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s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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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참 가혹하다.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누명을 쓰거나, 피해를 보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예를 들면 지금 부랄 친구의 부랄이 없음을 확인하고 그 얇아진 두 다리를 얌전히 침대 시트에 내려둔 놈의 복잡 미묘한 심정이라든가. 또는 여전히 남아있는 술의 출처에 관한 혐의. 본인 것이 없어진 일만큼 가혹한 일이 어디있겠냐만은.
“나 추운데 바지 좀 줄래. 그리고.. 혼자 있게 해 주라.”
“... 허.”
희수가 가���히 제 얼굴을 덮고 훌쩍거렸다. 희수는 상대가 당혹했다는 사실 쯤은 눈을 가리고 있어도 알 수 있었을 테다. 이윽고 누군가 몸을 일으키려는 듯 침대에 무게가 실렸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희수의 배 위에 옷가지가 던져졌다. 바지였다.
“... 그래. 혼자 있어라.”
“... ...”
“난 화장실 좀.”
방문이 닫혔다.
*
사실 그 때 진목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히는 걸 느꼈다. 그리고 폐부에 꺼림칙하고 애매한 직감이 한기처럼 날아들었다. 진목은 바람대로 옷을 좀 내려주고 제가 벗겨낸 바지를 희수 배 위에 툭 던져 놓은 다음 얠 혼자 두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방금 본 것을 머릿속에서 떨쳐내려 노력하면서. 그러나 그 진귀한 장면을 쉽게 잊을 수 있을 리가. 진목은 엉거주춤한 모양으로 방바닥에 발을 딛었다. 눈을 크게 감았다 떠 보아도 부드러운 곡선의 가벼운 몸과 물렁한 살이 손 끝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이전에 유도 기술을 제게 걸며 힘겨루기를 하던 시절과 비교도 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이어서 그 아래 허벅지 안쪽 살이 떠올랐다. 안 돼. 미친 놈아. 머리를 한 번 털어냈다. 점차 말도 안 되는 상상이 뇌리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래선 안 될 부위가 뻑적지근해짐을 느꼈다. 뇌리에 진정한 의미의 사이렌이 울렸다. 사나이는 태어나 네 번 운다, 아니, 네 번 세운다. 이미 열 번도 넘었겠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여자가 됐어도 친구를 상대로 서다니 반성해라 고진목. 더 좆되기 전에.
진목은 한 번 숨을 크게 내쉰 뒤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화장실로 직행하고 나면 희수의 집에는 지옥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적어도 거실에는. 침실과 화장실에는 각자 인고의 침음이 흐를 터였다. 이미 천 번은 넘게 들렸을 시계 초침 소리도 함께.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진목은 화장실에서의 고행이 마무리된 다음 손을 씻어내며 생각했다. 도대체 그 술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손을 대충 털어내고 다시금 거실로 나와 술병을 낚아챘다. 품명이며 설명글, 술병을 감싸고 있던 패키지까지 낱낱이 살폈다. 온통 한자로 도배돼 있는 기이하고 미심쩍은 포장 박스 안쪽에 작은 브로셔를 발견하고 단번에 펼쳐냈다. 다행히 작은 인쇄물은 으레 수입품에 따로 붙어 있는 것처럼 알아볼 수 있는 한국어 안내문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품명. 백일몽주. 제조사. 제조국. 이건 지워져 있다. 먹는 방법. 나를 마셔요. 주의. 되돌리고 싶다면 같이 마신 사람을 상대로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드세요.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에게 판매할 수 없음. 유통기한. 2024. 유통기한... 유통기한. 유통기한이 중요하지는 않다. 그런데 뭐? 상상한 것을 현실로 만들어?
“... 뭐 해.”
마침 타이밍 좋게 방문이 열리고 희수가 나타났다. 삼십 분이 좀 넘게 지난 때였으니 너의 참선은 삼십 분만에 끝나는 종류였던가. 진목은 안내문을 든 채 그대로 희수를 쳐다보았다.
“야.”
