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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투명한 눈꺼풀

안과 밖의 온도 차로 흐려진 창가에서 "무심은 마음을 잊었다는 뜻일까 외면한다는걸까" 낙서를 하며 처음으로 마음의 생업을 관둘 때를 생각할 무렵 젖는다는 건 물든다는 뜻이고 물든다는 건 하나로 섞인다는 말이었다. 서리꽃처럼 녹아떨어질 그 말은, 널 종교로 삼고 싶어. 네 눈빛이 교리가 되고 입맞춤이 세례가 될 순 없을까 차라리 나는 애인이 나의 유일한 맹신이기를 바랐다

잠든 애인을 바라보는 묵도 속에는 가져본 적 없는 당신이란 말과 곰팡이 핀 천장의 야광별에 대한 미안함이 다 들어있었다 그럴 때 운명이란 점심에 애인이 끓인 콩나물국을 같이 먹고, 남은 한 국자에 밥을 말아 한밤에 홀로 먹는 일이었다. 거인의 눈동자가 이쪽을 들여다보는 듯 창밖은 깜깜. 보풀 인 옷깃 여미며 서둘러 떠나갔을 애인의 거리는 막막하고 사물들은 저마다의 품속으로 어둠에 잠기는데

어디서 온 것일까

환기한 적 없는 집안의 먼지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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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nus In F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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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둥이 치는 어느 날, 작연출 토마스는 자신의 각색 작품 <비너스 인 퍼> 속 ‘밴다 본 두나예브’ 역의 오디션을 열지만, 원하는 여배우를 찾지 못해 한탄한다. 그러나 뒤늦게 찾아온 동명의 여배우 ‘밴다 조르단’이 오디션을 보게 되고 밴다는 ‘두나예브’를 토마스는 상대 배역인 ‘쿠셈스키’를 연기한다. 이 과정에서 밴다는 이 작품에 대해 성차별적이며 남성 중심의 상황에 대해 불평하지만 토마스는 이것은 둘 사랑의 문제라고 반박한다. 오디션이 진행되면서 둘은 각자의 배역에 몰입하며 실제와 극의 경계가 무너지고, 밴다는 토마스와 그의 약혼녀 사이에도 개입한다. 밴다는 비너스의 등장 장면에 대해 제안하고 점차 극과 토마스를 지배한다. 토마스가 마조흐적 성향에 과몰입하면서 둘의 권력 구조는 역전된다. 결국 밴다는 토마스를 대도구에 묶어 결박시킨뒤, 굴복당�� 토마스에게 일침을 가하고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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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중극의 쿠솀스키는 숙모에게 ‘궁정식사랑’의 형태를 경험했고 그 찰나의 순간이 그의 존재의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토마스/쿠솀스키: 왕족의 품위를 갖추고 있었죠. 육감적이고, 도도하며, 상대방을 압도했습니다. 숙모님은 제 기분을 단한번도 맞춰주지 않았어요. 절 업신여겼죠. 그래서 저도 숙모님을 음탕한 귀족년이라고 부르면서 반항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숙모님이 저에게 복수를 하신 거죠. 그날 부모님이 외출하셨을 때 숙모님이 서재로 들어오셨습니다. 커다란 러시아산 검은 여우 망토를 입고 계셨죠. (중략) 모피 위로 저를 쓰러뜨리고는 바지를 벗겼습니다. 저는 용감하게 맞서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하녀들이 제 손과 발을 꼼짝 못하게 잡고있었고, 숙모님이 회초리를 저에게 휘두르셨죠. 자작나무 회초리가 공중에서 윙윙 소리를 내고, 저에게 떨어졌습니다. 허벅지 뒤쪽과 발가벗은 엉덩이가 불이 붙은 것 같았습니다. 마치 구리 접시에 파고드는 염산 같았죠. 한 대 한 대가 진정한 예술가의 손길이었습니다. (중략) 그때부터, 모피는 그냥 모피일 수가 없고, 자작나무 막대기는 그냥 막대기일 수가 없습니다. 아시겠죠, 그 순간, 그 방에서, 그 여자에 의해서, 저라는 사람이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두나예브가 자신을 소개하는 모습을 통해 그녀가 자신이 연출하기에 좋은, 그리고 매혹적인 인물이라는 것을 직감한다.

    벤다/두나예브: (중략) 저는 젊고 아름다워요. 그리고 저는 그걸 최대한 이용할 거에요. 저는 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다 가질 거에요.

     기본적으로 쿠솀스키에겐 여신의 존재가 필요했고 그녀의 발바닥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 그가 욕망하는 것이었다. 쿠솀스키는 두나예브의 개인성을 존중하지 않고 그녀를 그 이상의 존재, 여신 ‘비너스’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여신을 떠받드는 동시에 여신의 권력을 두나예브에게 달콤한 언어로 입력하고 권유하며 그녀의 행동을 설계한다. 그 교묘함 속에는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려는 연출가적 행위들이 내재되어있다. 그럼에도 여신에 대한 일종의 거리감을 유지하는 ‘궁정식사랑’의 뼈대를 가져간다.

    밴다/두나예브: 그래, 하지만 만약-내가 이 밍크 밑으로 허벅지를 벌린다면.. 날 갖지 않을래?

    (중략)

    토마스/쿠솀스키: 권력, 당신이 원하는 건 권력입니다. 폼페이에서도 그걸 원한 겁니다. 나를 갖길 원하고, 다른 모든 독재자들처럼 발로 내 목을 짓밟고 싶어 합니다. 근데 글쎄요, 저는 문명인으로서 당신을 거역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말부에 다다를 때, 쿠솀스키는 자신이 펼쳐놓은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빠져나오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그는 모든 상황에서 안전하다. 그리고 관계는 역전되어 두나예브는 그에게 순종한다.

    토마스/두나예브: (무릎을 꿇으며) 당신에게 상처 주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정말 몰랐나요? 당신이 기대한 것 이상으로 내가 연기를 잘 했나요? 당신을 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다 했어요.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고. 당신을 치유하려고 당신 앞에 무릎 꿇어야 할 사람은 바로 나에요. 묶이고, 채찍으로 맞아야 할 사람은 저에요.

    (중략)

    밴다/쿠솀스키: 이제부터는 나를 주인님이라고 불러.

토마스/두나예브: 네, 주인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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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은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권력적 남성성을, 무지함을 응징하는 극이다.

대사로 이루어진 희곡의 특성으로 인해 시각 영역에서 누구의 시선으로 인물들이 보여지는지 그 맥락을 알아차리기 힘든 경우도 있다. 이 극은 남성의 기저에 깔린 권력과 그걸 파악하지 못하는 무지함을 드러낸다. 궁극적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자 여성인 밴다의 시선을 통해 그림이 그려졌기 때문에 저자는 생물학적으로 남성이지만 페미니스트이며 사회적 여성의 시선으로 극을 썼음을 알 수 있다. 밴다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극은 신화적 여신의 형벌이 내려지는 판타지일 수도, 한 여성의 치밀한 계획을 바탕으로 한 영웅적 서사일 수도 있다. 저자는 그 영역을 모호하게 그려냈다.

개인적으로 극의 중요 소스인 천둥소리와 밴다를 연관시켜본다면 그녀가 여신의 성격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든다. 그것이 극의 클라이막스인 마지막 장면을 마치 과거의 데우스엑스마키나, 즉 마키나(기계장치)를 그녀에게 대입한 형태였을 때, 그 전율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거대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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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시작부터 토마스는 노골적으로 여성, 그리고 여배우에게 프레임을 씌우고 있다.

