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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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tv7004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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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역사상 가장 무능했던 사장'...퇴직한 사우들이 통탄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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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lab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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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 비극의 연대기, 『Maoism, A Global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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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Lovell
Vintage, 2020
- 정치적 태도 혹은 생각이 이름을 가지게 되며 실체가 된다. 그리고 전세계로 퍼져 더 거대한,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커지고는 한 순간 소멸한다. 하지만 다음 세대로 유전자를 남긴다. 유기체가 아닌 ‘사상’의 80여년에 걸친 일생을 중국 역사학자인 줄리아 로벨은 600페이지가 훨씬 넘는 두툼한 책에 담아낸다. 봉건 왕정과 악질 지주, 그리고 가장 무자비한 폭력 기계 군벌과 맞서기 위해 등장한 마오쩌둥의 사상과 전략들은, 49년의 승리와 함께 민족 해방을 갈망하던 수많은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들에게 희망이 되었고, 소련의 모델을 수용하면서도 더 빠르게 성장하겠다는, 그리고 그 모든 걸 인민의 의지로 가능하다는 중국의 (겉으로는 이루어졌다고 주장된) 발전 전략은 막 독립했으나 어떤 물적, 인적 자원도 없던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국가들에게 따라야 할 (헛된) 미래가 되었다. 이제 소련의 ‘수정주의’를 넘어서 수많은 인민을 학살하고, 지배하는 제국주의자와 제3세계의 독재자와 맞서 세계 혁명의 중심 사상으로 성장하고, 그 과정에도 관료주의로 전락하는 소련에 맞서 끝없는 내부 혁명을 일으키는 시대에 가장 진보적인 사상으로 자리잡은 Maoism.
- 이 복잡하고 역동적인 ‘사상’의 일생을 다루면서 줄리아 로벨은 30년대 옌안(延安)에서 시작되어, 40년대 중국 전역으로 그리고 다시 50년대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등을 거쳐, 60년대 베트남, 캄보디아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나아가 미국과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 거치다, 70년대 페루와 인도, 그리고 21세기의 네팔을 거쳐 21세기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그 안에 뛰어 들었던 ‘사상’의 인간들의 삶을 통해 그려낸다.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는 결코 즐겁지 않다. 불 속인 줄 알면서도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대의에 대한 헌신은,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삶을 앗아갔으나, 대의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고, 때로는 배신당했다. 이 책 내내 역사와 ���의라는 ‘큰 이야기’에 의해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쉽게 꺼지는가를 지켜보면서 또한 그 헌신은 ‘정의의 실현’이라는 보답과는 인연이 없다는 현실을 확인하기 때문이다.
- 그럼에도 책을 손에서 놓기 어려운 건, 역사라는 시간적 배열 위의 사건이 얼마나 많은 변수들, 우연적 요소들에 의해, 그리고 수많은 오해와 착각 속에서 전개되는가를 너무나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수 백 년 동안 쌓여온 민족주의적 갈등의 잔재, 지도자의 개인적 성향, 거짓된 선동과 선전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착시, 자기 편한대로 잘라낸 이념의 조각들이 가장 선명한 계급 투쟁의 와중에도 끝없이 작동하며 구체적 역사의 장면을 결정한다. 대의에 뛰어들어 헌신한 이들이 생각했던 자신의 행동만을 변수로 하는 ‘일원방정식’의 역사란 존재하지 않았고, 그들은 세상을 움직이는 수많은 변수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 역사적 과정 속에서 수 천명의 목숨이 사그라지는 장면들을 경험하고, 또 그 장면을 만들어 내는 과정은 대서사의 역사와 혁명의 현실에 대해 날 것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 하지만 다시 돌아가면 그들은 다른 길을 선택할까? 악마와 싸우며 악마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끝난 후 우리는 그 빛 나는 광기에 대한 두려움에 아감벰이 말하는 ‘제스춰의 잠재성’에 운동을 맡기게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게바라가 마지막 노트에 남긴 프랑스 작가의 말처럼 “인간은 꿈의 나라에서 내려”오는 존재이며, 자신의 삶을 그리고 그가 처한 세계를 반성할 수 있는 것에서 존재가 규정된다면, 이 예상된 비극으로 우리는 여전히 뛰어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 세세하게 역사를 그리다 보니 직접 읽는 것이 제일이겠지만, 그래도 간략하게 요약을 해본다면,
From Mao Thought to high Maoism
- 책은 크게 세 부분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우선 먼저 Maoism이 겸손한 마오쩌둥 사상에서 세계 혁명의 지도 이념이라 주장하는 high Maoism으로 숭상되기까지의 과정이 다뤄진다. 다만 얼마전에 읽었던 『마오쩌둥 평전』이 마오쩌둥의 삶과 중국의 상황에 집중해 드러나지 않았던 모습들이 모습을 나타낸다. 이 과정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식민지 민족해방 운동의 과정, 신생 독립국이 제국주의에 의해 착취된 끝없는 바닥에서 새롭게 나라를 건설하는 과정, 여전히 내부의 식민지로 착취 대상이 되는 남아메리카의 인디오, 미국의 유색인, 인도나 네팔의 불가촉 촉민들의 사람다운 삶을 위한 봉기 과정이 다시 마오쩌둥의 개인적 희망과 다른 혁명 지도자들과의 경쟁, 그리고 중소 분쟁을 통한 세계 혁명의 문제와 이런 중국의 성장에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였던 서구의 대응까지 복잡하게 얽힌 것이었다.
