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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의 마음속에는 언제까지나 나이들지 않는 결코 바래지 않는 소년 소녀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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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com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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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기우편으로 날아온 주차딱지, 부당한 벌금 이의 신청 가이드 | 주차딱지, 벌금, 이의신청, 행정심판
등기우편으로 날아온 주차딱지, 부당한 벌금 이의 신청 설명서 | 주차딱지, 벌금, 이의신청, 행정심판 주차딱지를 받았는데, 억울한 마음에 이의 신청을 생각하고 계신가요? 부당한 벌금은 절대 인정할 수 없죠!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글에서는 주차딱지 이의 신청부터 행정심판까지, 단계별로 자세히 알려제공합니다. 주차딱지 이의 신청은 어렵지 않습니다! 이 글을 통해 권리를 지키고, 억울한 벌금에서 벗어나세요. 먼저, 이의 신청 대상과 절차를 확인해야 합니다. 만약 이의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행정심판을 통해 다시 한번 권리 구제를 시도할 수 있습니다. 이의 신청과 행정심판,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글에서 알려알려드리겠습니다! ✅ 주차 딱지 떼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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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tech38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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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증명서 재발급 거절? 이의 제기, 성공적인 방법 알아보기 |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부, 이의신청, 절차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절? 이의 제기, 성공적인 방법 알아보기 |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부, 이의신청, 절차 퇴직 후 필요한 서류인 퇴직증명서를 재발급 받으려는데, 회사에서 거부당하셨나요? 퇴직증명서는 취업, 학업, 각종 증명 등에 필수적인 서류로, 재발급 거부는 큰 불편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절망하지 마세요!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부에 대한 이의 신청은 충분히 가능하며, 성공적인 방법 또한 존재합니다. 본 글에서는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부 시 이의 제기, 성공적인 방법 및 절차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고, 재발급을 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자 합니다. 퇴직증명서 재발급 거부로 인해 겪는 어려움과 함께, 이의 신청 절차, 효과적인 방법, 주의 사항까지 상세하게 정리하여, 여러분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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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navrsl · 10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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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9 Loossemble Twitter post Happy Go Won day! 🦋🎂💚
[🎂] 2024.11.19 🩵 ʜᴀᴘᴘʏ ɢᴏ ᴡᴏɴ ᴅᴀʏ 🩵 #고원 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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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ttyofficial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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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10.
아직도 일기가 밀려있다. 사실 예전에는 시시콜콜한 일상까지 다 담다가 쓰기 벅차서 데이트 다이어리로만 쓴지 1년이 넘은 거 같다.
전날에도 과음을 하고(...) 그녀랑 서촌 계단집을 갔다. 이상하게 6월부터는 회, 초밥, 냉면 같은 차가운 음식이 당겼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 거 같았다.
그렇게 병어회, 소라, 해물라면을 먹고 종각까지 거닐다 쉐이크쉑에서 2차를 때렸다. 쉐이크쉑은 왜 햄버거 보다 사이드가 맛있을까...
장통교에서 불을 삼키는 아저씨를 보고 집에 들어갔던 기억이 난다.
아 맞다, 유툽 보는데 다나카가 병어보고 보틀피쉬라고 했는데 이원일 쉐프가 버터피쉬가 맞다고 했을때 엄청 웃었다. 될 사람은 된다. 노력하면 행운은 따라온다. 보트르퓌쉬가 버터루퓌쉬가 될 수 있구나.
2023.7.3.
하반기가 시작되었다. 이제 족쇄는 풀렸다. 다시 시작이고 더 열심히 박차를 가할 것이다. 더 재미있게 더 즐겁게 일은 언제나 그렇게 해야한다.
약을 줄여 주셨다. 몸도 건강을 찾기를 바라겠다. 그리고 신앙생활도 열심히 할 것이고 사랑하는 이와 어서 결혼허락을 받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사랑하는 이의 생일이 다가오는데 뭘 선물해줘야 하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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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ndoh ·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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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것을 오래 생각하지 말자. 깊게 사념하지 말자. 아니라고 부정하고 있는 그것을 제발 아닌 채로 두자.
말소리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목소리의 중첩들이 전부 공해다. 아이스브레이킹, 스몰토크, 어떤 이의 가십. 이런 거 안 하고 사는 세상은 무료할까. 아니면 미치도록 외로울까. 지금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사람들의 말소리를 그리워하고 있겠지.
사실 나도 사람의 말소리를 그리워한다. 가끔 혼자 있을 때 곁에 그가 있는 것처럼 불쑥 말이 튀어나온다. ‘어디야? 어디쯤 왔어?’ 꼭 그를 기다리는 중인 것 마냥 혼잣말을 하는 내가 미쳐버린 건 아닌지 걱정이 됐는데 끝내 이유를 찾았다. 아. 네가 내게 달려와주던 날들이 많았었구나. 넌 늘 내게 달려와주고 있었구나. 내가 지금, 네가 달려와주길 바라는 꿈을 꾸고 있구나.
소임이 맡겨진다면 그냥 하면 되는 거야. 평정을 잃을까 두려워 자꾸 스스로를 의심하는 거야. 내게 주어진 이유가 있겠지. 그냥 어떤 시점에, 마침 내가 그 소임의 주인에 적격이라 찾아와준 걸 거야.
사랑하는 이를 자유롭게 하는 법을 알려���기 위해 내게 왔던 그 이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하지만 감사를 표할 길이 없다. 그는 내 곁을 완전히 떠남으로서 내게 자유라는 것을 알려줬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지대하게 사랑했던 사람이 존경스러운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자 귀한 자취다.
7월은 메모를 하는 날이 많다. 내게 7월은 너를 많이 생각하는 달. 하고싶은 말이 많은 달. 내게서 태어났다 죽어버린 너를 오래오래 기리는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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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denua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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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면식 조차 없지만 어느정도 라포가 형성된 사람의 섹슈얼한 이야기는 전혀 모르는 이의 이야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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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ragerdurd · 11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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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코끝으로 뭉쳐진 그리움 앞에 남은 건 내가 볼 수 있는 만큼의 시간이었다. 나는 언젠가 그 그리움마저 사라지겠지
_ 몇 평짜리 작은 나의 방에 달도 뜨고 해가 진다. 사실 어둠만이 나의 마음을 밝힌다. 밝은 시간은 너무 환하고 ���기고 싶은 나의 이면과 그 치부를 드러내기에 나는 한사코 뒷걸음질은 친다.
_ 가로등 불빛이 나의 눈물로 범벅이 되어 물감처럼 혼탁하게 번져 나간다. 어떤 날의 눈물은 주황이었다가 초록이었다가, 빨갛거나
_ 큰 보폭으로 빠르게 나아간다. 느리게 걷는 이의 발걸음을 맞추고 싶을 때쯤, 나는 또 다른 안정을 찾는 것일 수도 있겠다. 보통은 느리게 걸을 때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낀다. 꼭 무슨 일 생길 것처럼, 일어나지 않는 일을 걱정이라도 할 것처럼. 눈덩이처럼 불어나 나를 따라다니는 건 결국 내 자신의 불안의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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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jine · 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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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가로 돌아오기 전, 서울에서 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그쯤의 나는 이제 막 말투에서 촌년 티를 벗어 낸 후였고 특별히 단짝이라고 할 만한 친구 없이 지내다 생애 처음으로 소중하다고 할만한 무리가 생길랑 말랑하고 있었더랬다. 이모는 항상 특기 적성으로 성적에 필요한 수업만을 허락해 주었는데 그때는 무슨 바람이셨는지 내가 줄곧 배우고 싶다던 종이접기를 선뜻 신청해 주셨다.