    토마스: “여성성은? 그것도 좀 가지고 오지! 요즘 젊은 여자애들은 여성적인 척도 못한다니까. ‘나가요’처럼 입고 오거나, 선머슴애처럼 입고 오거나 둘 중 하나야. 치마입고 스타킹 신으면, 내가 훨씬 밴다 같겠다. ”

     그러한 그가 원작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으며 쿠솀스키와 어떠한 연결고리가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것에 대한 근거는 미미하다. 애초에 대본에 드러난 정보는 그가 원하는 여배우를 찾지 못해 성질을 낸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에게서 ‘쇼즈’의 ��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는 거다.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 비춰지는 그와 약혼녀와의 관계를 밴��가 상기시킴으로써 독자는 평범하고 지루한 연인 관계, 그리고 약혼녀의 능력으로 인한 토마스의 자괴감을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토마스의 리비도는 상실 직전의 위기를 맞이했을 수 있다. 자신이 리비도를 부과했던 대상이 예술가로써 성공하지 못한 자신의 곁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그의 리비도는 자신의 쇼즈이자 쇼즈를 구성하는 인물 밴다에게로 전위될 수 있는 기회를 받아들였고 그는 단번에 움직인다. 일종의 안정을 위한 폭주인 것이다. 그는 자신의 마조흐적 연출의 욕망실현에 가능성을 느낀다. 원작의 쿠솀스키처럼 숙모와의 사건이 없다 하더라도 그에게 그러한 충동이 있다는 것은 페미니즘적 시선으로 봤을 때 일반 남성의 기저에 깔린 권력적 성향을 밴다의 목소리로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가 약혼녀와 쌓아온 이전의 모든 것은 마땅한 시간에 의해 형성되었으나 밴다가 나타난 시점으로부터 엄청나게 압축된 시간 안에 그는 그 모든 에너지의 이동을 경험한다. 그건 그의 신체, 혹은 정신적 역학에 의도치 않은 과부화를 주었을 것이며 그 이유가 이 극의 결말로 이어졌을 수 도 있다. 즉, 결말이 그의 과부화된 정신, 곧 환상일 수 도 있다는 것 또한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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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다의 등장 자체는 토마스에게 충격이자 그저 매력적인 팜므파탈의 상징계적 인물이었지만 극이 흘러감에 따라 그녀의 행동은 상징계의 상식을 벗어난다. 예를 들어 그녀의 등장과 정서변화에 나타나는 천둥번개, 연출가도 모르는 극장의 조명을 셋업하는 장면으로 하여금, 극의 전반에 나타나는 조명변화가 그녀의 의도일지 모른다는 암시, 1800년대의 의상을 준비한 것, 작품에 대해 무지한 척 했지만 실제로는 대본과 원작을 모두 파악한 상태이며 그것이 너덜너덜해질때까지 보았다는 사실, 토마스와 약혼녀의 관계를 파악한 것, 의도적으로 토마스를 쿠솀스키의 상황에 몰아넣고 동일시하며 두나예브와 쿠셈스키의 관계가 역전되기 직전, 토마스를 또 다시 마조흐적 인물에 대입시키고 오디션과 극의 상황을 치밀하게 동기화하는 날카로운 언어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마조흐적 인물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적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자신이 만든 연출적 상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그녀의 존재가 그의 쇼즈다.’ 라는 것 자체가 상징계에서는 모순이지만, 밴다가 상징계를 초월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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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의 역할과 권력에 대해 설명하는 쿠솀스키. 자신의 논리로 상대를 규정하고 그런 알고리즘 속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연출가적 행위들은 토마스가 연출가라는 사실과 궤를 같이한다.

쿠솀스키가 두나예브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장면에서 토마스는 잠시 빠져나와 연출가로서 밴다에게 비너스의 걸맞는 포지션에 서라고 명령하는 것은 극 전체의 모순성을 이야기 한다. ��, 토마스가 창조하는 비너스라는 것이다.

밴다는 극의 일부 차별적 성격에 대해 ���항한다. 자신과 두나예브의 목소리를 통해, 그리고 연출의 허점을 통해 지적한다. 중요한 것은 이 대사를 쓴 인물이 토마스라는 것이다. 본인이 썼음에도 그 진정성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여성이다. 즉, 연출가, 작가, 사회적 남성으로서의 무지를 여실히 드러낸다.

    벤다/두나예브: 우리 사회에서, 여자의 유일한 힘은 남자를 통해 얻어지죠. 여자의 인격은 인격이 없다는 거에요. 그저 빈 칸에 불과해요. 마음속으로는 그녀를 경멸하고 있는 인간에 의해 채워지는 빈 칸. 남자의 노예이기를 멈출 때, 여자가 어떻게 될지 궁금해요. 공평하게 교육을 받고, 일 에서도 동등한 파트너일 때. 여자가 자기 자신이 될 때. 한 개인이 될 때. - 세상에, 이 옛날 여자 벤다는 완전 시대를 앞석갔네요, 그죠.

    벤다: 쿠셈스키는 또라이고, 벤다는 또라이 필수품, 이런 건가. 천팔백 팔십 뭐시기 때 여자들이 다 소모당했듯이. 왜요.

     극은 후반부에 가면서 밴다가 비너스의 등장 장면을 제시하고 그녀의 의견이 무게를 갖게 된다. 점진적으로 드라마의 연출가(권위자)가 역전되면서 밴다는 토마스가 곧 쿠솀스키이며 이 극이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추궁한다. 나아가 극의 주제에 대해서도 저돌적인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벤다: 도대체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 거에요? 쿠솀스키가 밴다를 여기로 끌어들였잖아요. 뺀다는 억울하게 나쁜 놈 역을 하는 거라구요.

    (중략)

    토마스: 이 연극의 주제는.. 네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라,

밴다: 주제는, 그녀가 네 방으로 들어올 수도 있으니, 여신이랑 섹스하지 말아라, 이거야.

     권력의 흐름이 밴다에게로 완전히 기울어졌고 이제는 극의 인물들 또한 극중극을 벗어나 그들의 현실과 혼합한다. 밴다는 개인의 의지로 두나예브의 노예를 ‘토마스’라고 부르며 두나예브의 언어로 토마스의 실제 여권과 돈을 빼앗는다. 극의 긴장감을 본인의 의지로 지배하며 요리한다. 그럼에도 토마스는 극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못한다. 그는 그의 욕망을 들켰고 피지배적 연출에 대한 권력에 사로잡혔으며 인물 자체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밴다는 역전된 권력의 관계가 나오기 전에 교묘한 말로 토마스를 설득해 두나예브를 해보라고 제안하며 자신의 의도 속으로 토마스를 삼킨다. 그리고 그가 완전히 결박되는 순간 그녀는 상징계 이상의 무엇으로 빠져나와 토마스에게 일침을 가한다.

토마스가 밴다를 언캐니하게 느끼는 순간은 그가 그녀의 모습에서 기계적인 작동을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인간인 그녀가 점차 자신의 이론으론 판단이 불가능해지는 신적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언캐니한 순간, 그의 눈앞에 비너스가 실재하게 된다.  

    밴다: (그가 무릎을 꿇도록 한다.) 감히 네가. 감히 너 따위가! 너 불쌍하고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한 여배우 하나 사기 쳐서 네 프로그램대로 조정하려고 했지? 너만의 여자 프랑��슈타인 괴물을 창조하려고. 나를 이용해서 나 스스로를 모욕하도록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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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의 주된 요소는 사디즘과 마조히즘의 대립이 아니라 마조흐적 연출의 줄다리기라고 볼 수 있다. 마조흐적 연출의 한계는 이원론적으로 생각했을 때 피학과 가학중 가학을 당하는데, 이것은 그 자신의 욕망일수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손해이다. 마조흐적 연출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의 의도였느냐’인데, 일반적으로 보나 마조흐적 세계에서 보나 토마스의 의도는 모든 부분에서의 패배했다.

     어찌보면 토마스가 당한 형벌은 토마스 그 자신의 드러나는 문제점이 아니라, 정말 몰랐고 인지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형벌이다. 토마스도 그녀의 등장으로 인해 욕망의 가능성들을 실현시켰을 뿐인 인간이다. 평상시라고 해도 그가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거나 할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밴다는 주체적 여성으로서 그리고 여신으로써 그의 무지를 단죄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논리로 납득시키는 것이 불가능했나? 싶은 거다. 마치 밴다라는 인물을 거대한 마키나로 이용해 환상적인 형벌을 내린듯한 느낌이 있다. 극이라는 형식에는 알맞을 수 있지만, 무지한 남성의 인식을 알에서 꺼내려는데 여전히 논리가 아닌 감각으로만 덤비려는 것이 아쉽다.

     또한 여성의 내적 욕망을 확신하던 토마스가 왜 두나예브와 쿠솀스키의 관계를 막바지에 역전 시키는 각색을 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가 완전한 악인이라면 그의 논리에 부합하지 않는 드라마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극은 전반적으로 데리다의 ‘자기 내부에서 나오는 힘을 이해할 힘이 더 이상 없을 때, 우리는 형식에 매료된다’는 주장처럼 인물의 코라적 무질서와는 상관없이 텍스트로써 갖춰야 할 구성적 질서, 코스모스 속에 카오스가 적절하게 잘 배합된 희곡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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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령사상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범위의 것으로 정의 내린 뒤에 안정을 느낀다. 모르는 것에 대한 규정이야 말로 자신의 안락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지만, 그것이 깨지게 되는 순간은 견디기 힘든 순간이 된다. 신체의 모든 곳에 명칭을 매기듯, 심리상태의 알고리즘을 따지듯, 나르시시즘없이는 인간이 너무도 무기력해진다.

