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s-taesu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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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컨대, 서울에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내가 삼성동에 위치한 메밀소바집인 송을 가야한다고 가정해보자. 일단 네이버나 구글에 “삼성동 송”이라고 검색해 볼 것이고, 검색을 통해 송이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렇게 삼성동 초행길에 나선다고 가정하자. 일단 해당 지역이 코엑스 & 파르나스몰 & 현대백화점이 한 [블록]을 통째로 구성하고 있고, 2호선 삼성역 & 9호선 봉은사역 / 삼성중앙역이 해당 [블록]에 물려있다는 사실을 인지를 한 후, 그 커다란 한 블록 중에서도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은 좌측 하단에 위치해 있음을 지도로 확인한다.
이동수단 또한 고려해야 한다. 자동차를 이용할 경우 삼성동 [블록] 아무데나 가는 것은 큰 소용이 없다. 영동대로를 타고 오던 봉은사로를 타고 오던 결국 테헤란로에서 백화점이 맞닿는 코너에서 우회전 후 현대백화점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이걸 미리 알고 있지 않으면 대충 네비가 찍는대로 오다가 [블록]에서 최소 1바퀴는 돌 게 될 수 밖에 없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시 경우의 수가 조금 더 늘어난다. 9호선을 타고 온다면 봉은사역 7번 출구에 내려서 코엑스 지하를 가로질러 올 것이고, 2호선을 탄다면 삼성역 5번 출구에 내려서 대형 광고판을 하나하나씩 관찰하면서 백화점으로 향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온다면 좀 더 많은 경우가 생길 테고.
백화점에 도착하고 나서도 상황별로 접근 방식이 다를 것이다. 9호선을 타고 왔다면 코엑스 지하를 전부 뚫고 파르나스몰을 지나 현대백화점 지하 1층 식품코너에 도착했을 것이고, 2호선을 타고 왔다면 정식으로 현대백화점 정문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차를 타고왔다면 지하 4층~5층에 주차를 했을 것이다.
아까 전 검색을 통해 메밀소바집 송은 백화점 10층에 위치해 있음을 미리 알아놓았으니, 이제 10층으로 올라간다. 에스컬레이터 /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 도착, 송에 도착해서 메밀소바집이니 메밀소바 정식 세트를 하나 시킨다. 먹어보면 알게 될 것이다. 지하철을 2번씩 갈아타거나 40~50분 차 안에서 교통체증을 느끼면서 먹으러 올 만한 맛집이 아니라는 건 한 두입 정도만 먹어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제서야 서울에 처음 오는 나는 의문을 가진다. 대체 서울에 수많은 장소 중에서 삼성동, 그것도 값이 싸지도 않은 무역센터점 10층에 입점해 있는 송을 가야만 했을까? 그제서야 나는 “왜”를 처음으로 생각하게 된다.
만약 내가 삼성역 근처에서 살던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어림짐작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삼성동 주위에 밥집이라고 해 봤자 맨날 회사 근처에서 먹던 것 밖에 없고, 점심시간에 딱히 할 거도 없는데 빨리 식사를 해치우고 들어와서 낮잠 자기는 싫으면, 점심시간보다 몰래 10분 정도 빨리 나와서 10층에서 크게 호불호 ���지 않고 식사도 빨리 나오는 송에서 후딱 식사를 떼우고, 나머지 1시간 점심시간 동안 여유롭게 코엑스 현대백화점 구경을 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굳이 송을 방문해서 식사를 할 이유가 된다고 여길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굳이 송에서 식사를 하는 건 별로 현명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치만 첫 서울나들이를 나온 나라면, 무적권적으로 1) 길을 못 찾고 좌충우돌하면서 스트레스 받아 하거나, 2) 동네를 잘 아는 사람의 첫 안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서울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내가 삼성동에 위치한 메밀소바집인 송을 가야 한다고 가정해보자. 처음의 가정과 다른 점은, 삼성동에 근무하는 솔이를 본다는 이유를 가지고 가는 것이다. 아내가 주중에는 삼성동 근무를 하고, 점심시간이 11시 30분에 시작하는데, 사무실 주위에는 회사사람이 너무 많은데다가 식사를 마치고 나서 새로 들어온 로에베 매장 구경이 하고 싶다면, 굳이 화요일 오전에 복잡한 삼성동 현대백화점 무역센터 10층 송에 갈 괜찮은 이유가 생기는 것이다. 또한 미리 이 동네를 아는 아내가 송까지 어떻게 오는지 미리 알려준다면, 주차장을 못 찾아서 길을 뱅뱅 돌거나 코엑스 미로에 갇혀서 별마당 도서관을 찾아 하염없이 걷는 시행착오를 줄여줄 것이다. 이유가 확실하고 방법을 안다면, 아무리 길이 복잡하고 소바 맛이 그닥 훌륭하지 않아도 대인배처럼 짜증이 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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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면도를 하다 왼쪽 눈꺼풀 위쪽에 주름을 발견했다. 선명하게 늘어지거나 혀를 찰 정도는 아니지만, 흠 많은 탈에 또 하나 신경쓸 부분이 생겼다는 것이 여간 유쾌한 일은 아니라고 샤워하는 내내 생각을 했다. 문득 군대 시절 7살 많은 맞선임이 (그래도 한창 이쁠 나이 28살이었다) 지금부터 신경 안쓰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점호 끝날 때 마다 아이크림을 찍어바르던 것이 생각났다. 북면 용대리에서? 일병이? 20대가? 하고 속으로 참 유난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 때가 떠올랐다. 모든 행위와 비행위의 결과에는 복리가 붙는다. 내 눈가의 주름 같은 경우에는 만기해지 하는데 약 11년이 걸렸다.