꿈에 그리던 종이접기 수업에서 나는 다양한 학년의 사람들을 만났고 그러다 한 언니와 몇 번 같이 앉으며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었다.
나는 그 언니가 좋았다. 어디서든 첫째이자 맞이인 나에게 두 살 터울의 그녀는 귀한 인연이었고 매사 우물쭈물하고 소심한 나에 비해 언제나 털털한 모습이 너무나 멋져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에 한 번, 제일 좋아하는 수업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사람과 함께 배우는 이야기는 그 당시의 나를 여러모로 들뜨게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언니는 나와 함께 앉지 않았다. 내가 인사를 하면, 그냥 한 번 쓱 쳐다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냥 지나가기 일쑤였다.
​나는 당황했지만 그저 사정이 있으려니. 애써 올라오는 불안을 잠재우며 외면했다.
​사실 어떤 일이 나려면 언니와의 사이어야 했다. 그런데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적성 수업을 마치고 귀가를 하려던 참이었다. 가방을 챙기고 문을 나서려는데, 누군가 내 옆을 지나며 욕을 하는 것이었다. 순간 깜짝 놀라 토끼 눈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는데 처음 본 여자애가 본인의 친구와 함께 나를 보며 키득거리는 것이었다.
​태어나 처음 겪는 일에 나는 너무 놀랐고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얼마 뒤 알게 된 것은, 나에게 욕을 한 아이가 나와 같은 특기 적성을 듣는 동갑내기고 언니가 나를 무시할 무렵부터 함께 다니는 사이라는 거였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나에게 욕을 한 이유에는 언니의 터무니없는 이간질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도.
​사실 이 일이 있기 전 나는 그 아이가 같은 수업을 듣는지도 심지어 같은 나이인지조차 몰랐다.
​그러니 이간질이라는 말 자체도 본래라면 성립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난 그 아이에 대해 어떠한 말도 한 적이 없으니까.
​이 소식을 접한 뒤 처음 들었던 생각은 그저 억울함이었다.
​그제껏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싫어해 본 적이 없는데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다른 이의 미움을 사야 한다니.
​그러나 누가 봐도 내 잘못이 아닌 이 일을 나는 바로 잡지 않았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나는 반 친구들과 인사할 틈도 없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요즘도 가끔 관계에 대한 고민이 생길 때면 자연스레 이 일에 대해 떠올리곤 하는데 이 소설을 읽으며 문득 그때 내 행동에 대해 좀 더 깊이 있게 생각봐야겠다는 의문이 들었다.
​만약 그때 내가 진실을 말했다면 이후에 그 아이��� 나에 대한 오해를 풀었을까? 그리고 언니와의 관계는 다시금 회복되었을까?글쎄. 그건 알 수 없는 일이고, 어쩌면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건, 나는 내가 벌이지도 않은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내게 묻은 오해를 닦아내지 못했다. 아니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용기가 나지 않는다는 비겁함 뒤에 숨어서. 내가 아닌 나의 행동을 그저 방치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어른으로 자랐다.
​나는 여전히 비겁하다. 소심하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그대로의 마음을 비치지 않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나에 대한 오해를 풀지 않는다. 어떠한 계기가 필요했던 걸까 생각해 봤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지나온 기회는 많았다. 그저 그때마다 용기 없는 나에게 스스로를 가둬두고 변하지 않았을 뿐.
그렇게 어느 면에선 무책임하리만치 스스로를 내버려둔 나를 책 속의 그녀는 일깨워 주었다. 너무나 유약하고 선하지만 이상하게도 단단하게. 그녀는 말미에 자신이 한 선택이 또 한 번 틀릴지라도 그 순간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말한다.어쩌면 나는, 나와 비슷한 누군가가 내는 아주 작은 용기를 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내세울 수 ���는 신념 정도는 가질 수 있다고, 그 연약한 단단함이 설사 지금보다 관계가 악화될지 언정 바로잡을 시도 정도는 해야 한다는.
​나는 그녀에게서 그런 완고함을 배웠다.
​잘 만든 이야기는 마음에 결이 인다.
책을 읽으며 그녀와 같은 친구가 있었다면 하다가 내가 그녀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범은 생각보다 어렵고 다정은 그 무엇보다 강한 무기가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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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ofkissy · 28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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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01 ITZY's Instagram Reel
itzy.all.in.us: 류진 이의 #상상친구 #나띠 님과 #Igloo 도 녹일 만큼 핫한 챌린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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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ortscom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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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 딱지 벌금, 이젠 걱정 마세요! | 주차 딱지 벌금 납부, 이의 신청, 할인 팁 완벽 가이드
주차 딱지 벌금, 이젠 걱정 마세요! | 주차 딱지 벌금 납부, 이의 신청, 할인 팁 완벽 설명서 도로 위의 악몽, 바로 주차 딱지죠.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돈까지 낭비하게 만드는 주차 딱지!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주차 딱지를 받았을 때 당황하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할 수 있도록, 주차 딱지 벌금 납부부터 이의 신청, 할인 팁까지 알차게 담은 완벽 설명서를 준비했습니다. 주차 딱지 벌금 납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납부 기한은 얼마나 될까요? 혹시 억울하게 딱지를 받았다면 이의 신청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알쏭달쏭한 주차 딱지 관련 정보, 이제 하나하나 풀어알려드리겠습니다. 더 나아가, 주차 딱지 벌금 할인 꿀팁까지 공개합니다. 꼼꼼하게 읽어보시고 주차 딱지 걱정, 이제는 안녕! 지금 바로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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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stax-info · 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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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214 @kr_now Twitter Update
#몬스타엑스 #민혁 이의 #보그싶쇼🎨 많은 것을 품고 있는 스스로를 꼭 닮은 민혁이의 그림 :)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고 그리고 싶고 사랑하고 싶을 거예요🫶🏻 보그싶쇼 아껴 주시고 성원해 주시고 사랑해 주신 모든 분들 감사합니다. 참 좋았습니다!
#monstax #minhyuk's #VogueShipShow. Minhyuk's drawing which is very similar to him with a lot of things in mind :) We'll continue to want to see, draw, and love you. Thank you to everyone who cherished, supported and loved Vogue ship show. It was great!
translation by monstax-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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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1522 · 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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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년 8월 11일 말라카해협 북단의 ‘사실상 무인도’인 페낭에 영국 국기가 게양됐다. 영국 동인도회사EIC를 대신해 말레이 술탄국 커다의 영지인 페낭에 영국 국기를 게양하면서 프랜시스 라이트Francis Light(1740~1794)는 “풀루 피낭이라는 섬을 차지해 ’프린스 오브 웨일즈 섬‘으로 명명한다“고 선언했다.
실질적인 영국의 페낭 점거는 이보다 약 한 달 이르다. 7월 16일 라이트는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 3척을 이끌고 페낭에 상륙했다. 세포이로 구성된 인도인 군대를 상륙시키고, 무기와 보급품을 하역했다. 말레이인을 동원해 정글을 밀어내고, 땅을 고르고, 요새와 병영과 임시 숙소를 세우고, 깃대도 설치했다. 그 깃대 위에 말라카해협에서 처음으로 영국 국기가 내걸린 것이다. 영국 동인도회사를 대리해 라이트가 1771년부터 페낭을 할양하기 위해 커다kedah의 술탄고 협상을 벌인지 15년 만의 일이다. 이렇게 태국 남부와 말레이반도 서안에서 활동하던 동인도회사 소속 현지 무역상country trader 프랜시스 라이트는 ’페낭의 건설자‘이자 ’영국의 말라야 진출 선구자‘가 됐고, 영국은 말라카 해협에 처음으로 거점을 마련했다.