     언캐니한 순간들에 찾아오는 버틸 수 없는 공허함이 어느 순간, 나만 느끼는 무력함이며 나만이 알고 있는 가치있는 고통이라 생각했었다. 언어로는 배설 불가능한 정서들이 누군가의 나르시시즘으로 탄생한 용어에 의해 ‘나도 타자와 동일한 상태였구나.’ 라는 것을 깨닫고 안정을 되찾지만, 나만의 것을 박탈당한 또 다른 형태의 무기력함이 늘 공존한다. 그래서 나는 가끔 전뇌화를 상상한다. 그것은 이 시대의 전파가 아닌 미래의 인간을 넘어서는 원자구조의 영역이고 내가 흩뿌려졌을 때, 언어라는 불완전한 프레임에 나를 가두어 표현하는 것이 아닌, 내 머릿속에 흐르는 모든 것이 타인과 공유되는, 마치 에반게리온의 인류 보완 계획같은 상상을 한다.

그렇다면 우린 모두 같을까.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될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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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유

신영민(36세/ 내과의사)

  36세, 영민은 서울 소재 병원의 소위 잘 나가는 내과의사다. 그는 몇 주 전, 학술 워크숍을 하던 중 어머니의 교통사고 사망 소식을 듣게 된다. 사인은 단순 교통사고 사망이었다. 그의 어머니 차에서 발견된 경상도 소재의 정신과 병원 영수증을 발견하고, 그는 어머니에게 질환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해당 병원에 방문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진료기록은 전무하고, 한 남자의 병원비를 내러 자주 오셨다는 정보만 듣게 된다.

 그리고 그 남자의 정체는 정신질환이 있는 어머니의 남동생이자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과거 영민의 어머니는 부모님을 여읜 뒤, 정신질환이 있는 남동생과 단 둘이 살았고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20대 무렵 어느 날, 영민의 어머니께선 성장한 남동생을 제어할 수 없었고 남동생은 자신의 죄를 인지하지도 못한 채, 성욕에 이끌려 자신의 누나를 범한다. 영민의 어머니는 이 끔찍한 사실을 혼자 짊어진다. 동생을 병원으로 보내고 홀로 영민을 낳고 키웠다. 36년이 흐른 뒤, 영민이 내과의사로써 자리를 잡고, 이제는 평온해졌다고 느끼던 어느 날, 영민의 학술 워크숍 페이퍼를 발견한다. 그리고 명단에서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는데, 그 이름은 정신과 병동에 있는 남동생의 담당의사다. 혹시라도 잔존하는 과거의 실마리가 영민에게 얽힐까 두려워 급히 정신과 병원으로 향한다. 영민의 어머니는 운전 도중, 사실이 밝혀지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되고, 결국 도로의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선택을 하게 된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영민은 계시와도 같은 꿈을 꾼다. 그 꿈으로 인해 그의 인생은 이전과는 같을 수 없다.

  병원을 그만 둔 영민. 그는 자신의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하리만치 생생한 꿈을 꾼다. 자신의 모습을 한 남자와 처음 보는 여성이 허공을 부유하며 알 수 없는 대화를 한다. 세상의 종말이 오느니, 인류를 구해야한다느니 하는 말 따위다. 꿈에서 깬 영민은 자신이 점점 미쳐가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이미 자신의 인생은 종말이나 다름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살을 다짐하고 수면제를 처방받기 위해 근처 병원으로 향한다.

  꿈속의 여자, 지영과의 만남.

  영민은 무기력하게 길을 걷다가 꿈속에서 봤던 여자와 똑같은 여자를 발견한다. 영민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에게 다가가 꿈 이야기를 하지만 여자는 영민을 경계하며 자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그런 그녀에게 영민은 급하게 명함을 건���고 혹시라도 자신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고 한다. 생에 대한 집착일까. 아니면 기적을 바라는 걸까. 영민은 자살 생각을 잠시 미뤄둔 채 여자의 연락을 기다렸고, 다음날 여자에게 연락이 온다. 둘은 대면한다. 영민은 왠지 자신이 살아있고,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열을 느낀다.  

  지영과 영민은 사랑에 빠진다. 같이 누워 같은 꿈을 꾸고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꿈속의 남녀가 원하는 대로 매번 다양한 방식으로 살인을 하고 의식을 행한다. 그럴 때마다 꿈속 남녀는 기뻐하고 지영과 영민 또한 살아있음을 느낀다. 신들로부터 버림받지 않았고, 자신의 죄를 씻어내고 있다고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마지막 계시를 받는다. 둘은 얼마 없는 시간동안 부족한 제물을 채우기 위해 대량학살을 시도했고, 지영과 영민은 자신들이 벌인 테러 속보를 보며 축배를 마신다. 그날 밤이었다. 지영과 영민은 이전과는 다른 꿈을 꾼다. 여지껏 보아온 공간이지만 꿈속의 인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닌 자신이 그 인물이 된 것이다. 우린 선택받은 걸까? 드디어 천국에 온 걸까? 둘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황홀경에 빠지며 꿈속 세상을 부유한다. 한참을 부유했을까? 지영과 영민은 멈춰 선다. 서로를 바라보고 그동안의 웃음이 점점 일그러진다. 그리고 텅 빈 공간 속, 거대한 무음을 느끼며 드는 생각.

 근데 여기서 어떻게 나가지?

 현실의 시간은 그대로 흐른다. 현실의 지영과 영민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 방 안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그들은 웃는다. 미친 듯이 웃는다. 너무 웃다가 눈물까지 난다.

 그들이 왜 웃는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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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영화 속 세계에서는 새로 선출되는 교황의 정체에 대해 무엇보다도 큰 이목이 집중된다. 그만큼 영화 속 군중을 비롯해 대부분의 인물들에게 교황의 필요성이 대단하다는 걸 보여준다. 추기경들은 그러한 무게를 모두가 인지하고 있기에 누구도 교황을 선뜻 원치 않는다. 그것은 멜빌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이러한 책임의 무게와 그것을 감당하는 한 개인을 보여준다, 사실 아이러니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일반적으로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하는 정치인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모습들이 우리에겐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소재는 종교를 다루고 있으며 그 엄격한 소재를 해치지 않는다. 추기경들에게 교황은 신성한 자리이며 어떠한 부정도 허용되지 않는 고결한 자리다. 그것을 권력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는 그들 중 누구도 없으며 모두가 그 자리의 인물을 진심으로 필요로 한다. 축복 속에서 멜빌은 어떤 따가운 시선도 받지 않은 채 교황으로 임명된다. 그 또한 행복하다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지배적인 인식 때문에 개인이 겪는 고충은 개인의 내면에서 배설되지 못하고 점점 쌓여갈 수 있다. 우리의 보편타당한 인식이 누군가에겐 폭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 또한 보편적 인식에 위배되는 스스로를 혼란스러워 한다.

관객은 보편적 인식이 깔린 채로 시작해 멜빌 개인의 심적 상황에 스며들게 된다. 그러나 결말부에 다가서면서도 그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영화의 당혹스러운 결말에 놀란다. 결국 나는 멜빌이 교황의 자리에 오를까 아닐까라는 두 가지 추측 속에서도 일반적인 플롯의 구성상 어떤 사건을 계기로 멜빌이 마음을 가다듬고 교황의 자리에 오를 거라는 기대심리가 더 강하게 작용했다. 그것이 이 영화의 긍정적(코미디적) 요소에 부합하는 결말이라 착각한 것이다. 또한 그런 결말이 멜빌의 성장을 보여주는 거라고 감히 상상했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코미디의 문법을 능청스럽게 이용하면서도 동시에 이게 ‘코미디영화인가?’ 하는 무게있는 호흡이 동반된다. 중간 중간에 삽입된 교황을 연기하는 군인, 그가 튼 음악에 몸을 흔드는 추기경들, 교황청 내부에서 진행되는 배구경기등이 멜빌 내면에 집중하는 관객을 환기하는 동시에 방해한다. 때문에 교황청은 멜빌만 돌아온다면 완전하고 완벽한 장소가 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코미디적 요소들이 작용하는 곳에는 가짜 교황이 있을 뿐 멜빌은 존재하지 않았다.

