 방관할 뿐이다.
콧속까지 뻐근해져오는 시린 겨울날 강중식은 강윤희를 업어보기 위해 매일 같이 눈사람을 만들었다. 강윤희 또한 어린 강민서를 위해 눈사람을 만들었고, 강민서와 백아영은 사이좋게 만든 눈사람을 강윤희에게 날씨가 따뜻해짐에 따라 눈은 녹고 말겠지만,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것. 강중식과 강윤희, 강민서와 백아영. 눈사람은 사라졌지만 눈코입을 대신했던 흑미가 그 자리에 남아있었던 것처럼, 세대가 교체되어도 남는 무언가. 재난은 비슷한 레파토리로 우리의 일상을 덮친다. 아무런 경고없이 말이다.
ⅱ. 우리를 위한 소설은 없다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는 간단히 말해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속을 빠져나와 세상의 형편을 깨닫게 되는 성장서사의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주목할 만한 지점은 소유가 쇼코의 ‘미소’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인데, 작가는 총 세 단계―알 수 없는 이질감/나약하고 방어적인 태도/서늘함―에 걸쳐 그 미소를 통해 소유의 성장을 증명해보인다. 다소 신파처럼 느껴졌을 법한 소재에 독특한 소설적 장치없이 성장서사-가족서사를 써내려가기란 여간 쉽지 않다. 한국과 일본이라는 넓은 세계를 주입한 점과 그들이 적지 않으나 흔치도 않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각자의 학교에서 어설프게나마 영어로 대화를 할 수 있었다는 것과 할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것. 그리고 자신 위주로 돌아가던 세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로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겠다는 허망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 소설에 흡입력을 불어 넣는다. 이에 따라 소유는 자신이 갇힌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는 특별한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고 그 믿음은 안정된 세계로 들어선 쇼코를 목격하자마자 더욱 굳세지기도 한다. 그러나 거기서 발발된 알맹이 없는 열정은 금방 탄로나버리기 일쑤였다. 소유의 성장은 쇼코의 ‘미소’를 통해 증명되었으나 흥미를 잃은 영화감독 일에서 물러서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뜻밖에도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이제 혼자라는 것과, 내가 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소유가 평범한 세계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은 어쩌면 우리(we)를 위한 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 현실에서도 충분이 아프고 있는 우린(we)데, 위로를 받지 못할망정 상처를 들쑤시는 소설이란 재난을 부추기는 소설처럼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찾게 되는 건 우리(fence)안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래서 이렇게도 말해본다. 우리를 위한 소설은 없으나 우리의, 우리에 의한 소설은 앞으로도 무궁무진할 것이라고.
ⅲ.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
“가야 했다, 어디론가.” 영업팀장에서 시설관리팀 직원으로 좌천된 필용은 점심시간이 되자 한참을 떠돌다 종로 맥도날드로 들어간다. 사실상 권고사직인 좌천이 되고 나서 생각하는 거라곤 체면치레할 명함 속 직함이고, 알바생에게 반말이나 찍찍 해대는 무례한 ‘아재’스러움은 필용의 캐릭터는 마냥 불쌍하고 안쓰럽게 느껴지지 않도록 만든다. 이 소설이 가져오는 화두는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완전히 사라진다는 것은 대체 불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예전 추억을 상기시키며 들어간 맥도날드에서는 한때 대표 메뉴였던 피시버거(A)는 사라지고 없었다. 더 첨가되어 A’ 상태로 대체 상태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 A의 고유한 상태로의 완전한 소멸이었다.