페낭 점령을 두고 당시 인도 캘커타(콜카타)에서 발행되던 영어신문은 ”암본 학살의 복수“라고 흥분하기도 했다(Hussin, 2007: 115). 암본 학살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정향丁香 무역을 독점하기 위해 1623년 말루쿠제도의 암본에 주재하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상인 10��을 포함해 20명을 고문하고 처형한 사건을 가리킨다. 근대 주식회사의 원조로 꼽히는 영국과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는 당시 말루쿠제도에서만 나는 정향을 유럽에 팔아 주주들에게 이윤을 배당하는 구조였다. 당연히 향료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쟁이 치열했다. 암본 사건 이후 네덜란드가 말라카해협에서 향료 군도에 이르는 해상교역을 지배했고, 영국은 인도 경영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영국에는 오히려 득이 됐다는 해석도 있지만(주경철, 2008: 97~99), 나중의 평가일 뿐이다. 암본 사건에서 150년이 흐른 18세기 후반에도 영국 동인도회사로서는 인도-중국 해상교역을 방해하는 네덜란드의 말라카해협 제해권을 깨는 일이 전��적으로나 상업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를 ‘복수’라는 말로 알 수 있다.
(27~29쪽)
페낭의 이상한 점거에 관한 또 다른 ‘교묘한 해석’이 있다. 말레이국 연방FMS 초대 총주재관과 해협식민지 총독을 지낸 프랭크 스웨트넘Frank A. Swettenham(1860~1946)의 주장이 그렇다. 1786년 페낭 점령은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1819년 싱가포르 점령 이전에 있었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이지만, 동시에 영국의 말레이반도 지배에 걸림돌이 되고 말레인에게 불신과 숱한 고통을 안겨준 ’뜻하지 않은 사건의 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불행의 원인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cowardice”에서 비롯했다고 단언했다(Swettenham, 1907: 37). 그는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페낭 할양 협상 과정에서 주고받은 인도총독과 커다의 술탄, 프랜시스 라이트의 서한을 제시한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가 벵골만 동쪽에 새로운 기지를 물색하기로 결정한 것은 1763년의 일이다. 당시 니코바르제도, 안다만제도, 수마트라 북단의 아체, 태국 남서부 푸켓 등이 후보지로 검토되었다(Bassett, 1971). 18세기 후반부터 중국의 차 수요가 급증하면서 인도-중국 교역의 중요성이 컸지만, 인도 경영에 주력해온 영국은 말라카해협에서 남중국해에 이르는 교역로에 거점을 확보하지 못했다. 1763년 이전 인도 동쪽의 현지 무역은 중국인과 이슬람 상인 및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현지 무역상들이 주도했고, 영국인 현지 무역상은 거의 전무했다(Fielding, 1955: 41).
영국이 말라카해협의 페낭을 확보하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1771년부터였다. 당시 식민지 확장론자인 워런 헤이스팅스 캘커타 지사가 이를 주도했고,[*영국 동인도회사는 1773년 이전까지는 인도 서부의 봄베이(뭄바이), 동중부의 마드라스(첸나이), 북동부 벵골의 캘커타(콜카타)의 세 곳에 지사Governor가 통괄하는 지사부Presidency를 두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부패와 경영난이 심해지자 프레드릭 노스Frederick North 총리의 영국 정부는 1773년 규제법Regulation Act(1773)을 제정해 영국 동인도회사를 감독하시 시작했다. 기존 세 곳 지사부를 총괄하는 총독General-Governor을 신설하고, 벵골의 캘커타에 인도총독부를 뒀다. 총독과 지사는 영국 정부가 직접 임명했다. 워런 헤이스팅스Warren Hastings(1732~1818)는 1771년 당시 캘커타 지사Governor였으며, 1774년 초대 인도총독General-Governor에 임명돼 1785년까지 재임했다. 이 글에서는 캘커타, 봄베이, 마드라스를 오늘날 바뀌기 이전의 지명으로 표기한다.] 프랜시스 라이트는 인도 동쪽의 여국 기지 후보지로 푸켓과 페낭을 추천했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태국어도 소통할 수 있었던 라이트는 당시 푸켓을 거점으로 커다와도 교역을 하며 현지 물정에 밝았다(Stewart, 1901: 9~10). 라이트는 페낭의 지리적 이점과 왕국의 안위를 위해 영국의 도움이 필요한 커다의 술탄의 생각도 미리 읽었던 것이다.[*태국의 아유타야왕조가 버마의 공격으로 망하고, 중국인의 피가 흐르는 아유타야의 장군 탁신이 1766년 혼란을 수습해 방콕에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탁신은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속국에 조공을 강요하며 대외적으로 팽창적인 자세를 취했다. 커다의 술탄 무하마드 지와Muhammad Jiwa Muazzam Shah II(재위 1710~1778)는 영국의 힘을 빌려 태국의 공세를 막으려 했다.] 커다 해안은 인도에서 출발하는 범선의 첫 기착지였고, 수마트라 북동안과 버마 남부, 태국 남서부 해안을 잇는 교역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들 말라카해협 북부 지역의 사람들은 바다와 무역풍의 영향으로 생활방식이나 경제적으로 긴밀했다. 18세기 후반 인도의 식민지배를 굳힌 영국은 인도의 아편과 중국의 차를 교역하는 영국 무역선이 배를 보수하고 보급품도 조달받을 항구가 절실해졌다. 인도-중국 항로의 범선들은 인도 동부 코로만델 해안에서 남서풍을 타고 북상해 커다 해안 일대에서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뀌면 중국으로 향했다.
1775년 미국 독립전쟁이 벌어지면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던 페낭 확보 구상은 1784년부터 본격화돼다. 우선 영국이 다급했다. 말라카해협에서 배제됐던 영국 동인도회사는 1760년대 초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 무역에 반발해 독자 노선을 걷던 부기스왕국과 손잡고 리아우(오늘날 빈탄)에 후추 무역의 근거를 마련했는데, 네덜란드가 부기스와 2년간 전쟁 끝에 1884년 리아우를 점렴하고 말았다. 영국으로서는 말라카해협에 거점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했던 것이다. 커다도 다급했다. 전통적으로 태국이 커다를 비롯한 말레이반도 북부의 술탄국에 종주권을 행사해왔는데, 1782년 ���콕에 새롭게 들어선 차크리왕조는 압박의 강도를 높였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커다의 술탄의 다급함이 이상한 페낭 점거의 배경이었다.
커다의 술탄 압둘라[*Abdullah Mubarak shah I(재위 1778~1797), 술탄 압둘라는 1771년 라이트와 페낭 할양 협상을 했던 술탄 무하마드 지와의 아들이다.]는 1785년 8월 30일(이슬람 헤지라력 1199년 10월 24일) 페낭 할양의 조건을 명시한 편지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인도총독에게 보냈다. 말레이인의 편지 쓰기는 아주 엄격하고 정확하고 격조가 있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말레이인들의 각별한 편지 예절과 관련해 “편지를 쓰는 이의 모습은 시인이나 문인을 방불케 한다.······ 세세한 것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받는 이는 모욕감을 느낀다. 이처럼 말레이인의 엄격한 편지 예절을 유럽인이 무심결에 어긴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비숍(2017: 40).] 술탄 압둘라의 편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선 술탄 압둘라는 프랜시스 라이트가 인도총독의 지시를 받아 페낭 할양을 요청한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알렸다고 밝혔다. 그리고 인도총독이 영국 정착촌을 만들고 말라카해협을 항해하는 선박과 섬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조선소를 건설하겠다는 페낭 할양의 목적을 제시했으며, 아울러 커다를 공격하는 세력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하고 전쟁 비용도 감수할 것이라는 입장을 라이트를 통해 전달했다고 술탄 압둘라는 명시했다.