- 그리고 이 모든 출발은 36년 옌안에 건설된 중국 소비에트다. 비록 출발 당시의 군대 중 10% 정도만 살아 남았지만, 불가능에 가깝던 탈출극인 ‘대장정’을 성공하고, 그런 동지애에 기반해서 헌신적인 공동체 집단을 구축한 연안 소비에트는, 한 편으로는 교조적이며 군사적으로 무능했던 소련 유학파 출신의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일 획을 긋고, 중국 공산당의 군사력을 담당할 뛰어난 군사 지도자로 마오쩌둥을 자리매김하는 공간이었고, 동시에 언제나 ‘실천 속에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험한 오류를 담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던 마오쩌둥에게는 ‘공산주의 사회의 원형’에 도달할 수 있는 (이후 3천만명 이상의 아사자를 낸 대약진 운동과 50만명 이상의 사망자를 가져온 ‘문화대혁명’의 비극을 낳는) ‘꼬뮨의 경험’을 확인시켜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순간의 모습이 미국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와의 인터뷰에 담겨, (한 때 남한 학생 운동에서도 필독서였던) 혁명 르포에 있어 가장 위대한 작품인 『중국의 붉은 별』이 되었다.
- 옌안 소비에트의 경험은 이후 마오쩌둥이 새로운 혁명 세대로부터 보게 되는 모습들, 혁명에 대한 낭만주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교조주의, 영웅이 되기를 꿈꾸는 영웅주의, 무엇보다 삶과 혁명 운동이 분리된 자유주의 등에 대해 공격으로 이어진다. 42년 “당의 작풍을 정비하자”, “당팔고를 반대함”, “옌안 문예좌담회에서 행한 강화”를 잇달아 발표하며 대규모의 ‘교정 작업’을 진행한다. 물론 ‘교정’이라는 이름 하에 많은 지식인 활동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살해당한다. 인민의 직접적 경험에 기반한, 특히 농민의 땅내 나는 삶에 대한 마오쩌둥의 예찬이며, 동시에 지식인 운동가에 대한 끝없는 공격의 상징이기도 했다.
- 마오의 실천적 사상과 전략은 49년 혁명의 승리와 함께 이제 ‘승리를 가능하게 하는’ 사상으로 격상한다. 게다가 소련 모델을 수용한 중국의 발전 전략이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두면서, 원조인 소련을 너머, 식민���의 아픈 경험을 주었던 영국과 세계 최강인 미국을 넘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마오쩌둥은 강조하게 된다. 비록 가진 것은 없으나 의지만 있다면 이룰 수 있다는 ‘자발성주의’는 자신이 꿈꾸었던 꼬뮨의 모델인 ‘인민공사’의 확장으로 이어지고, 결국 ‘대약진 운동’이라는 오로지 인민의 자발성과 의지에만 매달리는 성장 모델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놀라운 성취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나라들에 적극적인 곡물 원조에 나선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성취와 과시’를 위한 거짓 데이터 덕분에 중국 농민은 3천만명 이상 굶어 죽게 된다.