필용과 양희는 대학 선후배 사이이자 종로의 한 어학원에서 같은 강의를 듣는 수강생이다. 필용과 양희는 함께 공부를 하고 맥도날드로 가 끼니를 떼우는 관계였다. 그런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난데없는 양희의 고백 때문이었다. “나 선배 사랑하는데.” 그럴듯한 분위기나 거창한 표현없이 방금 생각났다는 듯이 툭 내뱉는다. 여기서 양희와 필용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말하자면, 현재와 미래 중 어느 걸 좇으며 살아가냐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되는 건지에 대한 물음에 양희는 지금 사랑하는 것뿐이지 앞으로의 일은 누구도 알 수 없다는 듯 두루뭉술하게 필용을 흔들어놓는다. 오늘은 사랑하지만 내일은 모른다. 미래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필용에게 있어서 양희의 고백은 장난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다. 사랑을 확인하는데 혈안이 된 필용은 정오만 되면 양희에게 사랑에 대해 묻는다. 오늘은 어떤데? 사랑하죠, 오늘도. 그 이상한 사랑 고백과 사랑의 확인이 끝나는 시점도 뜬금없다. 또 다시 금방 생각났다는 듯이 ‘아 선배 나 안 해요, 사랑.’ 천천히 시든 것도 아닌 감정 자체가 아주 ‘없다’고 말하는 양희에게 필용은 분노하며 막말을 퍼붓는다.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 속 캐릭터는 인간(인물)을 이분법적으로 나눠봤을 때, 평이한 자가 특이한 자를 만나 다른 방향성을 깨닫고 성찰하게 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에서 평이한 자는 대부분 주인공의 자리를 꿰고 있으며 자신의 좁은 시야가 인생을 얼마나 편협하게 만들었는지 자각하게 만든다. 미래를 위해 준비하고 버텨내야했던 필용과 달리 현재의 감정, 현재의 시야에 대해 집중했던(어쩌면 오늘을 걱정하기에 바빴던) 양희는 필용 뿐만 아니라 읽는 이에게도 다른 삶의 방식을 제시해준다. 필용이 흘리는 눈물 또한 자신의 한계점에 다다라서 미래를 좇다 놓쳐버린 현재에 대해, 자신이 양희를 찾은 이유가 고작 자신의 회복을 위한 것이라는 스스로의 못남을 인정하게 되��까지의 후회가 들어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해본다.
이 소설을 다루면서 양희를 빼놓자니 섭섭하다. 양희의 캐릭터는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함으로 둘러싸인 인물이다. 다소 낯선 인물이 소설속에서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작가의 능력에 달려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인물을 읽는 이에게 온전히 담길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작가의 능력에 달렸다. 그러한 지점에서 김금희는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어쩜 이렇게 소설 속에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일까. 양희의 캐릭터를 뿐만 아니라 김금희의 다른 단편 소설 「조중균의 세계」 속 조중균이나 「문상」 속 희극배우의 캐릭터를 보면 다�� 현실과 동떨어져 보일 수는 있겠으나 주인공을 각성 시키는 데 효과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에는 부정할 수가 없다.
ⅳ. 오르락 내리락하다가 결국 넘어지고 말겠지
이런 이야기를 소설로 써도 소설로써의 가치가 있을까? 싶은 이야기는 모두 황정은이 만들어낸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이미지 속에 어떤 섬뜩함이 존재하는 황정은의 소설 「上行」은 남자친구 오제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나’. 셋이서 오제 어머니의 고모가 일구는 밭에 고추를 따러 하행하는 이야기이다. 고추를 따러가는 길은 고즈넉하다. 하행 길 내내 차창 밖으로 보여진 건 허물어진 축사와 버려진 콩들, 두 개의 연못을 헤매이다 도착한 곳은 ‘좁지만 깨끗하게 정비된 도로를 따라 도시의 철물점과는 다른 물건을 주렁주렁 내건 철물점이 있었고 양곡장이 있었고 보건소와 우체국과 면사무소가 아담하게 이어지’는 시골 마을이다. 오제의 어머니가 ‘새고모’라고 부르는 여자가 가꾸는 천평 남짓의 밭, 그들은 그곳에서 고추도, 호박도, 콩도, 배추도 모조리 따 자루에 담는다. ‘봐라’ 하고 나에게 명하는 오제의 어머니는 시골의 다른 얼굴―버려진 축사와 바싹 말라 버려진 콩들, 앞쪽은 멀쩡해보였으나 갈색이나 회색의 얼룩과 함께 검은 구멍이 뚫린 고추들, 누군가 쓰고 버린 듯한 장대, 싼값에 내놓은 땅(그러나 팔리지 않는)―들을 마주하게 한다. 시골은 누군가에 의해 쓸모가 없어져 버려진 것들과 더 이상 필요가 없어서 방치된 것들의 집합소였다.