“... 왜.”
“너 이제부터 그렇게 살아야겠다.”
다음 순간 무엇이 날아올지 알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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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다만, 너와 나 나라 지키는 영광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 절반쯤. 그 중에서 반의 반도 안 되는 누군가는 나라 지키는 영광을 누리지 못한다. 불특정 다수와 보내는 일 년 반의 가혹 캠프를 영광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래서 다른 말로 특혜라고도 부르는 군 면제는 고에게 생활관 기상 나팔 소리 따위는 모르게 만들어 주었다. 휴일의 단잠을 악몽으로 물들이는 일 없도록. 꿈 없이 잘 자는 체질 덕분에 악몽이라 해 봐야 철 지난 사춘기 시절 방황이 꿈 속에 ���물게 떠오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일어나 봐, 고진목!
사이렌 음이 번개와 같이 들이쳤다. 사이렌이 아니라, 기상 나팔? 아니, 고성의 목소리였다. 여자의 것 같은. 여자? 어째서? 여자랑 잤나? 그럴 리가 없는데. 마침 여자 아이돌과 헤어진지 얼마 안 된 참이었다. 그래서 고는 제가 술김에 사고를 친 줄 알았다. 좆 됐다. 그걸 잘못 써서 벌어진 일인데 좆 됐다는 말이 맞기는 한가. 이윽고 술. 잠. 무엇이든 덜 깬 정신 사이로 이성적인 사고가 흘러들었다. 분명 어제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을 마셨고, 집에 초대받아 더 마시고, 이야기하다 퍼졌고.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염희수 집으로 갔는데. 혼자 살기엔 썰렁한 투룸 침실 너머로 어제의 기억을 증명하듯 빈 술병이 보였다. 그러나 염은 찬찬히 기억을 되짚을 시간은 주지 않았고, 벽력같은 소식을 전했다. 뭐가 생기고, 뭐가 없어졌다고, 끝내 느껴지는 감촉까지.
야, 너..
회로가 고장난 로봇처럼 꿈뻑대는 눈. 말을 잇지 못하는 입과 다르게 손은 본능에 충실했다. 벌써 눈물 고인 염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는 염의 얇은 옷자락 위를 덮은 제 손을 기민하�� 움직였다. 손아귀에 물려드는 부드럽고 뭉근한 살갗의 따뜻함... 고는 반사적으로 몸을 확인하는 데 알맞은 각도를 찾기 시작했다. 그건 일초도 걸리지 않는 사이에 일어났다. 봉긋한 부분과 돌출된 부분, 근육이 없는 살덩이. 다른 쪽도 같나. 옷 때문에 착각한 거 아닌가. 그래서 옷자락 밑으로 불쑥 손을 넣었을 땐 염에게 미친 거 아니냐며 발로 얼굴을 맞기까지 했다. 얼얼한 얼굴을 감싸쥐며 자세를 바로한 다음.
그러니까, 네가 여자가 됐다는 말이지.
... 어.
하...
염은 아직 눈 앞의 치한(?) 때문에 붉어진 두 뺨과 물기 어린 눈을 삭이지 못한 상태였다. 고는 눈을 반쯤 좁힌 채 상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그게 마치 네 탓이라는 것 같아 보였는지.
... 몰라. 모른다고 나도. 그냥 일어나 보니까 이랬어.
... ...
씨, 짜증 나...
..... 작을 것 같더라.
뭐?
그리고 한대 더 맞았다. ...확실히, 조금 흥분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짚고 넘어갈 것은 고에게도 있었다.
술은 무슨 얘기야.
말 잘 했네. 너, 술 어디서 가져왔어? 이거 네가 일부러 준 거지.
뭔 소리야.
말이 안 되잖아!
같이 마셨잖아.
그러니까!
아니, 애초에 이런 술 받은 적 없다고!
그럼 왜 만���?!
뭐? 네가 갖다 댔잖아!
아무리 그래도, 어?!!!