- 이런 안과 밖, 아젠다와 실천의 괴리는 대약진 운동의 실패를 통해 2선에 물러난 마오쩌둥이 자신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해 다양한 시장 경제 요소를 끌어들이는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을 바라보며 다시금 폭발한다. 이들을 당내에 들어온 자본주의 세력으로 매도하며, 대약진 운동의 실패가 덜 공산주의화된 상황 때문이라는 믿음 속에서 중국 전토를 옌안 소비에트의 군사 공동체로 재구축하고자, 그리고 그 구축 과정을 거대한 실천을 통한 학습장으로 만들고자 ‘문화대혁명’을 주창한다. 린바오(林彪)와 4인방을 주축으로 한 강력한 극좌 세력은 마오쩌둥 사상을 이제 세계 혁명의 지도 이념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모델 꼬뮨’를 세계에 선전하고, 이 모델 공동체의 이념으로 Little Red Book, 즉 『모주석어록』을 전세계에 배포한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공동체 주의는 내부적으로는 혁명의 적이라는 명목 하에 오십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억명 이상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게다가 현실적이고 실천적이었던 마오쩌둥의 전략들은 이제 교조적 테제가 되어 세계 곳곳에서 비현실적 실천을 끌어내기도 했다.  
제국주의와 민족 해방
- 2차 세계 대전은 누군가에겐 식민지로부터의 해방을, 또 누군가에겐 기존 제국주의 지배자의 복귀를 의미했다. 해방한 나라는 파괴로부터 새로운 국가 재건의 고민을, 식민지 국가는 제국주의로부터 민족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주목한 건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자본주의가 성장하지 못한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농지 개혁을 통해 농촌의 지지자를 확보하고, 지방을 근거지 삼은 게릴라전을 통해 도시를 포위해 권력을 장악하는 마오쩌둥의 전략은 실현가능한 방도로 여겨졌다. 49년 중국 공산당의 승리는, 반제 민족해방을 꿈꾸는 모든 나라들에 희망이었고, 50년대 중국이 보여준 빠른 성장, 특히 대약진 운동의 (통계 상의) 놀라운 성과는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 경제 발전의 모델로 채택되었다.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지지는 자신의 모델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하지만 중국의 이런 자신감만큼 커진 것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 국가의 의심이었다. 이는 ‘도미노 이론’으로 정교화된다. 5~70년대까지 걸쳐 벌어진 격렬한 전쟁은 바로 이런 중국과 제국주의를 배경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투사들, 제국주의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전사들의 역사이기도 하다.  
- 20년대부터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투쟁했던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사회주의 성향의 제3의 길을 선택한 수카르노와 함께 새로운 국가 건설에 나선다. 마오쩌둥은 수카르노를 적극 지지하는 한 편, 중국 이��에 가장 강력한 인도네시아 공산당과 지도자인 디파 아이딧(D.N. Aidit)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아이딧은 마오쩌둥의 대중 노선의 철저한 신봉자였다. 그의 헌신적인 농촌 교육과 농촌 개혁은 많은 인도네시아인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정작 대중 노선을 통해 대중 속으로 들어갔으나, 또 다른 노선인 농촌 기반 무장 투쟁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결국 수카르노의 또 다른 지지세력이었던 수하르토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미국의 지원 하에 65년 쿠데타를 일으키고, 군부는 대대적인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학살을 벌여 50만명 이상이 목숨을 잃게 된다. 이 대학살극은 여전히 온전히 평가되거나 심판 받지 않았으며, 이 학살극을 이끌었던 이들은 여전히 지역의 유지로 힘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이 광경은 죠슈아 오펜하이머(Joshua Oppenheimer) 감독의 연작 다큐멘터리 The Act of Killing, The Look of Silence에서 생생하게 그려진다. 여전히 공포를 지닌 피해자 가족과, 즐겁게 떠들며 자신의 학살을 자랑하는 가해자들의 모습. 이 학살극에 대해 지원한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공산주의 발흥의 방지라는 취지로 크게 기뻐했음은 물론이다.