황정은의 「上行」을 읽는 묘미는 소설적 기교를 부리지 않는 단문과 평범한 듯 보이나 리듬감이 살아있는 대화들. 일상적인 상황처럼 보이나 작가의 예리한 시선에 포착된 시골의 다원적인 환경들. 그러한 요소들이 합쳐져 다소 다른 소설들에 비해 심심해보이는 이 소설이 자극적인 서사의 세계속에서도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반면에 「上行」은 너무 단조로운 서사를 가지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데, 이 단순한 서사는 농촌문제, 도시문제, 고령화문제 같은 복합적인 현대 사회의 문제를 적절히 드러내는 데 힘을 실어준다. 작가는 下行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에 어째서 上行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인가. 여기서부터 출발해보면 이 소설의 진짜 이야기가 와닿기 시작한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발버둥 치는 현대인들과 올라가지도 내려가지도 못해 중간에서 어설프게 서 있는 사람들. 그게 바로 작가가 생각한 현대인의 초상이었다.
ⅴ.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모르겠는 것
1980년 5월 18일 참혹했던 그 해 오월 광주는 벌써 삼십년도 훌쩍 지나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 전라도 광주 ‘출신’이라면 어딜가나 무거운 역사가 그들의 뒤를 따랐고 영문을 모르는 이들은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모를 무게감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다. 그것이 역사였고 역사를 지고 사는 이들의 숙명이었다.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의 주인공 ‘나’는 여행 중에 버클리 대학 근처에서 우연히 어떤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그 모임은 한국어에 관심은 있으나 능숙치 못한 교포들이 함께 모여 한국어를 배우는 목적으로 결성되었고, ‘나’는 그 모임에서 교포 해나를 만나게 된다. 해나가 준비해온 텍스트는 다름 아닌 “May, 18th”, 즉 영문으로 된 광주 사태 이야기였다. 광주가 고향이긴 하나 체감적으로 와닿지 않는 사태 이후에 태어난 ‘나’는 교포들과 함께 읽어내려가는 한국 광주의 역사적 사건이 여느 역사적 사건―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과 칠레의 피노체트가 저지른 일―과 다를 것없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이에 ‘나’는 ‘영어가 사건의 객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며 해나로부터 건네 받은 시 「학살 2」에서도 다른 나라의 시―육십년대 중남미의 폭정이나 1947년 타이페이 2·28 사건―를 떠올린다. ’나‘는 버클리를 시작으로 이년 뒤 교토와 삼년 뒤 삼십년을 맞은 오월의 광주에서 비슷한 상황을 맞이한다.
박솔뫼의 소설은 작위적인 느낌이 강하다. 흐름이 뚝뚝 끊기기도 하고 영화적 기법처럼 장면에서 그쳐버리는 장면들이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무얼 부르지」도 마찬가지다. 다소 무거운 주제를 이야기하고 있는 이 소설은 평면적으로 보면 조국의 역사적 사건을 체험해보지 못한 新세대가 해명 같은 이야기를 늘어 놓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가지는 생각은 지금을 살아가는 젊은 세대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인식이다. 그러나 박솔뫼는 아무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 윤리에 어긋나보이는 문제를 인물의 구체적 설정도, 소설적 사건도 모두 배제한 채 주제의식만을 소설 전면에 배치해 새로운 정서를 공유한다. 알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모르겠는 것에 대한 정서는 경험과 이해의 중간 지점쯤에 위치한다. 경험과 이해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사람은 舊세대가 아닌 작가이다. 그런 면에서 역사적 사건을 소설적 배경으로 등장시킨 다수의 작품들 가운데, 박솔뫼의 「그럼 무얼 부르지」는 효용성을 갖는다.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재난을 보냈고, 앞으로도 감당치 못할 만큼 맞이해야 한다. 현대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쩌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재난을 겪으며 이미 무언가를 상실해가는데 익숙해졌다. 재난을 피해갈 수 없으니 예방하는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현대 소설은 재난경보 시스템의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사람들을 회유하고 회생할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소설이 가지고 있다.