     멜빌이 밖으로 도망친 뒤 겪는 장면들은 느슨하게 감상했다. 앞서 말했듯 어떤 순간에 결정적 사건이 있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영화를 본 뒤에 다시 생각해보니 그의 입장에서 그를 변화시킬만한 드라마틱한 순간이라고 느껴지는 상황은 전혀 없었다. 멜빌이 의사에게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하고 버스에서 혼잣말로 연설을 되뇌고 숙박업소에서 맛이 간 연기자와 대화를 하지만 그 흐름은 유야무야 증발된다. 극단에 찾아가지만 자신을 받아주지 않고 자신을 상담해준 의사를 다시 찾아가지만 그 대화의 흐름 또한 왠지 흐지부지 끝난다. 극단 사람들은 각자의 얘기만 내뱉고 어떤 것도 매듭지어지지 않은 채 바티칸 대변인은 멜빌을 찾아온다. 대변인은 영화 초반부터 끝까지 일관된 모습으로 교황의 책임을 강조한다. 멜빌은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나 그의 말은 또 다시 휘발된다. 이러한 플롯의 진행에 대해 미묘하게 어색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면 어떤 이유로 멜빌이 교황의 자리에 갈까?’라는 궁금증만 생길뿐이었다. 다시금 위의 장면들을 곱씹고 결말을 보니 그야말로 처참하다는 생각이 든다.

멜빌에게 있어 그 자신의 선택 외엔 무엇도 그를 치유할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을 누구하나 진정으로 공감할 수 없는 이유는 교황이란, 모두에게 있어 ‘필요한 타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의 책임을 재��하고, 부모결손장애라는 프레임에 가두기만 할 뿐, 그의 존재를 멜빌로써 이해하려는 이는 생겨날 수가 없었다. 이미 평생을 교회에서 살며 지긋한 나이를 먹은 그에게 사회는 도전의 대상이 될 수도 없다. 신도들은 교황을 연기하는 배우의 손짓에 열광한다. 그의 존재는 결국 멜빌이 아닌 교황의 역을 행하는 자로 매듭지어졌고 멜빌은 그 매듭을 용납할 수 없기에 스스로 매듭을 풀어버렸다. 그는 무거운 포기를 선언했다.

     처음 영화 제목을 접하고 종교적인 이해에서 도태될까봐 걱정했는데, 영화는 인간에 대한 담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있어 책임이라는 것은 떼어낼 수 없는 항목이다, 우리 모두가 지도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 속에서 살아가면서 크건 작건 그런 역할을 맡게 될 수 있는 확률이 있다. 가정과 집단, 하물며 개인과 개인 관계에서도 그러하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지도자에게 갖는 일방적인 경외와 존경과 기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느껴진다. 기대심리는 일종의 폭력적 요구로 작용할 수 있고 인간의 미약함에 대한 부정으로 볼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미약함이 갖는 선택들에 대해 불만족스럽다면 스스로를 자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가장 큰 코미디적 요소는 제목에 있는 것 같다. 교황은 나셨지만, 영화의 핵심 사건은 멜빌이 교황으로 돌아오는 계기가 아닌 교황이 된 멜빌이 몰래 도망친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 도망 또한 발코니에 서는 것만큼의 용기가 필요하다. 일반적 관점에서 벗어날 순 있지만 모순에 지배당하는 개인의 행동들을 주목해본다면 그 속에서 나의 미약함들을 존중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멜빌의 선택의 가치가 아닌 그의 선택 자체만을 존중할 수 있을 것 같다.

[complexplode]

자유의 언덕

홍상수 영화의 특징은 욕망을 내재한 인물이 주변인물의 곁을 배회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일상의 부조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시간’이라는 소재를 활용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자유의 언덕>등 에서 흡사한 장면의 반복, 또는 장면을 섞는 연출을 보이며 인물의 무의식속 모순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고 상황의 변수에 따른 인간 심리의 변화를 인지하게끔 하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주의 깊게 영화를 보지 않는 이상 전후 상황에 대해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있으며 개인적으로는 부조리를 이러한 형식으로 드러내는 과정 자체가 날것을 더욱 날것같아보이게끔 하는 조미료를 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정적으로 움직이는 앵글과 반복적으로 사용되는 구도 때문에 영화적인 기법을 통해 특별한 인상을 받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 인물의 모순적 행동.

세상은 수많은 논리체계로 가득하지만 인간의 몸 안팎에서는 그보다 많은 비논리적 활동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자기 신체의 ��든 부위에 이름을 메겨 불안함을 떨쳐냈듯 인간의 행동반경 또한 이해하고자 하는 범위 안에 가두었다. 때문에 그 범위를 벗어난 자는 비정상의 선상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 경계는 모호하고 상대적이기 때문에 본인의 생각과 행동 사이에서는 수많은 모순들이 발생한다. 나는 영화 속 인물들에게서 이러한 인간의 무의식속 모순을 관찰해보았다.  

     영화는 모리가 권에게 편지를 쓴 뒤, 권을 찾는 시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야기의 흐름이 뒤죽박죽인 걸로 봐서는 권이 들고 있던 모리의 편지들이 떨어져 섞이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영화는 ‘모리가 겪은 실제 상황’인가 혹은 ‘편지 속의 상황’인가를 두고봐야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더 무게를 두고 싶다. 왜냐하면 숙소에서 소란을 피운 여성의 아버지가 퇴장한 뒤 아주 곧바로 여자를 찾으러 들어오는 남성의 모습이 실제의 리얼타임과는 상당한 괴리감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마치 편지의 장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락에 곧바로 쓰여진 내용이었기에 이러한 상황이 연출됐다고 본다. 또한 편지 속의 내용이라면 권이 읽는 편지 속엔 모리가 겪은 모든 상황이 담겨 있을 것이고 이는 곧 영선을 만났던 내용 또한 담겨있다는 거다. 모리에게 있어서 그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모리의 모순됨을 받아들일 수 있는)정도의 인물이 권이며 그렇기에 그녀는 모리에게 존경의 대상이 된다. 그녀는 모순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리와는 다른 성격의 인물이다.  

모리를 중점으로 그에게서 발생하는 모순점들을 살펴보자면, 핵심 키워드로는 욕망과 무례함이 있다.

욕망에 대해 말해보자면 단적인 예로 모리와 영선의 동침이 있다. 모리는 상원에게 여행목적과 권에 대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영선에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시간에 대한 철학적 견해와 영선의 남자친구 광현에 대한 험담만을 늘여놓는다. 본래 영선 또한 모리에게 책에 관해 나중에 설명을 해달라는 등의 만남의 구실을 주었고 광현에 대한 험담에 맞장구를 친다. 둘의 욕망이 부합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이는 모리가 가장 사랑한다고 말하는 권을 생각하면 상당한 모순적 행동으로 보일 뿐이다. 동침 이후 모리의 ‘당신은 이제 내 애인인가요?’ 라는 대사는 둘의 관계가 진전되는가 싶은 기대심리보다는 모리의 이면적 행동에 불쾌함이 더 느껴진다. 모리는 일반적인 윤리적 관점에서 어긋나는 행위임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숙소에 돌아오면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지하고 후회한다. 이후 영선과의 관계를 정리할 목적으로 그녀 집을 찾지만 결국 다시 한 번 동침을 하고 만다. 이처럼 모순의 연계 속에서 모리는 영선과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매듭도 짓지 않은 채 갑작스레 숙소에 방문한 권과 함께 일본으로 떠나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는다. 그것도 여자(영선)를 지키기 위해 남자와 다투었다는 장면 이후에 바로 말이다.  

모리의 무례함이 단적으로 잘 나타나는 부분은 상원과 싸웠던 여자를 찾으러 낯선 남자가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다. 거기서 모리는 남자에게 다짜고짜 ‘결혼했어요?’ ‘그냥 나이 들어 보여서요, 흰머리도 있네요.’ 등의 상식 밖의 무례함을 선사한다. 그 장면은 모리와 광현과의 대화에서 모리의 반응과 비교하여 모리의 모순성이 부각된다. 기본적으로 집주인에게 아침밥을 요구하고 더 싼 집이 있는지 찾아보는 모리의 경제적 상태를 짐작 할 수 있고 모리가 ‘시간’을 사유하는 태도와 숙소주인과의 대화를 통해 어떠한 프레임에 본인이 갇힌다는 것에 민감하다는 전제를 깔고 간다면 광현이 모리에게 ‘직업이 없군요.’,‘예술가 같네요.’ 하는 류의 대사가 충분히 화가 날 수 있다는 판단이 선다. 그러나 그 후의 모리가 다른 누군가에게 광현과 같은 무례함을 범할 줄 알았겠는가.  