- 아프리카에선 식민지에서 물러나면서도 여전히 백인 정부를 만들어 사실상 흑인을 노예로 관리했던 로디지아, 남아프리카 등에서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 주언라이(周恩來)를 중심으로 이미 50년대부터 중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졌고, 57년 ‘반둥회의’를 통해 독립한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연대가 표명된 바 있다. 마오쩌둥은 국내의 기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 적극적인 지지를 아끼지 않았고, 많은 군사 고문단을 아프리카에 파견해, 제국주의의 영향력을 벗어나려는 해방 운동 세력들을 지원했다. 많은 아프리카 혁명가들은 중국에 초빙되어 군사 훈련과 사상 교육을 받곤 했다. 60년대 아프리카 전역에서 발생한 반제, 반독재 무장 게릴라 운동은 대부분 중국의 지원과 영향 하에서 펼쳐진다. 특히 권력을 장악하고 대약진 운동의 경제 모델을 도입했던 줄리우스 니예레레(Julius Nyerere)의 탄자니아, 백인 지배의 로디지아에서 투쟁하던 조시아 통고가라(Josiah Tongogara), 남아프리카의 백인 지배를 끝내려 싸웠던 넬슨 만델라 등은 마오쩌둥의 무장투쟁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 그러나 중국이 가장 많은 물적 지원을 했던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는 상황이 조금 다르게 전개된다. 20년대 프랑스 유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호치민이 이끄는 민족해방운동 세력은 프랑스 식민 지배 상황에서도 프랑스와 강력한 해방 투쟁을 벌였고,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립을 선언했으나, 다시 돌아온 프랑스와 무려 10여년 가까운 전쟁을 벌이게 된다. 54년 전투의 승리로 베트남 독립을 꿈꿨던 호치민의 꿈은 제네바 협약을 통해 남북 분단으로 이어졌고, 이 때 제네바 협약의 중재자로 참여했던 중국에 대한 깊은 의심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남북 분단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반면 ���트남을 통해 중국의 지원을 간접적으로 받았던 같은 프랑스 식민지였던 캄보디아는 프랑스가 물러난 53년 이후 시아누크 국왕에 의한 통치가 이뤄졌지만, 폴 포트(Pol Pot)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는 그 과정에서 여전히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특히 70년 북 베트남을 압박하기 위해 미국의 후원 하에 론 놀이 쿠테타를 일으키자, 시아누크 세력까지 끌어들여 더욱 강력하게 된다. 이 관계는 결국 73년 미국의 철수로 인해 베트남이 통일되고, 75년 캄보디아가 폴 포트에 의해 민주 캄푸치아로 바뀌면서 새로운 국면이 된다.
- 호치민이나 폴 포트 모두 농촌 중심의 게릴라전이라는 마오쩌둥의 혁명 전략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이 들 사이에는 두 가지 큰 차이가 존재했다. 하나는 마오쩌둥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다. 호치민은 혁명 전략을 수용했지만,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뭘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는 호지민의 유명한 평가는 마오쩌둥 사상이 교조화되면서부터의 단절을 보여준다. 반면 폴 포트는 문화대혁명에서 보여준 마오쩌둥 사상에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4인방의 숙청 이후 마오쩌둥 사상에서 보여준 ‘공산주의의 실현’을 가능한 것은 자신뿐이라 믿었다. 이백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나온 폴 포트의 사회주의에 대한 책임을 알튀쎄르로 돌렸던 유명한 비난은 이렇게 마오쩌둥 사상을 매개로 전개되기도 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오랜 세월 유지된 민족주의적 갈등이다. 중국은 베트남을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했고,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자신의 영향권 하에 두고자 했다. 역으로 캄보디아는 베트남이 언제라도 침공할 수 있다는 의심을, 베트남은 중국이 침공할 수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 관계는 결국 베트남-소련의 캄보디아 침공, 중국-베트남 국경 분쟁 등 사회주의 국제주의가 완전히 소멸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 76년 마오쩌둥 사망과 4인방의 숙청은 문화대혁명의 끔찍한 결과를 자인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믿지 않는 이도 있었다. 