약 3년 동안 도어투도어 25분 거리에서 출퇴근하면서도 3달에 한 번씩 늦어주던 과거의 나는 요즈음 그 댓가를 치르는 중이다. 5년 전 떠났던 영통 회귀형을 구형받게 된 것이다. 졸업과 함께 안전이별했던 5100번이 1112번이 되어 서른이 넘은 내게 연락도 없이 갑자기 돌아왔다. 졸지에 하루의 2시간 반 정도를 이 목뼈 고문 의자에 앉아서 괴롭힘을 당하는 나. 내 운명의 명주실은 과연 몇 년도 까지 나를 광역버스에 앉힐 것인가? 특히 오늘같이 비오는 날 + 만원버스에 + 큰 우산 들고 + 옆자리 아찌와 같이 경부에 오르는 날 특히 더 궁금해진다.
여튼 6시 반에 일어나는 나는 이제서야 진정한 30대가 되었다. 내 일 하나 쳐내기 바쁜 일상과 드라이 안 하면 가녀린 정수리, 운동을 하루만 걸러도 통증이 엄습하는 목과 허리, "표백 세대" 출신의 뿌리깊은 체제불만, 등 내가 나이가 먹었음을 피부로 깨닫는 데에는 MBTI 검사나 신조어 검사 같은 게 필요가 없다. 또한 그만큼 뻔뻔해져서 돈을 향한 드러운 욕망이나 골프를 향한 무지성 혐오를 이젠 감추지도 않는다. 평일의 낙은 저녁식사 정도? 아내나 친구와 있을 때 말고는 진심으로 웃어본 기억이 없다. 내 취미가 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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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이 서울 및 수도권 출신이 아니라면, 그리고 평소에 꼼꼼한 스타일이 아니라면, (예컨대 데이트코스를 미리 준비하기 보다는 그날 기분에 아라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는 스타일이라면) 한강에 가고픈 이성친구의 제안에 일단 머릿속에 딱 떠오르는 묘수가 없을 것이다. 데이트 당일 급하게 네이버나 구글을 뒤져 본다거나, 또는 나랑 거의 같은 시기에 수도권에 상경한 친구선배들에게 술먹다가 어줍잖게 들었던 기억들이 갑자기 떠오른다거나 하면 꽤나 높은 확률로 반포 한강공원을 머릿속에 그렸을 것이다. 말하자면, 나의 20살이던 2009년부터 현재 2021년까지 10대 후반~20대 중반을 지나 보냈던 모든 대한민국 청년들이 선선한 밤날씨에 신반포 몇차 아파트 단지의 가로등 불빛을 받으며 휘적휘적 걸어가서 지하철이고 버스고 택시를 잡던 기억을 갖고 있을 거라는 게 내 추측이다. 추측이 틀렸고 그 기억의 편린이 나만의 것이라고 한다면, 실로 나는 '한강 나들이' 하면 바글바글한 인파 사이를 뚫고 반포대교 사람 다니는 길을 지나 텐트와 자전거와 초중고대딩줌마저씨들과 한데 섞여 음악분수를 보던 기억이 5할 이상이다.
그렇기에 불꽃축제나 랜드마크가 있는 한강의 웻싸에는 몇몇 추억이 있었어도, 한강의 이슷싸에는 거의 추억이 없었다. 사실 거의가 아니라 아예 없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렇기에 이번 고덕동 시찰은 실로 의미가 있는 자리였다. 중심지역의 경악할 만한 인구밀도에 비해 촘촘하지 않은 인파, 다른 강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을 정경에, 강동구의 야심이 느껴지는 시설들까지,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가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가장 좋았던 점은 위기가 없어 느슨해진 한강 자전거 코스 씬에 긴장감을 불어넣어주는 암사-고덕 업힐코스. 왼쪽으로는 여느 한강공원 뷰와 달리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탁 트인 시야와 오른쪽으로 올림픽도로를 쌩쌩 달리는 자동차의 조화가 아주 좋았다. 신상필벌도 확실해서, 끝도 없이 내려오는 길에 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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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명이서 포도주 한 병에 맥주 한 병이면, 원래 간에 기별도 안 간다. 막 시작하는 정도? 그런데 그날 나는 머리에 묻힌 동동구리물에 얼굴에 찍어바른 선크림도 안 닦고 침대에 “잠깐”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아홉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평소에 새벽 3시에 자는 내가 아홉시가 좀 안되어 잠에 든 것이었다. 어제는 어머니 아버지가 나 신혼생활 할 집에 이사왔다고 서울에 1년 하고도 반 만에 올라와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높은 확률로, 결혼하기 전 우리 가족끼리만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나는 잠깐 카톡하러 가야지라는 핑계로 잠깐 침대에 누웠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마 금요일 새벽 5시에 잤다가 일어나서 부모님 모시고 와서는, 토요일 하루종일 여기저기 다니고 하다 보니 몸이 피곤했나보다. 나도 모르게 체력이 많이 약해진게 아닐까.