    - 무의식속 모순의 사유.

모리의 모순적 행동은 비단 모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개인적으로 고등학생 당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오, 수정>과 같은 작품을 보았을 때, 나는 교육적으로 탈락사유를 지닌 인물들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당시에는 그 느낌이 불편하고 찜찜해 그의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건 내 미래를 이 인물들과 거리를 둘 수 있다는 기준점을 발견했다는 사실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현재에 와서 나는 그 인물들과 다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고 후련하게 답할 수도 없다. 이는 여전히 그들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의 무의식 속 내제된 어떤 욕망이 그들과 닿아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꿈속에서뿐만 아니라 내 일상의 곳곳에 내제되어 있다. 그 속에 담긴 나의 이기와 불완전함을 영화의 인물을 바라보는 행위를 통해 마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리는 왜 모순적인 행동들을 일삼을까? 그의 초목표는 ‘권을 찾는다.’에 초점이 맞춰져있지만 그 목표의 달성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영화 내에서 해답을 찾는다면 그러한 행위의 불확실성이 그에게 어떤 결핍을 가져다주었고 그것을 환기하고 해소하기 위한, 이성과 상반된 행위들이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그 스스로를 모순되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확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애초에 모순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것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스로의 모순을 인지하고 사유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될 수 있다. 본인이 이성적으로 학습한 윤리관에 위배된 행동들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수록 이 논리 사회로 부터 도태되어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는 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리는 그 답답함을 환기하고자 영선과 동침하고, 때때로 꽃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인간이 만들어놓은 시간의 개념을 해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앞서 나열한 무엇보다도 권의 존재가 그에게는 중요했다.

          <자유의 언덕>의 ‘자유’는 텅 빈 공간의 홀로 남은 상태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인과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해방감을 뜻한다. 모순을 인지하는 이에게 최고의 해방감은 자신의 모순을 품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영화는 제시한다. 모리에게 권은 그런 존재였고 그에게 ‘자유의 언덕’이란 권의 품인 것이다. 하지만 구색 좋게 말하자면 그런 거고 반대로 말하자면 결국 모리는 권에게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녀를 절대가치로 두고 저지르는 수많은 행위에 의해 상처 입은 이들, 그리고 당당하게 내뱉은 말들에 대해서는 그 어떤 책임감도 갖지 않고 살아간다는 한계가 있다.  

    -

이 영화에는 인물의 모순뿐만 아니라 형식적인 모순이 담긴 몇몇 장면들도 있다. 가령 권이 떨어뜨린 편지 중 챙기지 못 한 마지막 한 장은 무엇인지, 숙소에 여자를 찾으러 온 낯선 남자와의 대화 끝에 모리가 ‘화장실 간 덕분에 운이 좋았네.’라고 하는 등의 알 수 없는 대사들이 그렇다. 물론 개인적으로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두 번을 봐도 난해한 장면들은 과연 저 장면들에 의미를 부여했다 한들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휘발되는 장면이 아닐까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모순된 인과 속에서 사람은 아는 것을 부정하기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 하기도 한다. 이런 상황들을 홍상수 감독은 영화에서 자주 활용한다. 이는 어쩌면 본인의 행동이 일반적 차원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감독 스스로가 내면에서 발생되는 죄의식과 욕망이 섞인 무언가를 배설하는 행위는 아닐까 싶다. 물론 본인은 본인의 영화가 자전적이지 않다고 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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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 늙음, 죽음.

     늙는다는 것은 인간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물에게 있어 필연적 숙명이다. 그러나 그 늙음을 미리 예견하고 제대로 인지할 수 있는 이가 있을까. 현재의 ‘나’에게 있어 늙는다는 것은 미지이며 두려움, 그리고 짊어져야 할 공포이기 때문에 우리는 온 몸으로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인간의 자만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상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관점에서 튀어나온다. 물질적으로 소유한 것이 없을수록 내 앞의 노인보다 젊다는 그 사실에 안주하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삼차원의 인간에게 있어 그 사실은 적어도 죽는 한 까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기형도가 늙은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혐오가 담겨있다. 단순한 혐오는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늙은 사람>에서 화자가 노인을 인지하는 태도는 실상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어린 세대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일 수도 있는 거다. 기형도에게 그 사실은 참을 수 없는 무엇일지도 모른다.

<여행자>에서 화자는 어떠한 이유 때문에 여행을 떠났고 그것은 마치 도피처럼 보여진다. 여행은 기존의 나와 내가 있던 공간을 잊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가는 행위다. 화자는 여행지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는 것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부정하고 싶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에 대한 자책을 잊고, 기존의 나를 없애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거다. 그러나 그것이 장소만 바뀐다고 해결될 수 있을까. 결국 정체가 발각된 이유는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 의해서 내 정체가 들키고만 것이다. 화자는 자신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으나 자의로 그럴 수 없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기형도가 늙음을 혐오하는 이유는 이와 관련되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부정하고 싶은 ‘나’에 대해 늘 고통 받는 자신과는 달리 그 고통을 세월이라는 비겁함으로 마모시킨 노인들을 혐오 했을지 모른다.

<오후 4시의 희망>에서 화자는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는 동시에 그저 망가지길 원한다. 굉장히 위태로운 상황임과 동시에 자신에게 벌어질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해 예상하고 있다. 혼란스럽지만 질서정연하게.

     기형도의 시를 읽다보면 그 속에서는 그의 죽음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가 얼마나 위태로웠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그에게 있어 얼마나 고통이었는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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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나의 세계가 흔들리는 때에 나는 어디쯤 위치할까. 새로운 경험은 마치 다른 꿈을 꾸는 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요새 나는 그렇다. 잠에 드는 것이 어색해졌다. 오랫동안 잠들지 않고 걸을 때, 나는 꿈속을 붕붕 날아가는 기분이 든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선과 악인지 헷갈리는 새벽을 걷는다. 잠들려 할수록 각성하고 각성하려 할수록 잠드는 세계에서 인간은 큰 에너지를 소모한다. 소모하고 피로해질수록 욕망이 강해진다. 언젠가 동물은 위험에 처했을 때 후손을 남기기위한 번식욕이 강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화자는 참는다. 이 시처럼 우리 또한 참는다. 세상에 참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잠에 짓눌리는 한 인간의 예민함이 극도에 달했을 때 견뎌내야 하는 건 우리가 건강한 상태로 건강한 오후를 맞이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무엇일 것이다. 시인은 반쯤 감긴 눈으로 스스로의 욕망을 고찰한다. 세상에서 꿈으로, 꿈에서 세상으로 쉼 없이 오가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를 쓴다.

     제목 자체가 갖는 이미지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때때로 불면은 인간에게 축복을 내린다. 초인적 감각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마치 스파이더맨이 위험을 감지하면 온 몸의 털이 솟구치듯 불면 상태의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감각들이 발동이 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이성적 제어가 강해지고 본능과 이성의 충돌은 꿈으로써 해소가 되어야 하는데 그 꿈을 꿀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사유하지 않았던 비유와 은유들이 입 밖으로 쏟아진다. 시인의 시는 그러한 상태에서 겨우 완성되는 것이 아닐까.  

     진이정 시인은 시에 대하여, 메탈음악에 대하여, 이태원에 대하여 개인적인 감상과 경험을 시로 옮긴다. 나는 그러한 개인적 성격의 글이 ��칫 독자가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해석하는 거야 개인마다 다르고 어쩌다 그 경험의 교집합이 있을 때도 있겠지만, 때때로 너무도 구체적인 사물에 담겨지는 메세지는 그 사물이 낯선 독자들에게 읽히기 쉽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러나 반대로 독자가 시인과의 교집합을 발견했을 때엔 시너지 효과가 굉장하다. 시를 읽는 다는 건, 시가 읽히기 위해 내 경험을 비집고 들어가 시와 닮은 무엇을 끈질기게 찾아내는 행위와 같다. 시라는 거울을 통해 내 몸속의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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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죽은 앵두나무 아래 잠자는 저 여자

<황혼이 질 때면>

     가끔 내 신체의 구멍들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신체의 구멍들에서 그리고 탈피하는 환부에서 흐르는 고름들을 한 방울도 놓치기 싫어 상처와 그 테두리를 허겁지겁 핥아왔다. 씁씁함이 내장부터 가슴을 타고올라 기도주변이 저릿했다. 역해서. 목구멍쯤 올라왔을때 아 쇠맛이 혀를 찔렀다. 묘한 중독이 있었다. 행위를 멈출 수 없었다. 오롯이 이것만이 남들은 놓치고 있는 나만이 해내는 유일한 인간 탐구라 믿어왔기 때문이다. 고름이 식기 전에 해치워야 그 특유의 짭조름 비린 맛을 효과적으로 음미할 수 있었다. 이미 차가워진 고름딱지의 식감은 신선했지만 마치 희미해진 새벽꿈을 좇는 것 같았다. 꿈이 대단했었을 거라는 상상에 눈물이 찔끔 샜다.’