폴 포트, 조시아 통고가라 등과 함께 난징에서 혁명 훈련을 받았던 페루의 아비마엘 구즈만(Abimael Guzman)이었다. 철학 교수로 잉카 원주민 지역에서 학생을 가르치던 그는 페루에 존재하는 ‘내부의 식민지’인 잉카 원주민에 주목하게 된다. 평균 수명이 42세 밖에 안 되는, 끝없이 수탈당하지만 국가의 어떤 혜택에도 배제되는 이들을 살펴본 그는 마오쩌둥이 후난성 농민 운동에 대한 조사에서 혁명의 전략을 끌어냈 듯, 아야쿠초(Ayacucho) 지역에 대한 상세한 조사를 통해 페루 혁명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80년대 이들은 ‘빛나는 길’이라는 마오주의 게릴라 조직을 만들어 정부에 버림받은 지역들, 정치적, 인종적 학대를 받는 이들을 중심으로 페루 농촌 지역을 차례대로 점령하게 된다. 이에 대해 정부는 대대적인 초토화 작전을 통해 빛나는 길을 지지할 것으로 보이는 잉카 원주 부족들의 땅을 불사르고, 수만명을 학살하였다. 92년 구즈만의 체포와 이어지는 후지모리의 대대적인 탄압으로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혁명을 지도했던 도시의 인텔리들이 사라지고 난 뒤, 여전히 박해받는 이들에 의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 ‘내부의 식민지’에 대한 각성은 실제 그 식민지에 속한 이들의 해방 투쟁으로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불가촉 천민들이 그들이었다.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없는 가난을 없애기 위한 농지 개혁과 카스트의 철폐를 요구하며 67년 대대적인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 낙살바리 지역에서의 봉기로 이후 낙살라이트(Naxalite) 운동으로 불리는 이 저항 운동은, 마오쩌둥 사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인도 공산당 분파에 의해 주도된다. 영국 식민지 시기부터 농민 운동에 헌신했던 차루 마줌다르(Charu Mazumdar)는 농촌에서의 무장 근거지 건설과 이에 따른 무장 투쟁을 주장하며 본격적인 투쟁에 나선다. 하지만 72년 경찰에 의해 체포되고 곧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발표가 된다. 그럼에도 낙살라이트 운동은 여전히 인도 전체의 40%에 해당하는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사분오열되었던 인도 공산당은 인도공산당(마오주의)로 통합되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여전히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 마오주의의 마지막 이야기는 네팔이다. 마찬가지로 카스트 제도에 의한 억압과 네팔 원주민에 대한 가혹한 착취는 왕정에 대한 대중적 분노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특히 지식인들의 마오주의 수용을 촉발하였다. 그 중 빈곤층에 대한 야학 교육을 하며 그들의 실상에 분노하던 프라찬다(Prachanda)가 마오주의 전략인 농촌을 기반으로 한 무장 투쟁을 체계화하여 네팔 공산당은 96년 처음 무장 투쟁에 나서게 된다. 2001년 제1왕자에 의한 학살극에 의해 왕과 왕비, 왕족이 사망하며, 기존 왕정의 세력이 약화되었고, 입헌군주제의 약속마저 지켜지지 않게 되면서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받은 군부도 결국은 민중 항쟁에 항복하고 왕정 폐지와 의회 선거에 합의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 네팔 공산당의 행보는 그들이 주장했던 농지개혁과 카스트 철폐, 여성 억압의 해방을 달성해 나가고 있는 지 의심스럽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꿈을 이뤘다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이들이 혁명의 꿈을 배신했다고도 한다. 그리고 한 때 동지였던 어떤 이들은 새롭게 무장 투쟁의 전망을 준비하고 있다.
마오이즘이라는 오리엔탈리즘
- 마오이즘이 자리잡은 가장 기묘한 공간은 미국과 유럽이다. 이들에게 마오이즘은 다양하게 파편화 한다. 반식민지 해방 투쟁은 ‘내부의 식민지’에 대한 각성과 함께 미국에서는 흑인 인권 문제로 이어진다. 자신들의 기본적 권리 요구마저 경찰의 무자비한 폭력과 때로는 목숨을 잃는 일까지 이어지는 것을 경험하며, 이들은 무장 투쟁의 가능성을 고민하게 된다. ‘블랙 팬더 당’은 마오쩌둥의 무장 투쟁 사상을 끌어들여 흑인 빈곤층을 거점으로 한 게릴라전의 가능성을 고민한다. 물론 그 덕분에 FBI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어, 무장 투쟁에 나서기도 전에 경찰에게 지도자들이 살해되거나, 경관 살해 혐의로 투옥되었다.