17년 1학기 기말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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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금이 있던 자리
문학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불륜. 얼마나 극악무도한 행위인가. 그럼에도 이 소설을 읽는 내내 가슴 언저리가 저릿했다. 불편하면서도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을 콕콕 찔러대는 이것. 나는 그 현상을 단순히 설명할 수 없다. 그저 이 현상들로 하여금 내게 오는 아픔이 싫지 않다는 거다. 아, 싫어. 불편해. 그런 지점을 건드리면서도 끝까지 페이지를 넘기게 만드는 힘. 그렇기 때문에, 소설을 떼려야 뗄 수 없다.
서간체라는 형식이 어렵게 느껴지지만 사실 의미를 풀어 읽으면 그저 편지 형식이라는 뜻이다. 신경숙은 편지 형식의 ��체로 불륜 상대인 남자에게 계속해서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그러나 이 편지는 전해질 용도가 아니다. 자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심리와 솔직한 고백을 문체를 활용해 끌어내고 있는 것이다.
소설 속 ‘나’는 가정이 있는 남자를 사랑한다. 남자는 ‘나’에게 비행기를 타고 이 세계를 떠나자고 제안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유년기의 한 자락이 ‘나’를 사랑과 죄책감 사이에서 끈질기게 놓아주지 않기 때문이다. 위로 오빠만 셋이 있는 나는 엄마가 떠난 후 집에 들어온 새 여자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마당의 늦봄 볕을 거느린 듯한 화사한 여자. 좋은 냄새가 나는 너무나 뽀얀 그 여자.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색이 아니었을 뿐 더러 처음으로 ‘나’에게 관심을 기울여준 사람이었기에 큰 오빠의 협박에도 ‘나’는 그 여자가 싫지만은 않다. 나는 그 여자가 엄마를 집 밖으로 내몰게 한 내연녀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눈물을 참으려 자꾸만 이를 닦는 여자, 없어진 나를 찾아 헤맨 여자. ‘나’는 열흘 밖에 살다 가지 않은 여자에 대한 생각을 자꾸만 들추며 이 불륜의 행위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계속해서 상기한다. 은은한 향기로움을 가진 그 여자가 정확히 집어내 주었던 자신의 근원을. 잊지 못하면서.
그리고 이 장면이 없었더라면 이 소설이 그리도 마음 아프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 같다. 작가가 의도한 바대로, 모두가 마음이 쓰라렸던 그 대목.
그 여자의 당신이었던 아버지를 믿었으면서도, 그 여자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집을 나갔을까요. 어머니 때문이었을까요? 그 여자는 어머니가 잠시 다녀간 다음날 집을 나갔습니다. 그렇다고 어머니께서 그 여자에게 무슨 대거리를 한 것도 아니에요. 어머니는 오셔서 그 여자가 업고 있던 막냇동생을 받아 안았을 뿐입니다. 지치셨던 것인가? 아니면 그것이 어머니께서 견디시는 방법이셨는가? 어머니는 그저 말없이 아이를 받아 안고서 젖을 먹이셨어요. 어머니 젖은 퉁퉁 불어서 푸른 힘줄이 불끈불끈 솟아 있었습니다. 어린애가 한참을 빨고 나니까 그 힘줄이 가셨습니다. 봄볕이 내리쬐는 그 봄날에 마루에 앉아 젖먹이는 어머니와 그 곁에 서서 그저 마당만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는 그 여자라니. 어머니는 젖을 빨다 잠이 든 어린애를 포대기에 싸서 마루에 눕혀 놓고, 토방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게로 오셨어요. 그 때, 제 손에 그 여자가 만들어 준 설기떡이 쥐어져 있었던가 말았던가. 그 풍경을 생각하니 눈물이 번지는 군요. 어머니는 한 칸씩 위로 채워진 제 웃옷 단추를 다시 끌러서 제대로 채워 주시고, 벗어 놓은 제 신발에 담긴 흙부스러기를 털어내 주시고서는 물끄러미 제 눈을 들여다보시더니 다시 가셨어요. 삼십 분도 채 안 되는 시간이었지요.