이러한 인도총독의 페낭 할양 요구에 대해, 술탄 압둘라는 할양 협상의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조건은 동맹 요구이다. 비록 태국에 조공을 바쳤지만 독립적인 술탄국의 지위를 누려온 커다는 언제 차크리왕조의 태국이 쳐내려올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컸던 것이다. 영국이 커다의 영지인 페낭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면, 영국은 태국의 위협을 막아야 하는 커다의 필요를 충족하라는 게 술탄 압둘라의 요구였다. 술탄 압둘라는 커다의 외부든 내부든 자신을 공격하는 적은 동시에 영국 동인도회사의 적으로 간주되어야 하며, 전쟁을 벌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영국 동인도회사에 병력과 무기를 요청할 것이고, 그 비용은 전쟁이 끝난 뒤 갚을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둘째 조건은 영국 동인도회사가 페낭 할양에 따른 ‘보상금’으로 연간 3만 달러를 지불하라는 것이다.[*20세기 초까지 동아시아 교역에서 가장 널리 쓰인 화폐는 스페인달러로 불리는 ‘스페인 8레알 은화’였다. 1786년부터 1904년까지 페낭을 비롯한 해협식민지와 말라야의 공식화폐도 스페인달러다. 당시 공식 환율은 1스페인달러=5실링이다. 여국 파운드 스털링화는 1파운드=29실링, 1실링=12펜스였다. 따라서 4스페인달러가 1파운드 스털링으로 환산된다. 1903년~1939년까지 해협식민지가 자체로 발행한 해협달러Straits Dollar가 통용됐다. 해협달러는 역국 파운드 스털링화로 환산해 1해협달러=2실링 4펜스로 고정됐다. 해협달러는 스페인달러보다 액면 가치가 낮았다. 이하 이 책에서 표기하는 ‘달러’는 별도의 표기한 없는 한 1904년까지는 스페인달러, 이후는 해협달러를 가리키는 것으로 한다.] 말라카해협 북부의 아편, 주석, 등나무가구 교역을 독점하는 무역중심지 커다는 페낭을 영국 동인도회사가 차지할 경우 독점 이익을 잃게 된다며 보상을 요구했다. 커다 해안이 오래전부터 인도인 상선과 현지 무역선의 교류 거점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한 캡틴이 인도총독부에 보낸 비망록에는 1786년 라이트의 점거 당시 페낭에 거주하던 말레이인이 “30년 전만 해도 이 섬에 아주 많은 사람이 살았다”고 말한 내용도 있다(Braddell, 1982: 4). 이는 페낭이 한때 교역으로 번성했을 개연성을 시사한다. 술탄 압둘라의 보상 요구를 뒷받침하는 최근 연구도 있다. 커다가 본디 말레이반도 동부의 태국만 연안 지역과 말라카해협을 육로로 이어주던 교역 중심이었고, 태국만과 말라카해협의 산물이 교류되던 항구 페낭이 영국의 식민지가 되면서 커다의 영향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이다(King, 2006: 6`~71).
스워트넘도 인정하듯이 술탄 압둘라의 협상 조건에는 어떤 모호함도 없다. 헤이스팅스의 후임 존 맥퍼슨 인도총독 대행이 술탄 압둘라에게 회신한 요지는 이렇다. 협상 조건을 명시한 술탄의 편지를 1786년 2월 16일 프랜시스 라이트로부터 받았으며, 술탄의 서한과 협상 내용을 런던에 보고해 영국 왕과 동인도회사 이사회의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맥퍼슨은 함선을 파견해 페낭을 방위하고 커다 해안을 보호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도 했다. 이를 통해 라이트가 맥퍼슨에게 페낭 점령 권한을 위임받았고, 동인도회사가 술탄 압둘라의 동맹 요구를 분명하게 인지했다고 스웨트넘은 해석했다.
그런데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한 지 다섯 달 만인 1787년 1월 인도총독부는 커다와 동맹을 맺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존 맥퍼슨 총독 대행은 1786년 12월 찰스 콘월리스 총독으로 교체되었다. 페낭의 콘월리스 요새는 콘월리스 총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리고 “방위 목적이든 공격 목적이든 커다의 술탄과 어떤 동맹도 체결해선 안 된다”고 영국의 런던 정부가 인도총독부에 공식적으로 지시한 것은 페낭 점거 7년 뒤인 1793년의 일이다. 일련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수장인 인도총독이 페낭 할양의 협상안에 관해 충분히 이해했으며 영국 정부의 재가를 기다린다고 커다의 술탄에게 답장을 쓴 몇 달 뒤 라이트가 페낭을 점거했는데, 영국 동인도회사와 런던 정부는 술탄 압둘라가 제시한 페낭 할양의 제1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이는 협상의 결렬을 의미했다. 하지만 영국은 페낭에서 철수하지 않았다.
라이트는 1787년 5월 인도총독에게 보낸 편지에서 커다의 술탄이 덴마크, 네덜란드, 프랑스 등과 동맹 여부를 타진하고 있다면서 “나의 보잘것없는 견해로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당장 커다의 술탄이 영국의 보호 아래 있다고 선언하는 편이 훨씬 수월하고 비용도 덜 드는 방안”이라고까지 하소연을 했다.
사실 애초부터 영국 동인도회사가 커다와 동맹을 맺기는 가능하지 않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영국 동인도회사는 민간 법인의 무역회사이면서 외국과 조약 체결권까지 갖고 영국 정부를 대신해 인도를 식민지배한 ’이상한 회사‘이자 ’국가 속의 국가‘였다. 18세기 후반 영국의 인도 지배가 안정되면서 동인도회사 체제의 문제가 드러났고, 영국 정부는 1773년 ’인도 규제법‘을 제정했다. 동인도회사가 영국을 대신할 수 있는 권한은 남겨놓으면서 런던 정부의 감독을 받도록 한 것이다. 페낭 점거 2년 전인 1784년에 당시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는 규제를 한층 강화한 ’피트 법‘을 제정해 동인도회사가 주변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역내 분쟁에 개입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법에 따르면 커다의 술탄의 동맹 요구는 동인도회사가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고, 따라서 맥퍼슨 총독 대행은 페낭 점거 전 술탄 압둘라에 보낸 회신에서 이러한 사실을 밝혔어야 마땅했다.
페낭 점거 후 ��상금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영국 동인도회사는 졸렬했다. 점거 3년이 다 되어가는 1789년 7월 프랜시스 라이트는 보상금을 연 4,000달러로 할 것을 제안했지만, 커다의 술탄이 동맹과 보상금 조건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한다며 거부했다고 동인도회사에게 보고했다. 카다의 술탄은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페낭을 떠나라고 통보했다. 동맹 약속도 파기하고 심지어 보상금조차 지급하지 않는 영국의 이상한 페낭 점거를 5년간 참아온 커다의 술탄은 1791년 페낭을 공격했다. 커다의 무력시위는 실패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영국 동인도회사는 커다와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 할양을 공식화했다. ’동맹‘은 빠졌고, 보상금도 애초 3만 달러의 5분의 1인 연 6,000달러로 줄었다.
술탄 압둘라의 뒤를 이은 커다의 술탄이 1800년 영국 동인도회사와 2차 조약을 체결하고 페낭섬과 마주보는 커다의 프라이Prai(오늘날 Sebarang Perai)를 추가로 영국에 할양하면서 보상금은 연 1만 달러로 상향 조정됐다. 프라이는 당시 인도총독이자 강경한 제국주의자였던 리처드 웰즐리 후작의 이름을 따 ’프로빈스 웰즐리‘로 불렸다. 그리고 1821년에 커다의 술탄이 50년 전 우려했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태국이 커다를 침략해 약탈과 살육을 저질렀고, 커다의 술탄은 페낭에서 20년 넘게 망명해야 했다.