둘의 바보 같은 대화는 어디선가 본 웃긴 동영상을 떠오르게 했다. 고는 순간 힘이 탁 풀려 바람 소리를 냈고, 염을 내려다보며 침대 시트에 비스듬히 팔을 짚었다. 그러지 않아도 차이가 나던 팔 굵기며 몸집은 이제 멀리서 봐도 성별이 다르다는 걸 확연히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필름 안 끊겼어. 다 기억나.
... ...
어제 너네 집 와서 마시고. 넌 아예 맛 가고.
.... .... 어.
니가 치운다길래 내가 그냥 처 자라고 눕혀서. 너 옷 갈아입고, 자고.
.... ..... ....
근데 그때 마셨던 게. 저거.
.... 어.
저거 니가 꺼낸 거야.
구라 치지 말라고, 이런 상황에도 장난칠 생각이 드냐며 또다시 소리치는 염에게 고는 고함으로 맞섰다. 내가 장난을 왜 쳐! 이딴 장난 나도 사절이라고. 부랄 친구 만지기. 친구 부랄 만지기. 재미도 없는 VS 놀이에서 선택지에도 없는 친구 부랄 없애기라니. 만졌다면 가슴이겠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불현듯 어떤 가능성이 떠올랐다.
그럼, 거기도 진짜냐?
마주한 눈은 사뭇 진지했고, 대답을 기다리는 듯 상대를 향해 있었다. 거기라고 하면, ... 누군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벽걸이 시계에서 초침이 째깍째깍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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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넌 자격 없잖아.
다민이 거울을 바라보았다. 빛바랜 금속 장식으로 둘러싸인 예스러운 양식의 거울은 세월의 흔적이 가득했으나 제 역할을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곳곳에 흠집이 난 매끄럽고 둥근 표면에 두 사람분의 인영이 비치고 있었다. 교실 벽에 붙은 시계의 시침이 그림자에 가려졌으므로 하교하는 아이들의 희박한 대화 소리만이 늦은 오후 시간대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창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온 햇빛이 제자리를 찾으려는 듯 방황하다 어둠에 먹혀 사라지기 시작했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시선이 엇갈렸다. 그림자에 감싸인 둘은 햇빛의 각도에 따라 별안간 세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가, 넷이 되었다가, 비로소 둘이 되었다.
그는 단어의 의미를 파고드는 타입이 아니었지만, 약속과 자격은 그의 의식 속에서 별안간 튀어오르는 존재였다. 자신이 받은 상과 무수한 칭찬들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할 만큼 오래된 과거의 단면으로부터, 그런 단어들은 이따금 현실에 등장해 기억의 한가운데로 쏟아지곤 했다. 그리고 초점 없는 눈이 자신이 아닌 허공을 향하는 것을 알아차리던 순간에서야 어떤 기억이 솟아올랐다. 그것은 누군가로부터의 외침이다. 자신을 짓누르고 물리적으로 고통을 주던 그는 그를 더 이상 일어날 수 없게 한 뒤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제안했다. 앞으로 사고를 치지 않는다면 내 아들이 될 자격을 주고 계속해서 너를 지원할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꼭 약속하거라. 그는 자신이 대물림한 폭력의 피를 자신의 심장에 새겨진 방식으로 제압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의 자식은 십대의 중반에서 후반으로 자라기까지 다른 예시와 비교하여 특별히 나쁘거나 좋지 않은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였기 때문에, 그의 바람은 어쩌면 옳은 길로 가고 있었으리라.
그는 손을 멈추었다. 새끼 손가락을 감싼 금속성의 반지는 거울빛의 반사를 받아 약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것은 거울 안의 것과 같은 것으로, 흔한 소재였다. 그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알아낸 이야기에 따르면 골동품에 깃든 불분명한 힘은 사람을 뒤바꾸어 놓는다. 이름, 나이, 겉모습과 저마다의 역사까지 모두 베껴 겉보기에 완전히 같은 존재가 되는데, 다만 성격이 다르다고 했다. 이전에 알던 이라고는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어투가 험해지거나, 비상식적이고, 목적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종래에는 주변을 잊은 채 사라진다고 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떠올려냈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소녀의 앞에 상처럼 맺혀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의 과오, 그리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 채 자기 손으로 또다시 짓밟아 버린 누군가의 믿음을 차례로 떠올리면서, 자신은 결코 저것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또한 자신이 알아채지 못한 사이에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소녀에게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이미 깨뜨려 버린 유리잔의 파편을 피가 나도록 쥐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소녀의 다리를 부러뜨려 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자신이 거기 있었다. 그가 긴 침묵 끝에 입을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래.