     내게 구멍은 내 의지대로 벌리고 닫을 수 없는 그런 공간이었다. 내 몸 위에 존재하면서도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많은 것들을 나는 바라만 보거나 닦아내거나 핥을 수밖에 없었다. 구멍은 나의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무능력의 상징이었다.

그렇다면, 김언희 시인에게 구멍은 어떤 상징일까. 이 시에는 ‘개같은, 똥같은, 갈보같은, 천역에 찌들린, 피로로 썩어가는, 이미 끝장이 난, 끝장이 난 다음에도 중얼거리는 크르륵거리는 풍선껌을 씹는, 말랑말랑한 이빨로 내 머리를 씹는, 옴쭉 옴쭉 나를 삼키는, 헐, 헐, 헐, 웃는 구멍.’이라고 표현된다. 이는 마치 성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면서도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있는 객체로 보여 진다. 개같으면서 본능적이고 늘 사용되어야 했기에 피로하고 그럼에도 웃는 구멍.

     나에게 구멍이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과 같이 김언희의 구멍은 그러한 구멍일 수도 있겠으나 구멍 자체가 갖는 의지를 주목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곧, 구멍 자체가 화자 자신의 자의식을 대변한다는 것이다. 이는 그녀의 다른 시들이 그러하듯 여성으로써 시대를 ���아오며 자신에게 씌워졌던 프레임에 대한 조롱과 반항의 어조처럼 들린다.

     그녀는 당해왔던 것들에 대해 자조하지 않고 그녀 스스로의 방법으로 투쟁한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마치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그녀는 거칠고 강력한 방법을 택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이미지로 박혀져있는 ‘구멍’을 이용하고 또한 그것을 해체하여 그것을 투사의 무기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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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는 먼 집

<먹고싶다......>

     때때로 내가 하는 일에 육중한 회의감을 선사하는 상황이 있다. 이것은 진실이기도 진실이 아니기도 하다. 내가 바라던 상황일 수도 있고 끝끝내 오지 않았으면 했던 상황일 수도 있다.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사람은 기대심리가 생긴다. 이상적인 작업환경과 진행. ‘그래, 너무 이상적일 수 있으니 이 정도는 양보해서 요만큼은 힘들자.’ 라고 해도 이상은 이상이다. 결국엔 몸으로 느껴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내 몸 하나가 느꼈다고 ‘내 일은 이러이러한 일이다.’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아니다. 겨우 나 하나의 경험이 남들의 표준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체적으로 나는 처음 해보는 일을 시작할 때, 나 자신을 속인다. 우선 속이고 들어가야 일에 나를 끼워 맞출 수가 있다. 때때로 날 끼워 맞추는 게 버거울 때도 있지만 한두달 어거지로 끼우다보면 보통은 얼추 맞아 들어간다. 그래도 불편한 건 여전하다. 예상도 못했는데 맞는 일이 있고 잘 맞을 거라 생각했는데 들어가지도 않는 경우도 있다. 일을 하다보면 ‘사실 내 모양은 이랬는데..’ 하며 일에게서 벗어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소름끼치게도 스스로 회의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회의감에 날 끼워 맞추기 시작하는 거다. 반대로 아주 오랫동안 이 일에 대해 고민하고 만족스러울 만큼 날 다듬어 끼워 넣었는데 일 속의 부조리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내가 고민한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뭔가를 탓해서 벗어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내가 부조리의 일부가 되어야하는 경우도 있다.  

     화자가 <먹고싶다......>에서 느꼈을 기분을 나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먹고 싶다.’

먹는다는 행위는 우리가 살기 위해 의식적으로 의지를 갖고 음식 따위를 입을 통하여 배 속에 들여보내는 행위다. 기본적으로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취사선택할 수 있어야 ‘먹는다’가 성립이 된다. 시인이 ‘먹고싶다.’를 중얼거리는 이유는 그동안 타자에 의해 먹여졌기 때문이 아닌지, 혹은 먹혀졌던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에서 화자는 더 이상 ���신의 의지로 먹는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린다. 현실에 흡수당한다는 이미지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의지에서 벗어난 먹여짐으로부터의 탈피처럼 느껴진다. 어찌됐건 먹고, 먹여진다는 것은 생계를 관장하는 수단이다. 그리고 화자는 사랑과 함께 무너진다. 화자는 자신의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마음조차 버린다. 삼류의 삶은 무던히도 외로워 보인다. 그녀는 스스로를 삼류라 칭했지만 과연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때때로 나도 시인의 말을 빌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내가 하는 행위에 대한 회의감에 사무칠 때, 회의감에 사무쳐 몸과 정신이 따로 놀 때, 몸과 정신이 따로 놀아 생산적인 활동을 전혀 하지 못할 때, 그럼에도 비겁하게 배는 고플 때, 나는 먹고 싶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때의 나는 ‘먹고 싶’다는 관념을 되뇌는 것 같다.    

[complexplode]

우리들의 陰畵

<침묵>

반드시 진실만을 말할 수 있게 세상이 설계되었다면 ‘침묵’은 절대적인 ‘악’을 포함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다행이도 내가 사는 세상의 침묵은 정적과 표현 그 양립 사이의 무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시인은 그 중 한 지점에서 이 시를 쓰신 것 같다. 뱉어지지 못하는 것들은 끈적끈적한 침으로 묵을 빚어 내 가슴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를 잡는다. 어떤 상황에서의 침묵은 외부로부터 받은 압력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침묵을 고수하는 자는 때때로 방관자라고 비난받는다. 침묵은 아무 생각 없이 입을 다무는 것이 아니다. 입 밖으로 뱉고 싶은 수많은 말들 중 어느 하나 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택했기에 버려지는 수많은 말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침묵하는 이들은 늘 외롭고 죄인이다.

    <달>

군 시절 달을 보며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하루 일과 중 6시간을 가만히 서서 경계근무를 할 때 주변에 움직이는 거라곤 떠오르는 달과 달 곁을 지나는 먹빛 구름들이었다. 나의 달은 외로움이었고 또 내가 바라볼 수 있는 유일하게 완전한 존재였다. 나는 달을 쳐다보기도, 달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기도 했다. 달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망하고, 나를 제외한 채 자연스럽게 흐르는 세상을 목도 했다. 언젠가 부대에서 공모전이 열렸고 이때 나는 처음으로 달을 보면서 느꼈던 것들에 대해 시를 썼던 것 같다.    

시인의 달은 세상을 바라보며 많은 것들을 달빛으로 절여 그 걸 먹는다. 영혼과 혼령, 꿈 등의 단어에서 비롯해 보았을 때 시인에게 달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아닐까. 밤 처녀의 혼령을 웃으며 빨아 먹는다는 구절이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죽음과 관련된 어느 날, 시인은 문득 달을 보며 저것이 우리의 영혼을 먹는구나 느꼈을 것이 ���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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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별에서

<납 작 납 작>

화자의 일상을 회화가 아닌 공산품을 찍어내듯 나열하여 ‘하나님 보시기 어떻습니까?’ 한다.

입술도 없이 표정도 없는 납작해진 천지만물. 이미 화자가 느끼기에 허망한 그 심정임에도 하나님께 다시 한 번 물어보는 이유는 이 허무한 삶에 이유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일까.

    <사랑에 관하여> 2

연애를 하며 느껴지는 관계의 다양성을 가족구성원의 보편적 관계로 비유하는 것이 인상 깊다. 실제 사랑을 하며 우리는 서로에게 얼마나 많은 가족들의 모습을 보았는가. 그리고 그 가족들에게 받았던 모든 것이 우리의 사랑이 되었던 걸까. 사랑이라는 이름아래의 부정(不正)들도 말이다.