스웨트넘은 위와 같이 ’페낭 점거‘에 관해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비난했다. 하지만 영국 동인도회사가 해체된 이후에 활동한 스웨트넘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동인도회사를 졸렬하다고 평가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에 관한 교활한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9세기와 20세기에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영국령 말라야로 만드는 과정에서 페낭 점거 수법은 수시로 변주되었기 때문이다. 스탬포드 래플스Stamford Raffles(1781~1826)의 1819년 싱가포르 점령도, 영국이 말레이반도 지배의 발판이 된 1874년 팡코르조약 체결 과정도 기본적으로 페낭 점거의 졸렬함과 다르지 않았다.
스웨트넘은 페낭 점거의 기법을 말레이반도 식민지배 확대에 응용한 인물이다. 말레이어에 능통하고 화인사회의 물정에도 밝은 그는 팡코르조약을 성사시킨 주역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단지 스웨트넘의 활동 시기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1858년에 해체된 뒤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그는 영국이 페낭을 식민지로 만든 것 자체가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의 일 처리가 졸렬하다고 했다.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 회사의 졸렬함을 탓함으로써 스웨트넘�� 그로부터 100년 뒤 영국 정부의 말라야 지배는 정당하는 논지를 편 것으로 보인다. 스웨트넘의 페낭 점거에 관한 해석이 교활한 건 그래서이다. 영국이 말레이반도를 지배한 출발점은 1786년 페낭 점거였다.
(32~38쪽)
18세기 영국 법체계에 따르면, 사람이 살지 않거나 원주민이 거주하는 곳에 영국인이 정착지를 건설할 경우, 영국 정착민이 영국의 법과 주권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는 보통법이 적용되었다(Tan, 2017:52). 이는 영국의 식민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封土라는 논리로 이어진다. 라이트는 애초부터 말레이의 법체계를 배제하고 곧바로 페낭에 영국의 보통법을 적용하기 위해 사실상 무인도라고 했던 셈이다. 스탬포드 래플스가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도 “사실상 무인도”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물론 라이트가 사실상 무인도라고 한 것은 영국 제국주의의 기치였던 ‘법과 질서’를 페낭에 구축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페낭은 애초 영국의 ‘식민지’로 건설되지 않았던 것이다.
영국의 페낭 확보 전략은 ‘요새 항구fort port’로 요약된다. 인도-중국 무역로를 확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 군사적 요새fort이면서 동시에 말라카해협의 중계무역항이자 교역거점으로서 상업적 항구port를 건설하겠다는 의도였다. 이는 당시 패권을 추구하는 영국 정부 및 인도총독의 정치권력과 최대 이윤을 추구하는 동인도회사 상업자본의 이해가 어정쩡하게 절충된 결과였다(Purcel, 1965: 13~14). 정치권력과 상업자본의 이해가 전략적으로 일치한 지점은 ’네덜란드 타도‘였다. 정치권은 말라카해협에서 네덜란드의 재해권을 깨는 것이 급했고, 상업자본은 네덜란드의 독점무역 체제를 무너뜨려야 했다. 그 최초의 시도가 페낭 점거였다. 무역선에 식수와 식량을 보급하고, 해군 함정을 건조하거나 수리하는 등의 할양 사유는 페낭 점거의 부차적인 구실이었다.
(39~40쪽)
페낭의 역사에서 5년간의 이상한 점거와 8년간의 비공식 책임관의 문제는 이민과 경제적 성장의 서사에 묻히기 일쑤다. 예컨대 레녹스 밀스(Mills, 1960: 42)는 1786~1800년 페낭의 식민지 건설 과정을 성공적으로 평가하면서 그 핵심적인 세 가지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한 프랜시스 라이트의 탁월한 추진력, 라이트를 향한 상인들의 절대적인 신뢰, 자유무역 시스템”을 꼽았다. 이러한 관점은 영국이 식민지를 건설했기에 페낭이 무역항으로 성공했다는 식민지 패러다임으로 비판받지만, 오늘날 말레이시아 역사의 주류 서사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
일반적으로 19세기 영국이 제국을 운영하면서 가장 중시한 정책으로 자유무역이 꼽힌다. 이전 서양 열강의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와 구분되는 자유무역 체제는 근대의 부르주아가 구체제를 해체하기 위해 동원했던 자유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공격적이고 혁명적이었다. 자유무역 체제는 자유항과 자유이민이 뼈대를 이룬다. 우선 자유항은 기본적으로 두 가지 점에서 기존 영국이나 네덜란드의 두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 체제와 다르다. 항구의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어떤 선박도 자유롭게 항구를 드나들 수 있고, 어떤 무역���자의 교역도 규제를 받지 않는다. 두 번째 특징은 관세와 세금을 물리지 않는 것이다. 이전 독점무역 체제는 독점 이윤을 보장하는 대가로 높은 관세와 비싼 항구세를 물렸다. 자유항은 세금을 없애 기존의 독점을 깨뜨리는 전략이었다.
자유항과 더불어 19세기 후반까지 영국의 동이사아 식민지 확대 전략에서 두드러지는 자유무역 체제의 또 다른 특징은 자유이민 정책이다. 페낭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홍콩으로 이어지는 영국의 식민지 확대는 지리적 이점을 지닌 섬을 확보하고 아시아 사람들을 식민하는 방식을 취했다. 영국은 기존 현지 정치권력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전략적 · 상업적 이해를 동시에 추구했던 것이다. 무관세로 선박과 상인의 자유로운 항구 출입을 보장하고, 인구가 희박한 섬에 아시아계를 식민하는 영국의 자유무역 체제는 19세기 싱가포르와 홍콩에서 진가를 발휘했다. 하지만 영국이 동아시아에서 자유무역 체제를 처음으로 실험한 곳은 페낭이었다.
페낭 점거 당시 인도총독 대행 존 맥퍼슨은 프랜시스 라이트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여건이 좋다면 상인들은 상품을 싣고 페낭에 기항하는 것이 이롭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고, 상인들을 끌어들이면 귀하(라이트)가 페낭 항구를 드나드는 선박이나 수입물품에 어떤 종류의 관세나 세금을 부과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모든 인종이 찾는 자유항을 만드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Swettenham, 1906: 54). 페낭을 자유항으로 만들라는 명확한 지침을 내린 것이다.
자유항은 현지 무역상이었던 라이트 역사 바라던 바였다. 그런데 점거 이듬해 후임 인도총독은 페낭의 식민지 재정 문제를 지적하며 무관세 정책을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인도총독과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진 모두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마뜩치 않게 여겼다는 뜻이다. 자유항 실험과 페낭의 성공을 입증해야 할 책임은 비공식 책임관 라이트의 몫이었다.
그렇다면 페낭 실험을 책임진 라이트는 자유무역에 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었고, 어떻게 실현하려 했던 것일까? 라이트는 점거 이듬해 인도총독의 관세 부과 지시에 6개월간 뜸을 들인 뒤 영국과 인도 산 물품 수입과 영국과 인도 선적 선박엔 무관세를 적용하고 다른 경우에 4~6퍼센트의 관세를 물리는 방안을 보고했다. 이 보고서에서 라이트는 인도 총독에서 “페낭을 항구가 아니라 식민지colony로 간주해야 하며, 따라서 (식민지라면) 세원을 교역(관세)이 아니라 토지(재산세)에서 구해야 마땅하다”고 페낭의 자유무역의 필요성을 주장했다(Swettenham, 1906: 55).