너도 나를 잊어.
대신 한 번만 안아볼 수 있을까.
목소리는 분명히 거울 바깥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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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마이의 무녀가 병 속에 있는 걸 보았다. 소년들이 말했다. "무녀여, 원하는 게 무엇인가?" 그녀가 대답하길, "죽여 주소서."
-T.S.엘리엇, 황무지.
굶주림에 잡아먹힌 여자. 척박한 생. 무질서, 공허, 피와 고름이 영혼을 잿빛으로 물들인 끝에 비로소 사랑의 기쁨을 좇는 가여운 숨. ���는 당신같은 여자를 잘 압니다. 전부를 주지 않지요. 심장의 남은 부분을 마지막 순간까지 아껴 두었다가, 때가 되면 온 숨을 황홀 속에 내뱉는 것이 고결이라 믿습니다. 야트막한 습지와 햇볕이 내리쬐는 히아신스 언덕 아래에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 구원인 줄 압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흉한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아름다움에 스스로 속아넘어갔음을 알고 있습니다. 수천 개의 고약한 죽음을 목도하며 나만은 꽃답게 죽으리라, 삼켜내던 혀끝을 내가 모를 리 없습니다. 모두를 속였노라 홀로 자만하면서.
그래서 멋대로 굴기 싫군요. 당신이 가진 연약한 목을 비트는 상상을 하면 할수록 당신에게 개죽음을 주고 싶지 않아집니다. 오만하게 들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제일 오만한 것이 하나 있다면 내가 당신의 혼을 씻겨주지 못할지언정 그 삶을 유예시키고 싶다는 것입니다. 지리멸렬한 삶일지라도, 그 속에 잠깐이나마. 그러나 내겐 영겁이기에.
당신이 죽은 자리에 꽃이 피면 좋겠어.
-
그녀는 안개가 자욱한 숲을 건너갔다. 남자는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것 같으면 따라붙고, 가까우면 몇 걸음 멀어졌다. 도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달이 새벽을 비췄다. 불현듯 새가 날아간다. 그녀의 맨발이 흙으로 젖어갔다. 한 차례 바람이 불던 찰나.
"어딜 가."
남자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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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디로 흐르는가.
식당을 나오자 더운 바람이 불었다. 익숙한 캐럴이 흐른다. 따로 품을 들여 선곡할 만큼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은 항상 비슷한 노래가 흐른다. 텍사스보다는 우아하고 뉴욕보다 초라한 디프로스의 다운타운에 걸맞게 적당히 값비싼 안식. 당신은 식사 예절은 고사하고 소파 먼지를 털지도 않지. 쥐새끼와 함께 시궁창 소굴에서 잠을 자고 빗물로 얼굴을 씻어내려. 그런데 내가 본 건 뭐란 말인가. 그것도 당신 볼에 흐른 빗방울이라고 할 셈이라면 차라리 진짜 어린애 취급을 할 텐데. 그러나 손에 들린 건 당신이 탐내지도 않은 모자 따위가. 그러니 냅킨이 본디 향한 자리는 입가가 아니다. 허나 순간에 마주한 눈을 생각하면 이유 모를 슬픔의 깊이를 넘겨짚을 순 없다. 대신 다른 방식을 생각하는 것은 이전에 누군가를 잃어본 덕에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음이 우습다. 그러니 원치 않는 사치일지라도 위로가 된다면 나는 기꺼이 뒤에서 걸으리라.
열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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