일어나 보니 시간은 밤 12시 반이었다. 이미 집안은 어두워져 있었다. 거실에 나와보니 어머니 아버지는 이미 거실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신혼집 자리이니 우리 침대에 절대로 눕지 않겠다고 하시던 부모님은, 내가 깔고 자고 있던 두꺼운 침대이불은가져가지도 않고 내가 7월 8월에 덮던 여름이불을 들고 가셔서는 덮고 주무시고 계셨다. 내일도 일찍 일어나실게 분명하니 나는 거기서 그대로 다시 잠들어서 내일 아버지 어머니 페이스에 맞춰 일어나는 게 더 나은 판단이었겠지만, 이미 쪼대로 사는 라이프사이클에 익숙해진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2시간동안 휴대폰으로 시덥잖은 SNS나 하다가 2시 반이 되고 나서야 자려고 잠깐 밖에 나갔다. 부모님은 떨고 계셨다. 내 생각에는 아까 저녁에 식사를 하다가 내가 난방비가 12만원 나왔다고 말씀드려서 보일러도 켜지 않고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았다. 내 이불을 덮어드렸다. 2시간이나 지났지만. 화장실에 갔다가 추우시니 이불 덮고 주무시라고 말씀드리니, 아버지가 그냥 엄마아빠 사이에서 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좁디좁은 거실에 냉한 바닥에서 주무시는 어머니 아버지 사이에 누웠다. 어머니 아버지는 배게도 소파 자그마한 방석을 꺼내 주무시고 계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죄스럽다. 1월 23일 저녁은 아까 말했다시피 결혼하기 전 부모님이 마지막으로 서울에 올라오셔서 큰아들과 보내는 마지막 밤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덥잖은 얘기로 하루를 가득 채웠지만, 분명히 어머니 아버지는 그날 밤 내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나는 포도주를 먹고 잠들어버렸다. 정말 좁은 어머니와 아버지 사이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내 꼴이 정말 웃겼다. 속 안 썩이고 똑바로 살고싶은 나였는데, 어떻게 제일 쉬운 것 하나도 못할까. 난 엄마아빠 사이에 누워 자면서도 어머니아버지께 미안해서 비참한 기분에 휩싸여있었다. 그렇게 누워서 꼬박 2시간을 괴로워하다 5시쯤에 잠이 들었다.
반복이다, 7시에 일어난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는, 버텨야지 버텨야지 하다가 결국 또 잠에 들었다. 10시 반까지 그대로 자다 일어나니, 비행기 시간이 다 됐다. 나는 부모님이 올라오시길 한 3달전부터 상상하고 올라오시면 무엇을 할 지 상상하고 고민했었는데, 정작 그날이 오고 나서는 잠밖에 자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운전도 못해서 공항까지 가는 길마저 아버지가 직접 운전해서 가셨다. 우리는 공항에서 급하게 문배동 육칼을 먹고, 백미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두 개 사서는 다 먹지도 못하고 공항에서 급하게 헤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솔이와 나는 결혼을 미루기로 잠정적으로 결론내렸다. 어머니 아버지를 황망하게 보내고 집에 들어오니, 다시 집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애꿎은 솔이한테 괜히 투정을 부리고, 하릴없이 방과 마루를 서성거리다가 혼자 석촌호수에 산책을 나갔다. 한 시간만 똑바로 걸어도 정강이가 아려서 채 2시간도 못 채우고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소주를 한 병 사서, 이틀 전 먹다 남은 족발로 탕을 끓여서 먹고는 남은 맥주를 마셨다. 소주랑 맥주를 한 병 먹고, 사다 놓은 하몽을 먹고 배를 두들기고 앉아있다가 괜히 청소를 한 번 해도 10시였다. 나는 분명 어제 엄마아빠 사이에 누워서는 꼭 11시 내로 잠들어서 내일부터 똑바로 살 예정이었다. 그렇게 다짐을 하고도 결국 편의점에 가서 소주를 한 병 더 사왔다. 3일동안 전자담배를 하나도 못 피니 문득 너무 속이 답답해서 14개피 짜리 던힐 1mg 한갑을 샀다. 집 앞에서 피면 괜히 죄스러워 집 건너편에서 담배를 피다 문득 앞을 봤다. 나는 지금 내 차도 있고 전세지만 내 집도 있다. 어쩌면 직장도 있고 어쩌면 반려자도 만났는데, 그 어떤 것도 나 혼자 내 역량으로 일구어낸 것이 없었다. 나이가 서른 두 살이 되었지만, 내 인생을 지탱하고 있는 모든 기반은 어머니 아버지가 내게 퍼다준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인생에서 가지고 있는 것들 중 부모님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에 대한 보답도 단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런 생각이 들면 나는 굉장히 비참한 기분에 휩싸인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인 지 분명히 머릿속으로는 아는데, 그걸 실행에 옮기지를 못한다. 