- 제3세계에 대한 제국주의의 착취, 군산복합체에 의한 전쟁 강요 등은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전쟁을 경험한 미국과 유럽의 젊은이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68년을 정점으로 벌어진 신좌파의 반전운동은 시민 운동과 다양한 교육 운동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다양하다. ‘모든 반역에는 이유가 있다(造反有理)’나 ‘하늘 아래 완전한 혼돈이 있을수록 좋다’는 아나키스트적인 마오쩌둥의 철학은 프랑스 상황주의자들과 맞물려 모든 기존의 정립된 구조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진다. ‘세상의 반을 떠받치는 건 여성’이라는 마오쩌둥의 이야기는 마오주의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열었다. ‘인민에게 봉사하라’는 운동의 자세를 배운 이들은 화려한 경력을 포기하고 노조, 농촌의 기층 운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셜리 맥클레인 같은 배우나, 조안 로빈슨,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의 세계적 지식인의 문화대혁명 코뮨의 방문 경험은, 정작 중국의 상황에 대한 어떤 깊이 있는 연구와 결합���지 않은 채, 인류의 새로운 미래로 추앙받게 된다. 많은 신좌파 활동 그룹이 경쟁적으로 이 모델 꼼뮨을 모방해 자신만의 꼼뮨을 만들었고,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개인 숭배와 폭력으로 점철하는 컬트 공동체로 변화했다.  
- 가장 비극적인 것은 이런 실현 불가능한 공동체에 매달리다가, 결국 체제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무장 투쟁밖에 없다는 결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무장 투쟁의 정당화를 이들이 수용하기 시작한 부분이다. 어떤 도덕적, 제도적 규칙도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중국 군벌과의 투쟁에서 나온 이 실천적 전략은 이제 전혀 다른 형식적 민주주의가 구축된 유럽에서 행사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독일의 ‘적군파’는 납치와 테러를 통해 자신의 아젠다를 세상에 발신하지만, 그 결과는 세상의 호응이 아니라 질서라는 이름의 공권력 강화라는 비극일 뿐이었다.  
남은 단상들
- 중국은 5~60년대 세계 혁명 기지라는 전략 속에서 진행했던 세계 각지 혁명 세력에 대한 지원에 대한 역사를 은폐하고 있다. 마오쩌둥 사상을 마오주의로 전세계로 전파하려던 노력 역시도 감추고 있다. 그러면 마오주의는 사라진 것일까? 줄리아 로벨은 마오쩌둥 사상은 두 가지로 나뉘어 재현되었다고 지적한다. 하나는 덩샤오핑 이후 유지되던 개인 독재에 대한 제한을 깨버린 시진핑에 의해, 마오쩌둥 시대의 개인으로 집중된 권위주의 통제가 부활했다고 본다. 게다가 마오쩌둥이 세계 혁명과 민족주의적 팽창주의를 뒤섞은 국제 관계 전략을 취했다면, 시진핑은 순수하게 민족주의적 팽창주의로 국제 관계를 대하고 있다고 본다. 다른 하나는 신좌파의 등장. 이들은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재현한다고 주장하지만, 대부분 중국을 위협하는 혁명의 적에 대한 배외주의적 태도라고 본다. 이것이 지금의 중국이 어떻게 마오쩌둥 사상의 유전적 후계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 책을 읽는 내내 특이했던 것은 남, 북한 사회주의 운동에서 마오쩌둥 사상의 영향이다. 다른 아시아 지역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영향력을 발견하기 어려운데, 이는 아마도 북한의 존재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선 해방 전에는 철저하게 코민테른과 소련 공산당의 영향권 하에서 조선 공산당 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중국 공산당과는 거리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해방 후에는 북한의 존재가 중국 공산당의 모델을 채용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점 아닌가 싶다. 게다가 중국에 대한 경계심은 베트남과 유사한 것으로 보이는데, 김일성이 마지막까지 한국 전쟁에서 중국 개입을 원하지 않았다는 기록들, 그리고 중공군이 한국전쟁에서 20만명 이상이 전사한 것에 대해서도 ‘반제 반국민당 투쟁’에서 조선의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이 헌신적으로 기여하고 희생한 것을 이야기하며, 그 정도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라며 딱히 고마워하지 않았다는 기록 등을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리고 50년대 이후는 간헐적으로 마오쩌둥 사상이 들어왔겠지만, 그다지 지도적 사상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기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 결국은 자본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농촌에 대한 본원적 수탈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 아니었나 싶어 진다. 