라이트의 동료이자 초기 페낭의 자유항 실험을 주도한 제임스 스콧James Scott은 1794년 인도총독에게 보낸 상황보고서에서 더 분명한 어조로 자유무역에 관해 다음과 같이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Fieldign, 1955: 45~47). “교역이란 소비재를 수입하는 것도, 생산물을 수출하는 것도 아니다. 서로 다른 상품의 교환을 통해 이익을 얻는 것이 교역이다. 자유무역으로 자본과 인구를 늘려 식민지 재정을 확보하는 편이 상품에 관세를 물리는 것보다 더 확실하고 현명한 방책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상품은 관세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항구로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스콧은 아울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독점무역에 체제가 본디 ‘적은 비용으로 높은 이윤을 얻는 것’인데, 시장의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는 바람에 독점의 감시를 피해 거래하는 ‘밀매’가 성행하면서 독점 유지에 필요한 비용은 늘고 이윤이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비판했다.
이는 중상주의 독점무역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페낭을 ‘요새 항구’라는 전략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이사나 인도총독부와 달랐다. 라이트와 스콧의 생각은 철저하게 현지 무역업자의 이해를 대변했다. 이러한 자유주의로 초기 페낭의 틀이 잡혔다. 무역업자가 페낭 식민 당국의 관리가 되기도 하고, 동인도회사에서 식민지 관리로 파견된 직원들이 무역에 뛰어들거나 무역업자를 겸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제임스 스콧은 라이트와 푸켓에서 현지 무역ㅇ르 함께 했던 동료로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그는 페낭 최대의 상업회사인 스콧주식회사Scott & Co.을 운영했고, 최대의 땅부자이자 최대 농원주였으며, 조지타운에서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 ‘제임스타운’이란 도시를 건설하기도 했다. 라이트는 비공식이나마 식민지 페낭의 책임관이었지만, 월급으로 지출을 감당할 수 없다며 스콧의 회사에 출자해 배당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철저하게 상인이었으며, 따라서 영국의 식민지 경영을 담당할 공직자로서의 공적 의식은 부족했다.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의 페낭 자유항 건설은 두 가지로 추진됐다. 하나는 일체의 관세와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주자에게 무상을 토지를 불하하는 것이다. 무관세로 교역을 늘리고, 토지 불하로 사람을 식민한다는 구상이다. 이것이 초기 인도총독부의 방치 속에서도 페낭이 교역량과 인구를 빠르게 늘릴 수 있었던 동인動因이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토지 무상불하의 근거는 앞서 언급했듯이 페낭의 토지가 영국 국왕의 ‘봉토’라는 법 해석이다. 라이트는 근대식 토지세가 아니라 봉건적 면역지대免役地代 명목으로 페낭의 땅을 개인들에게 나눠줬다. 토지 불하에 어떤 기준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트의 인도총독부 보고에서 언급되었듯이 페낭의 이주자들 사이에 땅을 서로 차지하려 분쟁이 일었고, 페낭 식민 당국에는 개인의 탐욕을 제어할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라이트와 스콧을 비롯한 소수의 영국인 무역상과 동인도회사 직원들이 목 좋은 땅을 거의 독차지했다. 면역지대든 토지세든 부과되지도, 징수되지도 않았다. 토지세와 점포세 등에 과세 근거가 마련된 것은 라이트가 사망하고 난 뒤인 1795년의 일이다. 그나마도 상인들의 반발로 징세되지도 못했다. 페낭에 ‘행정’이 도입된 19세기 후반에나 토지세와 인허가세 등의 과세와 징세가 이뤄졌다. 라이트의 페낭 건설 청사진은 오로지 현지 무역상의 이해를 자유주의의 이름으로 관철하는 것이었다. ‘상인의, 상인에 의한, 상인을 위한’ 자유무역이었고, 페낭은 말이 식민지이지 말라카해협의 요지에 개설된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商館factory’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41~46쪽)
식민지 재정을 자체 충당하지 못한다면 페낭의 자유항 실험도 지속되기 힘들었다. 인구가 늘면서 치안 문제도 심각해졌다. 질병과 위생 등 도시 환경은 날로 악화됐다. 라이트의 후임은 비위생적인 조지타운에서 1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임했을 정도다. 이러한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라이트와 상인 동료들은 전근대적인 ‘징세청부제revenue farming system’를 채택했다.
징세청부제는 국가가 징세권을 민간에 하청하는 제도를 가리킨다. 국가각 ‘국가 조세를 징수하는 면허’를 특정 개인이나 집단에게 일정 기간 위탁하는 방식이다. 정부는 특정 품목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전매권을 경매를 통해 판매한다. 전매권을 획득한 개인이나 집단은 입찰 때 제시한 금액을 전매료로 국가에 지급하는데, 국가는 이를 행정 운용의 재원으로 삼는 것이다. 행정체계가 너무 허술하거나, 징세의 효율성이 떨어질 경우에 국가의 세원을 마련하는 방식이 징세청부제이다. 유럽에선 귀족에게 징세권을 줬을 때 중앙 정부에 돌아오는 세수가 너무 적을 경우 이를 시행하기도 했다(Butcher & Dick, 1993: 3).
징세청부제는 19세기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활용됐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못했던 동남아에서 정치권력은 주로 중국인 상인 집단에 징세 업무를 위탁했다. 징세청부제는 개인과 집단에게 특정 상품이나 서비스에 관한 독점권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자유무역의 자유주의와는 상반된다. 페낭 자유항 건설자들의 자유주의는 중상주의적 독점무역 체제를 해체하는 데는 혁명적이었지만, 무관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독점과 전매를 뼈대로 하는 징세청부제를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반동이자 모순이었다.
1788년 페낭에서 징세청부제가 처음 시행됐다. 전매물품은 중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쌀 증류주 아락arak이었다. 3년간 페낭에서 아락을 독점적으로 판매할 수 있는 업자를 경매 방식으로 선정했다. 주로 최고 가격으로 응찰한 개인이 낙찰되지만, 식민 당국은 응찰 가격과 더불어 응찰자의 경제적 · 사회적 역량도 함께 고려했다. 낙찰자는 약속한 전매료에 관해 식민 당국에 땅을 담보로 제공하거나 연대보증인을 세웠다. 징세청부제는 통상 ‘팜farm’이라 하고, 전매권을 청부한 자를 ’파멀farmer’라고 했다. ‘아락팜arak farm’이라 하면 아락 징세청부제를 가리킨다. 식민 당국은 아락팜으로 첫해 780달러의 전매료 수입을 올렸다. 3년 뒤 경매에서 결정된 아락의 전매료 수입은 연간 4,835달러로 6배가 됐다.
이후 징세청붕제의 품목이 늘어나면서 페낭 식민 당국의 세수도 늘었다. 아편팜(1791), 도박장팜(1793), 담배팜(1800), 돼지고기팜(1805) 등이 시행됐다. 도박장 운영 권한을 독점하는 도박장팜은 식민 당국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됐지만, 페낭의 유럽인 상인들이 사행성ㅇ르 조장한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바람에 1811년 폐지됐다. 1820년대 페낭 식민 재정을 떠받쳐준 징세청부제 5대 품목은 아편, 아락, 시리, 토디/바앙Toddy/Baang, 돼지고기였다. 시리는 말레이인의 관습인 빈랑 씹기에서 빈랑 열매를 싸는 베텔 후추의 잎을 가리킨다. 토디는 쌀로 빚은 술을, 바앙은 코코넛야자로 빚은 술이다. 중국인의 술인 아락과 달리 토디와 바앙의 소비자는 주로 말레이인과 인도인이었다.