일요일 밤은 항상 죄스러운 마음에 제 때 잠을 잘 수가 없다. 한 시가 넘어가는 이 시점에도 나는 내가 해야할 일은 반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챙겨보는 웹툰/만화는 이미 다 챙겨보았다. 글을 써야지 하고 앉아서도, 글을 다듬을 의지도 생기지 않고 그냥 다다다 써내려갈 뿐이다. 기분이 안 좋다. 누구보다도 따뜻한 주말을 보내고도 기분이 안 좋다. 지금 이런 걸 쓰면서도 배설하는 기분도 들지 않는다. 기분이 안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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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팅햄 대학교? 그 곳과 내가 살던 곳은 거리가 꽤 있었다. 스므녜인지 스미냑 인지 실제 발음이 이제는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옛날인데, 여튼 캠퍼스 뒷문에서 집까지 걸어가면 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대중교통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기억이 맞다면 Semenyih는 구간이 있었던 듯, 나는 아마 TTS 2에 거주를 했을 것이다. 그 집은 다른 여느 집처럼 2층집에 총 8~10명정도 거주할 수 있는 자그마한 주택이었는데, 집이 너무 허름하고 바퀴벌레가 너무 많이 나와서 아무도 이곳에 살지 않아 나는 약 3층짜리 10인용 집의 1층에서 혼자 살았다. 매일같이 샤워를 하다 엄지 3개 굵기의 바퀴벌레를 2마리씩 만나서 빗자루로 개박살을 내던게 일상이었다. 전역한지 1년도 안되서 눈에 뵈는 것 하나도 없는 스물 셋의 나도 혼자 밤에 2층에 올라가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무서워서......내가 뭘 하고 다녔는지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여튼 수업이든 뭐든 끝나면 난 뒷문으로 나와서 혼자 집에 털레털레 20분 걸어가곤 했다. 종종 그 당시에 나랑 놀아주던 몇몇 이들이 나를 집에 초대하긴 했지만, 그런 적도 몇 번 없었고 거의 대부분의 날을 집에서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에 돌아가는 팬을 바라보다 잠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 그래서 이 사진이 왜 찍혔느냐, 아마 학기는 다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도어락 그딴거 없이 보신탕집 식용 개들이 갇혀있는 우리를 잠가놓을 때 쓸 법한 무식하게 생긴 대형 자물쇠가 우리집 도어락이었다. 항상 가방이나 주머니에 한아름뭉치 열쇠를 들고 다녔는데, 하마타면 학기가 끝나갈 어느 날 그 키를 잃어버린 것이다. 앞의 대문을 열고 현관문을 들어가야 하는데, 대문은 뭐 그냥 넘어가면 되지만 개집자물쇠는 열쇠가 없으면 열 수가 없었다. 9년 전의 나는 무슨 생각인지 그 자물쇠를 벽돌로 한 10분은 내려친 것 같다. 그래도 전혀 꿈쩍도 하지 않는 자물쇠. 나는 땀을 뻘뻘 흘리고 욕지꺼리를 내뱉으면서 벽돌로 자물쇠를 내려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 집 앞에는 아무렇게나 자란 잔디들이 많아서 오래 서 있으면 풀에 다리가 베여서 풀독이 올랐다. 많이 움직이면 안됐었다.
그 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 옆집에서 절단기를 빌리자. 절단기를 대체 누가 가지고 있고 어떻게 빌리느냐? 주변에 있는 이웃들 집 대문을 쾅쾅 쳐서 절단기 있어요? 하고 물어보기로 했다. TTS 2의 Neighborhood 대부분의 집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낙후되서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나는 5개월동안 고스트 타운에서 사는 것 같아서, 내 인생 아마 가장 강하고 건강할 시기에도 밤에 종종 그 동네를 걷다가 두려움을 느끼곤 했었다.... 그렇지만 진짜 땡볕이 뒤지라고 내려쬐는 그 순간에, 열쇠가 없어 집에 못들어가는 상황에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 때의 나는 여러 고난을 대머리공룡마냥 정면 돌파했던 시절이었다.
여튼 아무도 모를 고난의 행군 끝에 절단기를 빌려 우리집 보신탕집대형자물쇠를 내가 직접 절단했다. 난 좀 기뻐서 우리집 와이파이가 연결되자 마자 저 위의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렸던 거 같다. 2013년은 페이스북이 먹어줬던 시절이었다. 가끔 한평생 회사 집 돈돈돈 거렸던 거 같은 내 인생에 이런 일들이 있었다는게 떠오르면 되게 신이 난다.