그것이 농민 중심의 농지 개혁으로 달성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 남한도 북한도 농지 개혁 후 중공업 발전을 위해 수탈당했다는 것. 중국은 인민공사라는 명목으로 벌인 대대적인 착취 과정 그리고 이것이 문화대혁명 이후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적 형태의 기업에 대한 자원이 되었던 것을 본다면, 또한 동남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경우 그것이 달성되지 못했을 때 도약이 없었다는 것 등을 생각하면, 비극적이지만 통과할 수 없는 과제라 생각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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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nhuishin · 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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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저는 분명히 엄마로부터 유치원을 가기도 전부터 서서히 강도가 높아지는 갖은 언어폭력과 신체폭력에 시달리며 자랐는데 한 마디 사과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잘못해도 맞았고 잘못하지 않아도 맞았습니다. 어떤 이유로 심기에 거슬리거나 단지 기분이 나쁘면 저를 전기선이나 쇠파이프 단소 등으로 온 몸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두개골에도 패인 흔적이 있습니다. 안 들어본 욕이 없습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살려달라고 제발 용서해달라고 빌면 비는 손가락을 맞았습니다. 온 몸에 멍이 들어 한여름에도 긴팔에 긴바지를 입고 나가야했던 적도 여러 번입니다. 공포스럽기 그지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 나중에 커서 이 얘기를 엄마에게 했더니 아빠가 자기를 못살게 굴었다는 동문서답을 하곤 했습니다. 때리고 못살게 군 사람은 본인 자신인데 왜 제게 사과하지 않는 것일까요? 죄의식도 없고 조금도 미안하지 않은 걸까요?
2. 물론 버리지 않고 키우기는 했으니 그간 친절한 적도 있었습니다. 아기 때를 포함해 아주 어릴 때에는 대부분의 포유류가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기에 그에 따른 귀여움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걸핏하면 일관되지 못한 부모의 태도에 안정감이나 정을 쌓을 수 없었고 열 살 무렵부터는 사소한 스킨십에도 낯설음이나 거부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저는 한국 나이로 4살 무렵 태어나서 처음으로 인정사정없이 두들겨 맞았던 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충격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성장기 내내 저를 때릴 때마다 지었던 광기 어린 악마 같은 표정도 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 도��히 용서가 안 됩니다. 몇 번의 실수였을 뿐이라면 마음이 좁은 편도 아니고 거뜬히 용서했을지도 모르지만 수시로 반복되는 폭력은 용서할 이유를 찾기 어렵더군요. 그럴 가능성은 낮겠지만 만약 복수할 기회가 있다면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큽니다.
3.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저는 나이 꽤나 있는 사업 망한 남자와 그보다 15살은 어린 조카뻘의 여자(당시 23세)가 어느 날 강원도의 한 횟집에서 술 마시다 피임도 하지 않은 원나잇을 해서 생겼습니다. 대책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장사해서 열심히 돈 벌어 키우기는 했습니다. 사랑이 별로 없는 가정에서 자란다는 건 사육당하는 것과 같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억력이 나쁜 건지 가정에서 행복해 본 기억이 딱히 없습니다.
-> 아빠한테 왜 그랬냐고 물으니 애는 그냥 자연스럽게 생기는 거라고 하고 저보고 불효자식이라고만 합니다. 자신의 실수와 무능력은 인정을 안 합니다. 왜 그러는 걸까요?
4. 부모는 결국 제가 중학생 무렵 이혼했습니다. 원래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고 사랑이 없었지만 경찰을 불러야했을 정도로 저를 향한 엄마의 심각한 폭력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물론 발단은 어디까지나 발단일 뿐이었습니다. 엄마는 술 담배에 찌들어 살았고 다른 남자들과 잠자리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부모가 한 침대에서 자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가정 내 사랑이 없었고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엄마와 연락하거나 만나지 않습니다. 증오스러우면 증오스러웠지 그립지도 않습니다.