5대 품목은 종족별로 소비가 갈렸는데, ���편 · 아락 · 돼지고기는 중국인,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의 품목이었다. 당연히 아편팜, 아락팜, 돼지고기팜의 전매권은 중국인이 장악했고, 시리와 토디/바앙은 말레이인과 인도인 업자에게 돌아갔다. 징세청부제에서 종족 간 분업 체계가 일찍부터 이뤄진 셈이다. 전매료의 덩치가 큰 5대 품목 가운데에서도 중국인이 주로 소비하는 아편과 아락, 돼지고기의 전매료가 많았고, 그중에서도 아편의 규모가 압도적으로 컸다. 1825년 페낭의 세무 당국이 아편, 아락, 토디/바앙, 시리 등 4개 팜 영업 실태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연간 매출은 아편이 10만 800달러로 가장 컸고, 아락(5만 달러), 토디/바앙(2만 7,000달러), 시리(8,760달러) 순이었다. 아편팜의 매출이 다른 세 팜의 매출을 더한 것보다 많았다. 이들 4개 품목에서 업자가 경비를 제하고 얻는 평균 이윤율은 73.78퍼센트에 달한 것으로 조사됐다(Hussein, 2007: 258). 낙찰만 받으면 70퍼센트가 넘는 이익이 보장되는 징세청부제는 거부가 되는 고속도로였다. 그 길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했음은 물론이다.
징세청부제는 자유항의 세원 부족을 채워주는 묘책으로 여겨졌지만, 이내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징세청부제는 전매권을 국가권력이 보장해주어야 제대로 작동한다. 예컨대 돼지고기팜의 업자들은 비싼 전매료를 국가에 납부하고 장사를 한다. 그런데 전매료를 내지 않는 업자가 몰래 돼지고기를 싸게 판다면 징세청부제의 틀은 깨지고 만다. 전매료를 물어야 하는 돼지고기 청부업자가 독점의 이득을 얻지 못하고, 당국도 계획된 세원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밀래의 공권력이 단속해야 마땅하지만, 페낭의 식민 당국은 그럴 의지도, 행정의 근육도 없었다. 전매권을 지키는 것도 청부업자의 몫으로 떠넘겼다.
(47~49쪽)
페낭의 식민지 지워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1786~1805년 페낭은 인도총독부 지휘를 받는 ‘책임관’이 통치했다. 나폴레옹전쟁(1793~1815)으로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면서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말라카를 1795년 영국이 확보했다. 1805년에 페낭의 지위는 몇 단계 급상승했다. 영국 동인도회사 이사회는 페낭을 캘커타(콜카타), 봄베이(뭄바이), 마드라스(첸나이)에 이은 인도총독부의 네 번째 지사부Presidency로 승격한 것이다. 이를 두고 빅터 퍼셀(Purcel, 1965: 18)은 “비관주의에서 낙관주의로의 놀라운 변화가 이처럼 짧은 기간에 벌어지다니!”라고 놀라워했을 정도다.[*페낭 확보 이후 인도의 영국 식민 당국은 과연 페낭이 유럽-중국 원거리 교역을 관장할 이상적인 곳인가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었다. 페낭이 중요한 교역항이 될 것인지, 식민지 행정 비용을 자체 충동할 수 있을지를 확신하지 못했던 것이다. Cowan(1950b:36~59) 참조. 실제 19세기 초까지 확신도 못하고 전략도 부재했던 인도총독부는 페낭을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로 여기지도, 식민지 건설에 충분한 지원도 하지 않았다. Stevens(1929: 379) 참조.] 1805년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해군이 트라팔가해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것이 이러한 낙관주의를 추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부터 페낭의 전략적 지위는 ‘요새 항구’에서 ‘무역 항구’로 바뀐다. 1807년 인도총독이 말라카의 요새를 ���괴한 것도 이러한 전략의 변화를 보여준다. 말라카 요새는 16세기 포르투갈이 축성하고 17세기 네덜란드가 확장한 것으로 15만 파운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는데, 영국은 7만 파운드를 들여 요새를 파괴했다(Swettenham, 1907: 57).
1819년은 페낭 역사에서 중대한 전기였다. 영국이 해협 남단의 싱가포르에 또 다른 식민지를 건설한 것이다. 페낭보다 지리적 이점이 뛰어난 싱가포르는 급성장했다. 기존에는 싱가포르로 인해 페낭의 좋은 시절이 끝났다는 해석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은 싱가포르가 유럽-인도-중국을 있는 국제 중계항으로 성장한 반면, 페낭은 해협 북부의 지역 교역 허브로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해주고 있다. 싱가로프 건설 이후 버마 남부에서 태국 남서부, 말레이반도 서안, 수마트라 북동안을 아우르는 지역이 페낭의 교역망으로 재편됐다는 것이다(Wong, 2007: 10~12). 싱가포르의 등장은 페낭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런던조약을 계기로 페낭은 싱가포르, 말라카와 함께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통합됐다. 해협식민지는 페낭에 주재하는 지사가 관할했다. 해협식민지의 세 곳은 저마다의 특성에 따라 발전했다. 페낭은 말라카와 600킬로미터, 싱가포르와 840킬로미터 거리를 두고 있다. 말라카해협의 북단과 남단 및 중부에 위치한 세 곳은 19세기 말까지 상호 보완적인 지역 교역망을 구축했다.
1850년대 들어 상황이 변했다. 증기선의 등장으로 해상교역이 급증하고, 이민도 늘었다. 특히 말레이반도의 술탄국 페락에서 대규모 주석광산이 개발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페낭의 인구 구성도 바뀌었다. 중국인이 페낭 조지타운 전체 인구의 절반을 넘었다. 페낭의 무능한 자유방임 정책은 한계를 맞았다. 화인사회와 식민 당국의 마찰도 불거졌다. 게다가 부패하고 무력한 영국 동인도회사를 해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영국 정부는 결단을 내렸다. 해협식민지는 1867년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에서 벗어나 런던의 식민 장관이 관할하는 직할 식민지Crown Colony로 바뀌었다. 영국인 싱가포르에 총독부와 행정 및 입법 위원회를 두고, 자체 입법권과 예산편성권도 보장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의 해협식민지 정책은 자유방임에서 개입으로 전환했다.
1786년부터 시작된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 81년간 식민지 경영 방식은 일관됐다. 싱가포르와 해협식민지를 전공한 역사가 콘스탄스 턴불(Turnbull, 2009: 37)은 영국 동인도회사 체제의 해협식민지 정부를 ‘해골 조직skeleton organization’이라 혹평했다. 달리 말해 식민지의 뼈대만 있을 뿐, 행정이란 근육이 없는 ’해골정부‘였다는 것이다. 자유무역으로 인한 막대한 이윤을 세금으로 걷어 들이지 못하면서 자유항 정책 때문에 돈이 없어 효율적인 행정을 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징세청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식민 당국은 전매권을 팔아 징세업무를 상인에게 하청하면서 공권력마저 민간에게 위탁해싿.
하지만 페낭을 포함한 해협식민지가 영국 정부의 직할 식민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당장 행정의 틀이 급격히 달라지지 않았다. 영국은 페낭의 아시아계 이주민에 관해 무지했다. 특히 영국은 식민지에서 중국인의 역할은 높이 평가한다면서도 중국인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턴불이 지적한 ’해골정부‘는 앞서 페낭 점거에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졸렬함을 탓한 프랭크 스웨트넘의 비판과 호응한다. 졸렬하게 점거된 영국 식민지 페낭으로 모여들었던 중국인 이주자들에게 ’해골정부‘는 낯선 땅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할 삶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19세기 말 간접지배의 방임에서 직접지배의 개입으로, 졸렬함에서 교활함으로 바뀌는 ’제국의 시대‘’에 화인사회는 또 한 차례 변화를 겪어야 했다.