    <고층 빌딩 유리창닦이>

가끔 빌딩 속 업무를 보는 이들을 생각하며 머리가 지끈할 때가 있다. 사실 화자의 시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하늘과 구름은 내겐 이상이며 빌딩 속 사람들은 현실이자 내가 마주해야 할, 혹은 마주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그들인 것이다. 유리 속의 그들을 보며 나의 무능에 머리가 지끈해진다. 나는 이미 술을 스물 일 곱잔 마신 상태부터 시작이다. 그리고 술잔을 점점 줄이며 현실과 마주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나를 더 취하게 하여 결국 내 내장의 답답함들을 토해낸다..  

    <물음표 하나>

나의 물음이 부정당하던 때를 기억해본다. 내 물음표의 물음을 마침표에 쑤셔 넣으려는 누군가에 의해 박살당하는 나의 가엾은 물음들. 어디로 갔을까. 허공에서 맴돌던 수많은 물음들은 누군가의 이해를 위해, 또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희생당했다. 시에서 의식의 흐름으로 나열되는 물음에 대한 단어들이 속도감이 더해져 물음이라는 단어자체가 존재를 갖게 되는데, 이상하게도 존재를 갖게 되자 그 어감자체가 낯설게, 그리고 외롭게도 느껴진다.

    <出家記>

6년전 그 일이 화자의 죄책감으로 뿌리내렸을까. 우리가 여지껏 교육을 받으며 자연스레 온 몸에 스며든 윤리의식은 때때로 나의 죄를 한없이 꾸짖어 이승에선 도망칠 곳이 없게 만든다. 누구나 자기 몸속에 망할 놈의 부처가 있지 않을까. 아니, 그것은 몸 속 뿐만이 아니라 내가 어디로 도망치든 어디서든 날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告白>

여자친구가 집으로 놀러와 나는 아직 읽지도 않은 이 시를 소리내어 읽어줬다. 누군가의 낭송이 이렇게 귀에 쏙쏙 박히던 때가 있을까. 앞서 봐온 시인의 시가 아니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무척 귀여운 시. 그리고 어쩜 그렇게 귀여운 시를 콕 골라내 읽어준 걸까. 정말이지 미소가 흘렀다. 관계에 있어 숫자를 세는 사람은 나의 애인이고 고백하는 이는 나와 가까웠다. 재밌다. 글이 갖는 동화적 환상이 현실 속에서 어떤 효과를 주는지 새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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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무덤, 푸르고

시인은 무엇을 잊을 수 없었고 잊지 않게 하려했을까. 그녀는 삶에 대항 저항 값으로 죽음을 등장시켰고 죽음의 저항 값으로 삶을 출연시켰다. 그러나 실은 어떤 허상의 ‘모놀로그’였으리라. 공교롭게도 삶과 죽음, 두 단어의 획의 수는 같다.

     미망(未忘) 혹은 비망(備忘)

<2> 세월이란 인간의 체감만으로는 감지하지 못하는 흐름이다. 우리는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내가 이렇게 늙었었나 자각한다. 거울을 곁에 두고 사는 인간만큼 자신의 늙음을 적나라하게 느끼는 동물이 또 있을까. 우리는 언제나 전보다 늙어버린 자신을 바라보며 늙기 위해 먹고 배설하는 행위의 추함을 인정하고 또 가볍게 망각한다.

<8> 시인에게 삶은 죽음만큼, 죽음은 삶만큼 그 질량이 동등하다.

<3> ‘사는 것은 욕되고 죽는 것은 헛되다‘. 삶에 대한 비겁함처럼 어쩌면 죽음을 향한 담대함처럼 느껴진다. <8>의 푸르러진 무덤 속에서 흔적조차 남지 않을 때에 시인은 비로소 평온함을 느낀다. 푸르른 무덤은 나의 이부자리이기도 할 것이다.

<5> 나는 화자와 달리 ‘잠으로 들어가는 저 입구‘가 좋았다. 잠들기 전,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면(죽으면) 어떡하지? 라는 막연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잠의 입구에서 나는 내 생의 마지막 숨소리를 냈고 그게 또 묘하게 설랬다. 어느 날부터는 꿈을 만끽했다. 꿈은 그 세계만의 독특한 논리로 나를 압도하며 이해시켰고 그런 공상이 좋았다. 꿈을 조작할 수만 있다면 꿈에서 평생을 살아도 좋을 것만 같았다. 악몽이라도 현실의 것보다 나으리라 생각했다. 내가 시인과 다른 것은 이러한 지점인 것 같다. <3>처럼 화자는 새와 동일시되어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자신을 마주한다.(그렇다고 내면의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나는 <4>와 같이 내 자신이 세상의 오점이라 자각하는 순간들이 지배적이었고 도피하고 싶었다. <6> 내 삶이 욕되다는 건 인정했지만 육체를 타고 흐르는 욕망은 그것 스스로의 자의식이 있는 듯했다. 죽음으로부터 기어나온 기억은 자꾸만 욕망이 되어 날 괴롭혔다. 나는 내 욕망을 믿지 못했다. 언제가 나를 <콱> 잡아먹을 요물이라고 생각했다.

<7> 화자의 밤은 무엇으로부터 기인했고 왜 사라지지 않을까. 세상을 살다보면 알아버려서 그 이전의 삶을 살 수 없던 때가 있다. 그렇다고 밤의 이전을 그리워하진 않을 거다. 어차피 돌아가도 다시 알고 싶은 것 투성일테니 말이다.  

<13> 고독은 고독한자의 것이다. 고독을 사유하기에 고독과 맞설 수 있다. 쏟아낼 피를 준비하기만 하면..!

     <말 못 할 사랑은 떠나고>의 개꿈의 시대. <서역만리>의 쇼윈도 속 줄줄이 꿰어진 통닭. 그것이 화자가 겪는 상태였을 것이다. ‘홍대입구’라는 번화가의 태풍, 그리고 태풍의 눈에 서있는 이질적인 기분. 그건 마치 무신론자인 내가 천여명의 신도들이 예배 보는 교회에 잠입했을 때의 두려움이다. 그 상대적 박탈감은 심리적으로 나의 시간을 고무줄마냥 길~게 늘어뜨린다. 그럼에도 날 가르치려는 것, 날 가르치는 모든 것에 뿅! 질투를 느낀다.

<세기말>의 화자처럼 맞고 싶을 때가 있다. 살다보면 가끔 불특정 다수를 향해 묵직한 돌을 던지는 사람이 있다. 나는 돌덩이를 줍고 그 묵직한 돌덩이에 맞는 상상을 한다. 왜 나는 아프지 않았을까. 정말이지 나는 제대로 한 대 맞고 정신을 잃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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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日記

<삼십 삼 년 동안 두 번째로>는 나의 모태가 되어버린 시다. 내가 태어난 시. 시에 닿을 만큼의 고통을 준 시. 끔찍한 시다. 나는 이 시를 통해 절망 속에 던져진 내 면상을 바라보고 오물 찌꺼기를 생성하는 내 신체를 분리하여 자각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이 수업을 듣는 계기를 마련해준 시, 내 절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지독히 고마운 시..다.

이러한 감상은 나의 아득한 사랑에서부터 분리되었다. 개인적인 일화다. 죽음으로부터 괴롭힘 당하던 철창속의 한 인간이 있었고 존재만으로 그를 구원해주던 어느 사람이 어느 날, 툭 하고 던져줬다. 그때부터 최승자의 시는 ‘짓뭉개져 버린 나의 얼굴’이 된다. 그래서 이 시집을 읽기까지 이전과는 다른 용기가 필요했고 감상마저 모호한 개인의 것이 되었다.        

      최대치의 사랑이며 고통이라 자부했지만 때가되면 밥 먹고 똥 싸고 때때로 예능 프로그램을 보며 미소짓는 나 자신을 본 적 있다. 나는 나를 인지하는 만큼 스스로의 모습이 괴물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역하고 비겁한 내 사랑 노래의 음소거 버튼을 눌렀다. 내가 나도 모르게 애절함에서 탈출하는 게 싫었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처럼 나의 고통 그대로를 분질러 꽃병에 담아 당신 앞에 전시하길 바랐다.  

<언젠가 다시 한 번>에서 최승자의 ‘너’는 나의 ‘너’를 상기시킨다. ‘너’라는 얼룩에서 냄새가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리고 지금 내가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너’로부터 영향 받았다는 끔찍한 사실들을 인지시킨다.    