-> 양친에게 인간적 연민을 느끼게 되는 지점들이 있기는 있으나 나는 자녀이지 부모의 부모 역할을 하는 패런탈 자녀가 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만을 사랑해온 부모를 사랑할 이유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아서 저도 저만 사랑해왔음에 떳떳합니다. 어렸을 때야 뭘 몰라 부모를 막연히 사랑함으로 구애했지만 자아가 생기고 공부를 계속하고 식견을 넓히다보니 헛수고에 허튼짓이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5. 어려서부터 학교 선생님들도 인정하실만큼 머리가 좋은 편이었고 공부는 잘 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는데 몸부터 어른이 되고 또 주위를 둘러보니 제가 남들보다 정신적으로 잘 자라지 못했음을 알게됐습니다. 그 부분들을 채워나가려고 노력해오고 있으나 평범한 가정에서부터의 평범한 세상을 경험한 적이 없어서 늘 어딘지 공허한 마음이 가시지 않고, 어떤 마음을 느끼는 데에도 무리가 있습니다. 특히 사랑을 잘 못 합니다.
-> 양친 모두 사랑에 무능한 존재들 같습니다. 받아본 적도 줘본 적도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6. 위와 같은 환경 속에서 사춘기 때에도 비��을 하거나 엇나간 적이 없었습니다. 비행을 시도할 마음이나 동기를 모를 정도로 정서가 발달되지 못해 감정적으로 무능했던 게 아니었나 생각해봅니다. 유전과 환경 모두 작용했을 것입니다.
-> 이만하면 자식 치고는 키울만한 아이 아니었을까요? 이것만 가지고 단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말입니다.
7. 고등학생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했고, 대학 다니는 내내 양친으로부터 용돈이라는 걸 받아본 경험을 손에 꼽습니다. 300에서 500정도 하는 보증금도 대주지 않아 고시원에 살게 되기도 했습니다. 양친 모두 제 계좌번호를 알고 있고 몰라도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저는 일을 쉬어본 적이 없다시피 합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할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종교적 태도나 가치를 강요받기는 매우 싫어합니다.
-> 엄마는 몇 년 동안이고 만 원 한장 보내준 적이 없는데 자식으로 생각하고 자식을 사랑한다면 이럴 수 없는 게 아닐까요?
8. 허구헌 날 종편 방송 켜놓고 온라인 바둑이나 하고 있는 아빠는 자신의 무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남편이 구멍가게를 하면서 매일 술을 마시고 수시로 아내를 패 아내의 고막이 나간, 단칸방에서 두 아들을 기르는 집이 있는데 독하게 공부해서 한 명은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고 한 명은 시청의 9급 공무원이 됐다는 이야기를 저한테 합니다.
-> 아빠 자신은 삼성 반도체 같은 대기업 상무 전무는 커녕 부장 과장도 달아본 적 없으면서 왜 저렇게 안 좋은 쪽으로 평범하지 않은 케이스를 제게 들먹이며 비교하는 걸까요?
9. 부모가 너무 한심하고 괘씸하고 비인간적이고 무능하게 느껴져 때때로 화가 치밉니다. 그래서 제가 당했던 것들 이상인지 이하인지 모를 만큼 원망과 저주와 욕을 퍼붓기도 했습니다. 번번이 속 시원하기만 하더군요. 이제는 만날 일도 거의 없고 어릴 때처럼 부모가 힘 세다고 마음내키는대로 때릴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날 부모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게 되더라도 장례식도 갈 생각이 없고 시신 인계조차 거부하고 싶습니다. 그냥 하던 일이나 계속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제가 비정상일까요?
10. 양친은 제게 연락조차 하ᄌ�� 않고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습니다. 잘못을 캐묻고 욕을 해도 아무런 답장도 없습니다.
-> 왜 그런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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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ngtongking · 8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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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으로 무능했던 박근혜표 경제정책 용서가 안된다 (김어준/정태인) http://ift.tt/2ocY3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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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ukabi · 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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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T @jinmadang: 민평련은 이쯤에서 해체하는 게 김근태 선생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지 싶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무능했던 업무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다. 민주투사로서는 업적을 남겼지만, 주어진 권력을 허투루 써버린 이야기는 고인을 욕되게 할 뿐이다. 이젠 역사로 보내드려야 한다.
민평련은 이쯤에서 해체하는 게 김근태 선생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지 싶다.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무능했던 업무 능력에 대한 이야기가 슬슬 나오고 있다. 민주투사로서는 업적을 남겼지만, 주어진 권력을 허투루 써버린 이야기는 고인을 욕되게 할 뿐이다. 이젠 역사로 보내드려야 한다.
— 전남진 (@jinmadang) July 13, 2018
via Twitter https://twitter.com/zizukabi July 14, 2018 at 12:22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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