(50~53쪽)
아편과 깡통의 궁전 - 강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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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onavrsl · 1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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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115 Loossemble Twitter post Happy Hyunjin day! 😺🎂💛
[🎂] 2024.11.15 💛 ʜᴀᴘᴘʏ ʜʏᴜɴᴊɪɴ ᴅᴀʏ 💛 #현진 이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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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2021 · 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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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8.27
뭐랄까.
내가 너무 미워해서 종종 해치고 싶었던 친구가 있었다. 사람을 그렇게 미워해 본 적이 없었는데. 다급하고 절박한 사회생활이 그 마음을 부추겼는지, 애초에 내 밑에 깔려 있던 마음의 모양이 사실은 그랬었는지 헷갈릴 정도로 명료한 욕망이라 당황스러웠던 밤이 많았다.
나도 모르게 그 애 목을 조르고 싶었어. 라고 내뱉어 버리고는 이내 수치스러워져 얼굴을 붉히며 편의점 앞에서 맥주를 들이키던 밤의 내가 지나면, 나를 향해 애매하게 웃어보이며 불편한 말을 거침없이 하는 젊은 아이의 기세에 어쩔줄 몰라 버벅이는 낮의 내가 있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불편했고, 불쾌했다.
내가 뭔가 더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 뒤에는 사실 나는 그럴 경험치가 없어. 그래 내가 뭐라고 그런 말을 하겠어. 그치만 그래도 나보다 후배인데 어떻게든 눌러야 그래야 내가 살아. 이런 마음들이 꿈틀거리며 제 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렇게 난 몇달 내내 그 애가 죽도록 싫고 불편했다.
그리고 몇년이 흐른 지금.
그 애가 나한테 미안했다고 말하던 그 술자리에서도 사실 나는 희열을 느꼈다. 입으로는 아니야 내가 부족했어 라고 수십번 되뇌였지만. 마음 속으로는 그래 네가 잘못했어 맞아. 그래 내가 맞았었어. 너는 틀렸었고.를 수십번 반복했다.
나는. 그 애가 미묘하게 내가 겉으로 내보인 선의를 무시한 침묵을 지키는 지금도
나는 너보다 더 관대하다는 마음으로 무장해 비난하듯 '좋아요'를 누른다. 나는 천박하다. 내 수가 너무도 잘 읽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너 역시 나 만큼 천박하길 바란다. 내가 저질러 버리고 만 부끄러운 일들이 망각이라는 축복 속에서 모든 이의 기억 속에서 녹아버리길 바라듯. 그냥 다 같이 천박해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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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ernalri · 5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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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언어 - 김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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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78 완벽한 삶이란 없듯이 완벽한 책이란 없으며 그렇기에 닫힌 삶/책이란 없고 우리는 늘 다음 삶/책을 지나쳐갈 뿐이다. 내일의 삶/책, 그 다음의 삶/책, 다가오는 삶/책들을 그때그때 파도 타듯 넘어서면서. 예기치 않은 바닷물을 기꺼이 꿀꺽꿀꺽 마시면서. 누구의 삶에서나 남은 시간은 늘 줄어들고 있고, 한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삶/책을 받아들이며 열린 세계의 자녀로 남아야만 한다. 마음의 경계를 새롭게, 새롭게 그리는 과정의 한중간으로서.
p. 80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곤 했다던 계미현의 할머니 이야기나 친구의 집에서 푹 끓인 사골국을 선사받아 기운을 차렸다는 김혼비의 글을 보며 충만해지고 또한 위축된다. 무언가 놓치고 있어. 나는 삶을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다. 늘 모르는 뭔가가 저기에 있다는 느낌, 손에 닿지 않는 따뜻함이 손끝에 걸릴 듯 부유하고 있다느 느낌, 내가 그것을 잡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바라지도 못하고 속지도 못하고 있다는 막연한 공포감. 어딘가 결여되어 있고, 나사가 하나 부족하고, 결정적인 부분이 비어있는 것 같다는 느낌으로 살아왔다. 뒤늦게 삶을 겨우 알아가는 이의 밤은 매일같이 서늘하다.
P. 82 여기서의 삶은 과정으로서의 삶, 매일의 시간, 바로 그것이다. 어딘가 깃발을 꽂아놓고 그리를 향해 달려가느라 도달하는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지는 그런 것을 삶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삶은 바로 여기에 있고 그 다음 몇초 간에도 있으며 바로 내일에도 있기 때문이다. 삶은 모든 때에 있으므로 매 시간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내가 다른 무엇도 아닌 나 자신이 되기를 바랐다. 나에게 점점 가까워지는 삶, 내가 아닌 부분을 줄여나가고 나인 부분을 늘려나가는 삶, 오래 걸리더라도 그런 삶을 살기를. 그럴 수만 있다면.
P. 86 이제는 땅에서 뭔가를 만들어내기까지 하는 우리 언니.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느끼는 언니. 나는 삶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만, 언니가 보내준 옥수수를 김이 나도록 쪄서 먹는 맛은 안다. 그게 내가 가까스로 가늠할 수 있는 삶의 지혜. 삶의 생동. 삶의 기운.
p. 91 영원처럼 반복되던 긴 시간을 버텨서 이런 날이 오기로 했다는 것이. 이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모르고도 울기를 멈추지 않았기에 오늘이 왔다는 사실을 오늘의 나는 알고 있다. 매일 아침 꼭꼭 씹어 먹은 요거트와 그래놀라가, 조용한 집에서 오랜 시간 쪄낸 찰옥수수가, 밤을 기다리며 천천히 우려낸 차가 나의 세포를 바꿔았다. 멀쩡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던 시간들은 이제 가벼운 ��억의 소재가 된다. 사람처럼 보이려고 했던 노력들은 이제 기워낸 자국조차 흐려지고 있다. 이를 갈며 악에 받쳐 살던 사람은 이제 조용히 잠들어도 좋다. 나의 세포는 수천 억번이고 교체되고 있고 영원히 고여 있을 것만 같던 시간도 기운을 내며 흐른다.
p. 92 그리고 그 마음을 잊지 않고 밥을 챙겨 먹고 커피를 몸에 부어서 운 좋게 터널을 빠져나왔다. 어쨌든 살아내는 모든 사람은 결국 살아내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p. 92 서른 살의 쓴 "고백"이라는 글에 나는 이렇게 썼다. "이제는 삶을 끌어안고 분투하느라 보낸 이십 대를 홀가본한 마음으로 떠나보내려 합니다. 이십 대가 자신의 소임을 다 한 덕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시절을 받아 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을테지요. 침대맡에도 주머니 속에도 달라붙어 있겠지요. 끈질기게 저를 괴롭힐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삶이란 없고 언제나 예전의 삶을 계속 이어갈 뿐'이므로 '무엇이든 무마할 시간이 있다는 건 큰 위로가 됩니다.' 계속 무마해보겠습니다." 무마의 약속은 곧 도전의 약속이다.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는 사람, 실패하는 사람에게만 무마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패와 무마의 순환 속에서 항해는 이어진다.
p. 251 나는 지금 당장 멈출 수도 있디만 계속 뛸 수도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이 차서 돌아버릴 것 같을 때 오로지 나만이 느리게 뛸지 걸을지 멈출지 결정할 수 있다. 얼마나 남았는지 생각하며 속도를 조절하는 것 역시. 매번 나를 새롭게 알아가고 동네의 풍경을 알아간다. 내가 나를 들고 뛰기. 왠지 계속할 수 밖에 없는 것.
p. 254 매일의 목표는 그날의 커피를 마시는 것. 그럴 수 있게 살아 있는 것이다.
p. 258 나는 여전히 엉망이지만, 조금 행복한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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