32살의 나라면 침착하게 학교로 돌아가서 수위 아저씨께 정중히 상황을 설명하고 절단기가 있는지 여쭤봤겠지만, 23살의 나는 tts 2의 모든 집의 대문을 두드리기로 결정했다. 예상과 같이 우리 집 라인에 있는 주택에는 아무�� 살지 않았다. 사무엘이나 마르코가 가끔 집에 놀러온 적은 있지만, 난 5개월동안 반경 1km 내에 혼자서 살고 있던 거였다.... 한 시간은 족히 돌아다녔다. 리얼 갤럭시 노트 1 하나 말고는 노란 핫팬츠에 흰색 망고나시를 입고 있던 나는, 입고 있던 옷이 비맞은 사람마냥 축축해질때 까지 발가락 찢어지는 개싸구려 쪼리 하나 신고 그 동네 전체를 돌아다니면서 절단기를 구걸하고 다녔었다. (말레이시아에 스콜성 호우 진짜 많이 왔었다....) 여튼 그 동네를 뺑뺑 돌아 내가 살던 곳에서 한참 떨어진 어느 무슬림 집안 8인가족네 집에서 절단기를 빌렸다. 히잡을 쓴 아주머니는 나한테 생수 750ml 한 통을 줬었다. 당연히 3g 도 없어서 와이파이도 잠깐 빌려서 기가 차고 코가 차는 이 때의 상황을 몇몇 친구들에게 중계를 했었다. 아마 그때 내 얘기를 카톡으로 들었던 그들 중 단 한 명도 내가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을 기억 못할 것이다.
여튼 절단기를 빌려 우리집 대문 식용개고기집우리자물쇠를 직접 내 손으로 끊고, 기분이 좋아서 페이스 북에 위에 사진을 올렸던 걸로 기억한다. 한평생 집 회사 돈돈돈돈 거리고 산 것만 같은 내 인생에 가끔 이런 추억이 떠오르면 굉장히 신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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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내가 별 의미없이 주절대는 말들 중에서 좀 밀고 있는 phrase는, '세상이 도대체 우째 돌아가는지 모르겟다'임. 아닌 게 아니라 진짜로 세상이 우째 돌아가는 지 도대체가 알 수가 없다. 올해 2월 말부터 일상 속에 마스크가 스며들기 시작할 때 부터, 마스크 위에 낀 찐따안경에 매일같이 서리는 김서림처럼 저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뉴 노말이니 전세값 폭등이니 코스피 2600이니 하면서 거시적 세상은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가 터져대는데, 정작 내 삶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적당히 투덜대고 적당히 힘들고 적당히 벌면서 적당히보다 조금 더 놀러다니는......
아침에 회사갈 때 씽씽이를 타고 가면서, 저녁에 퇴근하고는 털레털레 집에 오면서 지나가는 사람들, 그 표정, 주변에 건물들 위 간판 따위를 졸업 전 마지막 학기에 듣는 재수강 과목마냥 열심히 관찰한다. 테헤란로 특징 : 한 블럭만 안으로 들어가면 도시의 명과 암이 아주 적나라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음. 성별연령을 불문하고 진짜 다양한 사람들을 출퇴근길에, 그리고 특히 동네에서 마주친다. (우리 동네에 진짜 인구 구성이 말도 안되게 다양함) 저 사람들은 어디서 뭘 하면서 삶을 꾸려나갈까, 그런 나같고 너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어째저째 살면 지금처럼 저절로 사회가 구성이 되고 톱니바퀴가 굴러가나, 하는 생각을 최근 여러번 자주 한다. 그런 생각의 끈이 꼬리를 물고 물다보면 결국에는 '아니 진짜 세상이 도대체 우째 돌아가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라는 말이 터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는 집 밑에 편의점에서 2,900원 짜리 카스 한 병을 사버리게 되는 것이다.
20대 시절에 가끔 상상하던 내 미래는 어떨까, 하는 택도 없는 상상의 나래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맞춘 건 목떼가 낀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지하철 개찰구에 카드를 찍고 들어가는 모습 뿐이다. 어느 lane을 타든 일단 궤도에 오르면 삶은 대체적으로 잔잔한 무드를 띠게 되는 것 같다. 노트북 하나 덜렁 들고 비행기를 타고 대륙을 오다니거나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기타 둘러매고는 길거리에서 소음내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제3자의 입장에서 냉정하게 바라봤을 때 내 삶은 평범 그 자체이다. 당연히 걱정도 고민도 머리털빠지게 많지만 나를 괴롭히는 그것들마저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걱정, 남들 다 하는. 부모님 건강하시고 회사 월급 안 밀리고 내 칭구들 모난 길로 가는 모습 안 봐서 그런지, 배가 불렀나보다. 문제 없는 삶에 가슴 뛰는 일이 없다고 불평을 하는 꼴이니.