     위에 나온 감상은 ��게 2016년 나의 군생활로부터 기인했다. 그리고 그 당시는 <끊임없이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와 닮았다. 아서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 로먼이 자식들의 안녕을 위해 할부인생을 살았듯 시인은 죽음을 향해 영혼부터 신체의 일부까지 체납한다. 2016년 당시 나는 운전병이었다. 무의미한 하루하루는 호출을 기다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해 호출을 기다리는 걸로 마무리되었다. 부조리한 철창 속에서 나 스스로가 이 엉터리 메커니즘의 말단 부속품이라는 걸 바보처럼 늦게도 깨달았다. 허망함과 동시에 절망스러웠지만 도리어 몸은 가벼워졌다. 나는 없고 나를 닮은 먼지들만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철저히 ‘혼자’를 택했고 시인의 ‘니힐리즘’에 가까워졌다. 세상은 죄로 가득했고 나는 비겁한 죄인이었다. 종교가 없는 나는 죽음이 두려웠지만 죽음만이 유일한 해답의 가능성이라 생각했다. 죽음을 깊게 들이마셨다. 죽음의 가치를 삶과 동등하게 느꼈다. 퇴사를 생각하면 일이 즐겁듯 죽음을 생각하니 삶이 살만했다. 죽음은 내가 유일하게 나 자신으로서 택할 수 있는 가치였다. 그 때의 내게 최승자의 시를 던져준 사람은 메마른 땅 위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죄인이었던 내게 그 사람은 종교이며 교리였다. 그리고 최승자의 시는 내게 성경이었다. <오늘 저녁이 먹기 싫고>, <비극>, <악순환>등의 시에서의 ‘죽음’은 나를 끈적하게 관통한다. 나아가 <슬로우 비디오>에서는 내 죄의식의 이정표까지 확실하게 찍어준다. 내가 삼라만상에서 상처입듯 나의 오물로 더럽혀졌을 모든 이들을 천...천...히 바라 볼 수 있도록.

     새들이 알을 깨고 나오듯, 최승자의 시는 내가 스스로 죽음을 자각할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리고 죽음과 가장 친했던 때를 상기시켜주는 고맙고 지독한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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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의 끝

이 시집은 이성복의 ‘당신’을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당신은 누구이신지?

     <꽃 피는 시절>에 등장하는 당신은 화자의 의식과는 별개로 존재하면서도 의식의 전부처럼 느껴진다. 당신을 보내드려야 하지만 이미 자신의 피부가 되어버린 당신. 그런 당신을 보내드릴 때에 느껴질 찢어지는 고통. 그것은 현실과는 아득히 먼 당신을 보낸 이후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가는 것을 막는 것은 5차원 존재와 악수하는 것만큼 어려울 것 같다.

<서해>에서 당신은 이제 화자 곁에 없다. 그리고 화자는 가보지 못한 곳에 늘 당신이 있을 것을 염두한다. 이는 시공간에서 절대적이지 못한 화자 스스로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는 만큼 거대한 당신들에게 휩싸여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도처에 뱉어진 당신의 잔상들만큼 그는 그리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는 곧 그 스스로가 마음 속 골짜기 속으로 숨어든 이유가 아닐까.

<만남>에서 화자는 자신의 그늘을 인정하고 비로소 당신과 만난다. 이 만남은 인식을 넘어선 통찰이라고 생각하면 굉장한 안정감이 느껴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는 결국 당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무력의 배설물이다. 그가 만난 당신은 그 자신을 비추는 거울일까 그가 그토록 잊고자 했던 당신일까 그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당신일까.  

     이 시집은 이성복의 ‘산과 바다’를 동행하는 재미가 있다.

     <바다>에서 화자는 서러움을 무심히 바라보고 그것과 동행한다. 이게 서러움에게는 더 큰 서러움이었을지도. 때문에 서러움은 들끓는 바다의 목소리로 가엾고도 처절하게, 얼핏 위협적으로 울분을 토해낸다. 가끔 스스로에게까지 이방인이 되어버리고 싶을 때를 나는 이해한다. 그러나 곱씹어보니 그 의도적인 무심은 스스로를 더 곯게 만들었었다.

<산길1>의 당장 눈앞에 펼쳐진 짙은 사물들, 당장 피부에 와 닿는 섬세한 촉각들은 화자의 경험자체를 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의문이 든다. 망각은 화자의 선택이었을까 화자의 무지일까. 망각 이후에 실감하는 절벽은 한계를 절감케 하지만 절벽에게 뱉어질 용기는 내지 못한 채 다시 그리움의 잎새로 향하게 한다. 그것은 끊임없는 회의의 굴레처럼 느껴진다.

<산길2>, <앞산>과 같이 익숙함이 불현 듯 낯설게 다가왔던 경험이 있다. 광덕산을 오르면서 안다고 생각했던 길에서 길을 잃었다. 막막했다. 이제는 끝났겠지 생각한 곳은 끝나지 않는 길이었으며 그 길을 걷다보니 나의 불완전함에 대해 가랑비에 옷 젖듯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금 새롭기 위해 길을 걸었다. 미스테리한길을 걷는 도중에 청설모를 발견했다. 그의 친구들이 닦아놓은 길은 불안한 설렘은 더 고조시켰고 이내 그것이 내 몸 속에서 구비치도록 내버려 두고 싶었다. 마침내 산행은 끝났지만 다시금 집으로 가는 길의 시작이었다.

이성복을 읽을수록 그의 가족과 그의 당신과 그가 걸었던 길 전부가 내 인식 너머의 경험이었다는 확신이 든다. 앞으로도 종종 그의 시집을 관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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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

 이성복 시인을 살펴보면서, 물론 지극히 얕은 나의 시선으로 그를 읽었을 뿐이지만 그의 삶은 나 또한 겪었고, 또한 겪을 수 있는 삶이라 느꼈다.

     그의 시 중 가족으로부터 발화된 몇 편의 시가 인상적이었다. 어머니의 고통을 지켜보고 누이의 혼인 소식을 듣고, 아버지의 폭력을 관망하는 한 사내의 유년기는 나를 관통했다. 어머니가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시고 느꼈을 상실감을 곁에서 바라보았을 때, 누나의 결혼으로 앞으로 가난한 직업을 갖고 미혼으로 살지도 모르는 내가 면죄를 받았다는 안도감에 빠졌을 때, 주유소에서 알바생을 다그치는 갑작스런 아버지의 폭력성을 실감했던 순간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시는 시의 공백에 독자의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나와 속내를 나누는 친한 친구가 되기도, 어리광피우던 시절의 부모님이 되기도 하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첫사랑이 되기도 하는 거 같다.    

개인의 삶을 당사자의 눈을 빌려 바라 볼 때, 그 이미지는 강렬하다. 때문에 이성복의 삶은 그 삶의 주인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을 것을 조심스레 짐작해본다. 강한 인상은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를 잡고선 돌이켜 보았을 그 때의 상황을 더 강한 이미지로 왜곡시켰고 그것이 시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나의 경험상 분명한 건, 왜곡이란 자신의 인식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거다.

     나는 그의 시에서 그가 느꼈을 어떤 책임감을 발견했다. 시인이 보았을 참담함이 불감증을 녹인듯한 어조로 뱉어지는 게 마치 이방인을 연상케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모습은 책임감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알고 있기에 책임감과 욕망사이에서 번뇌하는 자의 자세. 그러한 문장은 그가 고통에서 얼마나 벗어나고자 했는지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나타난다. 강한 것을 더욱 강하게, 강한 것을 더욱 아름답게, 혹은 문자의 배열을 엇나가게끔 하여 그에게 잔존해있는 고통을 그 스스로 치유하는 듯 보였다.    

그의 직설적이며 드러내는 문장에 비해 드러나지 않는 목표점들은 사실 그 자신도 판단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간혹 나도 나의 무의식속에 자리 잡은 것이 무어길래 이성적인 알고리즘으로는 판단되지 않는 충동을 느끼며 나아가 행동(비윤리적인 것은 아닙니다.)으로 이어지는 걸까 궁금할 때가 종종 있었다. 관념적이지만 아주 직관적인 그 미스테리한 상황을 나도, 시인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닌지. 그걸 꼭 설명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이해는 못하지만 모르는 건 아닌듯한 그 몽롱하며 모호한 경계를 시인 이성복은 본인의 문장으로 드러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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