그 짧았던 삼십분 사이에 그 여자는 깨달은 것이다. 내가 있어서는 안 될 곳이었단 걸. 시간이 흘러서 그 상황을 모두 이해할 수 있게 된 나이가 된 ‘나’는 그 한 자락의 추억에 남자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일평생 남편에게 버림받은 채 살아온 점촌 할머니. 그 상황을 모두 지켜본 엄마. 아버지의 불륜 때문에 집을 나간 엄마. 열흘 만에 집을 떠난 그 여자. 그런 가정 속에서 자란 ‘나’, 그 여자가 된 ‘나’. 그 여자가 되고 싶었고, 나처럼은 되지 말라는 그 여자의 말이 자꾸만 괴롭혔던 것일 지도 모른다. 흐름에 맞지 않는 이야기인 것 같지만 나는 어린 ‘나’가 겪었던 그 여자의 감정을 어느 다른 소설에서도 느낀 적이 있다. 전경린의 <안마당이 있는 가겟집 풍경>이라는 소설인데, 여기서 어린 화자는 아버지의 동료인 한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어한다. 세련되고 친절한 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싶은 그 화자의 심경. 향기가 나는 그 여자를 싫어할 수 없었던 ‘나’와 비슷한 감정이 연루되어 자꾸만 어딘가가 절절했다.
‘나’는 남자를 만나며 겪은 반가움, 수줍음, 그리움, 무안함까지 모두 놓아버리기로 한다. 나는 남자와 약속했던 시간이 지나고 괴로워하다 결국 남자의 집으로 전화를 걸게 된다. 평안한 아내의 목소리, 그리고 남자의 아이 은선이까지. 눈이 먼 송아지와 그 밖에 여러 대입되는 상황을 풀어쓰며 감각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한 신경숙의 능력에 감탄하곤 했지만 마냥 좋아할 수가 없어 씁쓸할 뿐이다. 아직 나는 문학과 현실의 경계에서 갈팡질팡하는 중인가보다.
신경숙 풍금이 있던 자리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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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한 짓
동생이 동네 편의점 마감조를 잠시 맡게 되었다. 저녁을 편의점에서 해결할 생각으로 자정 쯤에 엄마와 집을 나섰다.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던 불짬뽕과 스팸치즈밥버거, 치즈 핫바를 먹었다. 먹었는데... 불짬뽕에서 멈췄어야 했다. 불짬뽕을 먹고 슬슬 위가 불편해졌던걸 무시한 내 잘못,, 스팸밥버거를 먹으며 절실히 느꼈다. 멈춰야한다. 먹는 걸 그만 해야 해... 그러나 나는 그것까지 다 먹고 핫바에도 손을 뻗었다. 핫바를 씹으며 편의점 바닥에 토를 해버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먹고 일어나자 진짜 토하고 싶어졌다. 소화는커녕 자꾸 체기가 몰려와 결국 가스활명수를 사 마셨다. 현재 시각 새벽 두시 이분 이제 좀 편해졌다. 다시는 그렇게 안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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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하기도 힘든 법인데, 한 만큼 나오지 않는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몇년간 내 목표는 입시였다. 입시에서 간신히 살아남으니 이제 무얼 해야 하는지가 관건이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중에 안타깝게도 적당한 걸 찾지 못한 나는 허무하게 방학을 맞이했다. 방학이 시작된지 보름 정도가 ���났는데 이제 노트북 앞에서 무언가를 써내려가려니 막막하기만 하다. 어렴풋이 생각해놓은 인물들을 조금 만들어내고 나니 이제 사건이 문제다. 내가 이들로 하여금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 그간 ���을 많진 않지만 꽤 꾸준히 읽어왔다. 한강의 바람이 분다, 가라와 소년이 온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노르웨이의 숲), 슈테판 츠바이크의 초조한 마음(연민), 파스칼 키냐르의 혀끝에서 맴도는 이름. 이번 방학에는 전공자라면 읽었어야 할 세계 명작들을 모조리 해결할 셈이었는데 그 일이 생각보다 고되다. 읽은 작품에 영향을 적지 않게 받는 나로서는 무리한 일일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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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30 금요일 여권을 찾으러 다녀왔다. 면허증 재발급 신청도 했다. 프로듀스를 뒤늦게 보며 드는 생각은... 나도 아직 어린데 저 어린 아이들.... 00년생 진영이.... 괜찮아.... 지훈도 90년대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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