여튼 걱정이랄 것이 결국은 돈, 돈 뿐이다. 내는 래퍼도 아닌데 어느 누구를 만나도 나는 이놈의 돈을 노래한다. 맨날 집, 자동차, 연봉, 쟤가 든 가방에 시계 얘기 그만하고 살고 싶은데, 31살의 나는 그게 잘 안 된다. 그게 핸실인데~ 라는 참 쉬운 가불기 멘트가 있지만, 그거는 일종의 체념이니까....그러면서도 가끔 아직까지도 가슴속 불꽃을 간직한 칭구가 행복론을 얘기하면 마음 속에서 '음....좀 뜬구름 잡는 얘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윽 고개를 드는 걸 보면 나는 코스프레가 맞기는 한가보다.
요런 바이브가 요즈음의 내 생각의 전반을 지배한다는 위기감에 대한 보상심리로 요새 나는 집에 오면 병든 닭들이나 들을 법한 맥빠진 노래만 틀어놓고 최대한 생각없이 소비할 수 있는 컨텐츠만 골라서 누린다. 최강록의 40분짜리 요리 브이로그나 1시간짜리 walking around New York city 4K, 혹은 GQ 오래된 정원 같은거....그런거 보고 있으면 약속 없는 날 기준 9시부터 12시까지는 순식간에 지나간다. 그 골든타임에는 대출연장이고 선적지연이고 이사고 뭐고 그냥 다 미뤄두고 머릿속을 화이트노이즈 같은 걸로 가득 채워놓는 것이다. 그러고는 눈 감길때 폭 자면 되는데, 현대인에게 눕자마자 자는 게 가능할 리 없지않는가? 그러면 그때부터 진짜 잠오는 지금까지는 나라 걱정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 것이다....휴대폰을 거실에 두고 책을 읽는 것도 며칠 시도해봤는데, 요거는 소설일 때는 참 잘 되지만 내 발전을 위해서 읽는 정보전달 목적의 책일때는 정말 지루하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그 단점을 몸으로 겪어보고 나니 책을 읽고 싶다는 마음을 끓는 점에 도달시키기가 쉽지가 않다.
그치만 이런 잠 못 이루는 밤에 대한 고민은 목이 아프지 않은 의자와 100마논이 넘어가는 침대가 있는 새 집에선 절로 해결될 것 같으니까 난 며칠 남지 않는 이런 날들을 즐기기로 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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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먹으면서 내가 느낀 바 고뇌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거나 문자화하는 것이 조금씩 부끄러워진다. 생각의 실타래를 가지란히 정돈하지 못한 채로 다른이에게 보이는 일을 저어하게 되는 나는 가슴 속 저기 침대 밑 보이지 않는 곳에 앞발로 쑤셔 숨기는 데 익숙해진다. 어디로든 발화하지 못한 말이나 생각은 마음 속으로 끓는데, 이제는 끓는 점에 닿지도 못하고 미지근에서 뜨거워지는 어느 언저리에서 뭉근하게 늘어붙어 아직은 여린 속을 데이게 한다. 끓지 않고 불꽃이 붙지 않음을 매일밤 침대에서 아쉬워하면서도 해가 뚜면 타성에 몸을 푹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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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브가 애비와 함께 벙원에 가기 위해 고층빌딩을 가로지르는 철근을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건너가는데, 고소공포증이 있는 애비는 계속해서 욕설을 지껄이며 겁을 먹고 그걸 보고 앞장서는 애비가 때로는 농담지꺼리를 하고, 때로는 따뜻한 말로 어르고 달래면서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보면서 6년 전 처음으로 로프를 매달고 암벽등반을 했던 기억이 났다. 내 기억이 맞다면 릿지 이름이 '설악산 하나되는 길' 이었다. 당시 내 역량으로는 분명 오르기 힘들었던 그 릿지를 같이 갔던 형들, 누나&교수님이 어르고 달래고 그래도 안되면 문자 그대로 위에서 자일을 붙잡고 끌여올려가면서 완등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진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위로, 위로, 위로 올라가면서 중간에 하늘에 대롱대롱 매달려서는 절대로 더 못 올라갈 것 같을때 속으로, 가끔 안들리게 겉으로 얼마나 많은 쌍욕을 뱉었는지....그 때 온 몸에 힘을 다 쓰고도 도저히 못 올라가서 선등자께 소리를 질러가며 당겨달라 했을때, 그 똥꼬까지 힘을 바짝 주고 공포에 떨던 기억은 시각적으로나 촉각적으로나 너무 생생해서, 가끔 악몽을 꾸면 게임 속 애비처럼 아무 안전장치 없이 걸어가다가 떨어질 때의 그 기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 오를 수 없는 부분에 온갖 애를 다 써도 절대 오를 수 없어 전적으로 타인에게 의지해야 할 때의 그 좌절감, 그런 것들을 전부 지나고 지나고 지나서 결국 해가 걸려있을 때 완등을 마쳤을 때의 그 짜릿한 기분, 뭐 그런 건강하고 땀나는 감정을 느껴본 지 진짜 오래됐다. 내가 최근에 어떤 걸 그렇게 오래 해 본 적이 있었던가? 운동이든, 좋아하는 것이든, 아니면 집착하고픈 결과든....? 감정 소모, 정말 택도 없는 것들에서 부터 비롯되는 스트레스, 공적이고 사적으로 잡다하게 신경써야 할 것는 점점 더 많아지고 그 위에 또 쌓인다. 반면에 어떤 것을 이루고픈 강렬한 동기 같은 건, 흰색 런닝을 입고 그 위에 흰색 셔츠를 입기 시작한 그때 즈음해서 갑자기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서서히 사라져가던게 아니었다. 서서히 사라지고, 그 서서히 사라진다는 사실을 내가 인지해서 그에 대해 충분히 우울감을 표하고 아쉬워하고, 그렇게 결국 떠나보내지 않고, 그냥 어느 날 어느 순간 나를 보니 그런 감정같은게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나는 집에 오면 출근할때 입었언 에어리즘을 그대로 입고는 게임을 직접 할 열정은 없으니까 플레이 walkthrough 영상 같은 걸 틀어놓고선 잠이 왔다가 깼다가 충분히 일찍 자지 못함에 죄책감이 들 때 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잠이 드는 삶에서 아무런 자기혐오를 느끼지 못하는 텁텁한 서른 한 살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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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다섯시 쯤 이제는 도저히 안 된다, 자야된다, 라는 생각이 들면 휴대폰을 손이 닿지 않는 먼 곳으로 던져둔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다가 아 참, 알람을 안 맞춰 놨던가?? 하는 생각이 든다. 혹여나 일어나서 휴대폰을 다시 손에 쥐면 겨우 잡아놨던 단잠의 실낱같은 꼬리가 또 달아날까 자리에 누운 채로 "하이 빅스비, 아홉시에 알람 맞춰줘" 라고 한다. 친절한 빅스비는 "네, 아홉시에 알람을 맞춰드릴게요. 세 시간 오십 육 분 뒤에 딱 맞춰 울릴게요!" 라고 말해준다. 그 시간을 들을 때 쿵 하고 내려앉는 가슴의 느낌은 참 비참하고 싫다. 두 장의 암막 커튼 사이로 내비치는 가느다란 어스름, 그 쯤 되면 억지로 깨 있느라 왼쪽 가슴 아래께가 욱신욱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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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돌의 차돌박이는 1인분에 5,900원이었다. 진짜 맛있었다. 31년 생애 중에서 가장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다니는 순간에 서 있는 지금의 나로서도 요 조그만 프렌차이즈 차돌박이집의 고기는 참 맛있었다. 계속 맛있다, 오늘 메뉴 좋았다 를 남발하면서 혼자 든 생각은, 이 5,900원 짜리 차돌박이가 1인분 42,000원짜리 대도식당보다도 더 맛있다는 것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5,900원 짜리 차돌박이가 42,000원 짜리 안심보다 맛있으면, 이 차돌박이가 안심보다 약 7배는 더 맛있는 거 아니야?' 라는 데 생각이 닿는 순간 난 깨달았다. 아, 나는 껍데기구나......되지 않기 위해서 그렇게나 의식적으로 노력해왔던 나도 결국 껍데기구나.... 음식의 맛은 결국 개인이 느끼는 만족도와 역치의 차이다. Lvl 7 짜리 맛있음이 있고 Lvl 19짜리 맛있음이 있는 게 아닌 것이다. 내가 차돌박이는 5,900원 이고 안심은 42,000원일 때 차돌박이가 안심보다 산술적으로 7배 높은 효용을 본다고 생각하는 그 '가성비적 잣대'를 들이미는 순간, 나는 맛과 맛에 경쟁을 붙여버렸고 그 경쟁의 우와 열은 결국 KRW로 가르게 되 버린 것이다.....무심코 그렇게 생각하고 그것을 옳다고 생각하게 됨으로서 임대아파트와 메이커아파트의 학군은 다른게 맞다고 생각하고, 국산차보다 외제차 뒷 쇼바에 눈길을 더욱 오래 주는 그런 서른 한 살이 나도 모르게 되어버린 것이다.......아바나보다 플로리다를 더 가고싶어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망고나시보다 에어리즘이 더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버런 것이다.....나는 이제 껍데기를 껍데기라고 부를 맹분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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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dai.ly/x2vznte
너무너무 좋아서 앞으로 진짜 힘들고 내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면 이 영상을 찾아서 보고싶다 오늘은 많이 힘들지도 않았는데 이 영상을 보다 조금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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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시위? 처럼 기타도 매한가지로 치지 않을 때는 기타줄을 느슨하게 풀어놓는 것이 좋다고 들은 적이 있다. 네이버였나? 구글이였나? 그렇게 알고 있지만, 내 기타는 무대에 오를 일도 없고 다른 이한테 들릴 일도 없는데 물묻은 손으로 좀 만지고 튠이 좀 나가면 어떻겠냐. 그치만 갑자기 기타를 들고 무대에 올라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침착하게 한 곡조 뽑아서 남심을 끓이고 여심을 녹이는 새키는 분명 평소 원펀맨 마냥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아무더 모르게 크로매틱 연습을 조지는 넘일테다. 맨날 할 줄 아는 노래만 10년째 우리는 넘은 그런 성공을 거머쥘 수가 없다 이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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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세상을 먼저 알아버리는가, 어느 세상에 먼저 애정을 쏟느냐가 20대 때 전부 결정이 나 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사랑을 붓고 싶은 세상이 있다. 왜 그 마음에 솔직해지 못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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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 한다, 꼭 해야한다. 하지 못하면 평생을 후회할 것이다.
내 입으로 떠들고 다닌 말, 내 인생의 prime time은 14년부터 16년까지 이어지는 근 2 년 동안의 시간. 나는 내년 11월 분명히 결혼을 할 것이고, 삶은 지금보다도 훨씬 고착화 될 것이다. 나는 평생 후회하고 싶지 않다. 나는 어떻게든 자리를 잡은 14년 Viña del Mar의 추억을 나눈 그 친구들을 하루씩 보러 가고 싶다. 관광, 놀기, 이런 것들이 아닌 오직 방문. 그들을 방문하고, 방문해서 내가 실제로 2014년에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주는 친구들을 만나 그들도 같은 추억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내 눈과 귀로 확인하며 결혼 이후의 삶에 기어코 순응할 수 있도록 꼭 내 친구들을 방문하고 싶다. 꼭. 이것이 실행될 수 있도록 내년 5월까지 이직에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아저씨화 된 몸을 최대한 총각화 시킨 후, 솔이와 부모님을 납득시키고 그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 친구들���게 나는 너희를 잊지 않았고, 너희들이 나를 잊지 않았기에 너무 감사하며 앞으로 이렇게 떨어져 있어도 언제고 그런 나날들이 있었음을 기억해달라고, 그 때의 그 감정은 내 인생을 통째로 뒤흔들어 놨다고 말해주고 돌아오고 싶다. 꼭......내년 여름 전까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도록 허투루 준비하지 않을 것이다. 또 어영부영 있다가 흐지부지하는 서른의 시작, 이제는 하지 말자. 내가 명확히 하고 싶다고 가슴 깊이 느끼는 생의 첫 번째 일이다. 내 자신을, 내 미래를 실망시키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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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주
친구의 죽음으로 장례식장에 왔다. 그의 사진에는 웃음이 만연하다. 금방이라도 “어서와! 잘 왔어!” 라고 말해줄 것 같다. 하지만 그저 나를 향해 웃어만 줄 뿐이다. 친구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자. 편육과 소주를 내주었다.
주어진 편육을 소주에 안주 삼아 먹고 있는데, 한 노인이 합석을 하셨다. “자네, 편육과 소주를 아주 잘 먹고 있구먼” 나는 별 정신나간 노인네인가 생각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러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그… 장례식장에 오면 왜 편육이 올라오는지 아나?” 나는 한번도 생각하지 못 한 일이라 대답을 못 하고 있었다. 노인이 계속 말을 이었다. “편육이 가진 의미는 그 죽은 사람의 몸을 의미하네, 그걸 입에 넣고 씹고 목에 넘기면서 그 먼저간 사람을 내 몸에 깊숙히 기억하기 위함이지.”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치지 않은 것이 다행일정도로 멍해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술은 그… 먼저간 사람의 눈물이라네, 세상에 대한 미련과같은 그 사람이 쏟아낼 수 있는 마지막 눈물 말이야.” 나는 그 노인의 말을 듣고나서 더 이상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먹고 넘기기엔 그 무게가 너무 무거웠다.
그저 먼저간게 너무 안타깝기만 하고 그의 죽음에 대해선 진지하게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내 슬픔에 잠겨 먹고 마시었던 것이었는데. 그 모든 행위가 죽은 자를 위로하며 그의 삶을 이어간다니… 한참을 그저 멍하니 있으니 노인은 나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떠났다.
삶과 죽음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우린 이 세상을 살아갈 의무가 내 삶 뿐만이 아니라 먼저 떠난 사람들의 몫까지 해야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삶의 무게는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닌가?
그렇게 먼저 간 친구를 남겨두고 나는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아오는 길에 생각해보았다. 내 삶의 수 많은 문제에 더해 그 친구의 아쉬움깢 품으며 살 수 있을까? 어쩌면 먼저 간 친구가 남져진 나를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까? 그곳에선 더 이상 무엇인가 결정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의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니깐 말이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사실은 버려진 것은 아닐까? 죽은 친구에겐 미안했지만, 현실로 돌아가려니 막막했다.
언제 시간이 되면 친구의 무덤에 찾아가 함께 눈물 흘리며 이야기 해야겠다. 나는 네 눈물을 한 모금 마시고 너는 내 슬픔을 들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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